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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의 붉은 달-20화 (20/113)

20화

“취기는 전혀 없으신 모양이군요. 역시 백호 님이십니다.”

그가 감탄했다. 백호는 어깨를 으쓱했다.

“일반적인 경우와 동일하게 생각하면 곤란하지. 명색이 사방신이거늘.”

“그렇군요.”

사혈은 탄성을 냈다. 백호는 입맛을 다시며 술을 몇 잔 더 마셨다. 기이할 정도로 달고 맛있는 술이다. 쌉싸름하면서도 끝맛이 달착지근했다. 사혈은 잔을 기울이는 백호를 보며 은근하게 말했다.

“제 딸은 참으로 미인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제 자식이어서가 아니라 여기저기서 아름답다는 칭송을 한 몸에 받는 아이입니다.”

아주 노골적인 자기 자식 칭찬에 백호가 황당한 표정이 되었다. 사영을 들이밀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대놓고 빠르게 말을 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의 표정을 보고도 사혈은 뻔뻔하게 말을 이었다.

“영리하고 참하기도 합니다. 아마 그 누구라도 상대로서 마음에 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 글쎄, 나는 그대 딸과 이야기조차 나눠본 적이 없어 잘 모르겠군.”

“자 보십시오. 비파 역시 아주 잘 탄답니다.”

사혈은 의기양양하게 딸과 여인들을 향해 손짓했다. 여인들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과연 음악은 훌륭했다. 곡조는 구슬프면서도 애절해 듣기에 좋았다.

백호는 자신도 모르게 술잔을 내려놓고 음악에 집중했다. 아주 아름다운 곡조였다. 특히 연주를 끌고 가는 비파의 음색이 고와 홀릴 지경이었다.

금세 한 곡조가 끝났고 백호는 자신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 그는 새삼스럽게 사영을 다시 보았다.

“비파의 명수가 여기 숨어 있었구나.”

“황공합니다.”

사영은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입은 푸르고 검은 비단옷이 사각거리며 소리를 냈다. 사혈이 눈치를 보다가 얼른 그녀를 불러 올렸다.

“어서 와서 대작을 해드리거라. 내 술을 하지 못해 신께서 심심하시겠구나.”

“그러고 보니 그대는 한 잔도 마시지 않았군.”

“워낙 독한 술이라 주량이 강한 이가 아니면 마셔서 좋을 것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뱀의 수장이 술을 못 한다라. 재미있는 일이야.”

백호는 피식 웃었다. 긴 옷자락을 사박사박 끌며 단을 올라온 사영이 부드럽게 웃었다. 그녀의 옆으로 길게 찢어진 눈이 곱게 휘어졌다. 창백한 피부에 적당히 분을 바르고 홍조를 띄워 더할 나위 없이 고와 보였다. 그녀는 비파를 조심스럽게 곁에 내려놓았다.

“저는 술이 강하답니다. 얼마든지 신께서 마음 놓고 드셔도 되는 상대입니다.”

“그거 재미있구나.”

사영과 백호는 술잔을 나누었다. 강한 술을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홀짝 들이켜는 그녀를 보며 백호가 순수하게 감탄했다.

“나야 신의 육체니 그렇다 하더라도 네 딸은 정말 대단히 술이 강하구나.”

“그렇습니다. 보기와는 달리 아주 강인한 아이지요.”

가느다란 손목을 꺾어 술잔을 내려놓으며 사영이 웃었다.

“저는 그 누구보다도 나중까지 제정신으로 남아 있을 자신이 있답니다……. 심지어 백호 님보다도 더 말입니다.”

“호승심이 있는 게냐?”

백호는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신이 되어 다스리는 신령과 경쟁심을 불태우고 싶지는 않았다. 애초에 경쟁이 되는 상대도 아니었다. 청룡이나 주작이면 모를까, 백호는 이 육체가 본신의 힘을 극히 일부만 이용하고 있을지언정 사방신이었다. 뱀의 신령 따위와 힘을 겨룰 일이 아니었다.

