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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의 붉은 달-101화 (101/113)

101화

염라대왕은 다시 붓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저승사자와 혼령들 역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붓질에 따라 이 저승의 모든 존재가 움직이고 멈춘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영은 잠시 긴장했다. 눈앞에 있는 것은 저승의 주인. 이승에 옥황상제가 있다면 지하에는 염라대왕이 있다. 상제와 동격의 존재를 감히 대면하고 있다는 사실에 무릎이 떨려왔다.

“세계의, 규칙을…… 속일 수 있다면.”

갑작스러운 긴장감에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그녀는 용기를 내려고 애쓰면서 염라대왕을 올려다보았다.

“그렇다면 명부가 저를 두 분으로 인식해 죽음의 운명을 충족했다 여기겠지요.”

“그래, 그렇겠지. 다만 규칙의 엄격한 눈을 어찌 속여 넘기겠냐는 것이다.”

사영은 흘긋 백호 쪽을 바라보았다. 남자의 푸른 눈은 아까보다는 조금 진정되어 있었다. 그의 눈은 의문을 담고 있었다. 대체 무얼 하는 것이냐?

백호는 가차 없이 그녀의 아비를 벌하였으나 동시에 그녀를 그대로 둔, 자비로운 신이기도 했다. 사영에게 잔인하게 군 것은 그녀의 아비였다.

그녀는 백호를 좋아했다. 사랑까지는 아니지만 동경과 비슷한 감정이었다. 그 누구보다 강하고 높은 위치의 존재, 또한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는 존재. 그래서 그의 곁이 탐이 났던 것이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면 되는 거야.’

사영은 떨리는 손을 쥐었다. 그녀는 숨을 몰아쉬고 품 안에서 반려의 노리개와 연화의 수틀을 꺼냈다.

“재미있는 걸 가지고 있구나.”

염라대왕이 흥미를 보이며 다시 붓질을 멈췄다. 저승의 모두가 다시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그는 목을 쭉 빼서 사영이 든 물건 둘을 바라보았다. 세계의 규칙과 몹시 비슷한 그의 눈에는 아마 이것이 연화나 백호와 비슷한 모습으로 보일 것이었다.

“……제법인데. 어찌 백호의 영기가 깃든 수틀을 지니고 있는 게지? 한낱 신령이 말이다.”

“반려께서 그리운 마음을 가지고 수놓으신 물건입니다. 붉은 단심이 깃들어 완성된 수틀이지요.”

신기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염라대왕의 앞에 사영이 조심스레 다가가 두 물건을 내려놓았다. 소년은 이리저리 노리개와 수틀을 뒤집어 보았다. 이리 보고 저리 보아도 과연 백호와 그의 반려였다.

“그래, 재미있구나.”

염라대왕의 기색을 엿본 백호의 기세가 한층 줄어들고 있었다. 그는 신중하게 염라대왕과 현무를 번갈아 보았다. 판관들 역시 서로 수군거리며 이야기를 나눴다.

잠시 두 물건을 보던 염라대왕이 뭔가 결심한 듯 새 종이를 하나 꺼내 그곳에 백호와 그 반려를 적어 내렸다. 저승의 명부는 흰 종이였으나 염라대왕이 지금 쓰는 것은 검은 종이였다. 그 위에 먹이 아닌 흰색의 글씨가 흘러내렸다.

다 쓴 뒤 명부를 보던 염라대왕이 기가 차다는 듯 웃었다.

“이것 좀 보거라.”

백호의 눈이 커졌다. 그가 허공에 들어 올린 흰 종이, 검은 먹의 명부에서 슬금슬금 두 개의 이름 옆에 사(死)가 적혔다. 회색 연기가 종이 위에서 피어올랐다. 그러나 글자는 끄트머리 한 획을 남겨두고 멈췄다.

“아직 모자라. 규칙은 이것을 백호와 반려로 인식하였으나, 모자라다.”

“무엇이 모자란 겁니까.”

백호가 급히 말했다. 이제야 나타난 희망의 빛에 그는 품 안의 연화를 고쳐 안으며 기운을 가라앉혔다. 현무가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역시 자신의 기운을 내려놓았다.

“무엇이든 가져다드리지요. 무엇입니까.”

염라대왕이 웃었다.

“생명을 거두는 이곳에서 모자란 게 무엇이겠느냐, 목숨이지.”

