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ouble Shot(더블 샷)-16화 (16/86)

16

“뭔 일 있어?”

혜담은 제 술잔을 채워 주다 말고 얼굴을 살피는 준석을 보곤 피식 웃었다. 무슨 일 있긴, 갑자기 연봉이 두 배 오르고, 휴가도 엄청나게 늘고, 차도 사 준다는 상사가 나타났을 뿐이지.

“오늘 연봉 협상 다시 해서 그때 같이 본 그 오피스텔 갈 수 있을 거 같다.”

“뭔 소리야? 연봉 협상 시즌 아니잖아. 거기다 거기 전월세라도 월세가…….”

“그러니까 연봉 엄청 올랐다고, 거기 충분히 갈 만큼.”

준석이 여전히 들고 있는 술병을 뺏어 온 혜담은 잔을 마저 채우고는 홀짝 술잔을 비웠다.

“새끼. 알아듣게 말을 해. 나 머리 나쁜 거 몰라?”

“머리 나쁜 게 자랑이냐? 내가 원래 이사팀이었잖아.”

“근데.”

“마케팅팀으로 옮기면서 연봉 협상이 잘됐어.”

“연봉이 엄청 올라서 가고 싶은 집 월세 충분히 커버가 되는 놈이 왜 다 죽어 가는 표정으로 앉아 있냐고.”

정곡을 찌르는 준석의 말에 혜담은 턱을 괴고는 제 앞에 덜어 놓은 곱창전골만 젓가락으로 헤집었다.

“그거 기억나?”

“뭐?”

잔을 채워 주지 않아도 알아서 제 잔을 채워 술을 마시는 준석에겐 시선을 주지 않고 곱창전골만 괴롭히던 혜담의 젓가락 끝이 곱창을 꾹 찔렀다.

“온달.”

“……어, 아. 아! 할머니 돌아가시고, 갑자기 나타났다가 먹튀한 새끼?”

혜담은 대답 대신 젓가락으로 연신 곱창 하나를 괴롭혀 댔다.

“멧돼지, 총, 커피?”

준석이 생각나는 단어들을 툭툭 던질 때마다 혜담의 보조개가 더 짙어졌다.

“그 새끼는 왜?”

몇 년 만에 온달을 입에 올렸더니 준석은 이 일과 그를 연관 짓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도 그럴진대 그라고 어떻게 연관 짓겠는가.

“이제부터 그 새끼가 직계 상사야.”

오늘따라 더 단 소주를 마신 혜담은 여태껏 괴롭히던 곱창을 입에 넣고 질겅거리며 제일 중요한 말을 꺼냈다.

“뭐?”

갑자기 벌떡 일어난 준석 때문에 부실한 양철 테이블이 흔들거리자 혜담은 급하게 테이블을 잡으며 욕설을 내뱉었다. 매장에서 삼삼오오 모여 웃고 떠들며 놀던 이들의 시선이 모두 제게로 향하자 혜담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야, 새끼. 바로 말해 봐. 뭔 말이야.”

대충 고개를 주억거려 주위 사람들에게 사죄의 말을 한 준석이 급히 다시 앉으며 재촉하는 말에 혜담은 다시 술병을 잡았다.

“나를 기억 못 하더라고.”

“그때 대가리 다쳐서 지가 누군지도 몰랐다며.”

“그러니까 그 대가리가 이번엔 나를 기억 못 해요.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우리 만난 적 있냐고 묻는데 한 대 치고 싶더라.”

온달을 안주 삼아 주절거리며 술을 마시던 혜담의 말끝이 점차 느려졌다.

“정신 잃은 놈 주워서 치료해 주고, 먹여 주고, 입혀 주고 했는데, 그놈이 회사 오너가의 직계 후손이고. 그래서 그 총이니 고성이니 사냥개니 하는 게 진짜 그놈의 삶이 맞는데. 세 살이나 어린 놈이 직계 상사가 돼서 내 개인 비서가 되어라! 했다는 거잖아.”

“오, 최준석. 머리 완전 돌은 아니네. 제대로 이해했으.”

“연봉도 올려 주고, 차도 주고 휴가도 더 달라고 했는데도 원하는 거 다 들어주겠노라. 내 개인 비서가 되어라. 하는 말에 자본주의의 노예인 너는 홀랑 넘어갔고?”

