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각인
“저기 봐, 셀레나야.”
누군가의 말에 다들 그가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한 여자가 지나가고 있었다. 긴 청회색 머리칼을 단정히 묶은 그녀는 감탄이 절로 튀어나올 정도로 빼어난 미인이었다.
“어딜 가는 걸까?”
“바구니 들고 있는 거 안 보이냐? 보나 마나 할멈이 시켜서 약초를 캐러 가는 거겠지.”
“그 할멈은 왜 맨날 셀레나한테만 시키냐? 저 고운 손 다치게.”
“할멈은 나이 들어서 거동이 힘들다잖아.”
“힘들긴 무슨. 저번에 보니까 잘만 돌아다니던데.”
“나도 봤어. 정말 잘 돌아다니더라.”
“그러니까. 내가 보기에는 그냥 핑계야, 핑계.”
말을 마친 청년이 혀를 차며 검지를 좌우로 흔들었다.
“하아, 그건 그렇고 셀레나를 도와주고 싶다. 내가 대신 약초를 캐다 주면 좋아하려나?”
“야야, 아서라. 5년 전에 아서 놈 사건 생각 안 나냐?”
“아서 놈 사건? 그건 뭐야?”
“이 자식, 완전 까먹었나 보네. 5년 전에 아서 놈이 셀레나 대신 약초를 캐 주겠다고 도와줬다가 할멈한테 걸렸던 거 기억 안 나냐?”
“아, 그…… 셀레나의 뺨을 때리고 머리칼을 잘라 버렸던 거 말하는 거야?”
“그래, 그거.”
“그 사건은 지금 생각해도 웃겨. 때릴 거면 아서 놈이나 때리지, 왜 셀레나를 때리고 셀레나의 머리칼을 잘라 버리냐? 도와주는 게 뭐 어때서?”
“아서 놈은 촌장님 아들이잖아. 아무리 그 할멈이 셀레나를 끼고 산다지만 촌장 아들한테까지 손찌검을 할 수 있겠냐? 절대 못 하지.”
“음, 하긴. 아무리 할멈이라도 여기서 쫓겨나고 싶진 않을 테니까.”
그 자리에 있는 청년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이 사건의 핵심은 셀레나를 도와준 사람이 남자였다는 거지. 아마 아서 놈이 아니라 여자애가 도와준 거였으면 안 때렸을걸?”
“여자애들이 도와줬으면 안 때렸을 거라고? 왜?”
“셀레나의 엄마가 출신도 모를 용병 나부랭이인가 뭔가 따라서 집을 나갔었다잖아. 그리고 돌아와서 낳은 게 셀레나이고. 물론 셀레나의 엄마야 셀레나를 낳고 죽었다지만, 그 핏줄이 어디 갈까 싶은 거겠지. 사실 난 할멈의 마음도 이해는 돼.”
“이해는 되지만 이해와 받아들이는 건 별개지. 그 할망구는 정도가 심하다고.”
“그건 나도 동의하는 바지만, 어쨌든 도와줄 생각하지 마라. 들키면 골치 아프다. 우린 아서 놈처럼 촌장님 아들도 아니고 수도로 도망갈 형편도 안 되니까.”
“넌 말을 해도 꼭…….”
남자는 제게 조언을 해 주는 친구의 말이 제법 밉상처럼 느껴졌지만 차마 반박을 할 수는 없었다. 모두 사실이었으므로. 그러나 수긍하는 분위기와 달리 셀레나를 보는 눈들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셀레나는 바구니를 들고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할머니가 내 준 할당량을 채우려면 오늘도 부지런히 약초를 캐야 했다.
그녀가 주로 캐는 약초들은 희귀성이 꽤 있는 약초들로, 보통 산속 깊은 곳에 났기 때문에 꽤 걸어야 했다. 길을 따라 산을 오르던 셀레나는 익숙한 흰색 꽃을 발견하고는 재빨리 달려갔다.
‘와, 벨라 꽃이잖아?’
벨라 꽃은 상처를 치료할 때 쓰이는 약초였다. 들려오는 이야기에는 치료 마법을 쓸 줄 아는 사람은 스스로 마나를 운용하여 상처를 치료한다고 하지만, 치료 마법은 정말로 고위 계열에 속했기 때문에 이를 쓸 줄 아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 때문에 웬만한 고위 귀족은 물론 평민들까지, 의사에게 약초로 만든 약을 처방받고는 했는데, 벨라 꽃은 그 약초들 중에서도 가장 비싼 값을 자랑하는 약초였다.
‘오늘은 적어도 할머니께 혼나지 않겠어.’
셀레나는 싱글벙글 웃으며 벨라 꽃을 땄다. 벨라 꽃은 이용 부위가 꽃잎이기 때문에 뿌리째 뽑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항상 들고 다니던 손수건에 벨라 꽃잎을 곱게 접어 넣은 셀레나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벨라 꽃 덕분일까, 오늘따라 산을 오르는 걸음이 유난히 가벼웠다.
산 중턱쯤, 평소 작업하는 곳에 다다른 셀레나는 약초를 캐기 시작했다. 식물로부터 한 뼘쯤 떨어진 위치를 살살 호미질을 해 뿌리째 캐낸 다음, 뿌리에 얽혀 있는 흙덩이들을 조심스레 털어 내고 바구니에 넣으면 된다.
열심히 약초를 캐내고 있는데 돌연,
쿵―!
묵직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놀란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호미로 제 손가락을 찍었다.
“아얏!”
재빨리 손가락을 확인해 보니 다행히 상처가 나진 않았다.
‘다행이야. 손가락에 상처가 났다면 생활이 어려울 뻔했어.’
만약 조금만 더 스쳤다면, 약초를 캐는 건 물론, 약초를 삶아 약을 만드는 것도, 씻는 것도 어려워졌을 것이다. 손에 상처가 없다는 걸 확인한 그녀는 조금 전, 자신을 놀라게 만든 소리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런데 아까 그 소리는 뭐였을까? 이 근방에서 났던 것 같은데…… 한 번 찾아볼까?’
셀레나는 바구니와 호미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소리의 근원지를 찾는 건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이상하다. 분명 이쪽에서 났던 것 같은데.’