잠시 공간 안에 침묵이 감돌았다. 결국 논의는 제자리로 돌아왔다. 세계의 규칙을 속이는 것은 성공했으나, 거기에는 대가가 역시 따라붙었다. 두 사람분의 생명력.

백호는 순간 바깥으로 나가 죄 없는 인간을 한 명 살해할까 하는 유혹에 시달렸다. 죽을 운명이 아니었던 자를 죽여 그 생명력만을 빼앗아 온다면 이 상황이 해결된다. 비록 그 영혼은 원한에 지박령이 될지라도.

“제가…… 그 생명력을 대신하겠습니다.”

강한 유혹을 깬 것은 사영이었다. 백호는 눈을 크게 뜨고 사영을 돌아보았다. 한때 발칙한 짓을 했던 뱀의 여인은 강단 있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제가 저승으로 넘어가겠습니다.”

“호오.”

“괜한 짓 하지 마시오, 사영.”

백호의 묵직한 만류에 사영은 살풋 웃었다. 그녀는 고개를 조금 젓고 푹 숙였다.

“백호 님, 제가 저질렀던 잘못을 용서하신다면 하고픈 대로 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그대에게 잘못을 물었던 적은 없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제가 저질렀던 일이니까요.”

사영은 두 손을 꽉 쥐었다. 현무는 다시 자리에 착석해 명부를 훑어보았다.

“사영 아가씨라 하였나, 하지만 한 명분의 목숨밖에 안 되니까 말이야. 생명력이 모자라지.”

“…….”

“신령으로 제법 괜찮은 경지에 이르렀지만 그렇다 해서 두 명분을 전부 감당할 수 있지는 않으니까 말이야.”

현무의 냉정한 말에 백호가 생각에 잠겼다. 그는 가만히 창백한 연화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가야 할까.’

삼도천의 물을 묻히면 인간은 모든 기억이 사라진다. 연화가 그를 잊도록 둘 수는 없었다. 사방신인 그는 모든 기억을 잊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리 오랜 세월이 걸리더라도 다시 돌아와 연화를 찾을 수 있다면.

순간 흐릿하게 노란 기운이 저승 한가운데 감돌기 시작했다. 염라대왕이 질색하면서 붓을 집어 던졌다.

“아니, 오늘 아주 날을 잡았구나. 이 고요한 저승에 또 손님이라니!”

“저런.”

현무 역시 한탄했다.

“심지어 약사여래께서 오셨군요.”

그의 말대로였다. 처음에 연했던 노란색의 기운은 점차 짙어졌고, 작은 구처럼 모인 기운 속에서 키가 크고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났다.

그녀의 앞에 모두가 무릎을 굽혀 인사했고 염라대왕 역시 마땅찮은 기색으로 고개를 까딱했다. 보살은 모든 윤회와 세상의 규칙에서 벗어난 존재였기에 상제나 염라대왕 역시 예를 갖춰야 하는 상대였다.

“오랜만입니다, 염라대왕.”

“가능하면 안 보고 싶은 사이인데 어찌 이렇게 먼 길을 오셨소?”

진주빛 머리의 소년이 심술궂게 말했다. 약사여래는 부드럽게 웃었고, 자신의 뒤에 손을 넣어 또 한 명의 여인을 꺼내었다. 그녀의 뒤에서 나타난 여인은, 연화였다.

“……연화야.”

백호는 눈을 믿지 못하고 껌벅였다. 그는 자신이 품에 안고 있는 연화의 육신을 꽉 잡고 연화의 혼령과 눈을 맞췄다. 그녀는 그리움에 범벅이 된 눈으로 그를 애닲게 바라보았다. 그가 다가가려 하자 약사여래가 한 손을 들어올렸다.

“내가 보호하고 있는 여인이니 누구도 곁에 올 수 없소. 만약 다른 이가 다가온다면 세계의 규칙이 연화를 발견해 곧장 저승으로 넘어가야 할 수도 있으니.”

“아.”

백호는 그 자리에서 덜컥 멈춰 섰다. 그는 애끓는 가슴을 자신도 모르게 한 손으로 쥐었다. 연화 역시 견딜 수가 없는지 치마를 틀어쥐었다.

“이렇게 난리일 줄 알고는 있었습니다, 염라대왕.”

“…….”

