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격정 (1)
산을 내려오는 셀레나의 얼굴은 다소 어두웠다. 늑대에게 내일 염증에 좋은 약초를 들고 오겠다고는 했으나,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평소에 못해도 두 뿌리 이상은 채취하던 것이라 별 어려움 없이 약초를 구할 수 있을 줄 알았으나 오늘은 이상하게도 한 뿌리도 구경할 수 없었다.
‘결국 보관함을 건드려야 하는 걸까.’
셀레나는 그녀의 할머니가 평소 약초를 말려 넣어 두는 보관함을 떠올렸다. 물론 염증에 좋은 약초 자체는 가격이 그리 나가는 게 아니었다.
되레 흔히 구할 수 있는 편에 속했으나, 한 번 보관함에 들어간 약초들은 모두 상품이었고, 할머니의 재산이었다.
가뜩이나 거짓말을 하는 걸 끔찍이도 싫어하는 그녀의 할머니인데, 자신이 몰래 그녀의 재산에 손을 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단순히 혼나는 것으로 끝나지 않으리라.
‘하지만 늑대가 그렇게 아파했는걸.’
셀레나는 자신을 보며 그르렁, 소리를 내던 늑대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가파른 숨, 나직이 울리던 울음. 얼마나 아팠으면 저를 보며 그리 호소했겠는가. 늑대를 생각하니 가슴이 욱신거렸다.
‘아니면, 차라리 할머니께 먼저 여쭤 볼까? 한 뿌리만 주실 수 있냐고 말이야. 물론 늑대에게 줄 거란 말은 못 하겠지만 그래도 오늘보다 더 많이 약초를 캐 오겠다고 하면 주실지도 몰라.’
상념에 젖은 채 걷는데,
“셀레나!”
낯선 남자의 목소리에 그녀는 하마터면 바구니를 놓칠 뻔했지만 가까스로 바구니를 붙잡았다. 목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보니 갈색 머리칼의 청년이 그녀에게 작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서…….”
셀레나는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청년의 이름을 불렀다. 무심코 청년의 이름을 불렀던 셀레나가 몸을 휙, 틀었다. 그러나 어느새 다가온 청년이 셀레나의 팔을 붙잡았다.
“오랜만에 본 친구인데 반겨 주지 못할망정 모르는 척하기냐? 못 보던 사이에 쌀쌀 맞아졌네요, 셀레나 양.”
“놔, 놔줘.”
“왜 그래?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
살갑게 굴던 아서는 몸을 움츠리며 주위를 살피는 셀레나를 보며 순순히 손을 놓았다. 그는 셀레나의 반응이 퍽 이해가 되지 않는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무언가 깨달은 사람처럼 ‘아!’ 감탄을 터트렸다.
“너 혹시 내가 말도 없이 수도에 가서 그런 거야?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 너희 할머니가 자꾸 너한테 말하면 죽여 버릴 거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데 내가 어떻게 너한테 말하겠냐?”
“…….”
“너희 할머니는 여전하셔? 네가 남자랑 있으면 너한테 손찌검하는 거? 예전에 한 번 도와줬다고 널 때리는 걸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아직도 생생하다. 생생해.”
아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고, 그의 말에 셀레나가 움찔거리더니 더욱 몸을 움츠렸다. 그녀의 몸이 잘게 떨렸다. 눈에 확연히 보이는 반응에 아서가 입을 떡 벌렸다.
“뭐야, 설마 아직도 그런 거야? 안 되겠다, 내가 아버지께 말씀드려서……”
“그, 그만해. 난 괜찮아. 그리고 내 할머니는 좋은, 분이셔. 그저, 날 홀로 키우시느라 고생을 많이 하셔서 그런 것뿐이야.”
“좋은 분? 그렇게 떨고 있으면서 너희 할머니가 좋다고 말하면 퍽이나 믿어 주겠다. 그냥 솔직하게 말해도 괜찮아, 셀레나. 내가 도와줄게.”
