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신분증 좀 주시겠어요?”
하루에 수십 번씩 반복하는 말인데도 직원은 오늘따라 쭈뼛거렸다.
“신분증이 필요합니까?”
“네, 그렇죠……?”
남자가 이쪽을 빤히 주시하며 의자에 착석하자, 직원은 왠지 손가락이 곱아들었다.
끝이 쭉 올라간 눈매는 얄궂고도 오묘했다.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고서야 저런 눈빛을 온전히 받아내기란 쉽지 않을 듯했다. 직원은 괜스레 텀블러를 들고 입을 한번 축였다.
남자는 조용히 생각에 잠겨있더니 이내 천천히 입매를 끌어올렸다.
“분실했는데 어떡하죠.”
“아…….”
한순간에 달라진 분위기에 직원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 그럼 재발급 신청서부터 작성해 주시겠어요?”
그녀가 허둥대며 서류를 건네주었다.
종이를 눈으로 훑어 내려가던 권채우가 돌연 멈칫했다. 문제는, 재발급 신청서 역시도 주민등록번호를 기입해야 하는 칸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의 미간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펴졌다.
직원은 펜을 쥐고도 좀처럼 칸을 채우지 못하는 남자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잠시 뒤, 권채우가 펜을 내려놓고 목덜미를 한 차례 주물렀다.
“전화 한 통만 쓸 수 있을까요.”
“……전화요?”
작은 마을의 공무원이란 어쩔 수 없이 심부름꾼으로 전락할 때가 많았지만, 이건 요 근래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 부탁이었다. 연락 수단이 없는 사람은 이 시대에 정말 드물었으니까.
직원은 당황했으나 묘한 압력이 느껴지는 그의 눈빛에 깨갱하며 손을 움직였다. 전화선까지 줄줄이 빼내어 극진히 그의 앞에 놔 주었다.
권채우는 복잡한 낯으로 수화기를 들고 웬 번호를 누르기 시작했다. 숫자 하나하나를 누르는 손이 무척이나 느릿했다. 번호를 누를 때마다 왜인지 턱 근육이 한껏 조여들었다.
뚜르르, 뚜르르, 이어지던 수화음이 어느 순간 뚝 그치고, 다시 들어도 불쾌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누구십니까.
“나야.”
―……채우?
상대는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권채우는 잔뜩 뒤틀린 숨을 간신히 욱여넣었다. 그저 이를 꽉 다물고 이 불유쾌한 순간을 견디고만 있었다.
―……네가, 내 번호는 어떻게 알았지?
차게 가라앉은 음성에선 최소한의 반가움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권채우도 마찬가지였다. 형이라는 작자에게 그 어떤 감정도 일절 들지 않았다. 아무리 기억을 잃었다고는 하나, 소이연을 아내로 곧장 받아들인 것과는 사뭇 상반된 태도였다.
“이연 씨 몰래 그쪽 번호 지우려고 하다가.”
―…….
권채우가 날카로운 숨을 터트리며 은근히 입꼬리를 올렸다.
“재수가 없어서 그런지 잊히지가 않던데.”
아슬아슬한 침묵이 이어졌다. 그저 툭툭, 책상 두드리는 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그래서 용건은?
“내 주민등록번호.”
그러자 권기석이 피식, 건조하게 웃음을 흘렸다.
―기억이 난 건 아니구나.
그의 목소리가 묘했다. 안도하는 건지, 아쉬워하는 건지 그 경계가 미묘했다.
“주민등록번호.”
권채우는 감정 없이 재촉만 했다. 상대와 길게 사담을 나누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소이연 씨한테 물어보지 그래.
권채우는 기민하게 상대의 비웃음을 알아차렸다.
“함부로, 그 이름 입에 올리지 마.”
―네가 별이라도 따 달라 하면 그 여자는 어떻게든 해 줄 텐데.
이어 낮은 목소리가 별안간 은밀해졌다.
―소이연 씨, 되게 충성스럽거든.