주위를 둘러보지만 보이는 건 풀과 나무뿐이었다. 아까처럼 큰 소리가 들릴 정도면 분명 무언가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셀레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잘못 들은 걸까?’
그녀가 막 뒤돌아서려고 할 때, 가까이서 ‘그으으…….’하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셀레나는 흠칫, 놀랐다. 마치 짐승의 소리 같았다. 그녀는 허겁지겁 발걸음을 뗐다. 짐승이 자신의 존재를 눈치채기 전에 도망가야 했다.
발걸음을 막 떼었을 때, 셀레나는 문득 아까 들었던 짐승의 소리가 옅은 신음 소리에 가까웠다는 걸 상기했다.
불현듯 이 주위에는 산짐승이 많아 덫을 설치해 두었다던 마을 사냥꾼의 말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고통에 들어찬 소리였지. 혹시 덫에 걸려서 다친 게 아닐까? 덫에 걸린 걸 그대로 두면 상처가 곪아 죽는다던데…….’
영영 몰랐다면 모를까, 자신이 그냥 지나쳐서 짐승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섣불리 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그래. 상처만 봐 주고 나오자. 그러면 적어도 내가 그냥 지나쳤다고 해서 죽지는 않을 거 아니야. 그 이후는 신경 쓰지 말자. 그리고 덫에 걸려 있을 테니까 내가 죽을 일은 없을 거야.’
무서웠지만 셀레나는 짐승의 정체를 확인해 보기로 했다. 아까 소리가 들려온 곳은 풀숲 너머였다. 덫에 걸려 있다 하더라도 짐승은 짐승인지라 그녀는 긴장한 얼굴로 꿀꺽, 침을 삼켰다.
조심스레 풀숲을 가로지르자 그녀의 시야에 은빛의 무언가가 가득 찼다.
“느, 늑대?”
너무 놀란 나머지 입 밖으로 절로 소리가 튀어나왔다. 자신이 육성으로 말했음을 깨달은 셀레나는 재빨리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자신의 소리를 들은 늑대가 눈을 뜨고 자신을 공격할지도 몰랐다.
셀레나의 예상대로 늑대가 눈을 떴다. 눈을 뜬 늑대가 이를 드러내며 한차례 울었다.
그르릉―.
그 낮은 하울링에서 느껴지는 위압감에 셀레나는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다. 머릿속이 그저 새하얗다. 사고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 머릿속으로 딱 한 마디 문장만이 생각났다.
‘죽을 거야.’
바로 자신이 늑대에게 죽게 될 운명이란 것. 어떠한 행동도 못한 채 늑대만을 바라보고 있는데 순간, 셀레나를 노려보며 경고조로 울어 대던 늑대의 울음이 갈라졌다.
단순히 갈라진 게 아니었다. 끼잉, 끼잉거리는 게 흡사 고통을 호소하는 느낌이었다. 셀레나의 시야로 늑대의 눈이 아닌 늑대의 상처가 들어왔다.
“화살?”
늑대의 허벅지에는 화살이 박혀 있었다. 화살이 박힌 자리를 중심으로 핏자국으로 보이는 게 길게 굳어 있었는데 보기만 해도 굉장히 아파 보였다. 덫에 걸린 것보다는 나았지만 그래도 화살을 맞았다니…….
‘많이 아프겠다.’
자신의 몸에 화살이 박힌 것도 아닌데 그녀는 자신이 아픈 것처럼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선뜻 손을 뻗는 건 어려웠다. 그녀의 앞에 있는 건 늑대였으므로.
비록 그 늑대는 지금 다친 상태였지만, 혹여나 그녀가 상처를 건드림으로써 늑대가 흥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쩐지 그냥 지나쳐 갈 수가 없었다. 이전에 그녀가 길렀던 강아지, ‘루리’가 생각났다. 루리를 처음 발견했을 때도 아이들에게 돌을 맞아 상처 입은 채 끼잉끼잉 울고 있었고, 셀레나는 그런 루리를 치료해 주고 할머니 몰래 길렀다.
얼마 안 가 할머니께 들켜 버릴 수밖에 없었지만, 그때 그녀가 길렀던 강아지 역시 늑대와 흡사한 색의 털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강아지인 루리는 흰 털을 가지고 있었고 그녀의 눈앞에 있는 늑대는 은색 털을 가지고 있었으며 덩치도 강아지보다 훨씬 컸지만, 다쳤다는 사실 때문인지 루리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그래. 지금 저 늑대는 다쳤잖아. 다친 늑대보다는 내가 더 빠를 거야. 그리고 상처만 살짝 보면 괜찮겠지.’
그렇게 결심한 셀레나는 조심스레 늑대에게 다가갔다. 가까이서 본 늑대는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컸다.
그르릉, 늑대가 한차례 경고를 했지만 연이어 끼잉, 소리를 내는 모습에 셀레나는 늑대에게서 느꼈던 위압감과 위협을 모두 잊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이미 늑대와 강아지가 동일시되어 있었다.
“쉬이, 착하지.”
그르렁―.
“괜찮아. 난 화살을 빼 주려는 거야. 널 해치려는 마음은 없어.”
늑대가 그르렁거리는 걸 멈추었다. 그걸 허락으로 받아들인 셀레나는 천천히 손을 뻗어 화살대를 붙잡았다. 일순 움찔, 늑대의 근육이 경직되는 게 느껴졌다.
그 움찔거림에 셀레나는 화살대를 잡고 있던 손을 내려놓았다. 생각해 보니 화살을 그냥 빼면 상처가 더 벌어져 아플 거란 생각이 든 것이다.
‘칼을 들고 와서 상처를 짼 다음에 꺼내는 게 나을까?’
셀레나는 화살을 보며 고민에 빠졌다. 화살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이전에 스쳐 가듯 들었던 용병의 말이 떠올랐다.
‘화살의 끝이 왜 삼각형 모양인 줄 알아? 그건 말이야, 단순히 들어가기 쉽게 만든 게 아니라 빼기 힘들라고 그런 거야. 화살을 처음 만든 놈이 누군지는 몰라도 사상이 참 독한 놈이지.’