아서는 그녀의 손을 잡으려다가 이내 아까 셀레나의 반응이 떠올랐는지 도로 손을 거두었다. 대신 그는 더없이 진중한 얼굴로 셀레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셀레나는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
“괜찮아, 나는……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횡설수설 말을 잇는데 시야 끝으로 흐릿한 형체가 눈에 들어왔다.
일순 셀레나는 자신의 몸이 얼어붙는 걸 느꼈다. 거리가 조금 있어 다소 흐릿했지만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의 할머니라는 걸.
셀레나는 황급히 아서에게서 떨어졌다. 그녀의 할머니가 뒤돌아서 집 안으로 들어갔다. 당황한 셀레나가 바구니를 쥐고 집을 향해 뛰었다. 갑작스레 자신을 지나가는 셀레나의 모습에 아서가 당황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지만, 셀레나는 그 목소리를 무시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자신과 아서의 모습을 목격한 할머니의 모습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가서 설명을 해야 했다.
아니라고, 할머니께서 생각하는 그런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고 설명을 해야 했다.
그 어느 때보다 빨리 달린 셀레나가 거칠게 숨을 들이마시며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녀가 숨을 가다듬고 문을 닫은 순간, 그녀의 얼굴 옆으로 무언가 지나갔다.
바람에 머리칼이 훅, 일어났다가 가라앉기가 무섭게 뒤에서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눈만 움직여 살짝 곁눈질해 보니 깨져 있는 그릇의 파편들이 보였다.
‘만약 저 그릇에 맞았다면…….’
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모르긴 몰라도 처참한 꼴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셀레나는 침을 한 번 삼킨 다음, 입을 열었다.
“할머니, 오해예요…….”
“오해?”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날카로운 목소리가 반문을 해 왔다.
“내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오해?”
“하지만 정말 오해예요. 집으로 들어오고 있었는데 아서가 일방적으로…….”
“내가 그런 거짓말에 넘어갈 정도로 만만해 보이더냐? 손까지 잡고 있는 걸 봤는데?”
“그, 그것 역시 아서가…….”
“너 이 할미가 우습더냐? 내가 늙었다고 무시하는 것이야?”
“아니에요. 절대로 그런…….”
“항상 말로만 그렇지! 네 어미 역시 똑같았어! 망할, 그 용병 놈과 도망치기 전에도 너처럼 그 말을 했지. 그놈이 일방적으로 잡았다! 자신은 관심이 없다! 모두 오해다! 난 바보처럼 그 말을 믿었지…….”
바보처럼 말이야.
노파가 덧붙였다.
“그런데 결과가 어떻던? 네 어미가 무슨 짓을 했었냐 말이야. 응? 기어코 그 용병 놈과 도망을 쳤지. 그리고 몇 달 뒤에 널 임신한 채, 돌아왔지. 그것도 잔뜩 얻어터진 채로.”
셀레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릴 적부터 그녀의 할머니는 물론 마을 어른들에게서 익히 들어왔던 이야기였다.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하도 들어온 이야기.
때문에 그녀는 노파가 다음에 할 말도 예상할 수 있었다. 분명 자신의 어미가 저를 낳고 죽은 이야기를 할 것이다.
“네 어미가 너를 낳고 죽고 난 뒤에 내가 얼마나 상심했는지 넌 모를 게야. 그리고 내가 너를 얼마나 애지중지하며 키웠는지 모르겠지. 그렇게 널 키웠다! 그런데 네가 나를 배신해?”
모두 예상했던 말이었으나 단순히 예상만 했던 것과 실제로 듣게 되었을 때의 느낌은 많이 달랐다. 셀레나가 시선을 내리깐 채 입을 열었다.
“배신이라니요, 절대 그런 것 아니에요. 저도 할머니께서 얼마나 저를 잘 키워 주셨는지 아는걸요. 아서는, 그저 오랜만에 마을에 와서 반가운 마음에 제게 인사를 한 것뿐이에요. 할머니도 알다시피 아서는 그간 수도로 공부를 하러 갔었잖아요.”
