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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가이드가 좀비 세상에서 살아남는 법 (121)화 (121/133)

121.

그러나 한수호는 진표성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쓰다듬는 것으로 그의 걱정에 대한 대답을 대신했다.

“가자. 이현이 걱정하겠다.”

한수호의 머릿속은 온통 이현이었다. 지금쯤 이현은 안절부절못하며 손가락을 물어뜯고 있을지 모른다.

치료 약에 대한 확신이 있어도 한수호가 멀쩡하다는 걸 제 눈으로 확인하지 않는 이상 계속 걱정하고 있을 테니까.

“진짜 팀장 이럴 때마다 내가 그동안 알고 지낸 사람이 맞는지 의심하게 된다니까.”

진표성이 할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푸욱 내쉬며 벌써 저만치 멀어진 한수호의 뒤를 서둘러 쫓아갔다.

기본적으로 타인의 감정에 무심하던 사람이 이현의 일이라면 물가에 어린아이를 내놓은 부모인 양 노심초사한다.

그 전에는 그래도 숨기는 시늉이라도 하더니 이현이 과거에 대해 기억한 후부터는 그 정도가 심해졌다.

그러는 그도 한수호처럼 이현이 걱정하고 있을까 봐 발걸음의 속도를 계속해서 높인다는 사실은 자각하지 못했다.

* * *

“진짜, 진짜 다행이에요…….”

“이현아!”

이현이 바닥에 주저앉자 한수호가 재빨리 그의 허리를 감싸 안아 부축했다. 이현은 한수호와 진표성이 실험실에서 나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얼빠졌던 정신을 추슬렀다.

입술에 남은 감촉이 서서히 흐려지니 한수호에 대한 걱정으로 가만있을 수 없었다. 그길로 연구소 바깥으로 나가 1층에서 서성거렸다.

저 멀리서 한수호와 진표성이 오는 걸 보는 순간부터 시야가 부옇게 흐려졌다. 일반적인 속도가 아니었다.

치료제가 정말로 효과가 있는지 실험을 하러 떠나갔다가 돌아오는 거였다. 그런데도 한수호는 멀쩡히 마력을 사용하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이 완성하고자 매달렸지만 결코 성공하지 못했던 좀비 바이러스 치료제를 자신이 만들어 냈다는 성취감은 생각보다 그리 크지 않았다. 한수호가 멀쩡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난 뒤에 느껴지는 안도감이 더욱 컸다.

“어디 이상한 데는 없어요? 사지 멀쩡하게 움직이는 거 맞죠? 마력도 제대로 움직이고.”

이현이 떨리는 손을 들어 한수호의 볼을 감싸 쥐고 그의 눈동자를 깊게 들여다봤다.

다른 손으로는 한수호의 팔다리가 멀쩡히 붙어 있는지 확인하느라 단단한 몸 곳곳을 주물럭거렸다.

“응. 괜찮아. 그러니까 이제 안심해도 돼.”

자신을 걱정해 주는 이현을 보는 건 기분 좋았지만 그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반응하려는 신체가 문제였다.

한수호가 새까만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이마 뒤로 쓸어 넘겼다. 동그란 이마 위에 제 이마를 맞대고 온기를 전해 줬다.

그제야 연신 거칠게 들썩거리던 이현의 가슴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맨날 둘이서 영화나 찍고.”

진표성이 불만스럽게 입술을 삐죽거리며 워커 앞코로 바닥을 툭툭 쳤다. 가볍게 두들기는 것처럼 보여도 그때마다 콘크리트 바닥에 움푹 홈이 파였다.

근처에서 놀고 있던 아이들이 신기해하면서도 두려운 표정으로 갈라지는 땅을 들여다봤다.

“동료들한테 연락해야겠어. 서동연한테도 얼마나 일이 진척됐는지 물어보고.”

마지막으로 연락했을 때 서동연은 분명 정강필의 꼬리를 밟았다고 했다. 하지만 정강필은 알파 1팀과 서동연이 압박했을 때도 유유히 포위망을 빠져나간 인물이었다.

그를 감옥에라도 처넣지 않는 이상 안심할 수 없었다. 이대로 자취를 완전히 감춰 버리면 언제까지고 불안함에 시달리며 살아야 한다.

제 야욕을 십 년 가까운 세월 동안 숨긴 사람이었다.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래됐을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인 만큼 이번에도 놓친다면 아예 해외로 잠적했다가 또 기상천외한 모략을 써서 되돌아올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그래요. 저는 최대한 많이 치료제를 만들어 볼게요.”

“……절대 무리하지 마. 나한테는 이현이 네 안위가 가장 중요해.”

좀비 치료제를 완성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반드시 이현의 피가 필요했다. 피라는 게 회복 포션을 마신다고 해서 뚝딱 만들어지는 게 아니었다.

회복 포션을 남용하는 것 자체도 몸에 무리가 가는 일이었고.

“너무 걱정하지 마요. 저도 형이랑 오래오래 함께 살고 싶어요.”

아주 오랜 시간 어둠 속을 헤매며 살아왔다. 이현의 삶은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실험대 위에 올려졌던 스무 살에 멈춰져 있었다.

