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5.
체력이 진짜…… 개복치라 불려도 할 말이 없었다. 이현이 중심을 잡기 위해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 순간 이현의 발치에서 일어난 그림자가 안전하게 이현을 받아 냈다.
손바닥에서 무기질의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좀비를 가까이에서 볼 때와는 다른 두려움이 가슴 속에 번져나갔다. 이현이 동요한 사실을 티내지 않기 위해 천천히 숨을 골랐다.
“가이드님, 진짜 무리했나 봐요…….”
어지럼증이 한결 가라앉고 나서야 이현은 눈을 떴다. 마지막으로 가이딩했던 황두학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이현을 살피고 있었다.
그림자는 이현이 제대로 자리에 서고 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바닥으로 스며들며 사라졌다.
“다들 걱정 끼쳐 드려서 죄송합니다.”
이현이 알파 1팀에게 고개를 숙여 사과를 건넸다. 안 그래도 자신을 배려해 알파 1팀은 중간중간 휴식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 이 아파트에 들어온 것도 구조한 아이 때문이기도 하지만, 제 체력을 걱정해서 내린 결정이라는 걸 알았다.
팀원들이 대화 도중 지금까지 임무 중에서 가장 휴식 시간이 많다고 말하는 것만 봐도 그랬다.
임무의 성공률은 시간을 단축할수록 높아진다. 그런데 이현 자신 때문에 한수호는 최대한 천천히 임무를 수행하는 중이었다.
“무슨 사과를 하고 그래. 그쪽 아니고 다른 가이드였어도 우린 지금처럼 행동했을걸. 팀장의 행동이 좀 유별나기는 한 것 같지만.”
진표성이 어깨를 으쓱이며 이현의 부담을 덜어 주는 말을 했다. 이현은 첫인상과 달리 진표성이 감정에 솔직할 뿐 천성은 나쁘지 않다는 걸 알게 됐다.
“그렇게 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잔잔한 미소와 함께 건넨 감사 인사에 진표성이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잘생긴 귀 끝이 은은하게 붉어졌다.
“생긴 거랑 다르게 쑥스러움은 또 많아 가지고. 넌 가끔 한 번씩 귀여운 짓을 하더라.”
“하지 마라.”
이나리가 건수를 잡았다는 듯이 진표성을 놀리기 시작했다. 거실 안은 금세 시끌벅적해졌다.
이현은 사이가 좋아 보이는 진표성과 이나리를 흐뭇하게 한 번씩 바라본 후에 김솔이 잠들어 있는 침실로 향했다.
“으흐, 으…….”
그러다 아이가 몸을 웅크리고 몸을 덜덜 떨고 있는 걸 발견했다.
“솔아!”
이현이 서둘러 아이에게 다가가 이마를 짚었다.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열기가 심상치 않았다. 이현이 아이의 몸을 덮고 있던 이불을 젖혔다.
아이의 옷은 이미 땀에 푸욱 젖은 채 여린 살갗에 들러붙어 있었다.
자그마한 손과 발이 바들바들 떨렸다.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눈을 반쯤 뜬 아이의 눈동자 초점이 흐릿했다.
열성경련이었다. 이현이 김솔의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아이의 몸을 주무르는 건 좋지 않기에 이현은 애타는 목소리로 김솔의 이름을 불렀다.
해열제도 아이가 의식을 차린 이후에 먹이는 게 좋다.
“솔아, 아저씨 왔어. 늦게 와서 미안해.”
아이가 아플 수도 있다는 걸 미리 예상해야 했다. 잠든 모습만 확인하고 자리를 비웠던 행동이 후회됐다.
경련이 지속되면 뇌 손상이 올 수도 있다. 가장 좋은 건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는 거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솔이가 열이 많이 나나요?”
“아…….”
이현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 임태한이 손에 무언가를 들고 이현의 곁에 다가왔다.
“해열제예요.”
임태한은 놀란 이현과 달리 침착하게 김솔의 상태를 살폈다. 이나리가 서둘러 가져다준 수건으로 뜨거운 얼굴과 팔다리를 닦아 내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보통 15분 이내로 잦아드니까 상황을 지켜보죠.”
마치 이런 일을 겪어 본 적이 있는 사람처럼 임태한은 차분한 태도를 유지했다. 다만 아이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음울하게 가라앉아 있을 뿐이었다.