“지금 내게 그놈을 감싸는 거냐?”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듣기 싫다! 아무리 아서 놈이 촌장의 아들이라 하지만 내 그놈에게 너를 줄 것 같아? 고작 촌장 아들 따위에게 너를?”
셀레나는 입을 다문 채,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어떤 말을 하든 통하지 않을 거란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난 오늘 네게 매우 실망을 했다. 저녁은 꿈도 꾸지 말거라. 거짓말을 하는 년에게는 빵조차 아까우니까.”
“……네.”
“알아들었으면 방으로 들어가. 내가 나오라고 할 때까지 나오지 말거라.”
순순히 응하던 셀레나가 마지막으로 들려온 말에 고개를 퍼뜩 들었다.
“그, 그건…….”
“지금 반항하는 게야?”
“아니요. 제가 할머니의 말씀에 왜 반항을 하겠어요. 다만,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
“부탁?”
“……내일까지만 나갔다 오면 안 될까요? 내일부터 할머니의 말씀대로 방 안에 들어갈게요. 남자랑은 말도 안 섞을 테니, 제발.”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는 게야? 내일? 뭐? 내일? 왜, 그놈이 내일 도망이라도 치자더냐?”
“그런 게 아니라……”
“그런 게 아니면! 말을 해 봐라. 뭔데 내일 꼭 나가야겠다고 말을 하는 건데!”
셀레나는 입을 다물었다. 차마 늑대에게 염증에 좋은 약초를 갖다 주기 위해서, 라는 말이 나오질 않았다.
늑대에 대해 말하면 적어도 오해는 풀릴 테지만, 대신 늑대는 할머니가 부른 사냥꾼들에 의해 죽게 될 것이다.
‘안 돼. 절대 말할 수 없어.’
그녀는 숲 속에 꿈쩍도 못 하는 늑대의 모습을 떠올리며 눈을 꼭 감았다. 그녀가 눈을 감기가 무섭게 노파가 매서운 목소리로 호통쳤다.
“왜 말을 못 해! 역시 네년, 숨기는 게 있었지! 내게 뭘 숨기는 것이야? 역시 너도 네 어미처럼 촌장의 아들놈과 도망칠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아니에요!”
“아니라고? 아닌데 왜 말을 못 하는 게야? 그놈 때문이 아니라면 뭘 숨기고 있는 거냐. 네가 가는 곳이라고는 산에 약초를…… 오호라.”
말을 하던 노파의 목소리가 간드러졌다. 그녀는 무언가 깨달은 사람처럼 눈을 가늘게 뜬 채 셀레나를 흘겼다.
“네년, 산에 무언가를 숨겨 두고 있구나. 그래, 이제야 이해가 됐다. 그래, 어쩐지 며칠 전에 의료용 칼도 사라지고 간만에 네가 정량도 채웠다 싶었다. 이제 보니 산에 남자를 숨겨 두고 있는 거구나! 다친 놈이 있는 게야. 그렇지?”
셀레나는 즉각 부정할 수 없었다. 남자를 숨겨 둔 건 아니었으나 늑대의 존재를 들켰다는 생각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그녀가 반박을 하려고 했으나 노파가 더 빨랐다.
“더러운 년! 더러운 년! 키워 준 은혜도 모르고 감히 남자와 놀아나?!”
“아니에요. 정말 아니에요.”
“좋아, 그럼 옷을 벗어 보거라.”
“오, 옷은 왜…….”
“네가 남자 놈과 안 놀아났다면 몸이 깨끗하지 않겠느냐. 그러니 어서 옷을 벗어 보거라.”
“여, 여기서요?”
“그래. 네가 떳떳하다면 흔쾌히 벗겠지.”
셀레나는 제 옷깃을 부여잡은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는 실로 떳떳했지만 타인의 앞에서 옷을 벗는다는 건 쉽지 않았다.
그건 설령 자신을 평생 키워 준 할머니라고 할지라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아무리 집 안이라 하지만 창에는 커튼이 쳐져 있지 않았고, 그 밖에는 사람이 지나다닐 수도 있었다.
