142화
리펜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떻게 나왔어?”
나오지 말라고 있는 미로였어? 내가 눈치를 못 챙긴 편?
하지만 이미 나왔으니 어쩔 수 없었다. 난 떨떠름하게 답했다.
“……본능으로?”
이런 데서 길을 잘 찾는 편이거든.
내 말에 리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고개를 기울이니, 한쪽으로 쏠린 앞머리가 드러나면서 이마 한쪽에 멍이 들어 있는 게 보였다.
“다쳤어?”
아무리 메이든 부인이 애를 잡는다지만 손을 올릴 사람으로는 안 보였는데?
붉게 달아오른 것이 좀 전에 다친 듯했다.
내 말에 아이가 손으로 슬며시 제 이마를 가렸다.
“이상한 사람들이 왔다 갔어.”
“이상한 사람들?”
어떤 놈들이 애 이마를 이렇게 만들어 놨어?
뭐 찬 거 대줄 거 없나? 난 주변을 살펴보았다.
벽과 천장과 바닥의 경계도 불분명한 까만 공간에 냉찜질용 물건이 있을 리가 없었다.
“응. 갈색 머리 아저씨 둘이랑 검은 머리 아저씨랑, 파란 머리 아저씨 하나였어.”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인상착의 목록인데?
난 눈썹을 치켜올렸다.
“아, 그놈들…….”
동제국 놈들이잖아!
대충 뭔 짓을 하려고 했는지 짐작이 갔다.
놈들도 이곳에 한 번 들렀던 게 분명하다.
그리고 초보 헌터들이 으레 그렇듯, 특수던전 내의 인물이 보스 몬스터로 변화할 것에 대비해 미리 디버프를 달아 놓으려고 했던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런 특수던전이나 RP에서는, 몬스터가 될까 봐 미리 디버프를 걸어놓는 게 아니라 몬스터가 안 되게 만드는 게 최선의 방법이란다…….
하긴, 우리 세계에서 게이트가 터지고도 1년 후에나 그 사실이 차츰 알려졌으니 얘네가 알려면 멀었을 것이다.
“내가 나중에 때찌해줄게.”
이 말은 진심이다!
내 말에 리펜이 눈을 크게 떴다.
“누나는 그런 거 하러 온 거 아냐?”
“아냐. 난 그런 짓 안 해.”
그런 몰상식한 인간들이랑 같은 선상에 놓지 말아 줄래?
난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아이의 시선이 나를 살폈다.
아직 의심을 거두지 않은 듯했다.
역시 디버프 ‘의심(L)’은 이 아이의 것이었던 듯했다.
“그림 그리고 있었어?”
난 리펜이 크레파스를 들고 열심히 뭔가를 그리던 스케치북을 가리켰다.
역시 그건 아까 우리가 봤던 그림이었다.
게다가.
[소예리]
[주이안]
[신재헌]
새까만 점 위에 이름까지 쓰여 있었다. 여긴 특수공간이라 그런가, RP던전 이름으로 처리가 안 되나 보네?
예상대로 저 그림이 미로의 정체였던 듯했다.
세 사람은 각기 다른 곳에 떨어져 미로의 출구로 향하고 있었다.
아직 만난 사람은 없었고.
“이 사람들하고는 모르는 사이야?”
리펜이 그림 속의 세 점을 가리켰다. 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친구 사이야.”
그러자 리펜은 눈살을 찌푸렸다.
[리펜의 의심이 강화되었습니다.]
아니, 우리가 친구인 게 그렇게 의심스러워?
“여긴 뭐 하러 온 거야?”
리펜의 목소리는 조금 날카로워져 있었다.
그야 여기 근처에 왔더니 감시 3종 세트가 사라지길래 감동스러워서 들어왔지…….
……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난 적당히 답했다.
“너랑 놀고 싶어서.”
내 말에 아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의심할 줄 알았는데, 믿네?
“진짜? 놀아줄 거야?”
그렇게 밝게 웃는 아이는 어릴 때의 신재헌 같았다.
“물론이지.”
내가 가볍게 답하자 리펜의 얼굴이 걱정으로 물들었다.
“근데 엄마가 뭐라고 할 텐데, 괜찮아?”
엄마? 메이든 부인을 말하는 거겠지?
난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그분은 우리가 뭘 해도 잔소리하실걸.”
애초에 그분은 우릴 호감도가 –85일 정도로 싫어하고 계시거든.
뒷말은 물론 덧붙이지 않았다.
하지만 리펜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맞아! 엄마는 맨날 그래!”
뜻밖의 공감대를 형성한 모양이었다.
[리펜 드 메이든의 의심이 조금 누그러들었습니다.]
[디버프 ‘의심(L)’이 ‘의심(SS+)’으로 약해집니다.]
오…… 이렇게 의심 푸는 건가?
“근데 여긴 뭐 하는 곳이야? 네가 노는 공간?”
방에서 편히 놀 수 있었으면 여기에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내 짐작이 맞았는지 리펜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엄마랑 싸워서 여기로 도망 왔어.”
리펜은 내가 빠져나온 문을 보다가 말했다.
“어른들은 저 미로를 통과하지 못하거든.”
난 어린이라 통과했단 말인가?
그런 근본적이고 기쁜 생각은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그럼 여기선 편히 있을 수 있겠다.”
어쨌든 그 어른의 범위에는 분명 메이든 부인과 그녀의 사람들이 포함될 것이 분명하므로.
