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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담은 점차 심해지는 폭풍우를 바라보며 느긋하게 식사를 즐겼다. 밖은 무서울 정도로 파도가 높게 치고, 양동이로 쏟아붓는 것처럼 오는 비가 창을 잔뜩 적시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반면 혜담이 있는 실내는 아늑함 그 자체였다.
간간이 놓여 있는 스탠드가 은은하게 집을 밝히고 AI가 틀어 준 클래식 음악이 귀를 즐겁게 했다. 포크로 샐러드를 섞는 혜담의 입에서 절로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뭐든 고객에게 맞춰 최고급만 준비한다는 루나의 말이 맞는지 그녀가 보내 주는 음식들은 한결같이 제 입맛에 꼭 들어맞았다.
드레싱에 감탄하며 신선한 샐러드와 올리브를 먹은 그의 손이 옆에 있는 계란으로 향했다. 테이블에 톡톡 두드려 계란을 까고, 준비해 놓은 소금에 콕 찍어 먹자 만족스러운 미소가 혜담의 얼굴에 가득 드리워졌다.
완숙의 계란 노른자에 살짝 목이 멜 때쯤 마시는 커피 한 잔까지.
이보다 더 완벽한 식사가 어디 있단 말인가.
계란을 다 먹은 후,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크루아상을 집어 쭉 찢은 혜담은 한 조각을 입에 넣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번쩍번쩍 우르르 쾅쾅. 아주 신났네. 신났어.
창을 거세게 두드리는 빗소리가 들리지 않기에 방음이 완벽하게 되는 줄 알았는데, 하늘을 울리는 천둥소리가 작게 들리는 걸 보니 밖의 상황은 심상치 않은 것 같았다.
“비 많이 오네. 내일은 해변가 산책 못 하려나?”
모래가 어찌나 부드러운지 맨발로 따뜻하게 달아오른 모래를 밟으며 돌아다니는 것은 요즘 혜담이 즐기는 일과 중 하나였다. 그걸 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아쉬움이 드는 것도 잠시 혜담은 맛있는 크루아상을 쭉 찢어 입어 넣고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어깨에서 흘러내리는 숄을 추슬러 올리며 통창 앞에 선 혜담은 한참이나 그대로 바다를 바라보았다. 이렇게나 가까이서 폭풍우가 몰아치는 것은 처음 보았다. 하늘은 짙은 회색이었고, 순간순간 번쩍이는 번개가 밝히는 이곳은 난장판 그 자체였다.
별일이 없을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리저리 휘청거리는 야자수가 뽑히지는 않을는지, 점점 높아지는 파도가 집까지 들이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밀려들었다.
어질러진 밖을 제가 치울 순 없을 것 같고, 루나에게 또 부탁해서 사람들을 보내 달라고 해야 하나? 그건 추가금이 얼마나 들려나……. 말도 안 되는 가격에 이곳을 대여한 것부터가 기적이었다.
지금이 이곳의 비수기 시즌이라는 말에 혹해서 루나가 보여 주는 사진만 믿고 덜컥 계약해 버린 곳이었다. 자고 일어났더니 우렁각시라도 왔다 갔는지 제가 어질러 놓은 집이 말끔히 정리되어 있고, 빨래까지 완벽하게 되어 있는 것에 깜짝 놀라기도 했다.
……그것도 서비스라나. 뭐라나.
하긴 이런 곳에 이런 별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손수 빨래하고, 청소할 리가 없긴 하지.
처음엔 레오의 입김이 들어간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주일이 지나고 2주일이 지나도 레오의 모습이나 흔적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기에 루나를 온전히 믿을 수 있었다.
“아…… 또야. 쯧. 내일은 스테이크나 해 먹어야겠네.”
분명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상하게 생각의 끝은 레오에게로 향했다. 그럴 때마다 다른 일을 하면서 혜담은 그의 생각을 떨쳐 버렸다. 혼자 있다 보니 혼잣말도 늘고, 아 역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인가.
한 손으로 제법 나온 아랫배를 슬슬 문지르며 혜담은 부엌 뒤쪽에 있는 창고로 향했다. 자기 전에 고기를 재워 놓을까. 아! 연어도 좋은 거 있던데, 꼬치 만들어서 데리야끼소스 발라 구울까.
루나가 보내 준 레시피를 참고해서 하나하나 따라 하다 보면 식사 준비로 어영부영 몇 시간을 보낼 수 있기에 이곳에 온 이후 혜담의 요리 실력은 나날이 늘어나고 있었다. 일단 배달을 시켜 먹을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 아닌가?
입덧이 심한 날이야. 대충 빵이나 샐러드같이 냄새도 많이 나지 않고 가벼운 것들을 먹는다고는 하지만 이놈이 제 아빠 식성을 버리지 못하는지 가끔은 심하게 고기가 먹고 싶을 때가 있었다.
딱 지금처럼.
창고에 있는 커다란 냉장고 앞에 선 혜담은 잘 손질되어 밀봉 포장되어 있는 재료를 트레이에 올렸다. 내일 먹을 재료들을 냉장고로 옮긴 혜담은 다시금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주 오래갈 폭풍우는 아니었는지, 거칠었던 비바람이 많이 잠잠해져 있었다. 폭풍의 길에 있었던 것일까? 섬이 작은 만큼 순식간에 폭풍은 지나가고 그 여파로 지금은 평소보다 조금 강한 비바람이 남은 것 같았다.
