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눈에 띄게 아름다운 푸른 머리의 여인이 웃어 보이자 군사들의 눈이 벌게졌다. 샘의 정령이니 인간의 여자와는 완전히 다른 미모를 지닌 미인으로 보여, 사내들은 더러운 욕정을 숨기지도 않았다.
“우리하고 재미 볼 준비가 된 여자인가 본데?”
“기특하기도 하지.”
킬킬대는 음담패설이 쏟아져 나왔다. 사영이 불안해하며 청수희를 재촉했다.
“빨리 가요, 청수희!”
“아아, 잠시만.”
샘의 정령이 눈을 깜박였다. 군사들이 거침없이 다가와 흙발을 욕탕 안으로 밀어 넣었다. 네 명이 전부 가까이 다가왔을 때, 소리 없이 욕탕의 물이 밑으로 미끄러져 흘러나갔다.
“마른 땅에서 익사를 하다니, 드문 경험일 거야.”
여인의 웃음소리가 높았다. 그녀의 곁에 채 다가가지도 못하고 발이 굳은 군사들은 어리둥절했다. 그들의 몸을 타고 오른 물길이 코와 입 안으로 파고들어 갈 때까지도 무슨 일인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곧 기도를 막는 한 덩어리 물에 사내들이 숨을 쉬지 못하고 바닥을 굴렀다.
얼굴이 시뻘겋게 된 채 사지를 휘젓는 그들을 보면서 물을 움직여 청수희가 군인들을 욕탕 밖으로 던져 내쫓았다.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색색거리는 소리만 욕실 안에 울렸다. 지금쯤 네 군사의 폐에까지 물이 찼으리라. 더 길게 고통받을 수 있도록 그녀는 기도에서 물 덩어리를 제거했다.
애매하게 숨이 쉬어져 미친 것처럼 기침을 하면서 군사들이 바닥을 긁었다. 고통 어린 신음성이 새긴 했으나 비명이 될 정도로 크지도 못했다. 눈이 충혈되어 마치 튀어나올 것 같았고 바닥을 긁는 손톱 밑으로 피가 샜다.
그것을 보며 사영은 몸을 떨었고 청수희는 밝게 웃었다.
“물 무서운 줄을 알아야지. 자, 이제 갈까?”
욕탕 안 절반쯤 찬 물이 파도치기 시작했다. 곧 둘의 몸이 욕탕의 물에 휘감겨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뒤에 남은 자들은 고통만 존재하고 죽지 못한 채 몸부림치고 있었다.
* * *
아주 따스하고 노란 빛이었다. 차가운 물속에서 정신을 잃었다고 생각했는데, 몸을 감싸는 온기에 연화는 눈을 깜박였다. 다리 끝을 스치는 치맛자락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현실이 아닌 듯 꿈 같은 기분이었다. 힘을 주어도 팔다리는 아주 느릿하게 움직였다.
다정한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연화야.】
들어본 적이 있지만 낯선 목소리. 여인은 그 주인공이 기억나지 않아서 고개를 갸웃했다. 소리인데도 온기가 느껴질 만큼 따스하고 부드러웠다. 낮은 웃음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예쁜 아이야, 어서 일어나렴.】
부드러운 손길이 연화의 찬 뺨을 쓸어내렸다. 여전히 피부로 느껴지는 온도는 차가웠으나 그것이 기묘하게도 거슬리지 않았다. 서서히 몸 전체로 따스함이 옮겨오기 시작했다. 그 온기에 손을 뻗어 쥐면서 그녀는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누구세요?”
여인은 아이 같은 말투로 물었다. 몸을 감싼 온기는 마치 아주 어린 시절 어머니가 안아주던 기억과도 같아서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졌다. 친어머니가 죽기 전에 안아주던 기억을 그녀는 뇌리 깊숙이에서 찾아냈다. 어머니의 연한 가슴에 얼굴을 묻고 그 향기를 맡으며 잠들던 때를.
연화는 자신도 모르게 뺨을 쓰다듬는 손길에 얼굴을 묻었다. 매끄럽고 따스하고 다정한 손길이었다. 다독이듯 상냥하게 얼굴을 감싸고 목소리가 속삭였다.