“솔아…….”
침착한 임태한 덕분에 이현도 놀란 가슴을 한결 진정시킬 수 있었다. 다른 팀원들도 소란에 달려왔다가 임태한과 이현만을 방 안에 두고 자리를 비켜줬다.
이현은 김솔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아이가 의식을 차리기만을 기다렸다.
협탁 위에 놓여 있는 시계의 초침이 흘러가는 소리가 초조한 이현의 심장을 대변하듯 똑딱거렸다.
이로 잘근잘근 깨물어 분홍빛이던 입술이 한층 붉어졌을 때다. 김솔의 눈동자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솔아, 정신이 들어?”
“네에…….”
아이가 자그마한 손을 뻗어 침대 위에 올려져 있는 이현의 손을 붙잡았다. 검지손가락 하나를 동아줄처럼 잡아 오는 아이의 모습에 이현이 이를 악물었다.
“다행이에요. 김이현 가이드, 여기 해열제요.”
임태한도 참고 있던 숨을 나지막하게 쉬었다.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성인들은 잠깐 아프고 지나갈 열도 아이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아, 할까?”
“약 싫은데…….”
“이거 먹어야 솔이가 안 아파. 아저씨가 먼저 먹어 볼게.”
아이는 아이였다. 열이 올라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동자가 흔들렸다. 마음이 약해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약을 먹이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현이 먼저 해열제를 입 안으로 넣었다. 시럽 형태로 된 약을 목 뒤로 넘기고 입을 활짝 벌려 아이에게 확인시켜 줬다.
“맛도 괜찮아. 아저씨 믿고 한 입만 먹자.”
잠시 고민하던 아이가 입을 자그마하게 벌렸다. 이현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해열제를 적당량 아이에게 먹였다.
“잘했어. 정말 잘했어.”
이현이 아이의 머리를 연신 쓰다듬었다. 아이가 잠시 눈치를 보는 것처럼 이현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조그마하고 여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안아 주세요…….”
아이는 그 말만을 남기고 눈을 내리깔았다. 기다란 속눈썹이 아이의 심장을 대변하는 것처럼 불안하게 떨렸다.
“이리 와.”
이현이 침대 위로 올라가 아이를 바라보는 자세로 누웠다. 무게감은 느껴지지 않고 온기만 전해지도록 아이의 등을 도닥거렸다.
임태한이 침대 가장자리에 구겨져 있던 이불을 펴 이현과 김솔의 위로 덮어 줬다. 이현이 눈짓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쉬어요.”
곧 미세한 발소리에 이어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김솔은 임태한이 나가는 소리가 들려도 이현만을 빤히 바라봤다.
“손……잡고 싶어요…….”
이현이 아이의 등을 토닥이는 손 대신 다른 손을 아이에게 내밀었다. 아까 전처럼 김솔이 이현의 검지손가락을 제 손바닥으로 감쌌다.
김솔이 처음으로 이현의 앞에서 미소를 지었다. 이현도 아이에게만큼은 복잡한 생각 따위는 다 뒤로하고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현은 김솔에게서 고르고 깊은 숨소리가 들려올 때까지 곁을 지켰다. 아이의 열이 완전히 떨어진 걸 확인하고 나서야 새까만 눈동자 또한 눈꺼풀 아래로 자취를 감추었다.
* * *
“그러고 보니…… 솔이는 우리가 보호복 입은 모습을 봐도 놀라지 않네요. 좀비들을 보면 무서워하는 건 확실한데. 이현 가이드가 솔이 처음 만났을 때도 보호복 입고 있었잖아요.”
“저도 그게 신기하더라고요.”
이나리가 보호복을 착용한 상태로 김솔의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이현도 이나리의 말처럼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보호복은 좀비의 외양이기에 보호복을 착용하면 일반 좀비와 같은 모습으로 변한다. 가까이에서 자세히 들여다봐야 차이점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연구진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것이었다.
아이는 마치 일반 좀비와 그들이 다르다는 걸 본능적으로 아는 것만 같았다. 시각적으로는 구분하기 힘든 모습인데도.
“솔아, 누나 안 무서워?”
“네에……. 나리 누나.”
“으으―! 너 진짜 왜 이렇게 귀엽니. 진짜로 누나 동생 할래?”
