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
“솔이도 무사히 돌아왔으니까 안에 들어가자. 서동연 도착하려면 시간 좀 걸려.”
이현은 원래도 피부가 하얀 편이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피를 뽑아 댄 이후로는 창백하게 질린 인상을 완전히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도 김솔이 사라졌다는 말에 크게 놀란 탓인지 안색이 좋지 않았다.
한수호가 한쪽 팔로는 김솔을 단단하게 받치고 다른 쪽 팔을 뻗었다. 이현이 쭈뼛거리며 그에게 다가와 몸을 기댔다.
이현의 허리를 단단한 팔이 휘감았다. 거의 발끝이 들린 채 한수호와 함께 걸어가는 이현을 보며 진표성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꼴을 평생 봐야 한다니.”
* * *
“신부야!”
서동연이 꼬질꼬질한 얼굴로도 환하게 웃으며 이현 앞으로 한달음에 달려왔다. 그 모습이 진흙탕을 뒹굴고 달려오는 대형견 같았다.
“아,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에요.”
뒷걸음질 치고 싶을 만큼 박력 넘치는 인사에 이현이 어색한 동작으로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나 안 보고 싶었어? 나는 신부 보고 싶어서 잠도 못 잘 정도였는데!”
……솔직히 서동연보다는 그가 데려올 정강필에게 더 큰 관심이 있었다. 정강필을 잡아들이는 일까지 마쳐야 고됐던 전쟁을 드디어 끝마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저도…… 보고 싶었죠.”
하지만 이현은 머리를 빠르게 굴려 적당한 말을 골랐다. 솔직하게 대답했다가는 서동연의 반짝거리는 눈동자가 어떤 식으로 돌아 버릴지 예상이 갔으니까.
이현의 둥그런 눈동자가 서동연의 왼손에 뒷덜미가 잡혀 있는 정강필에게로 향했다.
“흐으…….”
원래 이목구비를 알아보기도 힘들 만큼 얼굴이 뭉개진 터라 이현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한층 더 짙어졌다.
S급 에스퍼는 일반 사람보다도 훨씬 더 회복력이 빠르다.
팔에 든 멍도 반나절만 지나면 감쪽같이 사라질 정도였다. 도대체 어떻게 사람을 때렸길래 이 정도로 얼굴이 엉망인가 의문이 들었다.
그러다 등 뒤로 묶인 채 정강필의 손목에 채워진 거무튀튀한 아티팩트가 보였다. 능력자용 구속구였다.
그제야 정강필이 이토록 무력하게 붙잡혀 있는 게 이해가 갔다.
퉁퉁 부어오른 눈꺼풀 사이로 희미하게 드러난 눈동자가 이현의 얼굴에 닿았다.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서도 기묘한 빛이 번뜩거려 이현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일단 이 새끼 좀 건네주고 올게. 아주 얼굴이 뚫어지겠어.”
서동연이 가볍게 이현의 정수리를 스치듯이 쓰다듬으며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부담스러운 표정에 이현이 눈을 휘어 웃은 상태 그대로 한쪽에 비켜섰다.
정강필은 곧 서동연의 손에서 한수호에게 넘어갔다. 이현이 걱정스러운 눈길로 한수호를 살폈다.
그에게 정강필이 어떤 존재인지 잘 아는 탓이었다. 피는 섞이지 않았어도 부모와 같던 이였다.
하지만 정강필을 내려다보는 한수호의 얼굴은 표정이라고는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이현은 오히려 그 얼굴이 더 안쓰러웠다.
차라리 감정의 편린이라도 드러내는 게 낫겠다 싶을 만큼.
“신부, 나 배고파. 맛있는 거 없어?”
서동연은 오랜 시간 짊어지고 온 무거운 짐을 처리하듯 홀가분한 표정으로 다시 이현에게 다가왔다.
이현이 한수호가 걱정되는 마음에 그에게 향하려 할 때였다. 서동연이 이현의 팔을 붙들고 고개를 저었다.
“쟤가 나한테 너 부탁한다고 했어.”
“한수호 팀장님이요?”
“응.”
다른 사람들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는 이현도 한수호를 부르는 호칭을 조심했다. 공과 사를 구별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서동연이 의외의 말을 했다. 언제 그런 대화를 나눈 건지. 한수호가 그에게 이현을 부탁했다고 했다.
아마 한수호는 정강필을 대하는 제 모습을 이현에게 보여 주기 싫은 모양이었다.
이현이 어느새 훌쩍 멀어져 버린 한수호의 등을 끝까지 바라봤으나 한수호는 코너를 돌아서 사라질 때까지 돌아보지 않았다.
* * *
“오랜만입니다. 대부님.”
한수호는 정강필을 예전처럼 대부님이라 불렀다. 푸줏간에 걸린 고기처럼 끌려오면서도 눈빛만은 죽지 않았던 정강필이 한수호의 목소리에 고개를 푹 수그렸다.
한수호의 눈에는 항상 강하게만 보였던 사람이다. 그런 이가 지금 추레한 몰골로 죄인처럼 몸을 옹송그리고 있었다.
“만약 대부님께서 이현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건드렸다면…….”
양심에 반하는 일일지라도 한수호는 어떻게든 정강필을 살리기 위해 애썼을지도 모른다.