용병의 말을 떠올리니 더욱 그냥 뽑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안. 그냥 뽑기에는 네가 너무 아플 것 같아서…… 내일 칼을 들고 와서 뽑아 줄게. 대신에 진통제 효과가 있는 약초를 발라 줄게.”
그 말을 하며 셀레나는 바구니를 뒤졌다. 그리고 그녀는 곧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평소에는 많기만 하던, 상처에 좋은 효능을 가진 약초가 한 뿌리도 보이지 않았다.
‘이건 해열 작용을 하는 약초고…… 이건 간에 좋은 약초고…….’
바구니를 깊숙이 뒤져 봐도 마찬가지였다. 이상하게 오늘따라 진통에 좋은 약초가 하나도 없었다. 바구니에 있는 마지막 약초까지 확인한 셀레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혹여나 진통제 효과를 가진 약초를 발견할까,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주위에도 약초는 없었다.
‘어떡하지…….’
셀레나는 힘겨운 숨을 내쉬는 늑대를 바라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발만 동동 굴리고 있는데 돌연 그녀의 머릿속으로 벨라 꽃이 떠올랐다. 셀레나는 나지막이 감탄을 터트리며 품속에 손을 넣었다. 무심코 벨라 꽃을 꺼내려던 그녀의 손이 그대로 멈췄다.
벨라 꽃은 귀한 꽃이었다. 즉시 진통을 멎게 해 줬으며, 수요에 비해 공급이 딸려 더욱이 비싼 값을 치르는 약초 중 하나였다. 때문에 그녀가 아까 산을 오르다가 벨라 꽃을 발견했을 때 그리 기뻐했던 것이다.
이 꽃 하나만 가져가도 그녀의 할머니가 요구하는 하루치 금액을 맞출 수 있고 할머니에게 야단을 듣지 않아도 되니까.
‘그냥 새로이 약초를 찾아서 발라 줄까? 굳이 벨라 꽃을 쓸 필요는 없잖아.’
셀레나가 그렇게 생각하고 벨라 꽃을 그대로 품에 넣어 두려는데 귓가로 ‘끼잉’하는 늑대의 고통 어린 울음이 들려왔다. 아까보다 한차례 진해진 울음에 셀레나는 자신도 모르게 벨라 꽃을 꺼내고 있었다.
‘그래. 늑대가 아파하잖아. 할머니께 야단을 맞는 거야, 하루 이틀이 아니잖아?’
되뇌다시피 스스로에게 말하며 셀레나는 벨라 꽃을 입 안에 넣고 씹었다. 벨라 꽃 특유의 쓴 향기가 입 안을 가득 메웠지만 셀레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꽃을 씹었다.
그녀의 이 아래서 무른 꽃잎이 짓이겨지며 타액과 꽃즙이 섞여 들어 곧 덩어리가 되었다.
벨라 꽃을 뱉어 내자 손바닥의 절반을 차지하는 덩어리가 손 위에 있었다. 셀레나는 덩어리를 들어 늑대의 허벅지에 조심스레 바르기 시작했다.
얼마 안 가 늑대의 신음이 줄어들었다. 셀레나는 약초의 위명대로라고 생각하며 늑대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아까보다 늑대의 표정이 편해 보였다.
“어때, 이제 안 아프지?”
셀레나가 꽃을 다 발라 주고서는 늑대에게 물었다. 늑대는 아무런 말없이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빛에 반사된 황금빛 눈동자와 그 가운데에 박혀 있는 검은색 동공. 그 황금색 눈동자에 셀레나는 순간적으로 이질감을 느꼈다.
어쩐지 가슴이 빨리 뛰는 것 같기도 했다. 그 낯선 감각에 셀레나는 자신도 모르게 늑대의 눈을 피했다. 그녀는 다소 부산스레 바구니를 챙기며 일어났다.
“그럼 내일 다시 올게.”
늑대에게 작별을 고한 셀레나가 뒤돌아섰고, 그녀는 본래 약초를 캐던 자리로 가서 약초를 캐다가 산을 내려갔다.
‘결국 할당량을 채우지 못했어.’
셀레나는 우울한 얼굴로 바구니를 바라보았다. 바구니에는 약초가 수북했지만 약초의 개수보다는 약초가 지닌 값어치가 중요했던 까닭에 셀레나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도 화내시겠지.’
기실 셀레나에게 주어진 할당량은 애초에 그녀, 혼자 채울 수 있는 양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셀레나는 그녀가 할 수 있는 한, 양을 채웠다. 오늘은 운 좋게 벨라 꽃을 발견해 할당량을 채우고 할머니께 혼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벨라 꽃을 써 버렸으니…….
‘그래도 후회는 하지 않아.’
아마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 하더라도 또 자신은 늑대에게 벨라 꽃을 주었을 터였다. 자신은 할머니께 야단을 맞으면 그만이지만, 늑대는 계속 고통에 시달려야 할 테니까.
그렇게 스스로를 되뇐 셀레나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녀는 예상대로 할머니께 혼이 났다. 그녀의 할머니는 ‘열심히 하지 않은 것에게는 빵 하나도 아깝지.’라며 딱딱한 빵 반 조각을 그녀의 저녁으로 주었다.
하루 종일 고된 노동을 하고 돌아왔는데 빵 반 조각으로 배가 채워질 리가 없었다. 셀레나는 주린 배를 움켜쥐었다. 그러나 배를 아무리 눌러도 꼬르륵, 배에서 소리가 새어 나왔다.
‘내가 열심히 하지 않아서야.’
셀레나는 잠에 들며 내일은 더 열심히 약초를 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불현듯 늑대와의 약속이 떠올랐다.
‘참, 칼을 챙겨야지.’
침대에 누웠던 그녀는 도로 자리에서 일어나 칼을 찾았다. 명색이 약초 집인지라 그녀의 집에는 의료용 기구도 몇 개 있었다.
할머니 몰래 서랍에서 얇은 칼을 꺼낸 셀레나는 촛불에 칼을 달구고 칼을 식혔다. 식힌 칼을 손수건으로 감싼 그녀는 혹여나 잊을까, 내일 입을 옷에 칼과 지혈제를 넣어 둔 다음 잠에 들었다.
