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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의 붉은 달-100화 (100/113)

100화

“이유는 이미 알고 계시겠지요.”

“뭐, 명부에 자네 이름이 올라가 있는 것 때문에? 사방신쯤 되면 사실 우리 애들이 잡으러도 못 갈 거고, 자네가 거부한다면 어차피 유명무실한 게 아닌가.”

“저 외에도 또 한 명이 있지 않습니까.”

알면서 능글거리며 말을 돌리는 염라대왕을 보며 백호가 답했다. 또 한 명이라, 하면서 염라대왕이 유쾌하게 머리 뒤로 손깍지를 꼈다.

“자네 반려 말이로군. 소문이 파다하던 걸.”

“아신다면 이야기가 빠르겠습니다.”

“어쩌겠나, 이미 명부는 작성된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집행할 뿐인데.”

“연화의 영혼을 찾아가는 일을, 저승사자들의 임무에서 빼주시면 간단한 일입니다. 그럼 그사이에 제가 알아서 그녀의 영혼을 갈무리할 것이니.”

태연하게 말하는 백호의 얼굴을 보며 염라대왕이 인상을 구겼다.

“무슨 소리야, 영혼 찾는 걸 업무에서 빼라고? 그런 식으로 일처리를 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어. 별소리를 다 듣겠군. 그랬다가 구멍 나는 명부의 숫자 때문에 세계의 균형이 무너지면 어쩌려고?”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일 아닙니까.”

“그야 당연히 알지.”

어처구니없는 소리다. 염라대왕이 혀를 찼다.

“게다가 영혼만을 갈무리해 어쩌려고? 혼령이 저승으로 오지 않는다 해도 여인의 시체가 멀쩡하지는 않아. 부패해 가는 육신을 부여잡고 뭘 하려는 겐가.”

“육신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녀 자체가 중요할 뿐.”

그렇다고 부패하게 놓아두지도 않을 것입니다만, 하며 백호가 덧붙였다. 그의 푸른 눈은 침착해 보였지만 동시에 어딘가 빛을 잃고 있었다.

“나 원 참, 살다 보니 사방신이 이렇게 말 안 되는 요구를 하는 것도 보고.”

“안 됩니까?”

“당연하지 않나.”

턱을 괴고 있던 소년은 발을 달랑거리면서 다시 문서로 시선을 돌렸다. 무슨 흥미로운 방법이라도 찾아왔나 했더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고 왔다. 지루한 일상에 백호의 이야기는 꽤 흥미를 끄는 소문이었으나 그 이상이 될 수는 없었다. 염라대왕이 손을 흔들었다.

“이제 저승에서 좀 나가주게. 현무, 내보내라.”

“……백호.”

현무는 좀 난처한 얼굴이었다. 표정이 거의 없음에도 난처함을 알아볼 수 있다는 게 신기했으나, 염라대왕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는 한숨을 쉬었다.

“버티지 말고 나가. 나하고 힘겨루기를 했다간 이대로 인간계까지 우리 둘의 힘이 파장을 일으킬 것이다.”

“그래? 그거 잘됐군.”

백호는 눈을 내려 연못에 떠 있는 연화의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창백하고 차가운 얼굴, 지금은 백호 자신의 힘으로 시간이 멈추어져 있지만 이미 생명은 사라져 버린 육체.

염라대왕이 말한 부패한 육신이라는 말에 백호는 잠깐 숨을 멈추었다. 과연 인간의 영혼은 보존할 수 있지만 육체는 그렇지 않다. 시체는 썩게 마련이며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자연의 법칙. 금수와 초목의 신으로서 백호 자신이 그것을 가장 잘 알았다.

그 부드럽고 가냘픈 손길이, 작은 새처럼 백호가 쓰다듬고 어루만지던 작은 여인의 가느다란 사지가 썩어 없어진다. 종내에는 부패하여 흙에 묻히고, 자연으로 돌아가 다시는 만질 수 없게 된다.

영혼이 있더라도 그것을 담을 그릇이 없이 잡아둔다면 지박령에 지나지 않게 된다. 과연 그는 그런 운명을, 연화에게 요구할 수 있는 것일까.

