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사혈은 가늘게 기른 수염을 쥐어뜯으며 노했다.
“내가 이렇게까지 준비를 해줬는데 대체 무엇이 모자라서 실패했느냐! 내가 대체 얼마나 더 도와줘야 해!”
“…….”
아비의 미약과 혼향이 전혀 듣지 않았던 것이 이유라면 이유다. 이무기와 사방신의 격차가 이다지도 크다는 것을 몰랐던 아비의 무식 역시 이유다. 하지만 그 사실을 말하면 이성을 잃고 날뛸 사혈을 알기 때문에 사영은 그저 억울함을 삼켰다.
그녀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똑바로 앉았다. 사혈은 경멸하는 시선을 딸에게 던졌다.
“하여간 아무것도 제대로 하는 게 없구나. 대체 너 같은 게 왜 내게서 나온 거지?”
“…….”
“무능한 계집. 몸 건강히 낳아주고 대궐 같은 집에서 잘 먹이고 비단옷 지어 입혀놨더니 하는 짓이라고는.”
사혈은 혀를 차고 불쾌한 낯으로 돌아섰다. 사영은 가만히 앉아 그에게 들리지 않도록 한숨을 쉬었다.
지하에서 날 듯이 달려 나오자 신선한 밤공기가 그를 맞이했다. 백호는 숨을 크게 쉬었다. 지하에 있었던 그 짧은 시간 동안 답답해서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아직 시찰이 끝나려면 하루는 더 돌아야 했다. 죽 이어 돌아야 효율이 높다는 건 그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백호는 잠깐이라도 자신의 궁에 들렀다 갈까 싶었다.
이곳 뱀의 일족이 사는 곳은 백호의 궁에서 상당히 가까웠다. 날아간다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으리라.
‘연화는 잘 있겠지.’
그러고 보니 인간계에서 작은 제사가 있던가? 호접이 자리를 비웠을 날짜다. 미처 챙기지 못했던 부분에 백호는 혀를 찼다. 하지만 그래도 궁에는 묘우가 있으니 별일이야 없을 것이다.
하지만 뭔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호접이 없는 궁, 그곳에 연화가 홀로 있다. 혼자 밤을 지새우며 불안하지나 않았을까, 외롭지나 않았을까. 생전 처음 다른 생물체에게 세심한 마음을 쏟는다는 자각도 없이 백호는 입가를 삐뚜름하게 했다.
‘보고 싶군.’
밤하늘 위로 연화의 얼굴이 생생했다. 희고 단정한 이목구비와 가냘프고 부드러운 분위기. 작은 새처럼 아름다운 여인.
백호는 자신도 모르게 잠시 입을 다물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그리웠다. 사실 그리움인지 알 수도 없었다. 신으로 태어난 그는 여태까지 단 한 번도 누군가를 그리워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가봐야겠어.”
그는 크게 소리 내서 말했다. 시찰을 돌고 사방신으로서의 임무를 다하며 한순간이라도 다른 생각을 해본 적이 없건만, 백호는 충동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머리와 가슴 속이 전부 연화의 얼굴로 가득 차서 지금 당장 보지 않으면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는 마음을 정한 순간 망설임 없이 발을 떼었다. 호랑이의 모습으로 변한 그의 넓고 두꺼운 발이 바람을 밟았다. 날아가는 거체의 흰 털이 뒤로 나부꼈다.
소리 없이 흰 호랑이가 밤하늘을 갈랐다. 한 줄기 유성처럼 날아가는 백호의 속도는 그가 낼 수 있는 최대치였다.
불과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아 궁이 보였다.
그는 잠이 든 모두를 깨우지 않기 위해 아주 조용히 바닥에 내려섰다. 풀 한 포기 흔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괜히 다른 이들을 깨워 ―특히 묘우의― 싫은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이렇듯 고요한 밤에는 연화의 얼굴을 보고 딱 한 번 입맞춤만 한 뒤 다시 시찰을 나가도 될 것 같았다.