이튿날, 그녀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바구니와 호미를 들고 산을 올랐다. 그리고 그녀는 어제의 기억을 되짚으며 늑대를 찾았다.
‘분명 이쯤이었는데…….’
셀레나는 수풀을 헤치며 늑대를 찾았고, 곧 그녀가 찾던 게 시야로 들어왔다. 햇빛에 반짝이는 예쁜 은빛 털과 허벅지에 꽂혀 있는 화살. 어제 본 늑대가 맞았다.
늑대는 눈을 뜬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금색 눈이 어쩐지 오묘하게 느껴져 셀레나는 침을 한 번 삼키고는 조심스레 품속에서 칼을 꺼냈다.
“어제 한 약속을 지키러 왔어. 화살을 빼 준다고 약속했잖아.”
늑대는 별 움직임이 없었다. 그저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셀레나는 늑대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늑대의 허벅지를 잡고는 조심스레 칼을 대었다. 그러나 막상 살을 째려니 조금 두려운 느낌이 들었다.
“많이 아플 거야. 최대한 빨리 끝내 볼게.”
셀레나는 말을 끝낸 다음,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칼을 쥔 손이 덜덜 떨렸지만 그녀는 손을 움직였다. 칼은 생각 외로 부드럽게 들어갔고, 그녀가 째는 부위 위로 피가 나오기 시작했다.
붉은 피를 보자 덜컥, 겁이 났지만 셀레나는 자신이 망설이면 늑대가 더 아플 거란 생각으로 과감하게 손을 놀렸다. 십자형으로 상처를 짼 그녀가 그 속에서 화살을 꺼냈고, 그 위로 지혈제를 뿌렸다. 칼을 감쌌던 손수건을 찢어 상처를 돌돌 매자 제법 치료한 느낌이 났다.
문제는 지혈이었다. 상처가 워낙에 컸던 탓에 지혈이 잘될까, 걱정이 들었던 것이다. 그녀의 걱정과 달리 피는 금방 멎었다.
“상처를 치료했으니까 이제 금방 나을 거야.”
셀레나가 손을 거두며 말했다. 쓴 물품들을 차곡차곡 챙기는데 자신이 늑대에게서 빼낸 화살이 눈에 보였다. 늑대에게 박혀 있을 때는 몰랐으나 화살은 사냥꾼들이 쓰는 화살과는 다른 모양새였다.
보통 화살은 화살촉이 매끈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이 화살촉은 마치 일부러 조각을 해 둔 것처럼 화살촉에 홈이 파져 있었다.
‘일부러 조각한 것 같은데…… 뭘 형상화한 거지?’
셀레나가 자세히 보기 위해 화살을 향해 손을 뻗었을 때, 돌연 늑대가 그르렁, 울었다. 그 울음에 셀레나가 뻗었던 손을 거두며 늑대를 바라보았다.
“혹시 이 화살을 만지지 말라는 거야?”
그녀의 물음에 늑대가 울음을 멈추었다. 셀레나는 살짝 놀란 듯 늑대를 바라보았다.
‘말을 알아들은 걸까?’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어쩐지 셀레나는 늑대가 말을 알아들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일단은 늑대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어서 좋을 게 없었기 때문에 셀레나는 화살을 내버려 두기로 했다.
“알았어. 이건 그냥 둘게.”
대신 그녀는 바구니에서 작은 그릇과 물병을 꺼냈다.
“그리고 이건 물이야. 목마를 것 같아서 가져왔어.”
셀레나는 병뚜껑을 열고 그릇에 물을 채운 다음, 물그릇을 늑대의 입 쪽으로 밀었다.
“마셔. 그리고 기왕이면 먹을 것도 갖고 오고 싶었는데 먹을 게 없어서…… 미안해. 다음에 기회가 되면 꼭 가져올게.”
말을 마친 셀레나가 손을 뻗어 늑대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었다가 흠칫, 몸을 떨었다.
“그, 그럼 내일 또 올게.”
그녀는 당황함이 역력한 얼굴로 바구니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늑대…… 아니, 라슬로는 멀어져 가는 셀레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단정히 묶은 청회색 머리칼이 허리 근처에서 찰랑였다. 그의 귓가로 방금 전 셀레나가 했던 말이 선연하게 맴돌았다.
‘내일 또 올게.’
셀레나의 말을 곱씹던 라슬로는 곧 조소를 흘리며 처음 여자와의 만남을 기억해 냈다.
있는 마력을 모두 쥐어짜 내어 순간 이동을 한 그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좌표를 계산하고 이동한 게 아니라 갑자기 떠오른 좌표를 찍었던 까닭에 그가 있는 곳이 어딘지는 모르겠으나 오히려 모르는 편이 그에게는 좋았다.
수식은 정교하고 규칙적인 것보다 불규칙한 수식이어야 해독이 어려워 역추적을 피하기 쉬웠다. 당분간은 안전하겠지, 안심하며 눈을 감았는데 갑작스레 들려온 인기척에 놀라 순간적으로 그르릉, 울음이 흘러 나갔다.
그러나 그의 시야로 들어온 건 그가 생각했던 추격대가 아니었다. 건드리면 툭, 하고 쓰러질 것처럼 잔뜩 경직된 상태의 여자가 보였다.
추격대가 아니란 사실에 긴장이 풀림과 동시에 잊고 있었던 고통이 순간적으로 느껴졌다. 대비하지 못한 고통에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무의식적으로 신음을 흘렸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귓가에 들려온 건 ‘으윽.’이 아닌 ‘끼잉.’이었다. 흡사 다친 강아지가 비를 맞고 낑낑거리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의.
이번에는 라슬로의 몸이 굳었다. 아까 여자가 몸을 굳혔던 것처럼. 반대로 여자는 라슬로의 울음에 긴장이 풀렸는지 눈에 띄도록 안심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동정 어린 눈빛.
동정?
낯선 시선에 당황도 잠시, 여자의 시선이 제 허벅지 쪽으로 향하더니 화살을 보고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러더니 저가 더 아픈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리더니 자신에게 다가왔다.
