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너 그거, 거짓말할 때 얼굴이다?”
신재헌은 신유리의 그 말에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그런…… 얼굴이 있었나?
아까와 같은 표정을 최대한 짓지 않으려 애쓰면서 그가 말을 이었다.
“나중에 대답해주기로 했잖아.”
이상한 데서 날카롭다, 너는.
그는 짧게 숨을 삼켰다.
긴장한 걸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그는 습관적으로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억누르면서 최대한 자연스러운 표정을 가장했다.
하지만 머릿속은 텅 빈 채였다.
“네 말대로 거기서 씹을 순 없었을 거 아냐.”
그래서 앵무새처럼 그녀의 말을 따라 할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걸 보고 있는 소예리 헌터의 책은 이미 책장도 안 넘어가게 된 지 오래였다.
“여하튼 난 그 사람한테 관심 없네요.”
신유리는 손을 팔랑팔랑 내저었다.
“말했잖아. RP던전에서 사람 사귀어서 뭐 하냐고.”
그녀의 목소리는 정말 가벼웠다. 깃털처럼 가벼웠다.
훅 불면 날아갈 정도로, 가벼웠다.
신재헌은 짧은 한숨을 삼켰다.
정말 그녀에게는 짧은 해프닝에 불과했던 모양이다.
채팅으로도 본 말이었지만, 채팅에 저 말을 하는 신유리의 표정이 궁금했다.
너는 그때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텐치아라는 그자의 말에 조금이라도 동요했을까?
아니면 내가 너한테 사랑한다고 말할 때처럼, 그저 실없는 농담으로 치부했을까?
그놈의 고백이 너를 조금이라도 흔들었을까? 아니면 내 말처럼 네겐 그저 농담으로만 들렸을까?
머릿속이 새까만 의문으로 가득 찼다. 그의 잇새에서 불쑥 질문이 새어나왔다.
“그럼 실제로는?”
“어?”
신유리가 당황하는 게 보였다.
여기서 멈춰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신재헌은 또다시, 멈출 수가 없었다.
이미 달리기 시작해서 속도가 붙어 버린 마음은 그가 멈춰 세우기엔 너무, 빨랐다.
“남자, 사귈 생각 있어?”
그의 말에 신유리가 눈을 깜빡였다.
그 짧은 순간, 신재헌은 숨조차 쉬지 않고 그녀를 보고 있었다.
내가 긴장한 것을 알까.
너는, 알까.
알아줬으면 하는 이기심과 못 알아챘으면 하는 마음이 공존했다.
너는 내가 널 친구 이상으로 보기 시작했다는 걸 알면 틀림없이 불편하게 여길 테지.
그가 입술 안쪽을 깨물 때였다.
찰나의 시간을 두고 신유리가 손을 펴 보였다.
“굳이 안 사귀겠다는 생각은 안 해 봤는데.”
그 말에 귀가 기울여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어떤 답을, 기대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좋은 사람이 생기면? 사귀지 않을까?”
하지만 이어진 답은 신재헌이 기대한 것이 아니었다.
당연하게도, 그랬다.
신재헌의 짧은 숨이 터져 나왔다.
생기면 말이지. 그래, 좋은 사람이 생기면.
그럼 지금까지 옆에 있는 사람은 논외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나는 아예 생각지도 않는다는 거지.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신재헌 자신은 신유리에게 친구이니까. 친구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
알고 있었고 그래야만 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이 그것이니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마음이 점점 뒤틀리는 듯했다.
‘근데 넌 진짜 왜 왔어?’
정말 궁금해?
답해주고 싶었다.
너 때문에 왔다고.
소예리 헌터가 비밀을 지켜주는 ‘대가’로 온 것도 맞았다.
하지만.
신재헌은 신유리를 돌아보았다.
얘는 모를 거다.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거다.
내가 이곳에 소예리 헌터가 아니라 너 때문에 왔다는 걸,
네가 이곳에 오기 때문에 내가 이곳에 왔다는 걸.
“…….”
왜―
그는 입을 떼지 못했다.
왜 너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지?
다른 데서는 하나를 알면 열하나를 알면서, 왜 내 옆에서는 하나를 알려줘도 그 하나조차 부정하는 거지?
내가 너에게 직접 말하지 않아서?
농담이 아니라 내가 널 진짜 좋아한다고, 네가 더는 친구로 보이지 않는다고, 그렇게 말하지 않아서?
내가 내 손으로 네 평화를 바스러뜨리지 못해서?
그가 입술을 깨물었다.
“바람 타고 올라온 게 그렇게 신기해요?”
“당연하죠. 이거 마법이에요, 스킬이에요?”
“둘 다?”
신재헌이 생각에 잠긴 동안, 소예리는 자연스럽게 신유리와 이야기를 끌어내고 있었다.
“뭐야, 그럼 던전 나가면 집 앞엔 설치 못 해요?”
“응, 불가능~”
신유리가 아깝다는 얼굴로 마탑 가운데의 바람 구역을 보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늘 그랬다.
언제나 주변에 관심이 많았고, 저 호기심 어린 시선을 이곳저곳에 주었다.
그리고 그 시선을 신재헌 자신도 좋아했다.
하지만.
“…….”
신재헌의 시선이 신유리에게 따라붙었다.