“음……?”

눈앞의 사영은 아까와는 달리 대단히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그녀는 겉의 장포를 벗어 가슴을 드러낸 차림이 되었다. 매혹적인 얼굴로 웃으면서 여인은 술을 한 잔 더 마셨다. 볼이 달아올라 발그레한 얼굴이 마치 소녀 같았다.

“저는 불가능한 경쟁을 좋아한답니다. 백호 님과 함께라면 얼마든지 술을 마실 수가 있습니다. 미남을 싫어하는 여자는 없다지요.”

여인의 시선이 백호의 얼굴과 가슴을 오갔다. 자신만만하던 것과는 달리 술기운이 벌써 올라오는 모양이었다. 약간 혀가 풀린 모습이 더 귀여웠다. 그녀는 술을 한 잔 더 마셨다.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둘의 분위기를 보던 사혈이 조용히 다른 곳으로 물러났다. 아버지가 사라지는 모습에 관심도 두지 않고 사영은 백호만을 주시하며 입술을 핥았다.

“가까이서 뵌 것은 처음인데 멀리서보다 더 아름다우십니다. 이토록 눈부신 백발이라니.”

사영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밑에 늘어진 백호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은으로 짜서 만든 것 같기도 했고,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쌓아올려 만든 것 같기도 한 머리카락이었다.

연회장 안 음악은 은은했다. 어두운 조명 아래 모두가 자신들의 자리에서 술을 즐기고 있었다. 무희들도 모두 자리로 돌아가 있어 사영과 백호가 있는 자리는 한적했다.

얇은 막을 내려놓은 자리에 촛불과 등잔의 붉은 불빛이 은은하게 비추어 들어왔다. 빛이 사영의 좁고 날카로운 얼굴을 부드럽게 만들었다.

“항상 사모해 왔습니다.”

사영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녀는 올라오는 술기운 때문에 발그레해진 볼을 양손으로 눌렀다. 백호는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혀에 꿀이 발렸구나. 아첨이 수준급이야.”

“혀에 꿀을 바른 것은 맞습니다. 백호 님을 뫼시기 위함이지요.”

뱀의 여인이 웃었다. 그녀는 유혹적으로 붉은 입술을 벌렸다. 안에서 갈라진 작은 혀가 보였다.

“맛을 보시렵니까?”

그녀는 상 위로 상체를 기댔다. 움직임이 없는 백호에게 입을 맞추기 위해 사영이 느리게 그의 몸 쪽으로 자신을 기울였다. 둘의 입술이 맞닿으려던 순간 백호는 사영의 입술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백호 님?”

“재미있구나, 재미있어.”

그는 사영의 허리를 잡아채서 자신의 밑에 눌렀다. 얇은 막이 흔들렸다. 밖에서는 무슨 일인지 보아도 모를 것이다.

“아…….”

자신의 허리를 감싼 백호의 손을 느끼며 사영은 수줍게 눈을 내리깔았다. 입맞춤을 받기 위해 그녀는 조심히 입술을 열었다.

안에 아무것도 입지 않은 얇은 치마 위로 백호의 단단한 육체가 여과 없이 느껴졌다. 뜨겁고, 탄탄하다. 그녀는 홍조를 띄웠다. 심장이 두근거렸고 기대감에 찬 육체는 그를 향해 열릴 준비를 했다. 미리 깨끗하고 부드럽게 해놨던 아래의 입구가 지끈거릴 정도로 기대감에 차 있었다.

하지만 곧 다가온 것은 입술로 향하지 않았다. 백호는 손가락 두 개를 들어 사영의 목덜미 위에 가볍게 올려놓았다.

“누가 이렇게 깜찍한 짓을 벌였지?”

“백, 백호 님?”

사영은 놀라서 말을 더듬었다. 백호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사영의 경동맥을 가볍게 두드렸다.