그 모습을 보며 라슬로는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경고의 뜻으로 그르릉, 낮은 소리를 내 보지만 고통에 끼잉, 옅은 울음이 나왔다.
“쉬이, 착하지.”
라슬로는 그의 귀를 의심했다. 뭐? ‘쉬이, 착하지?’라고? 연이어 화살을 빼 주겠다는 말이 들려오긴 했지만 처음의 말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비록 지금 자신이 인간이 아닌 금수의 형상을 띠고 있다고는 하지만 명색이 인간이었고, 왕으로 추대 받던 자였다. 그런데 흡사 강아지에게나 할 법한 저 말이라니.
충격을 받은 그는 셀레나를 막을 수 없었다. 그는 셀레나가 하는 행동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그녀의 손이 상처 위에 닿는 순간, 고통이 사라졌다. 동시에 몸에 힘이 도는 기분을 느꼈지만 정신적 충격이 커서 그는 그 변화를 인지하지 못했다.
라슬로는 셀레나가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갈 때까지 아무런 짓도 할 수 없었고 한참 후에야 그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동시에 그는 자신답지 않은 행동에 기함했다. 자신은 신원을 모르는 여자가 제 몸을 손대게 가만히 있었던 것으로도 모자라, 자신의 모습을 본 여자가 그냥 돌아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미쳤군.’
그가 자조했다. 아무리 충격을 먹었다고는 하나 이렇게 맥없이 있다니.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러다 문득, 그는 자신의 마나가 요동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갖고 있던 마나를 바닥까지 쥐어짜 냈던 까닭에 적어도 일주일은 마나를 구경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벌써 마나가 차다니.
비록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몇 시간 되지도 않았는데 마나가 찼다는 것 자체가 기적에 가까웠다. 라슬로는 돌연 마나가 차오른 원인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셀레나가 그 원인이란 걸 깨달았다.
사실 그가 그렇게 결론을 내리는 건 당연했다. 셀레나가 다녀가기 전과 다녀가기 후의 차이가 극명했으니까.
라슬로는 셀레나의 정체를 추측했다.
‘마법사인가?’
그러나 그는 곧 고개를 저었다. 행색으로 판단하고 싶진 않았지만 여자는 마법사라고 보기에는 행색이 너무 비루했다. 흔치 않은 만큼 마법사는 그에 대한 대우를 돈독히 받았기 때문이다.
비단 행색뿐만이 아니다. 그녀가 마법사가 아닌 이유가 결정적으로 있었다. 바로 아무리 마법사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마나를 아무런 반발 없이 타인의 몸에 넣거나, 타인의 마나를 회복시킬 수는 없다는 것.
체내에 흐르는 마나는 타인에게 가면 언제나 반발을 일으키기 마련이었고, 남의 마나를 억지로 채울 수 없었다. 한 번 소모된 마나는 자연적으로 회복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이런 까닭에 세간에서는 남의 몸에 아무런 반발 없이 마나를 넣을 수 있는 경우는 없다고 말하고는 했다. 라슬로 역시 그렇게 믿고 있었다.
아니지. 예외가 하나 있었다. 바로 신수, 일카이의 피를 짙게 물려받아 현신이 가능한 이들에게만 나타난다는 ‘각인’의 상대. 그것만큼은 예외였다.
‘설마, 그 여자가 각인의 상대인 건가.’
라슬로는 제 생각이 제법 타당하다고 생각했다. 그 여자가 자신의 각인의 상대였기 때문에 신원도 모르는 여자의 손길을 받아들이고 보내 준 것이리라. 마나가 회복된 것 역시 각인의 상대인 여자가 자신을 만졌기 때문이라 생각하면 맞았다.
제일 확실한 확인 방법은 여자의 몸 어딘가에 새겨져 있을 각인의 문양을 확인하거나, 제 등에 있는 각인 색의 변화 여부를 확인하는 게 제일 확실했지만 표면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들뿐이므로 지금 당장은 확인이 불가능했다.
‘만일 그 여자가 각인의 상대라면…….’
마나가 회복될 때까지는 살려 두다가 이곳을 떠나기 전에 죽일 것이다. 각인의 상대가 없을 때도 어서 각인의 상대를 만들어 오라는 둥, 각인의 상대만 있다면 폐하께서 이리 고생을 할 일이 없을 텐데, 와 같은 말을 하던 보좌관이다.
그가 자신에게 각인의 상대가 생겼다는 걸 알게 되면 어서 왕비로 맞이하라고 야단법석을 떨 게 분명했다.
그러나 모르는 여자를 ‘각인의 상대’라는 이유만으로 왕비로 맞이하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가 그의 목에 칼을 겨눌 줄 누가 안단 말인가.
비록 어미는 달라도 아비는 같은 이복동생마저 언제나 저를 못 죽여 안달이 났고, 자신이 왕으로 즉위하자마자 자살한 새어머니마저 제 남편을 죽이고 싶어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죽일 것이다. 그에게 왕비란 있을 수 없는 존재였다. 그게 설령 신수, 일카이의 힘을 더욱 강화시켜 줄 각인의 존재라고 할지라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보좌관 역시 이미 죽은 이를 데려오라고 하진 못할 것이다.
‘우선 마나가 회복될 때까지 기다리다가 여자를 죽인 다음, 보좌관에게 연락을 하고 바로 여길 떠야겠군.’
생각을 정리한 라슬로는 셀레나를 기다렸다. 그리고 여자는 자신이 예상했던 대로 이튿날, 그를 찾아왔다. 화살을 빼 주겠노라며 칼을 꺼낸 여자는 손을 덜덜 떨면서도 기어이 화살을 빼 주고 갔다.
그것도 모자라 그에게 물그릇까지 내밀었다. 제 딴에는 라슬로의 목이 마를 것 같아 가져온 것 같았지만 신수의 피를 물려받은 그는 굳이 음식을 섭취하지 않아도 괜찮았던 까닭에 감동보다는 당혹감이 먼저였다.
이건 뭐하는 건가, 싶어 여자를 바라보니 여자가 웃으며 제게 손을 뻗었다. 그러더니 그의 머리를 쓰다듬는 게 아닌가. 그 접촉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동시에 기분이 나빠졌다.
