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던전의 S급 시한부 영애 (143)화 (143/218)

143화

내가 가리킨 건 신재헌이었다.

“일단 이 사람이 먼저 나올 거야.”

그는 마침 미로 출구 근처에 있기도 했다.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나도 그럴 것 같아. 그다음엔?”

리펜과 내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우리는 동시에 그림을 가리켰다.

“난 이쪽.”

“난 이 사람.”

리펜과 내가 가리킨 사람은 달랐다.

나는 소예리 헌터를 가리켰고, 리펜은 주이안 헌터를 가리키고 있었다.

의견이 다르다. 아이가 맞으면 난 아까 아이가 말한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틀릴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도 리펜은 나름 근거가 있는 듯 말했다.

“그 누나는 호기심이 너무 많아. 빨리 못 나올 거야.”

리펜이 말한 건 당연히 소예리 헌터였다.

음, 보는 눈이 있군.

하지만 난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주이안 씨보다는 먼저 나올걸?”

RP던전이지만 이름으로 쓰여 있으니, 이름으로 부르는 게 맞겠지?

설마 페널티 주는 거 아니지?!

[…….]

다행히 시스템창은 조용했다. 그 사이 리펜이 내게 되물었다.

“왜?”

아이는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순수한 눈망울을 깜빡였다.

이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지!

난 손을 펴 보였다.

“소예리 헌터님이 호기심이 많은 건 맞는데, 일단 위험한 데에서는 먼저 나오려고 하실 거거든. 그리고,”

난 주이안 씨의 이름이 적힌 점을 가리켰다.

“이 사람은 원래 늦게 나와.”

가장 먼저 길을 찾더라도 출구 직전에서 기다릴 것이다.

주이안 헌터는 늘 그랬으니까.

특히 재진입이 불가능해 보이는 이런 미로에서는 분명히 그럴 것이다.

만일 자신이 먼저 나오게 되면, 안에 남은 사람은 힐러 없이 돌발상황에 대처해야 할 수도 있으니까.

던전에서 미로 밖보다 미로 안이 위험하다는 건 상식이다.

“좋아. 그럼 그렇게 내기하는 거다?”

리펜의 눈이 흥미로 빛났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내기 내용은 정해졌다.

내가 주장한 순서는 ‘신재헌-소예리-주이안’이었고, 리펜이 주장한 순서는 ‘신재헌-주이안-소예리’였다.

입 안이 바싹 말랐다.

분명 내가 지금까지 봐온 헌터들의 성격을 생각하면 저 순서가 맞다.

하지만 변수가 없으리란 보장은 없다.

소예리 헌터님이 방구석 1열 스킬을 쓸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랬으면 내기에서 질 걱정은 안 해도 됐을 것이다.

비록 소리로 소통은 불가능하지만 시야를 공유해서 어떻게든 한쪽이라도 의사를 전달할 수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저 미로는 특수한 공간인지 소예리 헌터는 보조스킬을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아마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리라.

“좋아, 그럼 이 형은 먼저 나올 거고…….”

흥미를 담은 리펜의 눈이 신재헌을 나타내는 점을 바라보았다.

이미 신재헌은 출구로 직진하고 있었다.

“다음 사람들이 누나가 말한 순서대로 나오지 않으면,”

리펜이 눈을 반짝였다.

아이의 손에는 온갖 색의 크레파스가 들려 있었다.

“그림에 마구잡이로 낙서해 버릴 거야. 난 엄마가 보낸 친구들이랑은 놀기 싫어.”

왜 내기에서 지면 메이든 부인이 보낸 사람이 되는지 따질 틈은 없었다.

아이의 떼쓰는 듯한 말이었지만 저 말이 실제가 될 경우 살벌한 결과를 불러올 것이다.

내가 통과한 미로를 생각해 보면, 리펜이 낙서할 때마다 미로에는 새로운 벽이 생겨날 테니까.

그리고 당연히 SS급 벽인 만큼 단단할 것이다.

쉽게 부술 수 없을 만큼.

살벌한 상상에 내가 마른침을 삼킬 때였다.

―달칵.

미로 출구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

경계하는 모습으로 나온 건 당연히 신재헌이었다.

그는 아이와 같이 있는 내 모습을 보고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곧바로 검을 휘두를 수 있는 자세였던 그는 주변을 살피다가 경계를 풀었다.

그리고 내게 살짝 고개를 기울여 보였다.

누가 봐도 보스 되기 3초 전인 애랑 어쩌다가 노닥거리고 있었느냐는 물음이 분명했다.

