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왜 거기에…….’
온 신경이 창밖으로 쏠렸다.
점선 같은 빗줄기가 창문에 비스듬히 묻어나고 있었다. 잘못 푼 시험지도 아닌데 두 사람 사이를 자꾸만 빗금이 메운다.
언제부터 거기 서 있었던 거지? 이연의 손끝이 차가워졌다. 들켜선 안 될 것을 보이고 말았다는 낭패감에 아랫입술을 슬쩍 깨물었다.
그때, 먼 거리에서도 이연만 뚫어져라 보던 권채우가 돌연 눈길을 돌렸다. 그녀와 마주 앉아 있는 남자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훑어 내려가는 시선이 차갑고 섬뜩했다. 이연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연 씨?”
상대는 덜컹거리는 테이블 모서리를 붙들었다.
“……저기, 죄송하지만 저는 이만 집에 가야 할 것 같아요.”
“예?”
후다닥 가방을 챙기던 이연이 멈칫, 상대를 바라보았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덩달아 엉덩이를 들썩이는 이분은 죄가 없다. 그녀가 눈썹 끝을 축 늘어뜨리고 입을 열었다.
“저는, 이미 발을 잘못 들였어요.”
“네?”
“저는……, 저보다 더 가족애가 없는 사람이 좋아요. 옛날 여자나 추억 같은 건 전부 까먹었으면 좋겠고, 기왕이면 저처럼 문제가 많은 사람이면 좋겠어요.”
“예?”
남자는 별 희한한 말을 다 듣겠다는 듯 눈을 키웠다.
“이상형이요. 그래야 마음이 편해서요.”
“…….”
“제 치부를 남에게 설명하거나 변명하는 때가 오더라도,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을 사람이면 좋겠어요. 그런데 그런 이해심은 종교계에나 있을 법하니까……. 차라리 상대방한테도 하자가 있으면 수지가 맞을 것 같아요. 저만 책잡히긴 싫거든요.”
“……이연 씨. 그건 좀 위험해 보입니더. 무슨 사정인진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눈을 발바닥에 달아 두면 아이 됩니더.”
그가 엄중하게 지적했고 이연은 내심 끄덕거렸다.
“맞는 말이에요. 보통 벌레 자국이 많은 나무는 하급이죠.”
이연이 가방을 어깨에 둘러매고 허리를 폈다. 일순 그녀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창밖을 향했다. 곧바로 어느 한 곳에 고정되는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런데 밤나무는 예외예요.”
갈색을 띠는 밤나무는 아주 단단하며 그 무게감이 그대로 전달되는 나무였다.
“그 벌레 구멍이 밤나무 무늿결 특징이거든요.”
얼핏 음울해 보였으나 확신에 찬 목소리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이연은 허리를 숙여 꾸벅 인사한 뒤 카페를 나섰다.
하지만 막상 문을 열고 나오니, 헐레벌떡 뛰어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홀로 정물 같던 권채우가 보이지 않았다. 이연은 안절부절못한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급히 그를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옷이 젖는 줄도 모르고 골목골목을 확인하던 참이었다. 누군가 그녀의 팔을 홱 잡아당겼다. 담벼락에 쾅 하고 부딪치는 날개 뼈가 찌르르 아렸다.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익숙한 체취가 먼저 느껴졌다.
“……권채우 씨.”
반투명하게 젖은 하얀 셔츠가 그의 상체에 딱 달라붙어 원치 않아도 몸의 굴곡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더없이 새까매진 머리카락에서 높은 콧대를 타고 빗물이 흘러내렸다.
“나를 버리려는 거죠, 이연 씨는.”
그의 입에서 차가운 입김이 매캐하게 흩어졌다.
“잡내가 진동을 해요.”
권채우가 냄새를 맡듯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 작은 행동에도 이연은 목이 빳빳하게 섰다.
무언가를 예감한 그녀의 몸이 덜덜 떨렸다. 늘 이렇게 궁지에 몰리는 패턴은 이연에게도 퍽 익숙한 것이어서. 그녀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매번 권채우가 휘두르는 대로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번에야말로 이연은 그가 하는 방식을 따라 해 보기로 했다.
“여, 여자가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이 사람 저 사람 만날 수도 있는 거지, 그러는 권채우 씨는 비도 오는데 어딜 다녀와요?”
이연이 눈에 힘을 주었다.
“분명 나간다는 소리 없었잖아요. 또 무슨 짓 했어요?”
목 아래 경동맥이 쿵쿵 세차게 뛰었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는 한심한 꼴이었지만 원래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법이었다. 권채우는 별다른 표정 없이 대답했다.
“신분증 만들고 왔어요.”
“……!”
그러나 상상도 못한 대답에 그녀는 그대로 굳고 말았다. 뭐……? 뭘 만들어? 확 커진 눈가가 팽팽하게 당겨 왔다.
“놀란 것 같네요, 이연 씨.”
“아, 아니, 그게…….”
어느새 비에 푹 젖은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쳐다보기만 했다. 이연은 상대의 생각을 가늠할 수 없어 머릿속이 백지장이 돼 버렸다.
“나로는 도저히 안 되겠어요?”
“……네?”
“그래서 거짓말까지 쳐 가면서 딴 남자를 만나요?”
수렁에서 막 끄집어낸 듯한 목소리였다.
“씹질을 안 해서 그런가. 이연 씨는 가끔 내가 남편인 걸 잊어버리는 것 같아요. 아니면 내가, 준비되지 않은 이연 씨를 강제로 벌리고 짓쳐 들어가기라도 했어야 했나요?”
“……!”
