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이미 동제국 황태자 주변에 암살자도 파견됐어.”
그런 적 없었지만 마법사는 이미 내 말에 말려든 지 오래였다.
“그, 그런……!”
“왜 놀라? 동제국 사람인 것처럼?”
난 은근슬쩍 물었다. 그러자 마법사는 그제야 제가 자백한 꼴이나 다름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얼굴이 새파래졌다.
난 그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잘 알겠어.”
동제국 황태자 얘기에 얼굴이 새파래지는 걸 보니 계시록에서 말한 놈이 이놈이 확실했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처리할게요]
난 인벤토리에서 검을 꺼내며 짧게 채팅했다.
그러면서 문득 소예리 헌터를 노리던 강도 놈들을 다시 생각했다.
그놈들도 겁 없이 설쳤지.
주이안 씨한테 독 먹인 놈처럼, 그리고 이놈처럼.
난 검을 빠르게 휘둘렀다.
***
소예리 헌터한테 마법을 쓴 마법사가 처리되자마자, 소예리 헌터의 L급 봉인은 풀렸다.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 S급(보조)
- 버프 : 없음
- 디버프 : 없음]
상태창을 보니 이제야 안심이 되는 것 같았다.
“이, 이게 무슨 일입니까!”
뒤늦게 마법의 빛을 보고 달려온 마법사들이 오두방정을 떠는 사이,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신재헌이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그럼 간다.”
답할 틈도 없이 그는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아니, 얼굴 들키면 안 된다는 건 알겠는데.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이렇게 바로?]
아쉬움이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짐은 바쁘다]
짐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난 얼굴을 구겼다.
그렇게 바쁘신 분이 여기까지 옵니까?
난 황당한 얼굴로 마법사들 사이를 헤치고 나왔다.
“아무래도 저를 노리는 자가 있었던 것 같네요.”
당황한 마법사들에게 간단한 상황 설명을 하는 소예리 헌터를 보면서.
“그런……!”
마법사들은 분개했다.
“무사하십니까?”
이구동성으로 묻는 말에 소예리 헌터는 손을 앞으로 펼쳐 보였다.
―화악!
그러자 불꽃놀이 하는 것처럼 선명하고 환한 빛이 하늘을 수놓았다.
“오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헐 이런 스킬도 있었어요?]
크루즈 불꽃놀이 좋아하시더니 혹시 이것도 스킬로 익히신 겁니까? 대체 얼마나 간절했던 건데?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아쉽지만 이건 스킬 아니고 마법!]
클로나 에이센이 가지고 있던 마법으로, 이 RP던전을 나가면 없어진다는 뜻이었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아]
난 또 불꽃놀이가 엄청나게 간절한 줄 알았지 뭐야.
스킬로 버터관자구이 탐낸 주제에 할 말은 아니었지만…… 아니, 근데 버터관자구이 그렇게 간절한 건 아니었거든?
왜 스킬로 생긴 거야?
이 쪽팔리는 스킬 설마 은하 서버에 저장돼서 한국까지 따라가는 거 아니지?
내 오점 없는 인생에 E급 버터관자구이 따위가 묻는 건 참을 수 없었다.
“이렇게 멀쩡하니까, 모두 돌아가세요.”
그때 소예리 헌터, 아니 클로나 에이센의 청명한 목소리가 울렸다.
“그자에 대해서는 철저히 조사하고요. 일단 오늘은,”
그녀는 입술에 검지를 대어 보이고는 말했다.
“손님이 있으니.”
“하지만……!”
마탑에 외부인이 침입해 마탑주를 노린 사건이다.
그냥 지나갈 수 없다는 마법사들의 눈빛이 느껴졌다.
“물론 그자를 조사해 배후를 알아내리라 믿습니다. 그렇지만 그 사이에, 무려 그자를 잡아주신 에델바이스 백작을 소홀히 대접할 수는 없지 않겠어요?”
그녀의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아 가라고~~]
물론 채팅은 사근사근하지 못했다.
채팅이랑 말 헷갈리면 X된다! 진짜로!
난 조마조마한 얼굴로 소예리 헌터를 지켜보았다.
“……알겠습니다.”
결국 마법사들은 서로를 마주 보더니 주변을 정리하고는 떠났다.
그들이 사라진 후.
―달칵.
다시 20층짜리 탑에 들어온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서로 엄지를 척 내밀었다.
“위기 끝! 맞죠?”
“넵넵, 맞아요.”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멸망계시록 바뀐 거 확인했어용!]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마탑주에 대한 위협도 사라졌다고 언급된 건가요?]
주이안 씨가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소예리 헌터는 명쾌하게 답했다.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고럼고럼! 이제 주이안 헌터님도 발 뻗고 잘 수 있겠다! 그죠?]
그녀의 말에 아주 잠깐 침묵한 주이안 씨가 채팅했다.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제가 잠을 못 들 정도로 걱정시키신 것은 아니니 너무 신경쓰지 마세요]
그 말에 소예리 헌터가 씩 웃었다.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헐, 그럼 내가 생명의 위협을 받는데 발 뻗고 잔 거예요?]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그게 아니라]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ㅠㅠ]
말려들었다! 말려들었다! 난 헌터 채팅을 보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에이, 주이안 헌터가 잘 잤으면 됐죠 얼마 전에 습격도 당하셨는데]
편을 들어주는 듯하던 신재헌은 한술 더 떴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저는 걱정돼서 한숨도 잘 수 없었지만]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그게 아니라]
“지금쯤 이마 짚고 있을 거야.”