“…….”

“백호.”

재차 현무가 재촉했다. 백호는 눈만 깜박거리며 답이 없었다. 이대로 밀어낼 수도 있었지만 인간계에 쓸데없는 영향이 갈 수도 있어 현무는 잠시 기다렸다.

“이런 식으로는 네 요구를 들어줄 수 없다. 세상에서 가장 준엄한 것이 죽음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겠지.”

“…….”

“비록 네 죽음은 우리가 완벽히 보장할 수 없다 해도 네 반려의 죽음은 어쩔 수 없다.”

현무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런 식으로 쳐들어오기 전에 눈속임이라도 할 것이지. 지나치게 직선적인 성격의 백호는 타협을 몰랐으니 어쩔 수 없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백호가 천천히 앉아서 연화의 몸을 일으켜 품에 안았다. 가늘고 작은 여인의 몸은 백호의 장포 자락에 감싸여 얼굴만 보이게 되었다.

희고 창백한, 작은 얼굴을 쓰다듬으며 백호가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래, 이미 죽음의 냄새가 이 육신을 감싸고 있구나. 백호의 예민한 후각으로 살아생전 연화의 체향과는 전혀 다른 냄새가 스며들었다.

“그럼 방법이 없다는 뜻인가.”

백호가 중얼거렸다. 현무는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눈살을 찌푸렸다. 백호의 주변에서 거대한 기운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만둬라, 백호.”

백호는 서늘한 눈으로 현무를 돌아보았다. 서서히 그의 몸을 감싸고 올라오는 기운은 소용돌이치는 흰 안개와 같았다. 아무런 공기의 움직임도 없던 저승 한가운데, 세찬 공기의 흐름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내가 이곳을 전부 부수고 저승사자를 잡아간다면 어떨까.”

그가 히죽 웃었다. 저승사자는 혼령을 잡아올 뿐 아니라 잘못 사망한 혼령을 다시 육신에 붙여 넣을 수도 있었다. 현무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무슨 소리냐. 감히 저승의 지엄함을 부수겠다는 뜻이냐.”

“굳이 말하자면 그렇겠지.”

평소 오만하고 다혈질이지만 선을 넘는 일은 없었던 백호였다. 그러나 지금 그는 진심으로 전신의 힘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애초에 본신이 아니니 제압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백호가 신령계에 누워 있던 본신을 끌고 전심전력으로 달려든다면 이곳의 그 누구도 무사히 그를 이길 수 있으리라 장담할 수 없었다.

“진정해라, 백호. 이런 식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아.”

검은 기운을 몸에 두르고 있는 저승의 사방신은 어두운 눈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주변에 둘러앉아 있던 판관과 염라대왕이 하던 일을 멈추고 백호를 주시했다. 저승으로 끌려오던 영혼들과 저승사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분노한 사방신의 기운은 본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지하를 간간이 흔들었다.

“내가 대체 왜 여태까지…… 인간계에 미칠 영향을 걱정하며 움직였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

백호의 입가에 가늘게 웃음이 걸렸다.

“왜 그랬을까, 내가 사방신임을 잊으면 간단한 일이었는데.”

“백호.”

“내가 아무리 노력해 봤자 결국 이런 꼴이 나는 것을.”

소용돌이가 거세졌다. 백호는 미소를 지었다.

“나를 내쫓을 것인가? 그래, 이건 현무 네놈의 공간전이 능력을 통한 것이니 나는 인간계로 돌아갈 수밖에 없겠지.”

“…….”

“그렇다면 인간계부터 부수면 되나? 순서가 달라질 뿐이겠군.”

염라대왕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지금 당장 백호를 누르는 건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세계의 사분지일을 관장하는 신이 미쳐 날뛰기 시작하면 어디까지 균형이 망가질지 알 수 없었다.

현무가 차마 백호를 인간계로 밀어내지 못하고 맞서 자신의 검은 기운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사방신 둘의 기운이 맞부딪히며 공기 중이 타들어 갔다. 고요하고 무거웠던 저승의 하늘에 벼락과 번개가 오갔다.

“기다리세요.”

