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
어색함을 감추며 먼저 말을 걸었건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뚜벅뚜벅 레오가 다가왔지만 혜담은 뒤로 물러설 수가 없었다. 거미줄에 걸린 벌레처럼 옴짝달싹할 수 없다는 것이 더 정확한 말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레오의 시선이 제 몸을 느릿하게 쓸어내리는 것을 인지하는 순간 혜담은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손만 내밀면 닿을 만한 거리에 멈춰 선 레오의 몸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늘 올려다보던 그를 내려다보게 된 혜담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걸치고 있던 숄을 끌어 올려 최대한 제 몸을 가렸다.
“미안해요.”
제 앞에 무릎을 꿇은 레오의 말에도 혜담은 쉽사리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뭐가 미안해? 네가 나한테 미안할 일이 뭐 있는데? 혹시…… 네가 온달이라는 걸 기억한 거야?
“내가 다 잘못했어요.”
“…….”
레오의 손이 숄 끝을 잡고 있던 혜담의 손을 조심스럽게 건드렸다. 그의 생각을 모르기에 섣불리 그의 손을 쳐 낼 수 없었던 혜담은 그의 커다란 손이 가져다주는 온기에 입술만 더 꾹꾹 물어 댈 뿐이었다.
제가 그리웠던 온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제게 가장 큰 의미를 가진 사람이었다.
이 세상에 혼자인 자신에게 가족을 만들어 준 사람이었다. 비록 그가 그 일을 원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제가 힘들 때 제 옆에 있어 줬고, 저를 웃게 해 주는 사람이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와 함께한 추억을 파먹으면서 아기랑 그렇게 살면 된다고 되새기면서도 문득문득 그가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형아, 나랑 결혼해.”
레오의 입에서 처음 듣는 형이라는 단어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네잎 클로버 대신 반지 가지고 왔어. 내가 행복하게 해 줄게. 형아, 안 울게 해 줄게. 그러니까 나랑 결혼해.”
가슴에서 울컥 올라오는 감정에 눈앞이 흐려졌다. 자신의 손끝을 받쳐 든 레오의 다른 손에 무언가가 빛나는 것이 보였지만 계속해서 차오르는 눈물 때문에 혜담은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볼 수가 없었다.
왼손 약지 끝에 무언가가 닿는 것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혜담은 황급히 그에게 잡혔던 왼손을 빼냈다. 그러고는 앞에 무릎 꿇고 있던 레오를 밀쳐 내곤 데크를 따라 빠르게 걸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눈물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자 소매로 거칠게 눈가를 문질렀다.
“이혜담!”
저를 부르는 레오의 목소리에 혜담은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들어오지 마! 내 허락 없인 한 발자국도 들어오지 마!”
그러고는 활짝 열었던 문을 쾅 닫았다. 덜덜 떨리는 엄지 손끝을 깨물고는 입 안에 고인 침을 꿀떡 삼켰다.
아니잖아.
방금 그가 한 말…….
들어 본 적이 있다.
아주 오래전 일이라 완전히 잊고 있었지만, 그가 자신을 ‘형아.’라고 부르는 순간 잊혔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날은 돌아가신 부모님을 수목장에 모시는 날이었다. 슬픈 자신의 마음과 달리 날씨는 너무 화창했고, 할머니는 무척이나 바쁜 것 같았다. 언덕 위에 있는 나무 아래에서 있으라는 할머니의 말에 혼자 그곳에 멀뚱히 앉아 있었다.
엄마, 아빠가 자동차 사고로 돌아가셨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이제 두 분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멍하니 있을 때 커피 향과 함께 꼬맹이 한 명이 나타났다.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제대로 기억나지 않지만 꼬맹이가 저를 안아 주었다. 제 품에 쏙 들어오는 꼬맹이를 안고 한참을 울었던 것 같았다.
그 아이는 제가 마음껏 울도록 작은 손으로 등을 토닥여 줬고, 제 울음이 그칠 때까지 그 작은 가슴을 내어 주었다.
그 아이가 어떻게 생겼는지, 머리카락이 무슨 색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자신을 보던 초롱초롱한 신비한 녹색 눈동자는 잊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그 눈동자를 잊을 수 있지? 그 커피 향도…….