2층 창문이 평소와 달리 닫혀 있어 이상했다. 보통은 환기를 위해 열어두었는데 완벽하게 닫혀 있었다. 연화에게 밤공기가 차서 창문을 열지 않았나 하고 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백호는 근처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조용히 날아올랐다. 창 근처까지 왔는데도 이상할 정도로 소리가 없었다. 보통 인간이라면 어떤 경우에라도, 설사 잠이 들었을지라도 백호의 귀에는 숨소리가 들려야 했다. 기척이 없는 산 인간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주술?’
소리가 결박당한 느낌이었다. 제법 괜찮은 수준의 주술이라 백호는 한쪽 눈썹을 올렸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감히 신의 거처에 주술이라니. 묘우는 뭘 하고 있기에 감히 궁에 주술이 걸릴 때까지 가만히 있단 말인가.
불안감이 심장을 조금씩 잠식했다. 백호는 지체하지 않고 손가락을 창문에 댔다. 사방신의 손이 닿자 그것만으로도 아주 손쉽게 주술이 풀려나왔다. 그리고 갇혀 있던 소리와 기척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우현 님! 제발!”
머릿속이 자글자글 끓어오르는 듯한 열기 속에서도 연화가 필사적으로 외쳤다. 아랫배가 타는 듯 뜨거웠다. 그녀는 허물어지는 이성 속에 우현의 가슴을 밀치고 그의 다리를 걷어찼지만 덩치 좋은 남자는 조금의 밀려남도 없이 연화의 옷을 거의 찢듯이 벗겨냈다.
“안 돼……!”
목구멍을 타고 나오는 숨마저 뜨겁다.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저항했지만 우현의 손이 곧 연화의 가느다란 손목을 잡고 뒤로 꺾었다.
“악!”
고통에 그녀가 짧게 비명을 질렀다. 곰의 신령이 히죽 웃었다. 무서울 정도로 눈에는 초점이 없었고 미소는 탐욕스러웠다.
“암컷.”
“우현 님!”
“암컷…….”
얄팍한 저고리가 힘없이 찢어졌다. 우현의 손아귀가 멍이 들 정도로 연화의 팔목을 잡았고 거의 부러질 것 같은 통증에 그녀가 이를 악물었다.
【암컷.】
곰의 신령의 눈이 흰자위 없이 새카맣게 물들어 갔다. 짐승의 본능이 신령의 이성을 이기고 앞으로 나오는 것이었다.
연화는 약으로 인해 타들어 가는 욕망 속에서도 공포에 질렸다. 이미 아래는 축축했지만 머릿속은 무서워서 굳어버렸다. 우현이 고개를 숙여 그녀의 귓가와 목덜미를 물고 핥기 시작했을 때는 완전히 잡아먹힐 것 같은 공포가 뇌를 잠식해 연화는 꼼짝도 못하고 달달 떨었다.
사내의 커다랗고 두꺼운 손이 습기에 찬 허벅지 안쪽을 가르고 들어왔다. 이미 땀과 애액에 젖어 질척한 속옷 위로 사내의 손이 덮였고 연화는 이를 악물었다. 커다란 손은 힘이 빠진 그녀의 허벅지를 한 손에 쥐고 쉽게 벌렸다.
그 때 소리 없이 창문이 열렸다. 차가운 바람이 약하게 바깥에서 흘러들어 왔다. 연화를 탐하는 데 열중한 우현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지만 연화는 정면으로 열린 창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여자는 숨을 삼켰다.
밤하늘 한가운데 백호가 있었다.
분노로 불타오르는 푸른 눈은 동공이 세로로 열렸다. 그는 소리도 내지 않고 창문을 쥐어뜯었다. 건물 전체에 걸려 있던 약한 금제가 허무할 정도로 쉽게 찢겨나갔다. 아마도 금제 주술을 건 자는 그 반동으로 대단한 충격을 받았겠지만 백호에게는 어린아이의 팔을 꺾는 것보다 쉬웠다.