난 할 말이 많았다.

릴렉스, 릴렉스!

물론 그도 특수던전과 RP던전 경험이 많은 헌터였기에 내 행동을 이해 못 하진 않을 것이다.

난 진정하라는 뜻으로 손바닥을 아래로 눌러 보인 다음 손짓했다.

“이리 와. 나랑 리펜이랑 내기 중이야.”

“내기?”

그는 당연히 리펜을 자극하진 않았다.

자극해 봐야 SS+급 보스로 개화할 뿐이란 걸 알고 있으니까.

“응. 누가 먼저 나올지 내기하기로 했어.”

내 말과 스케치북을 본 신재헌은 곧바로 상황을 파악한 듯했다.

그때 리펜이 물었다.

“형도 할래?”

그 말에 신재헌이 살짝 눈을 가늘게 떴다.

맞히면 호감도라도 오를 테니 나쁜 선택은 아닐 것이다.

문제는 틀릴 때였다.

하지만 신재헌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어차피 가능성은 50%다.

그리고 거절해 봐야 SS+급 보스로 변화할지도 모르는 인물을 자극하기만 하는 꼴이었다.

“난 소예리 헌터님이 먼저 나온다는 데에 건다.”

그가 소예리 헌터님을 가리켰다.

나와 같은 생각인 게 분명했다. 리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생각이 똑같아?”

그야…… 몇 년이나 같이 있었으니까?

그 말을 끝으로 우리 셋의 시선이 그림에 집중되었다.

[…….]

소예리 헌터는 처음에는 막다른 길도 몇 번 다시 가면서 미로의 패턴을 파악하는 듯싶더니, 곧바로 제대로 길을 찾아 나가기 시작했다.

문제는 주이안 헌터가 먼저 출구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헤헤.”

리펜이 기분 좋은 듯 웃었다. 그러고는 크레파스를 들었다.

당장 그림에 뭘 그릴 기세였다.

“잠깐만, 아직 안 나왔잖아. 기다려 봐.”

난 리펜을 제지했다. 하지만 리펜은 다 이겼다는 듯 말했다.

“어차피 저기에선 쭉 걸어 나오면 되잖아.”

아이의 말대로 주이안 헌터는 출구로 통하는 일직선 통로에 서 있었다.

리펜은 그대로 스케치북에 줄을 지익 그을 생각인 듯했다.

그럼 주이안 헌터와 소예리 헌터는 그대로 미로에 갇히고 만다.

손을 잡아서 제지할까? 그럼 거부감이 상당할 텐데.

그래도 두 헌터가 미로에 갇히는 것보단 SS+급 보스몬스터가 낫지 않을까?

내가 빠르게 계산할 때였다.

신재헌이 불쑥 스케치북 구석에다가 다른 그림을 그렸다.

검은 크레파스로 그려진 건 웬 꽃이었다.

그가 적어도 20년 전에는 졸업했을 것 같은 아이다운 그림이었다.

그건 우리가 헤매던 미로와는 상관없는 곳에 그려져 있었다.

리펜의 시선이 꽃으로 향했다.

“아까 오는 길에 이렇게 생긴 꽃 있던데, 알아?”

신재헌이 물었다. 신경을 다른 데로 돌리려는 거다.

잘한다, 신재헌!

난 두 사람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보면서 스케치북 위의 그림을 살폈다.

소예리 헌터와 주이안 헌터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우리 예상대로 주이안 헌터는 출구 바로 앞에 멈춘 채 나오지 않고 있었다.

[…….]

이내 소예리 헌터가 주이안 헌터를 발견했는지, 잠깐 멈칫하다가 빠르게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이럴 줄 알았다니까!

난 안도감으로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감추었다.

그 사이 리펜은 신재헌에게 핀잔을 주고 있었다.

“그렇게 생긴 꽃은 몰라. 엄청 못 그리네.”

흥! 하는 리펜의 얼굴은 그래도 삐진 것 같진 않았다.

아이가 잠깐 시선을 돌리는 사이 신재헌의 표정이 기묘해졌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던전 내 인물에게 익숙한 S급 헌터답게 그는 금세 표정을 정리했다.

그러고는 리펜에게 크레파스를 내밀었다.

“그럼 가르쳐줘 봐. 난 모르겠다. 엄마가 그림 배우는 걸 싫어해서 제대로 못 배웠거든.”

그 말에 리펜이 눈을 깜빡였다.

“난 엄마가 자꾸 그림 배우라고 하는데. 이런 거 말고 이상한 사람 그리는 거.”