멀리서 아이를 찾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리고, 아이는 제게 네잎 클로버를 주었다. 그리고 그 네잎 클로버를 간직한 곳이…… 아! 시계 상자. 그날 제가 나무 아래 있는 사진을 할머니가 찍어 주셨다. 그리고 그날을 기억하려고 그 사진 뒤에 네잎 클로버를 붙였고. 제겐 의미 있던 사진을 넣어 둔 곳이…….
비틀거리며 안으로 들어간 혜담은 푹신한 소파에 쓰러지듯 앉았다.
제가 힘들 때마다 지켜 준 사람이 레오였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할머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갑작스러운 가족과의 이별로 인해 제일 힘든 순간을 늘 함께해 줬다.
먹먹한 가슴을 주먹 쥔 손으로 퍽 때렸다. 눈가에 맺혀 있던 눈물이 손등으로 뚝 떨어졌다. 기쁜지 슬픈지 힘든지 아픈지 복잡한 자신의 감정을 알 수가 없었다. 레오를 다시 만난 것에 대한 안도일지도 몰랐다.
아랫입술을 꽉 깨문 채, 소매 끝으로 다시 눈가를 문지르던 혜담은 테이블 위에 있는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레오가 무엇을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그도 저도 어린 시절에 있있던 일은 확실히 기억한 것 같았다. 그러니 네잎 클로버 타령을 하지. 그리고 이 일을 루나가 모른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녀가 어디까지 개입되어 있는지도 모르니 일단은…….
― 안녕, 혜담 씨.
몇 번의 신호음 뒤 들린 루나의 목소리에서 약간의 떨림을 읽은 혜담의 입꼬리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루나 씨, 제가 왜 전화하는 건지 아시죠?”
― 아니. 전 절대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아시잖아요. 레오는 진짜 놓치기 힘든 클라이언트인 거.
“레오. 어디까지 알아요? 제게 아이 있는 거 루나 씨는 알잖아요.”
지금껏 제 입으로 밝힌 적은 없지만, 눈치 빠른 루나가 모를 리가 없는 사실이었다. 둘 다 입에 올리지만 않았을 뿐.
― ……모르죠. 걔가 알았으면 일을 이렇게 만들었겠어요? 그런데, 지금 혼자예요? 아닌데. 레오가 도착했으니까 제게 전화한 거 아니에요?
“레오는 밖에요.”
― 네? 거기 지금 폭풍우…….
“거의 그쳤고, 들어오지 말랬더니. 안 들어오긴 하네요.”
루나와 통화를 하며 거칠게 날뛰던 감정을 겨우 가라앉힌 혜담은 긴 한숨과 함께 그제야 창가를 바라보았다. 청개구리도 아니고 지금까지는 제멋대로 잘만 하더니 진짜 들어오지 말란다고 안 들어오나? 시간상으로 봐서는 들어와도 한참 전에 들어왔어야 했다.
― 레오가 제대로 사과하긴 했어요? 제가 진짜 오지랖인 거 아닌데 레오 그놈이야 모태솔로니까 그렇게 멍청하다고 해도 혜담 씨도 답답하시잖아요.
“사과……하긴 했죠.”
가까이 오자마자 무릎 꿇고 사과의 말을 하긴 했다. 그리고 다음으로 그놈이 반지를 제 손에 끼우려고 해서 문제지.
“그 반지 레오가 디자인해서 진짜 힘들게 만든 거예요. 우주석으로 만들 거라고 해서 우주석 구한다고 시간 많이 걸렸거든요.”
“……반지.”
그러고 보니 갑자기 제가 손을 홱 빼내서 뭔가 번쩍번쩍한 것이 허공을 가르고 날아가는 것 같긴 했는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혜담은 창가로 가 밖을 내다보았다. 이곳에서 제법 먼 곳에 있는 휴식처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커다란 곰 한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 반지 내가 조금 전에 날려 버린 거야??? 제대로 보지도 못했는데.
― 아. 혹시 반지 아직 모르세요?
“……그거 잃어버린 것 같은데요.”
― 눼?
갑자기 난감해진 상황에 혜담은 손끝으로 창문을 톡톡 두드렸다. 그러니까 레오가 따라 들어오지 않은 이유가 제가 들어오지 말라는 것도 있지만 반지 찾는 거였어?
