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난 소예리 헌터의 말에 눈썹을 치켜올렸다.
“까서 눈에 안 좋은 거 빼고 다 깐 사이에?”
내 말에 소예리 헌터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면서도 그 비밀이 뭔지는 말해주지 않을 기색이다.
난 그녀에게 슬며시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러지 말고 나한테만 슬쩍 말해 봐요. 신재헌한테는 비밀로 할게.”
공공연한 비밀이란 말 들어보셨습니까?
내가 은근하게 속삭이자 소예리 헌터는 턱을 매만졌다.
“으음~”
그러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잉, 안 되겠어.”
그러면서 몸을 물렸다. 이렇게까지 비밀이야?
난 팔짱을 낀 채 물었다.
“심각한 거예요?”
놀릴 거리가 아닌가? 갑자기 시한부, 뭐 이런 전개 아니지?
하도 막장 던전을 많이 돌아다녔더니 생각이 그쪽으로만 번졌다.
“아냐, 아냐.”
소예리 헌터는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손을 휙휙 내저었다. 그러다가 멈칫했다.
“……아닌가?”
긴가민가하는 표정으로 소예리 헌터가 고개를 기울였다.
“아닐걸?”
맞으면 맞고 아니면 아닌 거지!
애매한 답이 나오니까 왠지 더 신경이 쓰였다.
“혹시…….”
설마…… 난 심각해졌다.
그놈이 나한테 비밀로 할 일이라고 하면…….
“해외에서 스카우트 제의 받았대요?”
그럴 수 있지.
신재헌이면 S급 중에서도 노력파 헌터로 유명했으니까.
그의 성장 가능성을 보고 스카우트 제의를 하는 길드가 꽤 된다고 들었다.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던전 들어오기 전에 해외에서 기가 막힌 조건으로 스카우트 제의라도 받았나?
헌터협회에서 엿도 먹였겠다, 한번 외국으로 나가보고 싶은 걸까?
……그렇다고 하기엔 내게 말하지 않은 게 이상했다.
그런 이야기를 새삼 숨길 사이도 아니었고.
“뭐? 스카우트?”
아니나 다를까, 소예리 헌터는 내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아냐, 팀 떠나는 거 아니에요.”
그 말에 난 묘하게 안심되는 걸 느꼈다.
“그럼 뭐가 문제지?”
헌터팀 떠나는 게 아닌데, 나한텐 비밀인 거?
‘너―’
문득 가까이에서 봤던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까 나를 안고 탑에서 뛰어내렸을 때.
늘 보던 그의 얼굴이지만 본의 아니게 품에 안겨서 보자니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깎아지른 듯한 남성적인 턱선 때문인지, 아니면 그답지 않게 가라앉아 있는 푸른 눈동자 때문인지.
그 모습이 유독 기억에 남았다. 사진처럼.
“음, 영영 비밀인 것 같진 않고.”
그때 소예리 헌터가 입을 열었다. 돌아보니 그녀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있었다.
“아직 신재헌 헌터가 말할 준비가 안 됐나 봐.”
그녀가 예쁘게 웃었다.
“말할, 준비?”
난 그 말에서 기묘한 느낌을 잡아냈다.
신재헌과 나 사이에, 준비가 필요한…… 말이 있다고?
내가 이어지려는 생각을 본능적으로 떨쳐내려는 때였다. 소예리 헌터가 말을 이었다.
“언젠가 말해주지 않을까? 아니, 꼭 그럴 거예요.”
그녀의 말에는 기묘한 확신이 묻어 있었다.
“내가 아는 신재헌 헌터의 일을, 신유리 헌터가 모를 리 없잖아요?”
난 그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었다.
그와 나 사이에는 비밀이 없다.
늘 그랬다.
헌터가 되기 전에도 우린 가장 가까운 사이였으니까.
그랬기에 우리는 서로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었으니까.
‘내가 아는 신재헌 헌터의 비밀을, 신유리 헌터가 모를 리 없잖아요?’
그런데, 그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 왜 이리도 기묘하게 들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
텐치아 백작은 능력 있는 귀족이었다.
비록 에델바이스 가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그의 텐치아 백작령은 거의 완벽한 게이트 방어율을 보이고 있었다.
“이번에도 지다니……!”
그는 매달 에델바이스 백작령과 게이트 방어율을 비교하면서 이기려고 기를 썼지만, 역부족이었다.
에델바이스 백작은 마치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처럼 완벽한 방어율을 자랑했던 것이다.
물론 정말 다른 세계 사람이 맞았지만 텐치아 백작이 그걸 알 리가 없었다.
“어떻게 저리 완벽하게 방어하지?”
텐치아 백작은 엘리트 코스만을 밟아온 수재였다.
어릴 땐 변경백으로 역사가 깊은 텐치아 백작령에서도 유독 뛰어난 후계자로 사교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제국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했으며 텐치아 백작이 된 뒤에도 그의 행보는 눈에 띌 정도로 독보적이었다.
그가 텐치아 백작이 된 이후, 초대 텐치아 백작 다음으로 영지가 번영하고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에델바이스 백작을 따라잡을 순 없었다.
[99.9%]
초기에 터졌던 게이트를 제외하면 에델바이스 백작이 잡아내지 못한 게이트는 없었다.
그 거짓말 같은 숫자에, 텐치아 백작은 노력파 천재답게 대응했다.
더 많은 공부와 수련으로 극복한다……!
하지만 이번 달도 졌다.
“고작 92%라니!”