【너는 나를 안단다. 아주 잘 알아.】
묻지 않아도 알고 있지. 그 말에 연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태어나면서부터 알아온 분이다. 아니, 어머니의 태내에 있을 때부터 알았을지도 모른다. 지금 와서 모를 리가 없었다. 다만 직접 뵌 것이 처음일 뿐이지.
그녀는 소리 내어 그를 불렀다.
“약사여래 님.”
【그래, 나의 가여운 아이야.】
따스한 노란빛이 한층 더 강해졌다. 아주 강하고 따뜻했으나 태양빛처럼 강하고 태워버릴 듯한 존재는 아니었다. 그저 그 빛 안의 존재들이 모두 편안하게 쉴 수 있을, 그런 빛.
“뵙고 싶었어요.”
연화가 속삭였다.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느껴왔던 힘이었다. 언제나 그들을 감싸고 지켜주던 온기. 아픈 자들을 모두 굽어 살피는 보살.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연화의 시야 안에 부드러운 선을 지닌 한 여성의 모습이 드러났다. 온통 노란색으로 감싸인 그녀는 연화의 아이처럼 맑은 눈을 향해 웃어 보였다.
약사여래는 천천히 연화의 뺨을 쓰다듬었다. 아주 오랫동안 돌봐온 자신의 딸에게 하는 듯 애정 어린 손길이었다.
【넌 아직 저승으로 갈 때가 되지 않았다. 돌아가야 한단다.】
네 운명은 참으로 기묘하구나, 하고 약사여래가 속삭였다. 저승의 명부에 올랐으나 동시에 완전히 정해지지는 않은 운명. 그러나 나는 너를 세상으로 돌려보내고 싶단다. 아직 충분한 행복을 맛보지 못하였으니. 보살의 목소리는 고요하지만 동시에 단단했다.
연화는 그녀의 뒤로 긴 길이 펼쳐져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어둡고 차갑고 긴 강물이 가로놓인 길. 그곳에서 희끄무레한 영혼들과 창백하고 하얀 손들이 그녀를 끌어당기려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저 멀리에 서서 함부로 다가오지는 못했다. 바로 이곳에 보살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승으로 절반쯤 발을 담근 자마저 다시 이승으로 데리고 오는 것이 약사여래였으니.
연화는 따스한 손길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저곳으로 가고 싶지 않아요.”
【그래. 언젠가 시간이 흐르면 모르되 아직 네가 갈 곳이 아니다.】
약사여래는 다정하게 말했다.
【사방신이 내게 보채고 있단다……. 저승사자의 방문도 무를 수 있다면서, 연화는 왜 데려오지 못하냐고. 정말 어린아이 같은 신이로구나.】
“누가…….”
【기억이 나지 않느냐? 너의 반려.】
“기억나지 않습니다.”
연화는 고개를 갸웃했다. 희고 보드라운 여래의 손이 다가와 여인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무언가를 닦아내는 것 같았다.
【삼도천의 물이 네게 튄 모양이구나, 그 오만한 사방신 말이다. 가장 성격이 급하고 빠르게 불같은 사랑에 빠질 수 있는 금수의 왕.】
약사여래가 소리를 높여 웃었다. 온통 텅 빈 공간 안에 그녀의 맑은 웃음소리만이 울렸다. 연화는 멍하니 맑게 웃는 보살을 올려다보았다.
【상제가 본다면 어이없어 할 게다. 그 백호가 자신의 영토마저 버려두고 널 찾으러 오다니.】
그것이 누구였더라. 연화는 눈을 깜박였다. 백호, 그리운 감정이 기억보다 먼저 찾아들었다. 심장께가 저릿하여 그녀는 가만히 왼쪽 가슴을 어루만졌다.
아주 느릿하게 한 조각, 기억이 돌아왔다. 비었던 머릿속이 천천히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입술을 달싹였다.
“백호 님.”
【그래. 그 녀석 말이다. 사방신, 너의 반려.】
약사여래가 답했다. 보살은 가만히 허공을 바라보았다. 깊고 긴 눈매가 뭔가 깊이 생각하는 듯 가늘어져 있었다.