“반지가 모래사장에 떨어졌어요.”
레오가 나타나서 지금까지 있던 것을 설명하자마자 휴대전화 너머로 루나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쩌렁쩌렁 울려왔다.
― 반지…… 아. 미쳐…… 레오…… 그거 찾는…… 하아. 아. 배 아파. 아 그런데 나 왜 이렇게 통쾌하지? 하아. 후. 숨 좀 쉬고. 혜담 씨. 미안. 너무 웃어서 미안해요. 전화 안 끊었죠?
“네.”
― 그럼 그 반지 안 찾아오면 문 열어 주지 마요. 걘 그런 고생 해도 돼요.
“……밖에 비가 좀 오는데.”
제가 잠시 나갔을 때는 보슬비였지만 그새 하늘이 마음을 바꾼 것인지 조금 전보다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 그게 뭐 어때요.
“밖이 어둡고…… 감기 걸리면?”
이 밤에 모래사장에서 반지를 찾으면 그게 기적이지. 날이 밝는다고 해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지만 어쨌거나 레오는 지금 불가능에 도전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리고 진짜 비 많73
“…….”
어색함을 감추며 먼저 말을 걸었건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뚜벅뚜벅 레오가 다가왔지만 혜담은 뒤로 물러설 수가 없었다. 거미줄에 걸린 벌레처럼 옴짝달싹할 수 없다는 것이 더 정확한 말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레오의 시선이 제 몸을 느릿하게 쓸어내리는 것을 인지하는 순간 혜담은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손만 내밀면 닿을 만한 거리에 멈춰 선 레오의 몸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늘 올려다보던 그를 내려다보게 된 혜담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걸치고 있던 숄을 끌어 올려 최대한 제 몸을 가렸다.
“미안해요.”
제 앞에 무릎을 꿇은 레오의 말에도 혜담은 쉽사리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뭐가 미안해? 네가 나한테 미안할 일이 뭐 있는데? 혹시…… 네가 온달이라는 걸 기억한 거야?
“내가 다 잘못했어요.”
“…….”
레오의 손이 숄 끝을 잡고 있던 혜담의 손을 조심스럽게 건드렸다. 그의 생각을 모르기에 섣불리 그의 손을 쳐 낼 수 없었던 혜담은 그의 커다란 손이 가져다주는 온기에 입술만 더 꾹꾹 물어 댈 뿐이었다.
제가 그리웠던 온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제게 가장 큰 의미를 가진 사람이었다.
이 세상에 혼자인 자신에게 가족을 만들어 준 사람이었다. 비록 그가 그 일을 원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제가 힘들 때 제 옆에 있어 줬고, 저를 웃게 해 주는 사람이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와 함께한 추억을 파먹으면서 아기랑 그렇게 살면 된다고 되새기면서도 문득문득 그가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형아, 나랑 결혼해.”
레오의 입에서 처음 듣는 형이라는 단어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네잎 클로버 대신 반지 가지고 왔어. 내가 행복하게 해 줄게. 형아, 안 울게 해 줄게. 그러니까 나랑 결혼해.”
가슴에서 울컥 올라오는 감정에 눈앞이 흐려졌다. 자신의 손끝을 받쳐 든 레오의 다른 손에 무언가가 빛나는 것이 보였지만 계속해서 차오르는 눈물 때문에 혜담은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볼 수가 없었다.
왼손 약지 끝에 무언가가 닿는 것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혜담은 황급히 그에게 잡혔던 왼손을 빼냈다. 그러고는 앞에 무릎 꿇고 있던 레오를 밀쳐 내곤 데크를 따라 빠르게 걸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눈물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자 소매로 거칠게 눈가를 문질렀다.
“이혜담!”
저를 부르는 레오의 목소리에 혜담은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들어오지 마! 내 허락 없인 한 발자국도 들어오지 마!”
그러고는 활짝 열었던 문을 쾅 닫았다. 덜덜 떨리는 엄지 손끝을 깨물고는 입 안에 고인 침을 꿀떡 삼켰다.
아니잖아.
방금 그가 한 말…….
들어 본 적이 있다.
