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우리가 오매불망 기다리던 마법사 놈은 내가 바람이 부는 곳에 온갖 물건을 띄워보고 나서야 왔다.
우리가 만반의 준비를 갖춘 줄도 모르는 채, 마법사 놈은 주변의 이곳저곳을 살피며 이 탑 주변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방구석 1열(A) 효과 유지 중]
그리고 풀숲에 숨어 있는 소예리 헌터의 분신이 그 모습을 우리에게 생중계해주고 있었다.
“오, 일단 체내의 기력을 묶는 마법부터 쓰는 거구나?”
그럼 기력 흐름을 방해해서…… 뭐라고 중얼거리던 소예리 헌터는 무려 필기를 하기 시작했다.
난 십 년 전에 졸업한 필기였다.
연구본능이 제대로 깨어난 게 분명했다.
“진짜 당해볼 거예요?”
진짜 괜찮은 거겠지?
물론 지금까지 겪어온 RP던전 지식이 있으니 괜찮다는 건 이해하고 있었다.
RP던전에서 무슨 일을 당하든 그건 RP던전 내부의 규칙을 따르니까.
그 RP던전의 배경이 만약 죽어도 새로 태어나는 설정이라면, 진짜로 죽어도 다시 새로운 장소에서 일어나게 되어 있었다.
그러니 마법을 건 놈을 죽이면 마법이 풀린다는 규칙 정도야 당연하게 제대로 적용될 것이다.
“어차피 여긴 마법이라서, 저놈이 죽으면 다시 풀린다니까.”
소예리 헌터도 같은 생각인지 가볍게 말했다. 이미 눈은 반짝반짝 광채가 나고 있었다.
“RP던전 보정을 받을 가능성은요?”
그때 아까까지 멍 때리고 있던 신재헌이 물었다.
저놈 혹시 피곤해서 지금까지 잔 거 아니야?
아무리 S급이라지만, 동제국 쪽 산맥에서 황성으로 돌아갔다가 바로 이곳으로 온 그의 일정을 생각해 보면 피곤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잠도 거의 못 잤을 텐데.
내가 그렇게 생각할 때 소예리 헌터가 어깨를 으쓱했다.
“보정은 이미 받은 것 같은데? 봐요. 이렇게 안 들키고 들어와 있잖아요.”
그녀가 방구석 1열 스킬 화면을 가리켰다.
[B]
소예리 헌터에게 봉인 마법을 걸겠다고 들어온 대담한 마법사의 허접한 랭크가 보였다.
“하긴…….”
B랭크인 애가 어떻게 마탑 근처의 결계를 뚫고 들어왔겠는가?
분명 탈출까지 무사히 할 수 있을 것이다.
주이안 헌터한테 독을 쓴 놈이 허접한 A급이었지만 L급 독을 쓴 것처럼, 저 B급도 L급 마법을 쓸 테니까.
“그건 그렇네요. 그런데.”
신재헌은 화면을 보다 말고 눈을 가늘게 떴다.
“스킬 봉인진이 탑 주변에 그려지고 있는데요?”
나도 비슷한 생각으로 화면을 보고 있었다.
물론 저놈이 20층까지 올라와서 마법을 걸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설마 탑 전체에 마법을 거는 거였어?
“그럼 나랑 신재헌 헌터까지 걸리는 거 아니에요?”
그 말에 소예리 헌터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으음.”
그녀가 살짝 고개를 저었다.
“이 세계에서 마법이라고 불리는 것들만 봉인될 거라……, 두 헌터님한텐 별 영향이 없긴 할 거예요. 그래도.”
그녀가 손짓했다.
“나가 있는 게 안전하겠어요.”
난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놈도 작업(?)이 다 되어 가는 것 같고.
“어차피 저놈도 처리해야 하니까. 나가 있을게요.”
내 말에 신재헌도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후드를 푹 뒤집어썼다.
“갑시다.”
소리 없이 창문을 연 신재헌이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그대로 뛰어내릴 생각인 듯했다.
나도 습관적으로 뛰어내리려다 말고 멈칫했다.
잠깐, B급 스펙으로 20층에서 뛰어내려도 되나?
내가 고민할 때였다. 내 고민을 알아챘는지 소예리 헌터님이 물어 왔다.
“내려 줘요~?”
그게 편할 것 같긴 한데, 비행 마법을 받다 말고 중간에 마법 봉인이 시작되어 버리면 대참사가 일어날지도 몰랐다.
어디 제대로 디딜 데도 없이 허공에서 떨어져 내릴 테니까.
그때 신재헌이 불쑥 말했다.
“아뇨, 그냥 뛰어내릴게요. 같이.”
신재헌이 나를 가리켰다.
어차피 S급에게 20층 정도는 높은 것도 아니니 나 하나쯤 들고 내려가는 거야 문제는 없을 터였다.
“좋아요. 그럼, 마법진에 문제없게!”
고개를 끄덕인 소예리 헌터가 강조했다.