‘옷을 벗은 사이에 누가 집 앞을 지나간다면?’
틀림없이 그 사람은 그녀의 벗은 몸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았다. 거북감이 그녀를 뒤덮었다.
“싫어요. 할머니, 이건 아닌 것 같아요.”
“싫어? 싫어도 벗어라. 네 꼴을 보니 더 이상 봐줄 여지가 없구나.”
“싫어요, 할머니! 싫다고요!”
“벗어!”
그녀에게 다가온 노파가 셀레나의 옷을 붙잡았다. 셀레나가 제 옷깃을 부여잡고 버텼으나 그녀의 할미는 막무가내였다.
한참의 실랑이가 이어졌고, 이내 찌이익, 소리와 함께 옷이 찢겼다. 너덜너덜하게 내려앉은 천 사이로 셀레나의 몸이 드러났다.
찢긴 옷 사이로 그녀의 가슴이 보였다. 당황한 셀레나가 얼굴을 붉히며 황급히 제 가슴을 가렸다. 수치스러웠다. 얼굴을 푹 숙인 채 어떻게든 찢어진 천으로 몸을 가리려고 애쓰는데,
“너, 너…….”
경악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너! 너! 네년이 기어코!”
순식간에 머리채가 휘어 잡혔다. 거친 손에 머리가 제멋대로 흔들렸다. 정신없다. 셀레나는 머리채를 잡힌 채, 현재의 상황을 파악하려고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할머니가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네년이! 네년이! 결국 날 배신했어! 망할 년! 망할 년!”
“제가, 뭐, 뭘…….”
“뻔뻔한 년! 아직도 남자와 놀아나지 않았다고 말할 것이냐? 설마 몸에 그렇게 흔적을 남겨 뒀으면서 아래가 처녀라고 말하진 않겠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흔적? 처녀?’
머리칼이 뜯기는 와중에도 셀레나는 그녀의 할미가 이렇게 흥분한 이유를 파악하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머리가 정신없이 휘둘림에 따라 생각이 자꾸만 흩어졌다.
잠시 후, 노파가 그녀의 머리채를 놓았지만 셀레나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머리가 이미 너무나 많이 휘둘린 탓에 정신이 아찔했던 것이다. 몸이 제멋대로 비틀거렸다. 다소 거친 손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그녀의 몸을 끌었다.
셀레나는 노파가 자신을 방에 가두려는 걸 알았지만 어떠한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방 안에 억지로 밀린 직후에도 셀레나는 쉬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철컥, 방을 잠그는 소리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 셀레나가 비틀거리며 문으로 달려갔다. 문손잡이를 잡아당겼지만 무언가에 걸린 것처럼 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저 덜커덩,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당황한 그녀가 문을 두들기며 외쳤다.
“할머니! 문 좀 열어 주세요!”
“…….”
“할머니! 열어 주세요! 제발요! 할머니!”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셀레나는 한동안 문을 두들기다가 이내 스르륵, 주저앉았다. 창을 통해 들어오던 빛이 서서히 옅어지더니 이내 밖이 어두워졌다. 문 앞에 엎드려 있는 그녀의 어깨 위로 어둠이 내려앉았다.
바닥에 엎드려 자던 셀레나가 깬 건 희미하게 들려오는 말소리들 때문이었다.
“……지?”
“그…… 제가…… 까?”
비록 대화의 내용만큼은 들리지 않았지만 대화를 하는 이들 중 한 명은 제 할머니의 목소리였다.
‘그런데 나머지 한 명은, 누구지?’
음성이 낮은 것이 남자의 목소리였다. 그간 살면서 할머니가 누군가를 집에 데려온 적이 없었기 때문에 셀레나는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 하물며 남자라면 질색을 하던 그녀의 할머니였다. 그런 할머니가 남자를 데려오다니…….