아주 오래전 일이라 완전히 잊고 있었지만, 그가 자신을 ‘형아.’라고 부르는 순간 잊혔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날은 돌아가신 부모님을 수목장에 모시는 날이었다. 슬픈 자신의 마음과 달리 날씨는 너무 화창했고, 할머니는 무척이나 바쁜 것 같았다. 언덕 위에 있는 나무 아래에서 있으라는 할머니의 말에 혼자 그곳에 멀뚱히 앉아 있었다.
엄마, 아빠가 자동차 사고로 돌아가셨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이제 두 분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멍하니 있을 때 커피 향과 함께 꼬맹이 한 명이 나타났다.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제대로 기억나지 않지만 꼬맹이가 저를 안아 주었다. 제 품에 쏙 들어오는 꼬맹이를 안고 한참을 울었던 것 같았다.
그 아이는 제가 마음껏 울도록 작은 손으로 등을 토닥여 줬고, 제 울음이 그칠 때까지 그 작은 가슴을 내어 주었다.
그 아이가 어떻게 생겼는지, 머리카락이 무슨 색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자신을 보던 초롱초롱한 신비한 녹색 눈동자는 잊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그 눈동자를 잊을 수 있지? 그 커피 향도…….
멀리서 아이를 찾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리고, 아이는 제게 네잎 클로버를 주었다. 그리고 그 네잎 클로버를 간직한 곳이…… 아! 시계 상자. 그날 제가 나무 아래 있는 사진을 할머니가 찍어 주셨다. 그리고 그날을 기억하려고 그 사진 뒤에 네잎 클로버를 붙였고. 제겐 의미 있던 사진을 넣어 둔 곳이…….
비틀거리며 안으로 들어간 혜담은 푹신한 소파에 쓰러지듯 앉았다.
제가 힘들 때마다 지켜 준 사람이 레오였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할머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갑작스러운 가족과의 이별로 인해 제일 힘든 순간을 늘 함께해 줬다.
먹먹한 가슴을 주먹 쥔 손으로 퍽 때렸다. 눈가에 맺혀 있던 눈물이 손등으로 뚝 떨어졌다. 기쁜지 슬픈지 힘든지 아픈지 복잡한 자신의 감정을 알 수가 없었다. 레오를 다시 만난 것에 대한 안도일지도 몰랐다.
아랫입술을 꽉 깨문 채, 소매 끝으로 다시 눈가를 문지르던 혜담은 테이블 위에 있는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레오가 무엇을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그도 저도 어린 시절에 있있던 일은 확실히 기억한 것 같았다. 그러니 네잎 클로버 타령을 하지. 그리고 이 일을 루나가 모른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녀가 어디까지 개입되어 있는지도 모르니 일단은…….
― 안녕, 혜담 씨.
몇 번의 신호음 뒤 들린 루나의 목소리에서 약간의 떨림을 읽은 혜담의 입꼬리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루나 씨, 제가 왜 전화하는 건지 아시죠?”
― 아니. 전 절대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아시잖아요. 레오는 진짜 놓치기 힘든 클라이언트인 거.
“레오. 어디까지 알아요? 제게 아이 있는 거 루나 씨는 알잖아요.”
지금껏 제 입으로 밝힌 적은 없지만, 눈치 빠른 루나가 모를 리가 없는 사실이었다. 둘 다 입에 올리지만 않았을 뿐.
― ……모르죠. 걔가 알았으면 일을 이렇게 만들었겠어요? 그런데, 지금 혼자예요? 아닌데. 레오가 도착했으니까 제게 전화한 거 아니에요?
“레오는 밖에요.”
― 네? 거기 지금 폭풍우…….
“거의 그쳤고, 들어오지 말랬더니. 안 들어오긴 하네요.”
루나와 통화를 하며 거칠게 날뛰던 감정을 겨우 가라앉힌 혜담은 긴 한숨과 함께 그제야 창가를 바라보았다. 청개구리도 아니고 지금까지는 제멋대로 잘만 하더니 진짜 들어오지 말란다고 안 들어오나? 시간상으로 봐서는 들어와도 한참 전에 들어왔어야 했다.