【그와 너의 운명이 무척 기묘하구나. 아주 가까운 앞날인데도 여전히 확정되지 않고 그저 무정형으로 흘러 다니기만 하는 운명이라니.】
약사여래의 눈에는 저승의 명부가 보였다. 한 나라의 왕조가 뒤집어지는 반란의 와중 수없이 많은 인간들이 명부에 올라 끌려갔다. 그곳에 분명 백호와 그 반려가 올라 있었으나 당연히 느껴져야 할 강제력이 미약했다. 여래는 천천히 연화의 머리카락을 쓸어주었다.
【아마도 신이 운명에 저항하려는 모양이구나.】
* * *
【그만 불러라, 귀청 찢어지겠군.】
현무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리 오래지 않아서였다. 얼핏 듣기에는 평소처럼 낮고 무감정한 목소리였으나 잘 아는 이의 귀에는 그 밑에 깔린 불쾌감이 들려왔다. 백호는 연화의 손을 잡은 채 허공에서 나타난 검은 형체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주변으로 순식간에 검은 그림자가 퍼져나갔다. 이른 아침, 수국의 내궁이었던 공간은 순식간에 어둠에 물들었다. 단순히 어두워진 것이 아니라 공간 자체가 잠시 겹쳐진 상태였다. 현무가 옮겨오기 귀찮아하며 저승의 공간을 흐릿하게 펼쳐 놓았다.
“나는 바쁜데 한가해서 좋겠군, 백호.”
창백한 얼굴이 어둠 속을 가르고 나타났다. 가벼운 비난의 말을 입에 담으면서 현무가 길게 찢어진 눈을 백호를 향해 흘겼다.
과연, 수많은 인간들이 죽어나가는 중이라 저승이 복잡할 것이다. 현무는 남에게 일을 미루지 않는 성격이었으니 더할지도 모른다. 신나게 인간의 영혼들을 끌고 다니고 있을 저승사자 견암과 그 뒤처리를 해야 하는 현무는 지금 아마 가장 바쁜 시간일 것이다.
“용건이 있어 불렀다.”
“그래, 당연히 있어야지. 허접한 용건이라면 큰일 날 줄 알아라.”
현무는 미간을 찌푸린 채 저승의 명부를 탁탁 책상에 쳤다. 바빠서 자리에서 일어날 틈도 없어 공간 자체를 열어 소통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변을 바삐 오가는 하위 저승사자들과 그들에게 끌려온 영혼들의 행렬이 보였다. 저승의 판관과 염라대왕의 곁에 책상을 둔 현무는 바삐 붓을 들어 영혼들의 죄목과 앞길을 써 내려갔다.
“명부에 나와 내 반려가 올라 있다 들었다.”
“……그래.”
현무는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고 계속해서 하던 일을 했다. 그의 검은 머리가 길게 바닥에 끌리는 모양을 보면서 백호는 입을 열었다.
“연화는 아직 오지 않은 모양이지?”
“아직. 저승사자들이 바빠 영혼을 아직 발견하지 못한 모양이다.”
“그거 희한한 일이군.”
백호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는 생각이 있었다. 저승사자가 영혼을 발견하지 못한다는 건 보통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들의 눈을 속일 수 있는 자는 이 하늘 아래 몇 되지 않는다.
혹시 약사여래인가? 그녀가 연화를 사자들의 눈에서 숨겨주고 있는 것인가.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어쩌면 소중한 기회일 수 있었다. 한 번 저승의 강물에 발을 담갔다면 아무리 사방신이라 해도 그 잃어버린 기억을 되돌리는 건 불가능했다.
백호는 몸을 일으켜 현무의 앞에 섰다. 몸이 완전히 넘어온 것도 아니고 그저 소통을 위한 형상이 공간 너머로 왔을 뿐이었지만 이곳의 주민들은 예민하다.
그가 왔다는 사실을 깨달은 염라대왕이 그쪽을 보며 손을 들어 보였다. 은은한 진주빛이 반짝이는 머리카락과 금색으로 빛나는 눈동자를 지닌 가느다란 몸의 소년이었다. 높은 의자에 앉은 그의 발이 허공에서 달랑거렸다. 그는 흥미로운 얼굴로 붓을 내려놓고 턱을 괴었다.
“백호, 오랜만이야. 가장 거친 생명의 신이 어찌 이 먼 저승까지 걸음하셨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