막 정신이 들었던 터라 눈이 따가웠다. 셀레나가 눈을 깜빡이는데 말소리가 점점 가까이에서 들리더니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났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놀란 셀레나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다 가슴께로 내려앉는 천의 너덜거림에 셀레나가 뒤늦게 제 행색을 깨달았다.
어떻게 숨길 수 있는 게 없을까, 싶어 주위를 둘러본 그녀는 평소 즐겨 걸치던 숄을 걸친 다음 속살이 안 보이도록 잘 여몄다.
숄을 여미기가 무섭게 끼이익, 문이 열렸다. 열린 문틈 사이로 보인 건 제 할머니였다. 그녀는 더없이 쌀쌀맞은 얼굴로 셀레나를 흘겨보고는 혀를 낮게 찼다.
“쯧쯧, 꼴이 거지 못지않구나.”
“……죄송해요.”
“사과할 필요 없다. 네년이 잘해서 여길 떠나 주면 되니까.”
“네?”
셀레나가 떨떠름한 얼굴로 노파를 보는데 크흠,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휙 돌리자 보는 것만으로도 비싼 옷이라는 게 느껴질 만큼 좋아 보이는 옷을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방해해서 미안하지만 좀 서둘러 주면 하네. 내가 좀 급해서 말이야.”
남자가 튀어나온 배 때문에 자꾸만 풀어지려는 단추를 잠그며 말했다. 그는 말을 마친 후에도 흠흠, 헛기침을 내뱉으며 셀레나를 위아래로 흘겼다. 얇은 눈매 사이로 저를 훑는 시선이 흡사 상품을 품평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소름 끼쳐…….’
남자의 시선에 셀레나는 더욱 숄을 세게 여몄다. 그러나 팔 위로 돋아난 소름은 가라앉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자작님. 저년에게 잠시 설명해 주느라 시간을 지체했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흠흠, 그러지. 하지만 빨리 끝내 줬으면 좋겠군. 내가 조금 급해서 말이야.”
“암요.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남자는 셀레나를 위아래로 한 번 흘기고는 뒤로 물러섰다. 남자가 조금 떨어지자 셀레나가 입을 열었다.
“할머니, 이게 무슨 상황인 거죠? 그리고 저 남자는 누구예요?”
“입조심하거라. 저 남자라니! 너 따위가 함부로 부를 만한 분이 아니다. 아주 높으신 분이야. 자작님이라고 불러라.”
‘자작님?’
“자작님이, 저희 집에는 왜…….”
“왜긴 왜야. 널 보러 오신 거지.”
“그러니까, 왜 저를…….”
“쯧쯧, 제법 명석하다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순 모자란 것이었구나. 하긴 그러니 외간 남자랑 아무렇지도 않게 뒹굴었겠지.”
“외간 남자라니요. 어제부터 계속 무슨…….”
“됐다. 지금 너와 말씨름을 할 시간 따위 없다. 네 변명 따위 듣고 싶지도 않다. 그저 넌 저분을 잘 모시기만 하면 돼.”
“잘 모시라고요?”
“그래. 저분의 마음에 들면 넌 정말 떵떵거리며 살 수 있어. 설마 네가 네 어미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셀레나.”
“어머니와 같은 실수라니요? 무, 무슨 말씀을…….”
“원래 자작님은 네 어미가 모셔야 할 분이었다. 네 어미가 망할 그놈만 따라가지 않았다면 그랬겠지. 그때만 생각하면 여간 속이 터지는 게 아니야. 그 용병 놈이 먼저 네 어미를 사창가에 팔아 버릴 줄 알았다면 내가 먼저 파는 거였는데.”
노파는 다시 생각해도 기분이 여간 상한 게 아닌 듯 눈살을 찌푸렸고, 셀레나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노파를 바라보았다.
‘어머니가 자작님을 모셔야 했다니? 게다가 용병이 어머니를 사창가에 팔았다고?’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할머니? 어머니가 왜 자작님을 모셔야 한다는 거예요? 게다가 팔다니, 그 무슨…….”