권채우는 잠시 귀에서 수화기를 뗐다. 끓어오르는 화를 눌러 참듯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꾹 감았다. 이상하게 입 안에서 욕설이 구른다. 온갖 폭발적인 것들이 안에서 회오리를 쳐대는데 그럴수록 목소리는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세 번은 말 안 해.”
―정확히 필요한 서류가 뭔데, 채우야.
“가족관계증명서.”
그에 권기석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진심으로 즐거워하고 있었다. 수화기를 붙든 권채우의 손목에 힘줄이 바짝 선다.
―신분증부터 다시 받으려면 오래 걸릴 텐데.
“내가 알아서 해.”
―그럴 수는 없지. 네가 먼저 형을 놀라게 했으니 기꺼이 선물을 주마.
그 미묘한 뉘앙스에 권채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거기서 조금만 기다려라.
전화는 그렇게 끊겼다. 권채우 찝찝하게 남은 앙금이 거슬려 쉬이 수화기를 내려놓지 못했다. 입 안이 까끌까끌했다.
얼마간의 지루한 시간이 흐르고, 별안간 안쪽에서 쿠당탕 소리를 내며 누군가 허둥지둥 문을 열었다. 머리가 반쯤 벗겨진 면장이 누군가를 찾듯 면사무소 안을 두리번거렸다.
마침 권채우와 눈이 딱 마주치자 왜인지 사색이 된 얼굴로 그가 다가왔다.
“……신분증은 오늘 안에 재발급 될 수 있도록 조치 취하겠습니다. 그리고…….”
면장은 덜덜 떠는 손으로 종이 하나를 건넸다.
가족관계증명서.
권채우는 뾰족한 모서리 쪽을 잡고 서류 내용을 빠르게 확인했다.
* * *
“결혼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두 번째로 만난 남자는 굵은 팔뚝이 인상적인 동갑내기 목수였다.
햇볕에 건강하게 탄 피부, 외향적인 제스처, 와락 커지는 목소리에 이연은 종종 어깨를 움칫했지만 그는 유쾌한 사람이었다. 남자는 자신의 취미를 끝도 없이 늘어놓다가 돌연 화제를 막 바꾼 참이었다.
“어……”
결혼은……. 무덤……?
이연이 우물쭈물하자 그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테이블 위에 팔을 올려놓았다.
“결혼은 인륜지대사죠.”
그녀는 별 의미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커피를 휘휘 젓는 손길에서 무료함이 배어 나왔다.
“이연 씨가 서른 둘이라고 했죠?”
“네.”
“그럼 제 말에 더욱 공감을 하시겠네요.”
“정확히 어떤 점이…….”
그녀가 고개를 갸웃하자, 상대는 생기 넘치는 목소리로 신나게 말을 이어나갔다.
“각자 부모님께 잘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거죠.”
“…….”
“요즘은 시대가 시대인지라, 저는 아내한테만 희생을 바라진 않을 겁니다. 장모님, 장인어른 모시고 캠핑도 다녀오고, 양가 부모님들이랑 같이 해외에서 한 달 살기도 해 보고 싶어요.”
그의 눈이 반짝였다.
“이연 씨는 어떻게 생각해요?”
“어…….”
물론 그의 심성과 의도는 좋아 보였으나 이상하게 이연은 숨이 막혔다.
사실 이연은 결혼의 결, 자를 들었을 때부터 이상하게 권채우의 얼굴이 떠올랐다. 한 침대에서 잠이 들고, 함께 깨어나고, 공간을 나눠 쓰는 그 모든 일상들이 새삼스럽게 똬리를 튼다. 그녀는 지레 몸을 굳히고, 고개를 가볍게 털었다.
“……멋진 계획을 가지고 계시네요. 응원해요. 그런데 저는……”
이연이 어색하게 웃으며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가족애가 그다지 없어서요.”
“네?”
그는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 눈을 커다랗게 키웠다. 그리고 찰나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 표정을 마주하니 이연은 정신이 얼얼할 지경이었다.