에델바이스령과 텐치아령 다음으로 방어를 잘한다는 영지의 게이트 방어율이 79%였다.
2위와 13%나 차이가 난다는 걸 생각하면 엄청난 성과였다.
하지만 텐치아 백작은 만족할 수가 없었다.
“더, 더 방어해야 한다!”
그가 불타오르는 덕에 텐치아령의 영지민들은 나날이 안전해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그의 앞에 편지가 한 장 도착했다.
[연합 ‘미야’ 소속의 가문들에 알립니다.
현재 바이야 백작령에 게이트의 수가 급격히 많아져…….]
“……!”
바이야 백작령이 게이트를 막지 못해 위기가 왔다는 연락.
텐치아 백작은 에델바이스 백작을 넘겠다는 제 목표를 위해 다른 가문의 영지민들을 등한시하는 자는 아니었다.
“그래, 이렇게 한 가지에 골몰해서는 발전할 수 없어!”
바이야 백작령은 게이트 방어율 7위.
비록 지금은 위기에 빠졌지만 바이야 백작령에 가서도 배울 것이 많으리라.
뿐만 아니라 바이야 백작령의 게이트 방어가 어떻게 뚫렸는지를 알면 텐치아는 더욱 단단해질 수 있을 것이다!
“당장 바이야 백작령으로 갈 준비를 해라!”
그의 명령에 기사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런데 그렇게 도착한 바이야 백작의 영지에서.
“……에델바이스 백작?”
텐치아 백작은 에델바이스 백작을 처음 만났다.
텐치아 백작의 머릿속에서 에델바이스 백작은 지금껏 라이벌 그 자체였다.
어떻게 저토록 완벽하게 게이트를 막을 수 있는 거지?
정말 사람인가?
뭔가 비리가 있는 건 아닌가?
아니다, 이렇게 사람을 이유 없이 의심하며 깎아내려서는 발전할 수 없다!
그러면서 머리를 비울 겸 갔던 자리였는데, 그곳에서 에델바이스 백작을 딱 마주친 것이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
그녀도 텐치아 백작을 만날 줄은 몰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뜬 채였다.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흘러내리던 흑갈색 머리칼이 떠올라, 텐치아 백작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그녀는 외모마저 완벽한 사람이었다.
‘지금 이 순간도 제국민들은 고통받고 있습니다.’
또한 그렇게 말하는 모습은 기사다웠다.
카르만의 귀족다운 모습.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은 결연하기만 했다.
그 능력도, 정신도 너무나 부러웠다.
그리고, 존경스러웠다.
텐치아 백작은 자신이 에델바이스 백작을 동경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때야 알았다.
그래서.
‘당신의 기개에 반했습니다!’
저도 모르게 그렇게 외치고 말았다.
‘……?’
눈을 동그랗게 뜬 에델바이스 백작은 당황한 듯했다.
그야 바이야 백작령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고, 듣는 사람들도 많았으니 당연했을 것이다.
“내가, 내가 무슨 짓을!”
텐치아 백작은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하지만 에델바이스 백작은 그 당황스러운 상황에서조차 청량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사람을 보내 말했다.
‘나중에 연락드리겠다 말씀하셨습니다.’
“하.”
텐치아 백작은 그 말을 들은 이후로 어떤 것에도 집중할 수가 없었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
그녀가 머릿속을 꽉 채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는 그녀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가 그런 실례를 저질렀음에도 자신을 봐준 그녀를.
“…….”
텐치아 백작의 눈이 반짝였다. 기대될 수밖에 없었다.
거절의 편지라도 좋으니, 동경하는 대상에게 편지를 받을 수 있다면, 아니, 연락이나마 받을 수 있다면.
한순간이나마 나를 생각해주신다면……!
그가 그렇게 손꼽아 연락을 기다릴 때였다.
“가주님, 가주님 앞으로 연락이 왔사온데―”
“뭐?”
―쾅!
텐치아 백작은 하인이 당황할 정도로 자리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업무용 책상에 있던 것들이 흔들릴 정도로 책상을 내리치면서.
“그, 가, 가문의 문장이 없는 편지입니다.”
하인은 당황한 듯했다.
“폐기할까요?”
안 그래도 제국 각지에서 에델바이스 영지 다음으로 시선을 많이 받고 있는 곳이 이 텐치아 백작령이었다.
그리고 보는 자가 많을수록 시기와 질투는 필연적으로 따라붙는 법.
편지에 누가 어떤 장난을 해놨을지 모를 일이었다.
“아니.”
하지만 텐치아 백작은 그 편지를 바로 받아들었다.
드디어 기다리던 편지가 왔다!
에델바이스 백작처럼 신중한 자라면 당연히 편지에 가문의 문장을 새기지 않았을 것이다.
잘못했다간 양가 간의 스캔들로 번질 수 있을 테니까.
―꿀꺽.
마른침을 삼킨 텐치아 백작이 편지칼로 편지를 조심스럽게 개봉했다.
―스륵.
그리고 그 안에서 편지를 꺼내든 그는,
“?”
해괴한 표정을 지었다.
기뻐해야 하지만 기뻐할 수 없는 표정.
슬퍼하고 싶지만 슬퍼할 수 없는 표정.
“황, 황제 폐하께서……!”
황제의 직인이 찍힌 편지였다.
하인이 본능적으로 무릎을 꿇는 가운데, 텐치아 백작은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펼쳤다.
왜? 왜 폐하께서 황가의 문장도 없이 친서를? 나한테?
이 영광스러운 상황에 그는 왜 이렇게 허탈한 기분이 드는지 알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