“왜긴 왜야. 자작님이 큰돈을 지불하겠다고 하셨으니 그렇지. 실제로 자작님은 네 어미를 키울 때도 원조를 많이 해 주셨다. 심지어 네 어미가 다 클 때까지 기다려 주시기까지 하셨지. 그러니 내가 네 어미를 넘기지 않을 이유가 뭐가 있겠느냐?”
“어, 어머니의 의사는요? 그리고 할머니의 그런 행동은 어머니를 팔았다던 용병과 다를 바가 없는 거 아닌가요?”
“오, 아가야. 날 그런 망할 놈과 동일시하지 말아다오. 그놈은 네 어미를 사창가에 싸게 팔아먹었지만, 난 네 어미를 비싸게 팔아먹으려 했던 사람이다.”
셀레나는 질린 얼굴로 노파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제 어미를 팔았다던 용병이나 할머니나 별 다를 바가 없었다.
“게다가 천애 고아인 네 어미도 자작님과 연이 닿았으면 평생을 풍족하게 살았지 않았겠느냐? 물론 네 어미는 이런 내 마음도 모르고 배은망덕한 짓을 했지만 이제는 상관없다. 네 어미가 여기로 돌아와 너를 낳았고, 장성한 네가 네 어미의 빚을 갚으면 되니까 말이다.”
“그, 그런…….”
충격에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제 어미가 고아였다니? 전혀 생각지 못한 이야기였고, 마을 사람들이나 노파 역시 말해 준 적 없어 몰랐던 이야기였다.
“너마저 멍청한 짓을 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웬 글러 먹은 놈과 굴러 처녀를 잃었는지도 모르겠고, 자작님께서 무슨 생각으로 네년을 받아 준다 했는지 모르겠지만 이건 기회란다.”
네게도, 내게도 좋은 기회 말이다.
노파가 덧붙였다. 셀레나는 탐욕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위아래로 훑는 노파를 보며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아까 자작이 자신을 훑던 것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지만 본질적인 느낌은 같았기 때문이다.
“참, 그리고.”
돌연 턱이 잡혔다. 갑작스레 잡힌 턱에 당황한 그녀가 노파를 밀치려고 하는데 입 안으로 무언가 슥 들어왔다. 이렇다 하기도 전에 입 안으로 들어온 그게 목구멍 너머로 넘어갔다. 약초를 삼킨 걸 확인한 노파가 셀레나의 입에서 손을 빼내며 말했다.
“그게 널 도와줄 거야. 특별히 약효가 강한 걸로 구했으니 너도 즐길 수 있겠지.”
셀레나가 목을 부여잡고 내뱉으려 했으나 밖으로 나오는 건 없었다. 자신에게 무얼 먹인 거냐고 따지려고 할 때, 목 부분을 기점으로 속이 미친 듯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뜨거워…….’
낯선 감각에 이래저래 몸을 비틀어 보지만 열기는 사그라지기는커녕 점차 지독해졌다. 셀레나는 직감적으로 할머니가 자신에게 먹인 것 때문이란 걸 깨달았다.
점차 진해지는 열기에 숨이 거칠어지고 가슴의 정점이 꼿꼿이 서는 게 느껴졌다. 그저 천에 닿았을 뿐인데 예민해진 유두는 그 작은 자극 하나 놓치지 않았다. 허벅지 안쪽에 힘이 들어간다.
‘기분이, 이상해…….’
허벅지 안쪽으로 원인 모를 액체가 잔뜩 고이는 게 느껴졌다. 처음에는 몰랐으나 힘이 들어갈 때마다 질척거리는 액체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셀레나는 이상한 기분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대로 있으면 안 돼. 여기서, 나가야…… 나가야 해.’
나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으나, 곧 앞길이 막혔다. 풍만한 덩치의 남자가 문을 막은 채 셀레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까 그 남자다. 자작님이라던, 그 남자.
아까 그러했듯, 남자가 눈이 셀레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이내 흡족해하는 얼굴로 웃었다.
“그럼 좋은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자작님.”
노파의 목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쿵, 문이 닫히는 소리가 흡사 지옥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처럼 들려왔다.