평범한 사람을 찾기에는 내가 자격 미달인 건 아닐까, 하는 깨달음이 역풍처럼 불어 닥쳐서. 문득 이연은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권채우와 가까이에서 부대끼다 보니 아무래도 자신이 평범하다는 착각에 빠졌던 모양이다.
남들에게 수도 없이 돌팔매질을 당했던 올챙이 적은 까맣게 잊고, 오만방자하게 평범한 남자를 운운했다.
하지만 막상 자리에 나와 보니 이연은 이 사람들에게 공감을 할 수가 없었다.
누군가는 첫사랑을 간직한 채였고, 누군가는 효심이 기특했다. 그들은 풍성해 보였다. 소중한 누군가를 꼭 움켜쥐고 함께 살아갈 준비가 된 멋진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이연의 울타리 안에, 사람은 없었다. 그녀가 평생을 일군 나무는 있어도, 사람은 없었다. 앞으로도 저들의 세계에 발을 붙이기란 요원할 것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둘 뿐인 줄 알았어요.’
그저, 다시 한번 그 말을 듣게 된다면.
문득 창밖을 보니 먹구름이 몰려들고 있었다. 그러자 쓸데없는 일은 집어치우고 당장이라도 집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그렇게 삼 번, 사 번, 오 번 남자들까지도 만나봤으나 역시나 이연은 위화감만 느껴야 했다.
자녀 계획, 주식 이야기, 학창 시절 이야기, 연애 경험, 웃긴 일화 등, 상대편 남자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끝도 없이 풀어놓는데 반해 이연은 꺼내놓을 건더기가 없었다. 빈약한 인생이었다.
“―이연 씨,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십니꺼.”
이연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는 과묵해 보이는 턱을 가진 동사무소 직원이 이연을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었다. 다소 후덕한 몸매였지만 안정감이 물씬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사실 요 몇 개월 동안, 권채우와 함께 겪은 황당하고 무서운 일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나 무슨 문제 있는 거 아니야……?’
별안간 남자가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한입에 털어 넣고는 물었다.
“이연 씨는 이상형이 우예 됩니꺼.”
“……없는 것 같아요.”
이연은 먹음직스럽게 놓인 디저트를 쳐다보기만 할뿐 이번엔 손도 대지 않았다.
“하나도예?”
이연의 얼굴에 기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황조윤의 말에 휘둘렸던 건 아니지만, 한 가지, 부정할 수 없는 말이 있었다.
‘넌 남자랑 사귈 수 있는 애가 아니잖아……! 아니, 애초에 사람들이랑 엮이는 것도 싫어했잖아! 이연아, 내가 널 몰라?’
‘밤마다 나무 보러 가고, 주말에도 집에서 비료나 만드는 애를 누가 이해해.’
괜히 입 안이 씁쓸해져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이었다.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내가 바란다고 해도 세상에 그렇게까지 완전한 사람은 없을 거예요.”
그때였다. 내내 잠잠했던 심장이 별안간 약에 맞은 듯 거칠게 펄떡이기 시작했다. 맥박이 망치질하듯 혈관을 두들겨대고 속도 울렁거렸다. 얼마나 피가 빠르게 도는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를 정도였다.
‘내가 지금 헛것을 보나?’
당황한 그녀가 눈을 비볐다.
이연이 눈길을 고정한 창밖에는, 퍼붓는 소나기를 흠뻑 맞고 서 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
남들보다 머리 한두 개는 더 있는 듯한 키와 뚜렷한 이목구비가 한눈에 들어왔다. 모두가 비를 피하기 위해 뛰어가고 있는데 권채우만이 길 한 가운데에 동상처럼 우뚝 멈춰 서 있었다.
오늘 하루, 필사적으로 그를 떠올리지 않으려 했는데. 그 다짐을 누군가 철저히 비웃는 것 같았다.
그는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폭우를 속수무책으로 맞으며 이쪽을 정확히 응시하고 있었다.
핏기 하나 없는 얼굴이 몹시도 창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