“맞아.”
리펜이 해맑게 웃었다.
웃는 표정을 보니 새삼, 연회장에서 주눅 들어 있던 표정이 겹쳐 보였다.
아까 아이가 피아노 칠 때부터 메이든 부인의 표정이 심상치 않더라니, 잔소리를 엄청나게 쏟은 모양이다.
대충 사정이 이해가 갔다.
“이왕 만났으니까 같이 놀자.”
그리고 어지간하면 SS+급 보스로 변하지는 말자!
내 말에 리펜이 눈을 깜빡였다.
그러더니 한마디를 툭 뱉었다.
“난 어른하고는 안 놀아.”
……저 미로 통과하면 어른 아니라며?
***
난 한참 후에야 리펜의 마음을 돌리는 데에 성공했다.
리펜을 설득하는 건 어려웠지만, 아이에게 가장 잘 통하는 방법은 역시 이거였다.
“나도 피아노 못 쳐. 노래도 진짜 못하거든? 교양? 나도 없어. 그래도 나 봐봐.”
난 내 얼굴을 가리켜 보였다.
“잘 컸지?”
“으음.”
내 말에 리펜은 턱을 매만지며 고민했다.
잘 큰 비주얼이 아니라는 뜻일까?
이래 봬도 그런 평가 들을 생김새는 아닌데?
난 날뛰는 자아존중감을 잠시 눌러 주었다. 지금 중요한 건 내 얼굴의 미학적 가치가 아니었다.
리펜은 잠시 그렇게 나를 살피다가 불쑥 물었다.
“진짜 노래 못 불러?”
그거 의심한 거였어?
“응. 진짜야.”
“정말?”
아이는 내가 친해지려고 거짓말한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내가 여기서까지 내 파괴적인 실력을 보여야 한다고?
“……안 믿기면 진짜 딱 한 소절만 들어봐.”
내가 쪽팔려서 밖에서는 어지간하면 노래 안 부르는데!
“―♪♬”
물론 다른 세계의 아이인 리펜이 애국가를 알 리가 없었다.
하지만 음이 뭔가 기괴하다는 건 알아차린 듯했다.
“진짜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기도 전에 리펜이 박장대소했다.
인정받은 건 좋은데 왜 이렇게 기분이 묘하지?
아무튼 결과는 좋게 난 듯했다.
“정말 엄마가 보낸 거 아니야?”
“아니라니까. 너희 어머니가 내가 노래 부르는 거 들으셨으면 저택에서 쫓아내셨을걸?”
이게 자학개그인가 뭔가 하는 그거냐? 내가 허탈하게 웃으면서 말하자 리펜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납득하지 마!!!!
“그럼 이렇게 하자. 누나는 몰라도 다른 사람들은 의심스럽거든.”
하긴, 그 사람들은 노래 잘 부르지.
내가 쓸쓸하게 생각할 때였다.
“그러니까 내기하자.”
“내기?”
의심을 내기로 풀 수 있을까요? 또 다른 의심을 불러오는 지름길이 아닐까요?
제안을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할 때였다.
리펜은 내 답을 듣지도 않고 말했다.
“저 안에 있는 사람들.”
SS+급 인물이 헌터팀이 갇힌 미로를 가리키는데 긴장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이 공간은 비정상적인 법칙에 의해 움직이는 특수 공간.
아마 리펜의 마음대로 되는 공간인 듯하니, 이 아이가 마음먹기에 따라 미로에는 지옥도가 펼쳐질 수도 있었다.
이곳에서만큼은 손짓 한 번에 산을 옮긴다는 군대 사단장보다 더한 권력자인 것이다!
내가 긴장하는 사이 리펜이 말을 이었다.
“저 사람들이 어떤 순서로 나오는지 맞히면 누나가 이기는 거야. 어때?”
그러면서 아이가 스케치북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여전히 미로를 헤매고 있는 세 사람의 위치가 검은 점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아이는 크레파스로 그 가운데에 살짝 점을 그어 보였다.
그건 움직이고 있던 신재헌 앞이었다.
[!]
지도에서 소리가 나는 건 아닐 텐데, 신재헌이 놀랐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거침없이 나아가던 그가 눈앞에 뭐가 생겼는지 멈추는 게 보였던 것이다.
아마 예상대로라면 갑자기 눈앞에 벽이 생겨났으리라.
만약 저 세 사람 위에 크레파스가 그어지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새삼 입 안이 말랐다.
메이든 부인이 좋아할 만한 정갈한 그림과 달리 아이의 삐뚤빼뚤한 낙서에 가까운 그 그림은, 얼마든지 크레파스로 덧댈 자리가 남아 있었다.
“좋아.”
거절해 봐야 좋은 일이 일어나진 않을 게 분명했다.
리펜은 내가 흔쾌히 수락하자 즐겁게 웃었다.
“나도 맞혀 볼래. 만약에 내가 맞히면, 저 사람들은 돌려보낼 거야.”
아이의 순수한 웃음이 이렇게 섬뜩할 수 있을까?
아이의 새빨간 크레파스가 날 가리켰다.
“그리고 누나는 나랑 영원히 여기에서 노는 거야. 알았지?”
목 뒤가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누나는 누가 먼저 나올 것 같아?”
새삼 SS급 던전이라는 게 느껴졌다. 난 차가워진 손을 옷에 문지르고 말했다.
“일단 얘.”
그리고 스케치북 위를 가리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