* * *
라슬로는 갑자기 찾아든 오한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몸을 떨던 그는 자신이 생전 처음으로 겪어 보는 현상이란 걸 깨달았다.
‘……뭐지?’
일부나마 신수의 피를 물려받은 그는 일반적인 사람들이 겪는 생리 현상을 일체 겪지 않았다. 그런 자신이 오한을 느끼다니.
잠시 의아함이 들었으나 그는 이내 고개를 바닥으로 내렸다. 앞발 위에 턱을 괴었으나, 시선만큼은 계속 한 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여자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이유는 별거 아니었다. 여자를 죽이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생각과 달리 그의 시선은 초조함으로 흔들리고 있는 상태였다.
보통 이때쯤에는 오곤 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여자가 오질 않으니 이상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설마 눈치챈 건가.’
자신이 저를 죽이려고 한다는 걸?
그러나 알아챘다고 생각하기에는 여자의 모습은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심지어 그가 여자를 죽여야겠다고 확고하게 마음은 먹은 건 여자가 가고 난 이후였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보다도 자신에 대한 동정이 먼저였던 여자였고, 제 안위보다 금수의 안위를 더 중요시 여기는 여자였다. 그리 멍청한 여자가 자신도 인지하지 못한 속내를 인지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가 냉소적으로 웃으며 가능성을 쳐 냈다. 그저 자신이 예민하게 받아들인 것일 거다. 아니면 자신의 생체 시계가 틀렸거나. 여자는 올 것이다. 그간 그래 왔듯.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라슬로는 이상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왜 안 오는 거지?’
초조함이 그의 몸을 감쌌다. 스스로조차 의식 못한 힘이 다리에 들어갔다. 움직이지 않겠다는 자아와 무의식적인 힘이 서로 부딪혀 다리가 들썩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슬로는 제 몸의 상태를 인지하지 못했다. 그가 앉아 있는 상태에서 그렇게 몸만 들썩이는데,
“……어!”
귓가에 쨍한 목소리가 울렸다.
‘방금, 그 목소리.’
분명 여자의 목소리였다. 라슬로는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여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기척을 살펴도 마찬가지다. 풀벌레 우는 소리만 들릴 뿐, 사람의 기척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뭐지?’
그가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다시금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싫어! 오지마아악!”
아까보다 훨씬 선명한 목소리였다. 라슬로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일으켰다. 지금 그에게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이해할 수는 없었으나 한 가지, 확실한 건 여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거였다.
‘여자가 위험하다.’
머릿속이 혼란스럽다. 라슬로는 정신없이 주위를 휙휙 둘러보았다. 그 와중에도 그의 귓가에는 여자의 비명이 끊임없이 들렸다.
‘도대체 어디지? 어디서…….’
고개를 휙휙 돌리며 육안으로 여자를 찾던 그는 이내 몸에서 꿈틀거리는 마나의 존재를 느끼고는 재빨리 마나를 운용했다.
금빛 마나가 여자의 흔적을 찾기 시작했고, 얼마 안 가 그의 머릿속에 어느 좌표가 찍혔다. 좌표가 읽히자마자 그가 순간 이동 주문을 외웠다. 금색 무리가 라슬로의 몸을 감쌌다.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도 잠시, 이내 발이 땅에 닿았다. 빛무리가 가신 시야에 가장 먼저 보인 건 셀레나의 위에 올라타 있는 덩치가 제법 풍만한 남자의 모습이었다.
“뭐, 뭐야!”
남자는 갑작스레 나타난 라슬로의 존재가 당혹스러웠는지 말을 더듬으며 뒤로 넘어졌다. 한껏 당황한 남자와 달리 라슬로는 덤덤히 주위를 훑었다. 곧 그의 시야로 그가 그토록 찾던 여자의 모습이 들어왔다.
‘무사했군.’
여자의 안위를 확인한 다음, 고개를 돌리려 했던 그는 그대로 굳었다.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여자의 상태가 돌연 눈에 훅, 들어왔기 때문이다.