― 레오가 제대로 사과하긴 했어요? 제가 진짜 오지랖인 거 아닌데 레오 그놈이야 모태솔로니까 그렇게 멍청하다고 해도 혜담 씨도 답답하시잖아요.
“사과……하긴 했죠.”
가까이 오자마자 무릎 꿇고 사과의 말을 하긴 했다. 그리고 다음으로 그놈이 반지를 제 손에 끼우려고 해서 문제지.
“그 반지 레오가 디자인해서 진짜 힘들게 만든 거예요. 우주석으로 만들 거라고 해서 우주석 구한다고 시간 많이 걸렸거든요.”
“……반지.”
그러고 보니 갑자기 제가 손을 홱 빼내서 뭔가 번쩍번쩍한 것이 허공을 가르고 날아가는 것 같긴 했는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혜담은 창가로 가 밖을 내다보았다. 이곳에서 제법 먼 곳에 있는 휴식처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커다란 곰 한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 반지 내가 조금 전에 날려 버린 거야??? 제대로 보지도 못했는데.
― 아. 혹시 반지 아직 모르세요?
“……그거 잃어버린 것 같은데요.”
― 눼?
갑자기 난감해진 상황에 혜담은 손끝으로 창문을 톡톡 두드렸다. 그러니까 레오가 따라 들어오지 않은 이유가 제가 들어오지 말라는 것도 있지만 반지 찾는 거였어?
“반지가 모래사장에 떨어졌어요.”
레오가 나타나서 지금까지 있던 것을 설명하자마자 휴대전화 너머로 루나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쩌렁쩌렁 울려왔다.
― 반지…… 아. 미쳐…… 레오…… 그거 찾는…… 하아. 아. 배 아파. 아 그런데 나 왜 이렇게 통쾌하지? 하아. 후. 숨 좀 쉬고. 혜담 씨. 미안. 너무 웃어서 미안해요. 전화 안 끊었죠?
“네.”
― 그럼 그 반지 안 찾아오면 문 열어 주지 마요. 걘 그런 고생 해도 돼요.
“……밖에 비가 좀 오는데.”
제가 잠시 나갔을 때는 보슬비였지만 그새 하늘이 마음을 바꾼 것인지 조금 전보다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 그게 뭐 어때요.
“밖이 어둡고…… 감기 걸리면?”
이 밤에 모래사장에서 반지를 찾으면 그게 기적이지. 날이 밝는다고 해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지만 어쨌거나 레오는 지금 불가능에 도전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리고 진짜 비 많이 맞아서 감기 걸리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밀려들었다.
― 아. 진짜! 혜담 씨는 그렇게 착한 게 문제예요. 걔 알파라고요.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최소 우성 알파. 아니 걔 아빠 닮았으면 골든 알파인데, 걔가 감기 걸린다고요?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네. 거기다 걔가 지금까지 혜담 씨 얼마나 힘들게 했어요. 그놈도 좀 힘들어야지.
“……그…… 그렇겠죠?”
― 혜담 씨. 아. 아니다. 혜담 오빠. 그냥 오빠라 부를게요. 그래도 되죠?
머뭇거리는 자신과 다르게 루나는 참으로 깔끔하게 상황을 정리하고 있었다. 오빠라 불러도 되냐는 말에 저도 모르게 그러세요, 라고 대답하는 것과 동시에 빠른 루나의 말이 혜담의 귓속으로 속사포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그래. 일단 루나가 시키는 대로 부엌으로 들어간 혜담은 핫초코를 한 잔 탔다. 그리고 다시 거실로 돌아와 창가에 놓여 있는 흔들의자에 앉았고, 따뜻한 담요로 몸을 감쌌다.
― 그런데 오빠. 걘 반지 찾을 거 같지 않아요?
혜담은 데크를 중심으로 여전히 바닥을 살피는 레오를 지켜보며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도 인간적으로 해 뜰 때까지만 기다려 줄까요? 아닌데, 오빠 피곤해서 자야 되잖아요. 오빠 졸리죠?
“응? 아. 아니.”
― 그럼. 나랑 딱 30분만 수다 떨어요. 30분 뒤에 문 열어 주자.
혜담은 레오에게 시선을 둔 채, 루나가 들려주는 레오의 학창 시절 에피소드에 귀를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