“조심하거라, 내 손가락이 잘못 빗나가면 여길 가를 수도 있으니.”

낯색 하나 변하지 않고 끔찍한 소리를 하는 백호는 현실감이 없었다. 머리끝부터 찬물을 끼얹은 것 같은 기분에 사영은 꼼짝도 하지 못했다.

“백……호 님, 저는 그저.”

“항상 사모해 왔다라……. 날 네가 언제 보았다고 사모했느냐, 말 그대로 가까이서 본 것은 오늘이 처음이거늘.”

백호는 피식 웃었다. 아까부터 눈치는 채고 있었는데 하는 짓이 깜찍해서 그냥 두었더니 갈수록 가관이었다.

“저, 저는…… 먼 발치에서 한 번 뵙고 너무나 아름다우셔서.”

“그러하냐? 그래서 이런 자리를 마련했구나. 술 안에는 미약을 넣고, 연회장에는 혼향을 풀고, 네 몸에는 향유를 바르고 말이야. 아, 비파로 연주한 곡에는 음공을 담았더구나. 그 재주를 다른 데 쓰면 좋았을 것을.”

전부 알고 있었다. 사영은 입술을 짓씹었다.

아비인 사혈은 용이 되기 직전인 이무기였고 그가 알아챌 수 없는 미약과 혼향이라 백호 역시 당연히 모를 줄 알았다. 사혈은 너무 당연하게 백호가 알아챌 수 없다고 단언했다. 그를 유혹해 술 한 잔을 먹이면 그때 일은 모두 끝난다고.

그러나 용이 못 된 이무기와 사방신의 격은 차원이 다르다. 사혈은 자신이 그들과 동등하다고 생각했지만 틀린 생각이었다. 백호는 이무기의 고약한 생각이 손바닥 보듯 훤히 보여 짜증이 났다.

백호의 푸른 눈이 어슴푸레한 속에서도 휘황하게 빛났다. 먹이 사냥 직전의 맹수 같은 눈이었다. 그는 작게 으르렁거렸다.

“술맛이 괜찮기에 앉아 있었더니 감히 이런 짓을 벌이고……. 사혈은 이런 짓으로 제 딸을 팔아먹으려는 것인가.”

“그, 그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저 제가…… 제가 백호 님을 사모하여 아버지께 조른 일이라.”

“그래, 그렇게 말하겠지.”

백호는 짜증스럽게 말했다. 그는 사혈의 성격을 알았다. 그는 자신의 자식도 얼마든지 끊어낼 수 있는 비정한 자였다. 수십 명에 이르는 자식들을 전부 기른 것도 이용하기 위해서였다는 말이 돌 정도였다.

그는 사영을 버려두고 일어섰다. 바닥에 쓰러져서 일어나지 못하는 뱀의 여인은 안쓰러워 보였다. 연화에 비하면 키가 큰 편이었으나 어쩐지 연화가 겹쳐 보였다.

“내가 눈치챈 것은 비밀로 해주지. 아니라면 내가 아니라 네 아비가 먼저 널 없앨 테니까.”

백호는 혀를 차고 자리를 떴다.

그가 막 밖으로 나오자 사혈의 시선이 그의 걸음을 주시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이 정도 어울려줬으면 성의는 충분히 보여줬다. 그는 크게 사혈을 불렀다.

“사혈, 나는 이제 가겠다. 술을 가져와라.”

“……아. 예, 예. 물론이지요.”

실패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사혈이 재빠르게 준비해 둔 술 세 병을 가져왔다. 허리춤에 그것을 차고 그는 가타부타 다른 말 없이 자리를 떴다.

사혈은 급히 백호의 자리였던 곳으로 뛰어들어 갔다. 자리에 쓰러져 있던 사영이 일어나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겉옷을 입고 있었다. 눈매가 붉었다.

“뭐냐, 실패한 게냐?”

“……네.”

“대체 왜!”

사혈은 소리를 질렀다.

금수의 붉은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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