김솔은 이현과 이나리에게만 곧잘 말을 했다. 여전히 다른 이들은 말을 걸어도 입을 꾹 다물고 있거나 이현을 그렁그렁한 눈빛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이나리가 김솔의 통통한 뺨을 매만지며 몸을 격하게 떨었다. 아이의 보호자는 이미 일반 좀비가 되어 거리를 배회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살아 있다면 아이를 그곳에 그냥 둔 채로 떠나지 않았을 테니까.
“……솔이는 아저씨 따라갈 거예요.”
아이가 슬그머니 이현의 곁으로 다가와 섰다. 이현의 바짓가랑이를 두 손으로 꼭 잡고 이현을 올려다보는 모습을 본 이나리가 입을 틀어막았다.
“다들 정신 차려. 우리가 지금 놀러 나왔어?”
그 모습을 언짢은 눈초리로 지켜보고 있던 김종현이 내뱉은 말 때문에 분위기가 한순간 가라앉았다.
“선배님. 저희 먼저 내려가요. 팀장님이 준비 마치는 대로 내려오라고 했잖아요.”
진표성과 이나리의 표정이 무섭게 굳어 갔다. 황두학이 눈치를 보다가 김종현의 팔을 잡아끌었다.
“놔.”
김종현이 신경질적으로 황두학의 팔을 뿌리치고는 먼저 현관문 쪽으로 걸어갔다.
“저 새끼는 진짜 마음에 안 든다니까.”
“동감.”
항상 싸우기 바쁘던 진표성과 이나리의 의견이 드물게 일치하는 순간이었다.
“두 사람도 그만해. 종현 형이 너희들 선배인 거 잊지 말고.”
과묵한 성격의 이낙균이 한마디 얹었다. 그제야 진표성과 이나리도 김종현이 사라진 곳을 노려보는 시선을 거둬들였다.
“저희도 이동하죠.”
“네. 솔이야, 아저씨한테 안길까?”
“……네.”
김솔은 이현에게 안기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이현의 말에 떼를 쓰지 않고 임태한을 향해 팔을 벌렸다. 임태한이 김솔을 품에 안아 들고 걸음을 떼었다.
이현도 그의 뒤를 천천히 뒤따라갔다. 하루 동안 지냈던 아파트인데도 떠나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한동안 지난밤 같은 휴식은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 * *
“그르르르…….”
“크햐으―!”
맛있는 식사를 하고, 보드라운 침구가 있는 곳에서 잤던 시간은 짧았다. 이현을 비롯한 알파 1팀은 또다시 냉혹한 현실을 헤쳐 나아가야만 했다.
“김진수! 이쪽 앞으로 벽 좀 세워 봐!”
“네!”
김진수가 능력을 사용해 흙벽을 세웠다. 진표성과 이낙균을 향해 달려들던 좀비 떼들의 발길이 멈췄다.
좀비들은 단단한 흙벽에 막혀 더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한데로 뒤엉킨 몸에서 썩은 살점과 진물이 흘러내려 바닥에 작은 웅덩이를 형성했다.
“팀장, 얼마나 남았어?”
“5킬로미터 정도.”
최소한의 휴식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이동하는 데 사용했다. 그렇기에 현재 알파 1팀은 예상한 것보다 이르게 강서구 국제선 청사 쪽에 다다른 상태였다.
좀비 사태가 발생하기 전부터 김포국제공항은 인파로 북적거렸던 예전의 명성을 찾기 힘들 정도로 적막했다. 몬스터 중에는 하늘을 제 영역으로 삼은 종류도 많았기 때문이다.
비행깃값은 이전과 비교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해외로 파견 나가는 능력자들과 협회 관계자들, 일부의 부유층이 사용하는 이동 수단처럼 되어 버렸다.
생각보다 넓은 공간에 비해 돌아다니는 좀비의 수는 많지 않았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었지만 한수호의 표정은 심각해졌다.
“잠시 정지.”
하프 좀비의 본거지로 예상되는 곳들은 하나같이 온갖 좀비들로 우글거렸다. 하프 좀비들부터 그들이 부리는 일반 좀비와 다양한 좀비 몬스터들로 수많은 기척이 느껴져야 하는 게 정상이었다.
“……기척이 너무 없네요.”
한수호 다음으로 이상함을 감지한 건 임태한이었다. 푸른색 눈동자가 날카롭게 번뜩이며 전방을 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