지금은 스물여덟 살이나 먹었지만 정신은 기억의 공백을 극복하지 못하고 심각한 트라우마에 시달렸었다.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도 가끔씩 땅이 꺼지는 듯한 아찔한 부유감을 느껴야만 했다.

기억을 되찾고 나서야 망가진 톱니바퀴처럼 멈췄던 삶이 다시금 제대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이현이 발뒤꿈치를 들어 한수호의 입술을 가볍게 훔쳤다. 놀란 듯 희미하게 떨리는 눈동자에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절대 무리하지 않고 방법을 계속해서 찾아볼게요. 완성품은 만들어진 상황이니까.”

이론과 실제는 엄연히 다른 영역이었다.

그런데 한수호가 좀비 치료제가 정말로 효과가 있다는 걸 증명해 줬다.

“혹시 모르니 들어가서 한번 검사해 봐요. 그래 줄 수 있죠?”

한수호가 괜찮다고 하고, 이현이 봐도 그는 달라진 게 없었다. 그래도 모르는 일이었다. 한수호는 계속 추적검사를 받아야만 했다.

“응.”

“좀비한테 물린 부위, 여기 맞죠?”

이현의 눈동자가 핏자국이 남아 있는 한수호의 손에 닿았다. 흔적이 꼭 잇자국처럼 보였다.

안쓰러운 손길로 손등을 매만지자 한수호가 이현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제 손가락을 엮었다.

“일단 안쪽으로 들어가자.”

두 사람이 애틋한 모습을 보이니 주변으로 사람들이 슬금슬금 몰려들었다. 생존자들에게 에스퍼들과 이현의 존재는 그들을 지켜 줄 영웅이나 마찬가지였다.

두려운 존재ㅇㅣ면서도 선망과 존경의 대상이었다. 특히 어른들보다 때가 덜 묻은 아이들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진표성이 이현과 한수호의 다정한 모습에 바닥을 엉망으로 만드는 모습을 본 뒤에는 두려움도 잊었다.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진표성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용사님이야…….”

“코믹 레인저 레드 같아.”

“……TV 보고 싶다.”

귓가로 날아드는 아이들의 대화 소리에 진표성도 서둘러 이현과 한수호의 뒤를 따라 연구소 안쪽으로 들어갔다. 밝은 햇살 아래 드러난 귓바퀴가 새빨갰다.

* * *

“아, 분명 방금 전까지 여기에 있었던 게 확실한데.”

서동연이 코를 킁킁거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하프 좀비는 신체 능력이 뛰어난 만큼 후각도 웬만한 에스퍼보다 발달했다.

꿈에서도 놈을 죽일 정도로 하도 정강필을 증오했더니 이제는 그의 체취마저 강렬하게 머릿속에 남아 버렸다.

“대장, 흩어져서 찾아볼까요?”

“위험하지. 너네는 그 새끼랑 마주친 순간 대가리가 터질 텐데.”

하프 좀비 중 하나가 서동연에게 다가와 물었으나 서동연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많은 일을 겪은 후라 이제 서동연은 제법 동료를 아낄 줄 알게 되었다.

지금 곁에 서 있는 이들은 이건오가 반란을 일으킨 후에도 그에게 붙지 않고 서동연에 대한 의리를 지켰다.

그러니 아무리 서동연이라도 예전처럼 동료들을 사지로 쉽게 밀어 넣는 건 꺼려지는 일이었다.

“그냥 내 뒤에 따라붙어.”

“네.”

서동연이 이곳까지 데리고 온 놈들은 살아남은 하프 좀비들 중에서도 능력이 강한 자들이었다.

최대 속도로 달리는데도 하프 좀비들은 뒤처지지 않고 서동연의 뒤를 곧잘 따라붙었다.

“도대체 얼마나 죽여 놓은 거야. 이 새끼 이거, 나보다 더한 악질이라니까.”

정강필의 뒤를 쫓는 길에는 여지없이 사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다양하기도 했다.

사람뿐만 아니라 능력자부터 시작해서 일반 좀비와 하프 좀비, 그리고 좀비 몬스터까지.

다들 생김새는 다르지만 공통점은 있었다. 하나같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얼굴로 숨이 끊어졌다는 것.

서동연도 꽤 목숨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정강필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가 죽인 존재를 쌓으면 작은 동산을 이룰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저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습니다.”

“응. 나도 들었어.”

빠른 속도로 잔해들을 헤치면서 지나갈 즈음 이질적인 소리가 서동연의 귀에 잡혔다.

미약하지만 비닐 조각이 발아래 밟히는 듯한 소리였다. 서동연과 하프 좀비들 중 일부의 고개가 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향해 휙 돌아갔다.

“다들 소리 죽여.”

서동연이 앞장서서 수상한 기척이 느껴지는 곳으로 움직였다. 하프 좀비들도 숨을 죽인 채로 그의 뒤를 쫓아갔다.

“……피 냄새.”

희미하지만 비릿하면서도 향긋한 내음이 코끝에 스쳤다. 분명 사람의 피 냄새였다. 그것도 희미하게 마력이 느껴지는.

“찾았다. 쥐새끼 같은 놈.”

서동연의 양 입꼬리가 귓가에 닿을 듯 올라갔다. 지금 같아서는 정강필을 보자마자 그의 심장을 산 채로 뜯어내 우걱우걱 씹어 먹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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