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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가이드가 좀비 세상에서 살아남는 법 (130)화 (130/133)

130.

그 때문에 정강필은 이현에게 섣불리 다가가지 못했다. 죽일 기회가 여러 번 있었는데도 망설여야만 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한수호 때문에.

“너는 나한테 이러면 안 된다. 내가 널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강필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한수호가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이 그림자를 움직여 그의 입을 재차 막아서였다.

“으으읍……!”

정강필이 사지를 버둥거렸다. 그러나 반항은 반항으로만 그쳤다. 한수호는 손쉽게 정강필을 철제 침대 위로 올렸다.

그의 손목에 구속구가 채워져 있는 한 그는 에스퍼의 마력조차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보잘것없는 중년 남성일 뿐이었다.

S급 에스퍼인 만큼 그를 구속하는 아티팩트가 그의 마력을 완전히 억누르지는 못했다.

문제는 정강필의 몸이 극도로 쇠약해져 있다는 거였다. 남을 탓할 수도 없었다.

모두 다 그가 스스로에게 행한 실험이 원인이었다. 포위망이 좁혀 올수록 느긋하게 실험을 진행할 수가 없었다.

S급 에스퍼를 잡아 와 실험해야 하지만, S급 에스퍼는 정강필이 하프 좀비 무리를 장악하고 일부 에스퍼들을 제 편으로 만들었을 때에도 사로잡지 못한 존재였다.

정강필은 결국 스스로의 몸에 실험을 해야만 했다.

실험은 효과가 있는 듯하면서도 여러 부작용을 일으켰다. 그중 하나가 마력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게 어려워졌다는 거다.

임시방편으로 도플갱어까지 이용해 봤으나 서동연의 힘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그 결과, 정강필은 서동연을 마주친 후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억울했다. 자신은 이런 꼴을 당하려고 지금까지 수많은 노력을 해 온 게 아니었다.

“흐으으……!”

제 의지에 반응하는 마력을 죽을힘을 다해 끌어올렸다. 전기뱀장어라도 된 것처럼 정강필의 몸 곳곳에서 섬광이 번쩍였다.

구속구에 중점적으로 마력을 흘려 넣었다. 정강필이 필사적으로 쏟아 넣은 마력에 구속구 위로 파지직 금이 가기 시작했다.

“흐으, 으으…….”

마침내 구속구가 손목에서 떨어져 나갔을 때 정강필이 실핏줄이 다 터진 얼굴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서동연과 하프 좀비들의 이목을 피해 조금씩 구속구에 마력을 흘려 넣은 결과였다. 구속구가 풀리자 봇물이 터지듯이 엄청난 마력이 몸 곳곳을 휘돌았다.

“윽…….”

정강필이 입술을 짓씹었다. 온몸에 수놓인 상처들이 조금씩 아물어 가면서 엄청난 고통을 동반했다.

“커억……!”

그러나 정강필의 발악은 오래가지 못했다. 마치 뒤집어진 벌레가 버둥거리는 모습을 지켜보듯 무감한 눈빛으로 그를 살피던 한수호가 움직였기 때문이다.

“제가 대부님을 위해 준비해 둔 구속구입니다.”

방금 전에 간신히 손목을 구속하고 있던 아티팩트를 부서뜨렸다. 그런데 일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정강필의 목 위로 그보다 훨씬 더 두껍고 단단한 아티팩트가 채워졌다.

“으읍……!”

정강필이 흰자위가 새빨갛게 충혈되도록 눈에 힘을 줬다. 아직은 자유로운 손을 뻗어 한수호의 멱살을 잡으려고 했으나 곧 사지마저도 철제 침대와 연결된 구속구에 고정되어 버렸다.

“그거 아십니까? 이현이가 좀비 치료제를 개발했어요. 아무도 못 했던 일을 해낸 거죠.”

정강필을 볼 때는 감정의 편린조차 비치지 않았는데 이현의 이름을 입에 올린 순간 거짓말처럼 조각 같은 얼굴 위로 온풍이 불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철제 침대가 연신 덜컹거리는 소리를 냈다. 목과 팔목, 발목에 구속구가 채워진 정강필이 몸통을 들썩거리면서 내는 소리였다.

실험실 안을 가득 채우는 소리에도 한수호의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맺혀 있었다.

“좀비 치료제를 만들려면 이현이의 피가 꼭 필요해요. 계속해서 연구하다 보면 대체제를 찾을 수 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이현이의 피가 없으면 치료제를 만드는 건 불가능합니다.”

한수호가 깨끗한 거즈를 들어 그 위에 식염수를 콸콸 부었다. 그 후 정강필의 얼굴부터 옷 위로 드러난 부분들까지 깨끗하게 닦아 냈다.

한수호의 발치로 새하얀 색을 잃어버린 거즈들이 뭉텅이로 쌓여 갔다.

“이현이 성격상 몸에 무리가 간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해서 피를 뽑을 겁니다. 아마도 최소한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모든 이들이 좀비 치료제를 맞을 때까지는.”