남자의 비틀린 눈빛에 굳어 버린 것도 잠시, 권채우는 한쪽 얼굴을 완전히 일그러뜨리고 그녀의 어깨에 스르륵 무너졌다.
“도저히 전남편이랑 내가 분리가 안 돼요?”
“…….”
“그렇게나 무리였어요?”
그가 고개를 들고 애걸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파고들었다.
“이렇게 사람 속을 진탕 들쑤셔 놓을 만큼?”
그의 흰자위에 시뻘건 핏줄이 서자 이연은 눈에 띄게 몸을 움찔거렸다. 그 선명한 반응에 그가 자조적으로 웃음을 흘렸다.
“알아요, 이연 씨가 필사적으로 감추려고 했던 그 권채우가 얼마나 씨발 새끼였는지. 이연 씨가 나한테 무슨 거짓말을 했는지.”
“……!”
갑작스러운 그 말에 이연은 숨도 쉬지 못했다. 몸속 어딘가가 차갑게 꿰뚫리는 듯해 순간 넋이 빠져 버렸다.
“어, 어떻게…….”
뭔가 기억이 난 건가? 과거가 떠올랐나? 그날 밤이 생각나 버렸나? 그가 뭘 파묻고 있었는지도? 이연의 머릿속이 엉망진창으로 꼬이는 순간, 그가 재차 압박해 왔다.
“우리 빙빙 돌려 말하는 건 이제 그만해요.”
“…….”
“이연 씨, 나 안 좋아하잖아요.”
“……네?”
“내가 모를 줄 알았어요?”
이연은 계속해서 까발려지는 거짓말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아내한테 손찌검이나 하던 무능력한 쓰레기를 언제 버릴지, 어떻게 버릴지, 그 생각만 하고 있었대도 이해는 해요.”
“무, 무슨……. 손찌검이요?”
이연은 난데없는 단어에 눈꺼풀을 빠르게 깜빡였다.
“그런데 생각할수록 억울해 미치겠어서. 나는 이제 시작인데 누구는 끝을 보았대. 이연 씨 같으면 순순히 납득할 수 있어요?”
그가 건조하게 피식 웃었다. 그러나 비꼬는 것 같진 않았다.
“그래서 미안해요.”
권채우는 눈썹을 와락 찡그렸다 도로 빠르게 되돌렸다.
“나는 이연 씨랑 제대로 끝까지 가 볼 생각이라.”
“…….”
“안됐지만 배려는 이 순간부터 끝이에요.”
그의 큼지막한 손이 이연의 허리를 아프게 움켜쥐었다. 떨어지는 빗방울을 싹 증발시킬 만한 열기가 그의 두 눈동자에서 펄펄 들끓었다. 이연은 어느새 차가워진 손으로 옷자락을 꽉 쥐었다.
“……나, 나는 권채우 씨한테 맞고 살지 않았어요……! 그거 오해예요. 어쩌다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래서 한 번도 없다?”
이연의 입이 벌어지려다가 말았다. 초면에 뭐 한 번 정도는…….
권채우는 어색하게 눈동자를 돌린 그녀의 턱을 붙들고 억지로 시선을 맞춰왔다. 그는 당장이라도 입술을 가르고 들어갈 것처럼 고개를 급격히 내리고 읊조렸다. 소이연이 제 손에 잡힐 듯 말 듯했다.
“말해 봐요, 그럼 왜 그렇게 나를 무서워했는지.”
“…….”
“처음 의식이 깨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왜 아직도 나를 ‘권채우 씨’라고 부르고, 틈만 나면 거리를 벌리거나 발을 빼려고 하는지. 나는 꼭 들어야겠어요, 지금 이 자리에서.”
흠뻑 젖은 얼굴은 처연하기는커녕 매섭기만 했다. 선명한 눈초리와 날카로운 압박에 이연은 그의 말마따나 도망이라도 치고 싶었다. 얼굴에 부딪히는 빗줄기가 따끔거렸다.
“그게…… 그건…….”
그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이연을 주시했다.
공포와 설렘을 구분해 보려던 그녀의 작고 무용했던 시도는 이렇듯 꼬리가 잡히면서 또다시 질질 끌려가게 되었다.
권채우를 발견한 순간부터 심장은 발작하듯 방망이질을 해 댔고, 그럴 때마다 이연이 그어 놓은 선을 자꾸만 짓뭉개고 흩트려 놓았다. 무서운데 반갑고, 무서운데 필요한. 그런 말도 안 되는 것들을 하나로 뭉쳐놓겠다는 듯 찧고 또 찧어댔다.
“나한테 대체 뭘 숨기는 거예요.”
문제는 감정에 비례하여 자라는 게 죄책감이라는 것이다.
“그, 그건 내가 권채우 씨를 속여서 그래요……!”
“속여요?”
“우리…… 혼인 신고를 안 했어요!”
그녀가 눈을 질끈 감고 힘주어 외쳤다. 결국 마음이 흔들리고 만 이연이 최초로 진실을 토해 낸 순간이었다.
쏴아아―.
쉬지 않고 쏟아지는 빗줄기가 이연의 속눈썹을 적셨다. 찰나의 정적이 지나가고, 그녀가 한쪽 눈을 조심스럽게 떴다.
그러자 그곳엔―
“……!”
양 입꼬리를 쫙 찢어 웃고 있는 권채우가 있었다.
예상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반응에 젖은 블라우스 사이로 소름이 끼쳤다. 저 표정은 놀라움이나 충격이 아니었다.
오히려…….
우연찮게 또 다른 거짓말을 목도해 버린, 안 그래도 사냥의 순간만 잔뜩 벼르고 있던 남자가 매끈한 총신을 쓰다듬으며 터트리는 웃음이었다.
“너, 좋은 말로 해서는 안 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