“마법진 다 그리고 마법 발동되면 처리해야 돼요! 알죠?”
이제 소예리 헌터의 금안에서는 광채가 날 지경이었다.
저놈의 학구열!
“얼른 갑시다.”
마법사를 혹시나 놓쳐서는 곤란하니까.
탁! 내가 신재헌의 손을 잡았을 때였다.
“?”
그가 멈칫하는 게 보였다.
난 마법진을 부지런히 그리고 있는 방구석 1열의 영상을 보다가 물었다.
“혹시 패키지로 봉인되고 싶어?”
그 말에 신재헌은 대번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럼 실례.”
뭔 실례?
답하려는 순간, 신재헌이 날 공주님 안듯 불쑥 안아 올렸다.
“오.”
S급씩이나 돼서 이렇게 곱게 안긴 건 처음인데―
아.
그렇게 생각하던 난 뒤늦은 깨달음을 얻었다.
“내가 주이안 씨 처음 안고 갔을 때도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왜 그렇게 떨떠름한 표정이었는지 알겠네.
난 웃음을 참기 위해 애써야 했다.
―탓.
그때 20층 창문을 밟고 뛰어내린 신재헌이 순간 삐끗했다.
“어어.”
덕분에 난 혀를 씹을 뻔했다. S급 버스 승차감이 심상치 않았다.
“너―”
진짜 컨디션 안 좋은 거 아냐? 그렇게 물어보려는 때였다.
신재헌이 불쑥 물었다.
“주이안 헌터는 언제 안아준 거야?”
안아줘? 그걸 안아줬다고 표현해야 해?
아니 그 전에, 이놈도 안고 가는 거 봤을 텐데?
“처음 만난 날. 기억 안 나?”
그 말에 신재헌은 짧게 아, 하는 소리를 냈다.
그러더니 불쑥 물었다.
“그 뒤로는?”
그 뒤에 뭐? 들고 다녔냐고? 난 떨떠름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내가 주이안 씨 전용마차냐? 싣고 다니게?”
내 말에 신재헌은 답이 없었다.
어쭈, 이놈 봐라?
―탓.
그 사이 우리는 지상에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풀숲으로 몸을 숨기는 순간.
―파앗!
소예리 헌터가 있는 마탑 주변이 연둣빛으로 번쩍였다.
“오.”
봉인 마법이 저건가?
신재헌이 내 몸을 내려주는 사이, 내 시선이 곧바로 상태창으로 돌아갔다.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 S급(보조)
- 디버프 : 마법 봉인(L)]
이야, L급 던전 보정 받았을 거라곤 생각했지만 진짜 L급 스킬을 걸어 버리네?
내가 어안이 벙벙해서 입을 벌리는 사이 채팅이 올라왔다.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L급이면 유사시에 해제하기가 힘들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신재헌이 불쑥 답했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괜찮아요. 보니까 준비과정도 까다로운데다 막 쓸 수 있는 마법도 아닌 것 같고]
그 말에 잠시간의 텀을 두고 주이안 씨의 질문이 올라왔다.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신재헌 헌터님도 그곳에 계십니까?]
채팅창에 말도 안 하고 왔으니 알 리가 있나.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오니까 있더라고요 서프라이즈 선물인줄]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휴식은 취하셨습니까? 아무리 S급이라도…….]
으, 으아악! S급 힐러의 잔소리다! 난 슬그머니 채팅을 시야 구석으로 치워 두었다.
반면 신재헌은 더한 잔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답할 수밖에 없었는지, 난감한 표정으로 답하는 게 보였다.
저놈, 주이안 씨한테는 비밀로 하고 오려고 했던 게 분명하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이번 일만 끝나면 쉴게요]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사흘 이상 쉬셔야 합니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윽]
그렇게 채팅하면서도 신재헌은 마법사의 도주로를 이미 차단한 상태였다.
풀숲에서 소리 없이 움직여 제 공격 반경 안에 마법사를 넣는 것만으로 준비는 끝났다.
“히히…… 마탑주도 이걸로 끝이다!”
그걸 알 리가 없는 B급 마법사는 삼류 악당의 사망 전 플래그를 거침없이 세우고 있었다.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와 진짜 아무 스킬도 안 되네?]
그 사이 소예리 헌터는 원 없이 봉인 마법 연구를 하고 있었다.
―타탓!
난 놈이 주변을 휙 둘러보고는 자리를 뜨려는 걸 대번에 잡아냈다.
“누, 누구냐!”
놀란 마법사가 나를 돌아보더니 귀신 본 것 같은 표정으로 변했다.
“너, 넌 수호기사단장 에델바이스 백작?”
폐급 시한부 일반인이었는데 이렇게 알아보는 사람도 생겼습니다.
많이 컸다, 세니아!
내가 빙그레 웃어 주었다.
“정답.”
마법사는 정말 들킬 줄 몰랐다는 얼굴이었다.
“어, 어떻게 마탑에 수호기사단장이!”