침대에 누워 있는 여자의 행색은 엉망진창이었다. 길게 찢어진 천 사이로 속살이 보였고, 맞기라도 한 건지 여자의 뺨은 잔뜩 부어 있었다.
상황을 파악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덜덜 떨고 있으면서도 끝까지 제 옷깃을 부여잡고 있는 여자와 흘러내리는 바지춤을 잡고 있는 남자. 그것들이 뜻하는 바는 그리 많지 않았다.
머리끝까지 분노가 들어찬다는 게 이런 느낌일까. 부글부글 끓는 와중에도 이성은 차분히 내려앉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남자의 처분에 대한 방법이 여럿 떠올랐다.
어떻게 남자를 처리할지 생각하며 다시 여자에게로 시선을 돌린 라슬로와 셀레나의 눈이 마주쳤다.
흐트러진 청회색 머리칼 아래로 잔뜩 충혈된 여자의 눈과 마주한 순간, 라슬로의 이성이 뚝, 끊겼다.
말 그대로 뚝.
‘죽인다.’
감히, 네까짓 게.
살기가 깃든 그의 금색 눈동자가 형형히 빛났다. 그 모습을 본 남자가 히익, 숨을 들이켜며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을 빠져나가기 위해 남자가 문손잡이를 붙잡고 힘껏 당겼으나 문은 덜컹, 들썩거리기만 할 뿐 열리지 않았다. 그제야 남자는 아까 전에 노파가 문을 잠갔다는 걸 기억했다.
“할멈! 당장 문을 열게! 당장!”
남자가 다급한 손길로 문을 쾅쾅, 두들겼다. 그 소란에 밖에서 잠금장치를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내 문이 열리고 남자가 안도하는 얼굴로 밖으로 나가려고 할 때,
푹―!
살이 꿰이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렸다. 남자는 떨리는 얼굴로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그의 왼 가슴을 뚫고 튀어나와 있는 금색의 창과 그걸 중심으로 점점 피로 젖어 들어가는 자신의 옷.
“아, 아…….”
뒤늦은 고통이 그의 몸을 강타하기가 무섭게 그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힘없이 쓰러지는 남자의 모습을 본 노파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자작이 라슬로를 보고 놀랐듯이 노파 역시 라슬로를 보고 놀란 눈치였다. 그녀의 입술이 덜덜 떨리더니 이내 뒤돌아서서 달리기 시작했다.
“느, 늑대다! 늑대야!!!”
노파가 쩌렁쩌렁하게 외치며 달렸다. 자작에게 그랬듯 노파 역시 죽이기 위해 라슬로가 마나를 운용했다. 그의 발치에서 금빛 마나가 흘러나왔다. 마나로 생성된 긴 창이 노파를 향해 던져지려고 할 때,
“……늑대야?”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창이 파스스 흩어졌다. 노파가 달음박질한다. 그녀가 밖으로 나가며 외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라슬로는 노파의 목소리보다 셀레나의 안위가 우선이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셀레나를 바라보았다. 눈의 초점이 안 맞는지 셀레나는 얼굴을 연신 찡그렸다. 그녀가 더듬더듬 라슬로를 향해 손을 내뻗었다. 그 모습을 본 라슬로가 여자에게 다가섰다. 금색 빛무리가 그들을 감쌌다.
바깥에서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오두막집 앞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의 손에는 각기 농기구와 무기가 들려 있었다.
“그러니까 늑대가 저기 있단 말이지?”
“그래! 크기가 완전 집채만 하더라니까!”
노파가 팔을 한껏 벌려 늑대의 크기를 표현하려고 애썼다. 그 몸짓을 본 사람들이 침을 꿀꺽, 삼키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무기를 꽉 쥐고 집 안에 들어선 그들은 늑대의 덮침을 각오하고 방을 옮겼다. 그러나.
“……없다?”
그들을 반긴 건 집채만 한 늑대도, 셀레나도, 자작의 시체도 없는 텅 빈 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