소예리 헌터가 웃음을 터뜨렸다.
“한숨도 내쉬었겠죠.”
그러면서 ‘이분들이……!’ 하면서 분노 아닌 분노를 하고 있을 것이다.
놀린다는 거 주이안 씨도 알고 있으니까.
정말 딱 한숨을 내쉬었을 것 같은 시간을 두고 채팅이 다시 올라왔다.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아무튼 모두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혹시 멸망계시록에 다른 내용은 더 없었나요?]
정신을 차린(?) 주이안 씨의 채팅에 소예리 헌터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없었어용]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나중에 뜨면 다 말해줄 테니 신경쓰지 말라구~!]
멸망계시록이 미래의 일을 예언해주는 게 확실한 이상, 자주 펼쳐봐야 할 터였다.
“후우.”
여하튼 위험은 끝이었다. 난 한숨을 내쉬는 소예리 헌터를 보면서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스킬은 배우셨을까?
스킬을 직접 당해본다고 다 스킬이 생기는 거였으면 지금쯤 헌터계는 난리가 났을 것이다.
애석하게도 스킬을 백 번 천 번 당해도 그냥 당하기만 하지 그 스킬의 원리를 알아차리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아, 봉인 스킬이요?”
소예리 헌터의 얼굴은 들떠 보였다.
“이거 완전 신기한 마법인 거 알아요? 원래 마탑주 마법 지식이 머릿속에 있긴 한데…….”
줄줄이 이어지는 이론 설명에 난 소예리 헌터를 심각한 얼굴로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알아들은 척해주자!
―둥실.
“……해서 흐름을 막아 가지고…….”
소예리 헌터가 신난 사이 우리는 20층까지 다시 바람을 타고 올라왔다.
“……는 스킬이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짜잔!”
소예리 헌터는 20층에 발을 내디딜 즈음에야 설명을 끝내더니, 채팅창에 스킬 설명 하나를 공유했다.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봉인(B) - 상대의 움직임을 봉쇄한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오]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오]
우린 나란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설마 했는데 정말 배웠냐!
저것도 진짜 재능이었다.
비록 B급이라 S급인 소예리 헌터에게는 높은 등급의 스킬은 아니었지만, 스킬이 추가된 것만으로도 대단한 성과였다.
“완전 기분 최고야! 도와줘서 고마워요!”
소예리 헌터가 날 폭 끌어안았다. 그러면서 재잘거렸다.
“아니, 마법사치곤 몸이 재빠르더라구. 어지간하면 쫓아가서 잡으려고 했는데, 봉인 마법에 한동안 움직임도 속박하는 게 있더라구요.”
그녀가 눈을 찡긋했다.
“유리 헌터님 아니었으면 나 큰일 났을 거야!”
그 말에 난 감동도 잠시 중요한 것을 지적했다.
“제가 없었으면 이런 시도를 안 했겠죠?”
아무리 호기심이 하늘을 찌르기로서니, 소예리 헌터가 제 안전을 등한시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내 말에, 소예리 헌터의 표정이 싹 바뀌었다.
그러더니 그녀가 입을 비죽였다.
“들켰나.”
들키긴 개뿔!
“어휴!”
못 산다, 진짜! 난 손을 내저었다.
결국 기분 좋은 소예리 헌터와 나만 20층에 남았다.
정말 신재헌 이놈은 원래 없던 것처럼 사라져 있었다.
“아니, 근데 대체 신재헌 그놈은 왜 온 거래요?”
나 오는 거 뻔히 알고 있었을 텐데?
“내가 너~무 걱정돼서~?”
소예리 헌터가 마법으로 뜨겁게 데운 물로 찻물을 부으며 말했다.
난 그 말에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럼 헌터 채팅에 말하고 왔겠죠.”
“그럼, 나랑 이야기하러?”
소예리 헌터가 예쁘게 웃었다. 난 그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건 아무리 봐도 신재헌이 방문한 이유를 짐작하려는 게 아니라, 그냥 막 갖다 붙이는 것 같지 않은가?
“굳이 와서? 비밀 얘기 하려고?”
내 말에 소예리 헌터가 눈부시게 웃었다.
“그럴 수도 있고요.”
아무래도 반응을 보니 소예리 헌터는 그가 왜 왔는지 알고 있는 듯했다.
내가 눈썹을 치켜올릴 때였다.
“비밀이에요.”
소예리 헌터가 불쑥 말했다.
그러더니 입술에 제 검지를 대어 보였다.
“신재헌 헌터가 이곳에 온 이유. 비밀이야.”
“진짜 이유가 있긴 했어요?”
있었어!? 내 말에 소예리 헌터가 웃음을 터뜨렸다.
“네. 신재헌 헌터님이랑 비밀로 하기로 약속했어요.”
“?”
아니, 뭐 사람마다 적당히 비밀이야 있는 법이지. 나도 흑역사는 비밀인데…….
……아니 그런데, 굳이 비밀로 한다니까 묘했다.
중요한 일인가? 안 좋은 일?
“그놈이 비밀로 해달래요?”
자긴 비밀 따위 없는 것처럼 뭐든 나불거리고 다니더니.
내가 팔짱을 끼어도 소예리 헌터는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러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신유리 헌터한테는 특-히 비밀로 해 달랬어요.”
뭐요? 난 눈썹을 치켜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