삼류는 여기에 변명을 준비해 놓는다. 이류는 즉석에서 머리를 굴려 변명을 준비한다.
하지만 일류는?
“어떻게겠어.”
난 어깨를 으쓱했다.
생각하기 귀찮은 것도 있었지만 붙잡힌 이상 이런 말을 던져주면 놈은 십중팔구…….
“계획이 새어나갔나……!”
머릿속에서 알아서 소설을 쓰기 마련이었으니까.
“그러게 입조심 좀 하지 그랬어.”
난 대충 아무 말로 대답해 주었다. 마법사는 제 입을 헙 틀어막더니 외쳤다.
“아버지하고 동생 부부한테만 말했었는데……!”
난 순간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암살하러 온 주제에 너무 많이 나불거린 거 아니냐?
동제국 황태자는 이런 놈을 암살자라고 쓴 거야?
황제가 황성에 앉아 있는 일이 없는 서제국과 절망스러운 후계자를 둔 동제국 중 어느 쪽이 먼저 망할지 정말 궁금했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얘 잡았는데 지금 처리해요?]
“놔, 놔랏!”
난 놈이 벗어나려고 애쓰는 걸 때찌때찌 때려주며 채팅을 기다렸다.
그러자 잠시 후 소예리 헌터의 채팅이 올라왔다.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넵넵 해볼 거 다 해봤어용!]
들뜬 목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듯했다.
어휴, 저 실험정신을 어쩌면 좋냐.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진짜 얘 처리해도 안 풀리는 거 아니죠?]
알고 보니 이놈만 해법을 가지고 있다거나?
나는 그럴 능력은 없어 보이는 마법사를 보며 의문을 품었다.
“놓으라고! 에에에잇!”
물론 놈은 나름 마법사라고 마법을 쓰면서 벗어나려고 발악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 봐야 B급인 데다 내 스탯은 이미 B급 이상이었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 / 25세, 딜러(B)
체력 : 924213 (+55000)
근력 : 11233 (+10000)
마력 : 13230 (+10400)
민첩 : 7595 (+10005)
지구력 : 4959 (+10200)
방어력 : 3426 (+10005)
특수 : 도금 목걸이(C, ‘헌터 신재헌(S)’ 애장품 보너스 : 획득 경험치 +50%)]
이렇게 튼튼한 B급 보셨습니까?
이 마법사가 B급이 아니라 A급이라고 해도 도망에 특화된 스킬이 있지 않은 이상 내 손에서 벗어나는 건 불가능했다.
물론 벗어나 봐야 신재헌이 때려눕히겠지만.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시스템창 떴어용 저놈 처리해야 풀린다고]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걱정마 걱정마~]
대체 보조계 헌터에게 호기심이란 뭘까?
생각해 보면 연구원들이나 교수 같은 사람들이 보조계 헌터로 많이 각성했다던데, 보조계로 각성하는 건 혹시 호기심이 조건이 아닐까?
쓸데없는 고민을 하면서 난 쓸모가 완전히 사라진 마법사를 내려다보았다.
“애석하게도 풀어줄 마음은 없고.”
내가 말하는 사이 신재헌은 어슬렁거리면서 탑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다른 놈은 없는지 확인하는 것일 터였다.
저렇게 굳이 안 봐도 기척만 읽어도 알 텐데.
저놈은 얘 때려잡으러 온 것도 아닌 것 같고, 진짜 뭘 하러 온 거야?
저놈도 새삼 외로움을 느끼나?
사실 던전에서 신재헌이 그림을 그렸던 노트를 가져야 했던 건 주이안 씨가 아니라 본인이 아니었을까요?
“놔라!”
내 상념을 마법사가 방해했다.
―탁!
난 마법사의 머리를 다시 한번 때찌해주며 예의상 물었다.
“누가 시켰어?”
내 말에 마법사가 입을 딱 다물었다. 절대 말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보였다.
난 그 얼굴에 대고 정답을 말했다.
“동제국 황태자가 시켰지?”
그 말에 아니나 다를까, 마법사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L급 마법 보정을 받은 것 빼고는 잠입에 영 맞지 않는 인재였다.
동제국이 서제국보다 먼저 망하지 않을까?
내가 알기론 동제국 황태자가 지금 설치는 이유가 동제국 황제가 앓아누워서였으니까, 황제가 세상 뜨면 동제국도 나란히 망할 것이 분명했다.
그 전에 이 던전 클리어해야겠다.
“그래?”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며 난 입을 열었다.
“우리 폐하께서는 네가 입을 다물면 동제국 황태자를 먼저 털어버리라고 하시던데.”
[RP던전 페널티 위기! : 세니아답지 않은 싸가지]
답지 않은 뭐요?
내가 눈썹을 치켜올릴 때였다. 당황하는 마법사 너머로 신재헌이 손을 펴 보이는 게 보였다.
그런 말 한 적 없는 폐하가 황당해하거나 말거나 난 마법사를 주시했다.
그리고 직구를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