‘완전 개 취급이군.’
여자 역시 그걸 깨달았는지 잠시 흠칫하더니 재빨리 바구니를 들고 일어났다. 가려면 그대로 갈 것이지, 내일 또 오겠단다.
라슬로는 여자의 성정에 대해 조금 알 것 같았다. 멍청하고, 또 멍청하다. 경계와 긴장감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신수, 일카이의 피를 물려받은 그는 신수의 껍데기를 흉내 낼 수 있었고 다른 이들이 말하길, 그의 형상은 ‘늑대’와 닮아 있다고 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보통 검은색에서 금빛을 띠는 갈색 털을 가진 늑대와 달리 그는 은색 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털색과 보통의 늑대보다 덩치가 크다는 걸 제외한다면 늑대와 비슷하게 생겼으니 여자가 자신을 늑대라고 착각하는 건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늑대라고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여자는 실로 멍청했다.
‘뭐 상관없나.’
어차피 사흘 후면 죽일 여자이니.
라슬로는 가볍게 생각하며 여자가 두고 간 물그릇을 한편으로 밀었다.
* * *
셀레나는 잔뜩 긴장한 기색으로 제 앞에 있는 노파를 바라보았다. 머리가 하얗게 센 노파는 인상이 굉장히 굳세었는데, 셀레나의 할머니였다. 안경을 쓴 그녀는 셀레나가 들고 온 바구니 속의 약초들을 하나하나 꼼꼼히 살펴보더니 이내 마지막 약초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오늘은 웬일로 할당량을 채웠구나.”
그 말에 셀레나의 얼굴에 안도가 번졌다. 산을 내려오는 내내 확인을 하긴 했지만 혹여나 중도에 흘리거나, 자신이 잘못 계산한 게 있었을까,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평소에도 오늘처럼 하면 얼마나 좋으냔 말이야.”
노파가 끌끌, 혀를 차며 주방에서 딱딱한 빵을 꺼내 셀레나에게 던져 주었다. 바닥으로 떨어지기 전에 가까스로 빵을 받은 셀레나가 조심스레 빵을 감쌌다. 평소 먹던 반 토막의 빵이 아닌 제 팔뚝만큼 긴 빵이었다.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감사하다고 말한 다음, 자리를 뜨려는데 뒤에서 노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고 보니 서랍에 의료용 칼 한 개가 안 보이던데.”
셀레나의 몸이 움찔거렸다.
“혹시 못 봤니?”
“네, 못 봤어요.”
의식하기도 전에 거짓말이 절로 튀어 나갔다. 스스로가 말을 해 놓고도 놀라 순간적으로 몸을 떨었을 정도로, 의식하지 못한 거짓말.
“그래?”
셀레나는 지금이라도 저가 가져갔노라고, 늑대가 화살을 맞아 화살을 빼 주기 위해 가져갔노라고, 실토를 할까 고민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대로 거짓말을 하기로 했다.
늑대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면 자신의 할머니가 마을 사람들에게 말하고 다닐지도 몰랐다. 그리 되면 마을 사람들은 늑대를 사냥하러 갈 것이고 가뜩이나 화살을 맞아 거동을 잘 못하는 늑대는 그대로 잡혀 죽게 될 것이다.
‘늑대가 죽어?’
어쩐지 늑대가 죽는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미친 듯이 아려 왔다. 콩닥콩닥, 뛰는 가슴에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있는데 노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았다, 들어가서 쉬어라.”
그제야 셀레나는 인사를 꾸벅하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으로 들어온 그녀는 빵을 끌어안은 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별 의심을 하지 않으셔서 다행이야.’
만약 할머니가 그녀의 거짓말을 눈치챘다면 오늘 저녁은 고사하고 많이 맞았을 것이다. 그녀의 할머니는 거짓말과 남자를 끔찍이도 싫어했으므로.
‘아마도 어머니 때문이겠지.’
그녀의 어미는 젊었을 적, 한 용병과 눈이 맞았고 그대로 집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와 저를 낳고 죽었다고 한다.
어렸을 적부터 그녀의 할머니는 술을 마실 때마다 셀레나에게 ‘그 계집애가 이상하게 밖을 나다니고 거짓말을 해 댈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라고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이후, 셀레나가 노파에게 거짓말을 했을 때 ‘누가 그 어미에 그 딸년 아니랄까 봐 지어미를 쏙 빼닮았구나!’라며 불같이 화를 내고 뺨을 때렸을 정도로 노파는 거짓말을 하는 걸 끔찍이도 싫어했다.
그리고 노파는 나이를 불문하고 남자가 셀레나의 근처에 있는 것 역시 싫어했다.
5년 전, 마을 소년 중 한 명이자 촌장의 아들인 아서가 제 할당량을 채우는 걸 도와주겠다며 같이 약초를 캐다 준 걸 들켰을 때, 노파는 제 어미를 닮아 어린 것이 벌써부터 끼를 흘리고 다닌다며 그녀를 매우 때렸다.
처음 거짓말을 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맞고, 허리께까지 길렀던 머리칼이 귓바퀴 위까지 싹둑 잘려 나갔었다. 엉망으로 잘린 머리칼을 애써 숨겼으나 마을 사람들이 그녀의 사정을 알게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모두가 혀를 차며 그녀에게 손가락질을 했고, 셀레나는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다녔다. 그 사건 이후로 셀레나는 그녀를 키워 준 할머니를 애정하면서 동시에 한없이 두려워했다.
‘만약 거짓말을 했다는 걸 들켰더라면…….’
이전처럼 또 맞았을지도 몰랐다. 늑대는 남자가 아니니 머리칼이 잘릴 염려는 없을 테지만, 어릴 적 겪은 무자비한 폭력에 대한 공포는 그녀의 몸에 문신처럼 남아 있었다.
셀레나는 몸을 한차례 부르르, 떨며 빵을 탁자 위에 올려 두었다. 그리고 빵의 윗부분을 조금 떼먹은 다음, 수건으로 잘 싸서 바구니에 넣어 두었다.
‘내일, 늑대에게 줘야지. 그러고 보니 물은 마셨을까? 마셨겠지? 씻고 나서 물통에 물도 채워 놔야겠다.’