“감히 신의 거처에.”
백호의 신형이 소리 없이 날아들어 와 우현의 뒤에 섰다. 살기를 느낀 곰의 신령의 눈 안에 퍼뜩 아주 약간의 이성이 돌아왔다. 그는 흐리멍텅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자신의 밑에 누워 바르작대는 사람을 보았다.
“여, 연화 님……?”
여전히 정신이 완전히 돌아온 것은 아닌 듯 어눌한 발음이었다. 욕망과 본능과 이성 사이에서 우현의 검은 눈이 방황했다.
그러나 더 시간이 없었다. 백호가 그의 뒷덜미를 잡아 뒤로 던져 버렸다.
“커헉!”
비명을 지르며 뒤로 구른 곰의 신령은 민첩하게 일어났지만 곧 자신의 앞으로 다가오는 백호를 깨달았다. 그는 멍청한 눈으로 백호와 뒤에 있는 연화를 번갈아 보았다.
지금 이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분명 부엌에 내려가 어두운 찬장을 봤던 것까지는 기억하는데, 그 이후는 전혀 모르는 일이다. 자신이 왜 지금 이 방에 있는 것인지, 연화는 거의 벗은 채로 필사적으로 이불을 둘러써 몸을 가리려 하는 것인지, 왜 백호가 저렇듯 살기등등한 얼굴로 다가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백, 백호 님.”
우현은 대번에 납작 엎드렸다. 다가오는 백호의 살기에 수조가 걸었던 주술은 단숨에 깨져 달아났다. 덜덜 떨고 있는 곰의 신령을 일으켜 목을 잡고 들어 올렸다. 백호의 머리카락이 달빛에 차갑게 빛났다.
“…….”
“백, 호 님……. 저, 쿨럭, 그, 그게…….”
“말해 봐.”
“큭, 크……헉, 저, 저는 뭐가 뭔지……. 컥!”
목을 잡힌 채 우현의 커다란 덩치가 허공에 매달렸다. 발끝이 땅에서 떨어져 흔들리자 본능적으로 그는 몸부림쳤다.
그를 들어 올린 백호의 얼굴은 마치 가면 같았다. 아무런 표정도 감정도 새어 나오지 않는 딱딱한 돌가면. 단지 전신으로 뿜어내고 있는 살기가 압도적일 뿐이었다.
우현은 바짓가랑이가 축축해지는 것을 느꼈다. 전신이 후들거렸다.
백호는 우현을 들어 올린 채 방 안을 둘러보았다. 침대에서 이불을 둘러 써 필사적으로 몸을 가리던 연화는 흔들리는 팔로 침대를 짚었다. 땀에 젖은 흰 얼굴 위로 눈물이 엉망이었다.
“백호 님…….”
그녀는 혀가 절반쯤 굳은 채로 애써 백호를 불렀다. 다리 사이는 애액이 쏟아져 질척거리고, 아랫배는 욱신거린다. 더 견딜 수가 없었다. 가슴과 유두가 간질거렸다. 게다가 그녀가 유일하게 안기고 싶은 남자가 눈앞에 있었다. 연화는 허덕이면서 백호에게 손을 내밀었다.
“백호 님.”
가느다란 손끝이 허공에서 떨렸다. 그 손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백호는 우현을 창밖으로 집어 던졌다.
가볍게 던져 버린 밖에서 쿵 소리가 났다. 명색이 신령이니 목이 부러지지야 않았을 것이다. 다만 타박상이 좀 있을지는 모르지만.
신은 느리게 연화가 앉은 침대로 걸어갔다. 여자의 눈가가 붉었다. 혀가 반들거리며 입술 사이로 내비쳤다.
“백, 호 님……. 절…… 좀 어떻게라도…….”
연화가 손을 내밀어 백호의 옷자락에 매달렸다. 그녀는 땀에 젖은 이마를 백호의 옷에 비볐다.
금수의 붉은 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