날카로운 코끝을 타고 흘러나온 숨이 땅거미처럼 늘어졌다.
“이미 다 지나간 일을 말해서 뭐 하겠습니까. 과거는 과거 그대로 두어야 한다.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오로지 현재와 다가올 미래다. 대부님께서 제게 종종 해 주셨던 말씀입니다. 기억하십니까?”
한수호가 철제 침대 위를 검지손가락 끝으로 매만지며 어느새 아련해진 추억 하나를 떠올렸다.
호탕하게 웃으면서 말하던 얼굴이 지금도 눈에 선했다. 기억과 달리 현재 정강필은 그때의 기개를 모두 다 잃어버린 상태였지만.
“으읍……!”
정강필의 입에는 재갈마저 채워져 있었다. 여러 번 혀를 깨문 듯 완전히 다물어지지 않는 입가에 말라붙은 핏자국이 가득했다.
한수호가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그가 고개를 좌우로 격하게 저었다.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게 있는 사람처럼 한수호를 간절한 눈동자로 올려다보기까지 했다.
어둑한 그림자가 정강필의 발치에서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정강필의 숨통이 트였다.
“……수호야.”
한수호가 이토록 쉽게 제 부탁을 들어줄 줄 몰랐다. 정강필이 떨리는 숨을 애써 다독이며 무릎걸음으로 한수호에게 다가갔다.
서동연이 이곳까지 오면서 심심할 때마다 다리를 짓뭉개 놨던 탓에 그가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질척한 핏자국이 길게 이어졌다.
“너는…… 나를 이해해 줘야 해. 내가 어떤 심정으로 이 모든 일을 벌였는지.”
입 안이 바짝 타들어 갔다. 정강필이 피 섞인 침을 삼키며 절절한 심정을 담아 한수호를 설득했다.
“에스퍼들이 아무리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해도, 나이 들면 약해지기 마련이야.”
이마 위에 맺힌 식은땀이 방울처럼 흘러내려 정강필의 눈가를 적셨다. 그 모습이 꼭 참회의 눈물을 흘리는 수도승처럼 보였다. 우습게도.
“좀비들의 수는 계속해서 늘어나고, 사람들은 에스퍼에게만 기대하지. 본인들은 아무런 능력도 없으면서 에스퍼들을 사지로 밀어 내기만 했다.”
정강필의 눈동자가 탁하게 흐려졌다. 처음에는 그도 에스퍼의 능력을 활용해 많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천 명을 구해 내도 한 명을 잃으면, 그 한 명의 목숨값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았다.
“그런데 하프 좀비가 나타났어. 나는 이게 기회라는 걸 깨달았다. 에스퍼가 하프 좀비의 능력까지 얻으면 좀비 사태도 모두 해결될 거라고 믿었어.”
정강필은 진심으로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이 결국에는 인류를 구원하는 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자신의 신념에 인생을 모두 건 자 특유의 광기가 초췌한 얼굴 위로 여실히 드리워졌다.
“이현이는 하늘이 우리에게 내려 준 기회야.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된다. 수호, 네가 이현이를 많이 아낀다는 걸 알지만, 역사를 봐도 대의를 위해서 작은 희생은 항상 필요했어.”
정강필도 가끔은 이현이 아니라 한수호와 연이 닿지 않은 이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하고는 했다.
한수호는 천애 고아로 살아온 정강필이 유일하게 제 선 안으로 받아들인 존재였다.
정말로 아들처럼 귀히 여겼다. 자신이 불로불사의 비밀을 얻게 되면 제가 손에 넣은 모든 것을 한수호에게도 나눠 줄 생각이었다.
“이현이한테 한 일은…… 미안하다. 하지만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같은 선택을 했을 거야.”
한두 해 생각해서 시도한 일이 아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정강필은 멸망을 향해 걸어가는 인류를 보면서 안타까운 심정을 금치 못했다.
무지몽매한 인간들을 볼 때는 혐오감이 들다가도 그들이 보는 세상은 아주 좁다는 걸 인정하고 나서야 미약한 연민이 들었다.
“그러니 수호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나랑 같이 인류의 구원자가 되자.”
손이 묶여 있지 않았다면 정강필은 지금 한수호에게 손가락이 군데군데 잘려 나간 손을 뻗었을 거다.
한수호가 입에 물린 재갈만 풀어 줘 그는 여전히 사지가 속박된 상태였다.
정강필은 대신 눈조차 깜박이지 않은 채로 한수호를 강렬하게 올려다봤다. 제 마음이 그에게 전해지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아.
“개소리는 잘 들었습니다.”
“수호야!”
말을 끝마칠 때까지 한수호는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눈을 느릿하게 깜박이기만 했다. 정강필은 그걸 청신호로 받아들였다.
오랜 시간 곁에서 지켜봐 온 만큼 정강필은 세상에서 한수호의 이면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
한수호는 시간 낭비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듣기 싫은 내용이었다면 초반부터 정강필의 입을 막아 버렸을 거다.
사회적인 가면을 쓰고 잘 생활하는 것처럼 보여도 한수호의 머릿속은 어딘가 비틀어져 있었다.
그의 세상은 이현을 중심으로만 돌아간다. 만약 이현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한수호는 망설임 없이 제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