소년은 입을 삐죽였다. 그는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던졌던 붓을 주섬주섬 주워 올렸다.

“분명히 내게 뭔가 강요하러 오셨겠지요.”

“물론입니다.”

약사여래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지겹다는 얼굴을 한 염라대왕을 보며 웃은 그녀는 상냥하게 연화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이야기가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는 내 이미 저쪽에서 듣고 있었습니다.”

“……현무, 공간전이를 할 때는 제대로 저쪽을 닫아놓으라 내 일렀던 것 같네.”

“죄송합니다. 이럴 줄은 몰라서.”

현무는 시큰둥하게 사과했다. 사실 약사여래쯤 되면 닫아놓는다고 해도 그쯤은 뚫어서 볼 것이다. 보살들이 괜히 윤회 수레바퀴의 바깥에 있는 존재들이 아니었다.

“목숨 하나가 부족하다 하였지요.”

“그래요. 어차피 그것이 없으면 넘어갈 수 없습니다. 설마 여래께서 여분의 목숨을 지니고 계시지는 않을 것이고.”

염라대왕이 배짱을 튕기며 말했다. 여래가 살며시 웃었다. 그녀는 품에 손을 넣어 작고 푸른 향낭 하나를 꺼내 들었다.

“작은 푸른 새의 목숨입니다. 중간지대에 떠돌던 혼령 하나를 위로하고 그 근처에서 발견했습니다. 죽어 넘어진 작은 새를 말이에요.”

“…….”

“아마 현무 님은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기억에서 파란 새를 찾아낸 현무가 혀를 찼다. 그래, 그때 그 자가 죽어버렸군. 죽을 때가 되지 않은 자를 억지로 저승에 다녀오게 해 죽게 만들어버린, 뱀 일족의 수하였던 파란 새.

“이것을 넘겨드리겠습니다. 그의 혼령은 이미 저승으로 갔으니.”

“보살께서 멋대로 이런 걸 가지고 계시다니 좀 곤란한데요.”

“욕심 때문에 죽을 때가 되지 않은 자를 억지로 끌고 가려는 저승사자보다 더 곤란할까요.”

저승사자와 사혈 사이에 있었던 거래를 이미 약사여래가 알고 있었다. 아마도 파란 새 수조의 혼령을 위로하며 알게 되었으리라. 현무는 한숨을 쉬고 고개를 저었다. 염라대왕도 못마땅한 얼굴로 붓을 종이 위에 두드렸다.

“할 수 없군.”

모든 조건이 갖추어졌다. 더는 거부할 이유도 마땅치 않았다. 현무가 한마디를 보탰다.

“저는 찬성합니다. 저승 명부가 완료되었음을 선언하겠습니다.”

“……자네가 그렇다면야.”

염라대왕은 한숨을 쉬었다. 그는 명부를 들어 올렸고, 백호와 반려의 이름 곁에 써 있던 사(死) 자가 완성이 되었다.

백호는 그것을 보며 속이 전부 타버린 듯 기운이 빠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제 헤어지지 않아도 괜찮다. 둘 모두 이승에 머물러, 따스한 육신을 가지고 더불어 손을 잡을 수 있었다.

“정말 별일을 다 보겠군.”

현무가 투덜거렸다. 그는 사영을 건너다보았다.

“여기서 가장 손해를 본 건 당신이로군, 뱀의 아가씨.”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선택한 거니까요.”

연화의 영혼이 하늘거리며 사영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조심히 사영을 살펴보았다. 그녀가 전각의 시녀로 일했던 그 여인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눈치챈 듯했다. 검은 눈 안에 있는 미안함을 알아채고 사영이 웃었다.

“미안해하지 마세요, 연화 님.”

어차피 이승에는 이제 더 이상 그녀의 자리가 없었다.

사영은 똑바로 현무를 바라보았다. 재미있다는 듯 가늘게 좁혀진 눈동자를 보면서 그녀는 말을 이었다.

“이렇듯 아무런 고통 없이 죽을 수 있는 건 흔히 오는 기회가 아니지요.”

“하지만.”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연화 님. 나는…….”

사영은 말하다 말고 입술을 깨물었다. 혼령의 상태로 있음에도 연화의 모습은 하늘거리며 아름답게 빛났다. 진심으로 걱정하는 그녀의 눈동자는 검고 둥글고 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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