셀레나는 수건을 들고 욕실로 향했다. 미리 잘라 두어 갖다 뒀던 나무 장작을 넣고 성냥으로 불씨를 피워 물을 적당히 데운 그녀는 씻기 시작했다.
머리를 감고 몸을 씻던 그녀는 무심코 쇄골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가 얼어붙었다. 쇄골과 어깨 사이에 붉은색의 무언가가 넓게 퍼져 있었다. 반점 같기도 한 게 흡사 벌레 떼에게 물리면 이럴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게 뭐지? 혹시 벌레에 물린 건가? 아니면 약초를 캐다가 독에 중독된 걸까.’
여럿 생각이 왔다 갔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건 없었다. 셀레나는 제 목덜미를 조심스레 쓸었다. 그러나 딱히 특별한 이상 증세는 보이지 않았다.
‘열도 안 나고 붓지도 않는 걸 봐선 독은 아닌 것 같은데…… 뭘까?’
붉은 반점들의 정체에 대해 고민하던 그녀는 우선 며칠 두고 보기로 했다. 며칠 경과를 두고 보고 이상이 생기면, 그때 의사를 찾아가도 늦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며.
다음날 아침.
셀레나는 일부러 목 칼라가 있는 옷을 골라 입고 손수건을 목 주위에 두름으로써 목덜미를 꼼꼼히 가렸다.
어젯밤에 흐릿했던 반점들이 오늘은 더욱 선명해져 도저히 머리칼로 가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할머니께 말을 하고 의사를 찾아갔다 올까?’
생각도 잠시, 셀레나는 고개를 저었다. 열도 없고 붓지도 않았으며 통증도 없는 반점 때문에 오늘 하루 쉰다고 말하면 ‘계집애가 쉬려고 꾀병을 부린다.’는 말을 들으며 혼만 날 거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게다가 늑대에게 오늘도 가겠다고 말을 해 두었잖아. 약속을 지켜야 해.’
셀레나는 평소 작업하던 대로 도구들을 챙기고 집을 나섰다. 걸음을 옮기면서 그녀는 바구니 안에 있는 빵을 매만졌다.
‘늑대가 잘 먹어 줬으면 좋겠다.’
자그마한 소망을 품은 그녀는 늑대를 찾았고, 곧 그녀의 시야로 늑대의 모습이 보였다. 햇볕에 은빛으로 반짝이는 갈기가 눈부시다.
셀레나는 새삼 늑대의 위엄에 감탄하다가 이내 고개를 젓고는 늑대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다가가자 늑대가 고개를 들었다. 금색 눈동자가 그녀를 또렷이 응시한다.
순간 그녀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어쩐지 가슴 부분이 간질거렸다. 그러나 셀레나는 애써 그 느낌을 무시하며 웃었다.
“잘 잤어? 상처는 어때? 내가 살펴봐도 괜찮을까?”
말로는 허락을 구하고 있으나 그녀는 이미 늑대에게 다가가서는, 저가 어제 묶어 둔 손수건을 풀고 있었다. 곧 수건을 다 푼 셀레나가 상처를 확인하고는 작게 감탄했다.
“와, 잘 아물었다. 이대로 가면 금방 다 낫겠는데?”
셀레나는 상처를 건들이지 않는 선에서 늑대의 발을 매만지며 상처를 살펴보았다. 상처를 살피며 홀로 감탄하던 그녀는 곧 빵의 존재를 상기했다.
“참, 네게 줄 게 있어.”
말을 마친 그녀는 바구니에서 빵을 꺼내고는 ‘짠!’을 외치며 늑대에게 내밀었다.
“배고플 것 같아서 가져와 봤어. 아무것도 못 먹은 것 같아서 말이야.”
셀레나는 늑대에게 먹으라며 그의 입가에 빵을 내밀었다. 그러나 늑대는 금색 눈을 깜빡이며 그녀를 바라보다가 휙, 고개를 돌렸다.
명백한 거부의 표시였다. 당황도 잠시, 셀레나가 재차 늑대에게 빵을 권했다. 결과는 동일했다.
‘왜 안 먹는 거지? 혹시 빵을 싫어하나?’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녀는 늑대의 입 사이로 드러난 긴 송곳니를 보고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늑대는 육식 동물이었다…….
‘맙소사. 내가 지금 육식동물에게 빵을 권한 거야?’
풀밖에 먹지 않는 초식동물에게 육식을 권한 꼴이다. 부끄러움이 셀레나를 덮쳤다. 얼굴이 홧홧 타오르는 느낌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지금쯤 자신의 얼굴이 제법 붉을 거라고 생각하며 셀레나는 빵을 치웠다.
“미안, 내가 너무 나만 생각했네. 늑대가 빵을 먹을 리가 없는데…….”
바구니에 허겁지겁 빵을 치우던 그녀가 순간 움찔했다. 늑대는 육식동물이다. 그렇다는 건, 자신은 늑대에게 있어 먹잇감이라는 소리였다. 그 사실을 인지하자 등골이 오싹해졌다.
셀레나는 침착해지려고 애썼다. 그러나 쉬이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우선 늑대에게서 멀어지자.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척…… 이 될 리가 없잖아.’
절로 울상이 지어졌다. 어떻게 해야 자연스레 늑대에게서 멀어질 수 있을까, 고민하는 그녀의 시선이 바삐 움직였다. 다음 순간, 셀레나는 늑대의 옆에 있는 물그릇을 발견했다.
“어?”
자각을 하기도 전에 셀레나는 물그릇을 잡고 있었다. 물그릇에는 물이 가득 차 있었다.
“안 마셨어?”
그녀의 말에 늑대가 고개를 들었다. 셀레나는 자신이 늑대를 무서워했다는 사실도 잊은 채 물그릇을 가리켰다.
“왜 안 마셨어? 목이 안 마른 거야?”
늑대의 눈동자가 물그릇을 한 번 보고는 다시 셀레나에게로 왔다. 그러나 셀레나의 얼굴은 풀릴 줄 몰랐다.
“먹은 것도 없는데 물까지 안 먹으면 몸에 안 좋을 텐데…….”