일촉즉발로 두 기운이 부딪히려는 찰나,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딘가 주의를 끄는 익숙한 목소리에 백호가 잠시 멈칫했다. 품 안의 연화를 고쳐 안으며 그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현무 역시 마찬가지였다. 둘의 기운이 소강되며 뒤로 조금씩 물러났고, 염라대왕만이 누구인지 아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삼도천의 검은 물결 한가운데로 두 개의 형상이 천천히 떠올랐다. 두 사람은 느릿하게 강물을 넘어왔다. 한 방울의 물도 묻히지 않으려는 듯 아주 조심스러운 발걸음이었다.

“어쩐 일이냐, 청수희.”

“샘의 정령 청수희가 저승의 주인이신 염라대왕께 인사 올립니다.”

“됐다. 아무리 네가 샘물의 정령이라 하나 삼도천을 타고 나타나다니 대담한 짓이야. 한 방울이라도 잘못 옷깃에 묻으면 어찌 되는지 잘 알지 않느냐.”

청수희가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곁에 있는 여인을 흘긋 보고 백호는 누구인지 알아챘다.

뱀의 일족, 사영.

“뱀의 아가씨까지 끌고 여기에 무슨 일이냐.”

“백호 님께서 풀지 못하실 중요한 일을 사영 아가씨께서 기꺼이 풀어드리고자 하시어, 제가 모시고 왔습니다.”

두 사방신의 기운에 짓눌릴 것 같아 사영의 얼굴은 창백했다. 청수희는 그 와중에도 여유를 잃지 않았다. 그녀는 사영을 끌어당겨 자신의 곁에 세워 보호하면서 나붓이 절을 했다.

“무슨 뜻이지?”

“말씀 그대로.”

청수희의 곁에 서 있던 사영에게 모두의 눈이 쏠렸다. 한 번도 이렇게까지 자신에게 이목이 집중된 적 없었던 터라 사영은 잠시 놀랐다. 그녀는 잠시 불안하게 옷깃을 만지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승의 명부에 오른…… 백호 님과 반려님의 이름을 대신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네가? 무슨 수로?”

염라대왕이 말했다. 가벼운 반문이었으나 무시는 아니었다. 그저 대단히 궁금하다는 듯한 얼굴일 뿐이었다.

“세계를 넘어가는 자들을 다루는 규칙은 엄격하다. 산 자와 죽은 자를 가르는 법칙은 그와 견줄 수 없을 정도로 준엄하지.”

소년은 다시 붓을 들어 문서를 쓰기 시작했다. 이런 소란이 있는 와중에도 시간은 흐르고 있어, 밖에서는 수많은 생명들이 죽어 이곳으로 넘어오고 있었다. 잠시도 손을 놓고 멈출 수 없는 이유였다. 판관들 역시 다시 붓을 들었다.

“윤회의 굴레에서 나온 명부는 우리조차 다시 쓰지 못한다. 대체 무슨 방법으로 네가 그들을 대신하겠다는 뜻이냐.”

사영은 그 아름다운 진주빛 머리카락의 소년에게 잠시 넋을 잃었다가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말을 이었다.

“명부는…… 정확할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하나의 이름이 뜻하는 것이 전혀 다른 인물일 때도 있다고.”

“…….”

“그리하여…… 제가 그분들을 대신해 영혼과 생명을 드릴 수 없을까 생각했습니다.”

염라대왕은 물끄러미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높은 곳에 앉은 아름다운 소년은 한쪽 눈썹을 올렸다.

“그래서 네가 대신 죽겠다?”

“……예.”

“네가 무엇이기에 감히 사방신과 그 반려를 대신하겠다는 것이지?”

명부를 우습게 보아도 정도가 있지 너무 하는군, 하면서 염라대왕이 피식 웃었다. 그는 기세를 전혀 죽이지 않은 채인 백호와 현무 쪽을 흘긋 보았다.

“세계를 부수는 것도 상관하지 않을 정도로 돌아버린 사방신이지만, 한낱 뱀 새끼와는 차이가 크지. 네 무엇을 보고 이 명부가 백호와 그 반려로 여기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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