이제 그녀는 바람에 뭐가 뜨는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이게 자동문처럼 사람을 인식하는 게 아니란 거죠?”
“내 마음대로라니까.”
“그럼 내가 여기 있다가 소예리 헌터님 화나게 하면 뚝 떨어져?”
신유리가 바람에 몸을 맡긴 채 물었다. 소예리가 웃음을 터뜨렸다.
“웅, 떨어져요. 그러니까 어서 마법의 말을 해라!”
그녀가 손짓하자 정말로 신유리의 몸이 19층까지 슉 내려갔다.
신유리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보이지 않는데도 어떤 모습으로 웃고 있을지 선명하게 그려졌다.
웃는 모습은 특히 좋아했으니까.
“예리 언니! 언니이이이!”
“앞으로도 그렇게 부르면 안 돼?”
만족한 듯한 소예리 헌터가 그녀를 20층까지 다시 끌어올렸다. 신유리는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왜? 왜? 왜?”
소예리 헌터가 묻자 신유리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이렇게 소예리 헌터님이 안달하는 걸 못 보니까?”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울렸다.
“그냥 1층까지 떨어뜨릴 걸 그랬나?”
소예리 헌터가 눈을 가늘게 뜨는 게 보였다.
신재헌은 그 모습을 의자 등받이에 팔을 걸친 채 보고 있었다.
“너도 와 볼래?”
그때 시선이 마주친 신유리가 물었다. 그는 손을 내저었다.
“아니.”
“왜, 재밌는데. 이거 던전 나가면 못 한대.”
그녀가 다시 신기한 듯 바람 위에 물건을 띄워 올리며 말했다.
장난스럽게 빛나는 검은 눈동자가 왜 오늘따라 원망스러워 보이는지, 신재헌은 알고 있었다.
나는 네가 이곳에 온다고 해서 더 서둘러 이곳에 도착했는데.
너는 그러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야, 그럴 것이다.
너에게는 당연한 일이겠지.
“이게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니라니까 그러네?”
들뜬 목소리가 들렸다. 신재헌이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그래, 당연하겠지.
너는 친구를 보고 있으니까.
편하기만 한 십여 년 지기를 보고 있으니까.
그는 일어나는 대신 신유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야, 여기 말레티아의 검도 뜰까?”
신재헌이 쓰는 말레티아의 검은 무게가 상당했다.
드문 귀속 아이템이라 타인이 들면 엄청나게 무거워지는 검이기도 했다.
이야기를 듣던 신재헌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서 인벤토리로 손을 집어넣었다.
[말레티아의 검(SS+)]
검을 꺼낸 그가 주저 없이 바람이 부는 영역 안으로 검을 던져 넣었다.
신유리의 흥미를 담은 시선이 검을 따라갔다.
그 덕에 신재헌은 그녀를 마음껏 볼 수 있었다.
검이 뜨는지는 궁금하지도 않았다. 검이 바닥에 처박히든 탑을 반으로 갈라버리든 상관없으니.
“…….”
네가 우연히라도 나를 사랑했으면 좋겠어.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네가 나를 의식했으면 좋겠어.
어느 순간 내가 네게 스며들었듯이, 너도 내게 어느 순간 스며들어서, 네가 불편하지 않게 나를 사랑해줬으면 좋겠어.
신재헌은 입술이 마르는 것 같았다.
갈증이 든다.
―사락.
바람에 날리는 신유리의 머리칼이 그의 볼을 스쳐 지나갔다.
이렇게나 가까이 있을 수 있지만 그는 그저 친구였다.
“뜬다! 뜬다! 소예리 헌터님, 이걸로 칼 휘두를 순 없어요?”
“휘두를 수야 있겠지만 별로 세게 휘둘러질 것 같진 않은데…….”
소예리 헌터가 눈을 빛내며 바람 영역 앞으로 다가왔다.
새로운 공격방식(?)을 연구할 마음이 든 게 분명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신재헌의 시선은 신유리에게만 박혀 있었다.
웃음을 터뜨리는 환한 얼굴.
신기해하면서 이곳저곳을 가리키는 너.
“딴 사람이 말레티아의 검 만지면 시스템창 뜬다며. 지금 시스템창 같은 거 떠?”
신유리가 눈을 반짝이며 물어 왔다. 신재헌은 고개를 저었다.
신기하다는 듯, 눈을 반짝이는 너.
“안 떠? 그럼 이걸로 공격 가능한 거 아니에요? 무게만 해도 상당할 텐데…….”
그렇게 말하던 신유리는 문득 그를 돌아보았다. 그러더니 그를 쿡 찔렀다.
“서서 자는 거 아니지?”
나와는 다른 얼굴로 나를 보는 너.
신유리가 눈앞에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보이지 않기를 반복했다.
감질나게.
―탁.
그 생각이 드는 순간 신유리의 손을 그가 잡아냈다.
“넌 뭘 그렇게 멍 때리면서 봐?”
손이 잡히자 신유리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너.
신재헌은 답할 뻔했다. 입을 간신히 틀어막은 그가 시선을 돌렸다.
의아한 시선이 따라붙었지만 신재헌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떡하지.
나, 네가 너무 예뻐.
그 생각을 그대로 뱉어 버릴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