그녀가 물그릇을 흘긋거리며 말했으나 늑대는 물그릇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그렇게 얼마나 침묵이 이어졌을까, 늑대가 슬쩍 셀레나를 흘기더니 천천히 물그릇에 입을 가져갔다. 그리고 입을 벌려 혀로 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혀가 물에 닿을 때마다 물그릇의 물이 흔들렸다.
물그릇에 고개를 처박은 채, 물을 마시던 라슬로는 불현듯 회의감을 느꼈다.
‘지금 내가 무얼 하고 있는 거지? 내가 왜 물을 마시고 있는 거지?’
그는 물을 마실 생각이 없었다. 굳이 마셔야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분명 그랬는데, 왜 자신은 물을 마시고 있는 것인가.
혀를 날름거리며 목을 축이던 라슬로는 자신이 물을 마신 게 여자가 물그릇을 가리킨 이후부터라는 걸 깨달았다. 자신도 모르게 여자의 눈치를 살살 보게 되더니, 정신을 차려 보니 물을 마시고 있었다.
‘정말 이 여자가 각인의 상대인가?’
그렇지 않고서야 이 이상함을 설명할 수 없었다. 불쾌하다. 제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는 몸이.
라슬로는 이틀 후까지 두고 볼 것도 없다고 판단했다. 지금 당장 여자를 죽여야겠다는 생각으로 고개를 든 순간, 그의 시야로 환히 웃고 있는 셀레나의 얼굴이 들어왔다.
두근―.
심장이 뛰었다. 몸 전체가 확, 하고 울리는 느낌이었다. 라슬로는 자신이 여자를 죽이려 했다는 사실도 잊은 채, 멍하니 셀레나를 바라보았다.
두근두근, 심장이 요동친다. 문양이 그려 있는 부분을 중심으로 머리, 발끝까지 고동이 전해졌다. 오직 셀레나의 얼굴만이 확대되어 시야로 들어왔다.
‘사랑스럽다.’
더할 나위 없이.
자신을 응시하는 여자의 눈과 표정, 몸짓이 사랑스러웠다. 하다못해 바람에 살짝 흩날리는 머리칼조차 사랑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여자의 어느 것 하나 사랑스럽지 않은 것이 없었다.
‘가지고 싶다.’
당장 제 품에 가두고 싶다. 제 아래에 깔리게 하여 잔뜩 범하고 싶다. 얼굴과 목이 하야니 분명 옷에 가려진 몸 역시 새하얄 것이다.
그 하얀 몸을 범하고 또 범해서 자신의 흔적으로 여자를 잔뜩 더럽히고 싶었다. 제 아래에 깔린 여자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여자가 낼 신음 소리가 궁금했다. 분명 그 소리마저 황홀하겠지.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아랫도리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아랫도리가 뻐근했다. 묵직한 그 무게감에 라슬로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숨이 절로 거칠어진다.
‘가져 버릴까.’
욕정으로 가득 찬 그의 금안이 주위를 살폈다. 주위에는 수풀만 무성했다. 움직이는 생명체라고는 여자와 자신뿐이다. 자신을 방해할 건 아무것도 없다…….
“늑대야?”
순간, 정신이 퍼뜩 들었다. 그가 고개를 들자 잔뜩 걱정스러워하는 얼굴의 여자가 보였다.
“많이 아파?”
‘무슨 소리를…….’
“역시 상처가 덧난 거니? 겉으로 보기에는 잘 아물어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미안해, 이렇게 아파할 줄 몰랐어. 염증에 도움이 되는 약초를 들고 왔어야 했는데…….”
라슬로는 눈을 깜빡였다. 상처가 덧나? 아파? 염증? 드문드문 떠오르는 단어들과 현재의 상황을 연관 짓던 그는 곧 여자의 생각을 파악했다.
‘그러니까, 이 여자는 내가 발정한 걸 상처가 덧나서 아파한다고 생각한 건가?’
절로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여자가 더욱 호들갑을 떨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왕왕 울렸다.
“어떡해…… 역시 내가 약초를 들고 왔어야 했는데, 정말 미안해. 내가 내일은 꼭 약초를 가져올게. 미안해.”
셀레나는 거듭 사과하고는 점차 멀어졌다. 내일 또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서.
라슬로는 셀레나가 떠난 뒤에도 쉬이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가 이성을 차린 건 한참 후였다.
‘방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한 거지?’
뒤늦게 돌아온 이성이 그를 후려쳤다. 속이 울렁이고 구역질이 났다. 만난 지 고작 며칠밖에 안 된 여자였다. 그런 여자를 보며 사랑스럽다고 생각하다니?
여기까지만 하더라도 말이 안 되는데 그것도 모자라 여자를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으며, 행동으로 옮기려고 했다.
아마 여자가 중간에 자신을 부르지 않았더라면, 정신이 돌아오지 않았을 테고 자신은 이미 여자를 범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미쳤군.’
진심으로 미쳤다. 상대의 의사도 묻지 않은 채, 본능에 눈이 멀어 하마터면 미친 짓을 할 뻔했다.
라슬로는 잠시나마 여자에게 그런 생각을 품었던 자신이 끔찍해졌다. 살면서 단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던 터라 그는 더욱 자신에게 혐오감을 느꼈다.
‘망할 각인…….’
비속어를 내뱉던 라슬로는 문득 제 몸에 마나가 꽤 회복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물론 본래의 마나 양만큼 회복된 건 아니었지만 죽을 뻔했을 정도로 바닥을 보이던 며칠 전에 비하면 많은 양이었다.
마나로 제 보좌관에게 연락을 하려던 그는 이내 마나의 운용을 멈추었다. 지금 보좌관에게 연락을 취하면 그들은 곧바로 이곳까지 올 것이고, 그는 황성으로 돌아갈 수 있을 터였다. 그렇게 되면 여자를 살려 두게 되는 꼴이 된다.
자신이 각인이 되었다는 걸 알아차린 것처럼 그의 보좌관 역시 그가 각인의 상대를 찾았다는 걸 알아차릴 확률이 컸다.
그러니 보좌관에게 연락을 취하기 전에 여자부터 죽여야 했다. 결심을 굳힌 금색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