“별일 없겠지?”
다 먹은 그릇들을 식기세척기에 넣고, 마땅히 할 일이 없어진 혜담의 시선이 계속해서 밖을 향했다. 모른 척하고 이대로 잠들었다가 내일 일어나서 둘러봐도 되긴 한데…… 고민하는 것도 잠시 혜담은 조심스럽게 집 밖으로 나갔다.
바람이 조금 세긴 하지만 비는 보슬비 정도로 바뀌어 있어 위험한 상황은 아닌 것 같았다. 메인 문에서 바라보는 곳에 있는 야자수나 정원수들은 큰 피해를 입지 않은 것 같았다. 늘 바삭하던 데크 위로 모래와 알 수 없는 해초류들이 널려 신발 아래에서 버석거리는 소리를 만들어 냈다.
혹시나 발이 빠지거나 위험한 일이 생길까 봐. 모래사장으로 내려가지는 않고, 집 주변에 둘린 데크로만 이동한 혜담은 집에서 제법 떨어진 작은 휴식처에 도착했다.
“큰 문제는 없지만, 사람은 보내 달라고는 해야겠네. 어차피 물품 보내 줄 때도 됐고. 곧 떠날 건데 그동안 나 몰래몰래 와서 집안일 해 주신 분들에게 감사 인사라도 겸사겸사하고.”
별로 많이 걷지도 않았는데, 피곤함이 몰려와 잠시 앉아 쉬고 싶었지만 흠뻑 젖은 공간에서 제가 쉴 만한 곳은 없었다.
“그래. 밤늦었다 이거지? 빨리 들어가서 자자고?”
홀로 지내는 시간이 많다 보니 아기에게 말을 거는 횟수도 점차 늘어나고 있었다. 아랫배가 아닌 허리에 손을 댄 채 말을 하던 혜담의 시선이 한 곳에 멈췄다.
이곳은 무인도이다.
그 말의 뜻은 사람이라고는 이곳에 자신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한데 후원에서 자신 쪽으로 걸어오는 커다란 덩어리는 분명 사람의 형체와 비슷했다. 그리고 후원에는 헬기장과 선착장이 있었다. 이곳으로 올 수 있는 이동 수단이 드나드는 곳. 그 폭풍우를 뚫고 누군가가 왔다고? 그럴 리가 없잖아.
불안한 마음에 혜담은 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신을 지킬 만한 무언가. 갑자기 나타난 사람이 제게 호의적일 수도 있지만 그러지 않을 수도 있었다. 갑작스럽게 좋아지지 않은 기상 상황에 급하게 쉴 곳을 찾아왔다면……. 집과 이곳까지의 거리를 가늠하던 혜담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평소였다면 집으로 전속력으로 달려 보겠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도 아니었다. 길은 미끄럽고 제 체력은 예전보다 좋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휴대전화라도 가지고 나오는 건데. 물론 응급 구조 신청을 한다고 해도 바로 구조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어설프게 상대를 자극했다가 좋지 않은 일이라도 일어난다면 그걸 스스로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혼자였다면 다르겠지만 지금 제겐 지켜야 할 것이 있었다. 오직 이 세상에서 자신만 지켜 줄 수 있는 존재가…….
바싹 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적신 혜담은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멀리서 이곳으로 다가오는 이는 길을 헤매거나 두리번거리지 않았다. 제게로 곧장 걸어오는 상대를 지켜보는 혜담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라면 자신이 머무는 본채가 아닌 옆에 있는 별채를 내어 줄 순 있었다. 제발 그런 사람이기를……. 지금 제 머릿속을 채우는 온갖 부정적인 것들이 모두 제 불안에서 비롯된 잘못된 생각이기를 바라던 혜담의 눈꼬리가 가늘어졌다.
커다란 곰 같은 체격. 무엇보다 물기를 잔뜩 머금은 비릿한 바다 내음에 스며든 알싸한 커피 향을 느끼는 순간 혜담은 두 손으로 제 입을 막고 멈칫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체격이 큰 사람이야 많다. 하지만 이런 향을 가진 사람은 흔하지 않았다. 큰 체격에 커피 향을 가진 사람. 이 무인도를 알고, 날씨에 상관없이 자신의 의지만으로 헬기나 배를 띄울 수 있는 사람. 그리고 루나.
레오 루이스.
한 사람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과 동시에 혜담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지금껏 나타나지 않았잖아. 왜 하필 지금. 혹시 이 근처를 비행하다가 궂은 날씨에 급히 이곳으로 선회한 것일까?
어떠한 결정도 내리지 못한 혜담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올 때마다 심장이 쪼그라들었다. 그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를 모르기에 섣불리 행동할 수가 없었다. 휴가 기간이 끝난 후에도 복귀하지 않은 것에 관해서만 트집 잡으면 좋을 텐데. 일과 관련된 것이라면 제가 잘못한 것이니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한다고 해도 달게 받아들일 자신이 있었다.
지금 제가 제일 숨겨야 하는 이 사실만 모른다면 뭐든 상관없었다.
“……어, 아. 음…… 안녕?”
보폭이 넓은 그의 걸음으로 열 걸음 정도 될까? 더 이상 다른 사람과 착각할 수 없을 만큼 가까운 곳에 레오가 멈춰 서자 혜담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