검녹빛 눈동자가 우울하게 가라앉았다. 이현, 그 아이 자체를 사랑하지만 가끔은 그가 조금이라도 좋으니 이기적으로 행동하기를 바라게 된다.

하지만 이현은 그럴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알기에 한수호는 이현의 손에 칼을 쥐여 주는 대신 제가 칼 자체가 되기로 했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쩌면 대부님의 피가 이현이의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정강필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한수호가 이현에게 얼마나 미쳐 있는지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를 위해 자신에게 이토록 잔인하게 굴 줄은 몰랐다.

어느새 정강필은 온몸이 깨끗하게 닦인 채 실험복을 몸에 걸치고 있었다. 그가 수많은 사람과 하프 좀비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밀폐된 실험실 안은 지하실 특유의 퀴퀴한 냄새가 났다. 바람이 불어올 리 없다는 걸 아는데도 몸 위를 싸늘한 바람이 할퀴고 지나가는 듯했다.

몸이 오들오들 떨렸다. 만약 입에 구속구가 채워져 있지 않다면 이가 딱딱 소리를 내면서 부딪쳤을 정도로.

“흡……!”

정강필의 목을 가로지르는 핏줄을 굵직한 주삿바늘이 무자비하게 꿰뚫었다.

“너무 억울해하지 마세요. 대부님이 이현이를 비롯해 수많은 이들에게 했던 짓이니까.”

투명하던 주사기의 몸통이 검붉은 핏물로 채워져 갔다. 거대한 주사기 안이 가득 채워지고 나서야 한수호는 주삿바늘을 빼냈다.

“부디 대부님의 피가 이현이의 것과 비슷하기를 기도하세요. 그래야 질긴 목숨 자연사할 때까지 이어 갈 수 있을 테니까요.”

소독솜을 들어 피가 송골송골 맺혀 든 부위를 지그시 누른 한수호가 정강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겼다.

“또 오겠습니다. 그때까지 한숨 주무시고 계세요.”

“으으읍……!”

코를 덮어 오는 가제 수건에 정강필이 한사코 고개를 돌리려고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속눈썹이 느릿하게 내려앉았다.

이어 덜컹거리던 철제 침대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닫힌 정강필의 눈꺼풀을 들어 올려 동공 반응까지 확인한 한수호가 손에 주사기를 든 채 몸을 돌렸다.

지하 공간에 만들어 놓은 실험실은 한수호의 홍채와 지문, 그리고 영문과 숫자로 조합된 열두 자리의 비밀번호까지 입력해야 드나들 수 있었다.

한수호가 빠져나간 실험실 안에는 일정하게 흘러나오는 숨소리만이 들렸다.

* * *

“형, 이거 어디서 발견했어요?”

“하늘에 대고 소원을 빌었어. 이현이 피를 대신할 만한 걸 찾게 해 달라고.”

“그게 뭐예요.”

실없는 농담처럼 한수호의 입술을 빌려 흘러나온 말에 이현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자신은 심각한데 한수호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아서였다.

“출처는 말 못 해. 하지만 누구에게 해를 끼치는 건 아니야. 그러니까 이걸로 치료제도 만들고, 실험도 해 보자.”

한수호가 이현의 이마에 제 이마를 가벼이 맞대고 가느다란 허리를 끌어안았다.

서로의 눈에 박힌 홍채의 문양마저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실험실 특유의 여러 약물 냄새 속에서도 상대방의 체향은 숨을 쉴 때마다 폐부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었다.

키 차이가 나는 탓에 이현의 허리가 가볍게 뒤로 넘어갔다. 자칫 몸이 자빠질 만큼 위태로운 자세였지만 불안한 마음은 일절 들지 않았다.

여러 겹의 천을 넘어 느껴지는 단단한 팔이 자신을 안전하게 지탱해 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똑같은 DNA 구조가 있을 리가 없는데……. 불가능한 일…….”

이현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입술 위로 가볍게 닿은 폭신한 감촉이 말문을 막았다.

숱 많은 속눈썹이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파르르 떨렸다. 여러 번 입을 맞췄는데도 숨결을 나눌 때마다 긴장하는 이현을 보며 한수호의 눈매가 둥글게 휘어졌다.

“궁금한 거 알아. 그래도 지금은 서로에게만 집중하자. 어때?”

한수호가 이현에게 건넨 건 정강필의 피였다. 정강필은 공식적으로 처형을 당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는 머리와 몸통이 분리됐다. 시체는 한수호가 수거해 화장했다.

유골이 담긴 함은 에스퍼 전용 감옥에 안치됐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독방이었다.

“……알겠어요.”

이현은 한수호에게 묻고 싶은 것들이 많았으나 지금은 복잡한 생각은 뒤로하고 달큼한 숨결만을 나누고 싶었다.

오랜 시간 너무 깜깜한 암흑 속을 헤맸다.

정강필이 죽었다고 해서 허무하게 스러져 간 생명들이 다시 살아나진 않는다. 지금도 여전히 협회 정문에서는 죄를 지은 이들을 강력하게 처벌해 달라는 시위가 하루가 멀다 하고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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