아무래도 메이든 부인은 아이가 인물화를 그리길 원하는 듯했다.

신재헌은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우리 엄마도 이상한 거 그리려면 차라리 사람 그리라고 하시더라. 근데 난 관심 없어서 안 한다고 했거든. 그랬더니 엄마가 혼내더라고.”

정확히 말하면 그의 어머니는 그가 입시 미술을 하길 원했던 거지만, 던전 안의 아이가 진실을 알 리 없었다.

“진짜?”

리펜이 눈을 반짝였다. 오…… 공감대가 형성됐다 이거지?

“형도 그랬구나?”

“어. 하기 싫은 거 해봤자 뭐 하냐?”

그가 말을 받는 사이 소예리 헌터가 먼저 문을 열고 빠져나왔다.

“어머.”

그리고 뜬금없이 그림 놀이에 빠진 우릴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제야 리펜의 시선이 문 쪽으로 향했다.

그때쯤 주이안 헌터는 문을 닫고 미로에서 나오고 있었다.

휴.

난 그제야 참고 있던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리펜에게 홀가분하게 말했다.

“내기는 우리가 이긴 것 같네.”

리펜의 주의를 성공적으로 돌린 신재헌이 두 헌터에게 무사하다는 뜻으로 손을 펴 보였다.

주이안 헌터와 소예리 헌터가 안심하는 사이, 리펜은 그런 건 이제 관심 없다는 듯 회색 크레파스로 꽃을 그려 신재헌에게 건넸다.

“이렇게 그리는 거야. 따라 그려봐.”

친절하게 연회색으로 그려진 꽃은 처음에 신재헌이 그린 것보다 좀 더 삐뚤빼뚤했다.

“흠, 좋아.”

신재헌은 그게 아주 어려운 작업이라는 듯, 일부러 삐죽삐죽 선이 나가게 그림을 따라 그렸다.

그 모습을 본 리펜이 까르르 웃었다.

“진짜 엄마가 보낸 사람들은 아닌 것 같아.”

그러고는 결론 내렸다.

뭔 이야기인지 알 턱이 없는 주이안 헌터와 소예리 헌터가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런 게 있어요! 나가면 말해줄게!

난 두 헌터에게 손을 펴 보였다.

[리펜 드 메이든이 흡족해합니다!]

그때 시스템창이 떴다.

[리펜 드 메이든의 호감도가 +10 됩니다.]

[리펜 드 메이든의 현재 호감도 : +10]

[리펜 드 메이든의 ‘같이 놀자(L)’ 스킬 효과를 받습니다.]

이건 무슨 스킬인데?

어떤 스킬이든 기본이 L급으로 붙어 나오니 살벌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같이 놀자(L) : ???]

정보를 자세히 보려고 해 봐도 나오는 건 없었다. 딱히 무슨 능력치가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리펜, 어디 있니!」

먼 곳에서 왕왕 울리는 목소리는 다름 아닌 메이든 부인의 것이었다.

놀란 건 우리도 마찬가지였지만, 리펜은 특히 화들짝 놀랐다.

「피아노 연습하라니까, 어디로 간 거야!? 네 실력이 부끄럽지도 않아?」

날카로운 목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리펜이 귀를 틀어막았을 때였다.

[메이든 부인이 리펜에게 피아노 연습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리펜의 피아노 연습이 이어지지 않을 경우, 메이든 부인의 호감도가 10초당 –1 됩니다!]

아니, 리펜 피아노 연습이랑 우리 호감도랑 무슨 상관인데!

하지만 논리를 따질 틈은 없었다. 연달아 상태창이 떴다.

[리펜의 피아노 연습이 이어질 경우, 메이든 부인의 호감도가 5분당 +1 됩니다.]

구석에 먼지 쌓인 피아노가 보였다.

지금 피아노 연습하기 싫다고 귀까지 막는 애한테 피아노 쳐달라고 부탁하라는 거야?

피아노만 봐도 얼굴 하얘지는 애한테?

“…….”

멈칫한 우리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을 때.

그런 우리를 재촉하듯 시스템창이 하나 더 떴다.

[리펜이 싫어하는 일을 할 경우, 리펜 드 메이든의 호감도가 10초마다 –1 됩니다!]

요컨대 피아노 치면 리펜의 호감도가 10초마다 1씩 깎인다는 소리였다.

안 치면 메이든 부인의 호감도가 10초마다 1씩 깎인다는 소리고.

뭐 어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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