“글치. 글치.”

“어차피 그놈은 기억 못 하고 넌 돈이 필요하니까 그냥 과거 일은 다 묻어 놓고 직장 상사로 알아서 모시겠다?”

“암요. 모르는 사람이고 어제 처음 본 사람이지.”

“니 또라이가? 말을 해. 내가 네놈의 생명의 은인이다. 돈도 엄청 많은 집안이면 연봉 올려 주는 게 문제야? 이 새낀 지가 무슨 신데렐라인 줄 알아요.”

준석의 직설화법에 혜담은 표정을 찌푸린 채 소리 나게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계속 곱창만 보고 있어서 몰랐는데 고개를 들어 그를 보니 준석은 두 개가 되었다가 하나가 되었다 하며 연신 현란한 분신술을 펼치고 있었다.

“신데렐라는 무슨 인어공주. 새꺄.”

“인어공주는 왕자 좋아해서 그런 거고. 넌 아니잖아. 하여튼 이상해. 매번 듣다 보면 니 새끼가 그놈 좋아했던 거처럼 들린단 말이야.”

내가 온달을 좋아해? 뭔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를 하고 있어.

이건 그냥. 그러니까 내가 제일 힘들 때 잠시 옆에 있어 줘서…….

“그거 내 첫 키스였는데. 좁은 침대에서 그러고 잔 것도 처음이고. 누군가와 끌어안고 잔다는 거 생각보다 기분 좋더라. 사람 품이 그렇게 따뜻한지 난 몰랐지. 반짝반짝하는 눈동자로 괜찮아, 라고 말하는데. 그 말 듣는 순간 진짜 괜찮아지더라고. 내가 끌어안고 있던 무거운 거 힘든 게 다 사라지고. 마법이라도 부린 것처럼. 반짝반짝.”

혼자 주절주절 늘어놓던 말은 혜담이 테이블에 머리를 박는 것으로 끝이 났다.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그리고 마주 앉아 있는 준석의 표정이 어떻게 변하는지 같은 건 혜담의 안중엔 없었다.

* * *

홀렸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말려들었다. 어영부영하다가.

7시 55분. 평소라면 이제 막 샤워를 끝내고 출근 준비로 분주할 시각이지만 현재 혜담은 젖은 머리카락도 제대로 말리지 못한 채, 말로만 듣던 건물 앞에 멍하니 서 있었다.

어찌저찌 짐을 다 옮기고 퇴근하던 길에 걸려 온 준석의 전화 한 통이 문제였다. 술이나 한잔하자는 말에 꿀꿀하던 기분을 날리러 갔다. 한잔이 두 잔 되고 두 잔이 석 잔 되고, 제 나이는 망각하고 신나게 부어라 마셔라 했고, 눈 떠보니 준석의 집이었다.

제집보다 준석의 집이 회사와 더 가까웠기에 미적거리며 이불 속으로 파고드는 것도 잠시 헤라의 브리핑에 혜담은 침대에서 스프링처럼 튀어나와야 했다.

9시 회사 출근 대신 8시 온달의 집으로 출근해야 한다는 걸 완전히 까먹고 있었던 것이다. 샤워하면서 준석을 닦달해 그의 집에 뒀던 정장을 꺼내 달라고 했고, 욕실에서 나오자마자 준비된 옷에 팔다리를 꿰어 넣었다.

목에 넥타이를 매며 급하게 택시를 잡아탔고, 아슬아슬한 여유를 두고 방금 택시에서 내린 참이었다.

여기가 우리나라에서 제일 비싼 빌라라고 했던가? 전 세대에서 한강이 보이고, 집 바로 옆에 주차장이 있고, 거기다 몇 평이라고? 아, 핵이 터져도 몇 달은 살 수 있는 벙커가 지하에 있다지?

찬 바람이 덜 마른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고, 온몸에 소름이 쫙 돋음과 동시에 혜담은 서둘러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건축 당시 호화스럽고 고급스러우며 엄청 비싼 분양가로 한참 언론을 떠들썩하게 했던 빌라의 정문을 통과하는데도 제법 많은 시간이 걸렸다. 안구 스캔에 손바닥 지문까지 등록해야 들어올 수 있는 곳의 최고층 펜트하우스라.

이런 재회는 전혀 상상치 못했다. 처음 만남도 흔하디흔한 로맨스 드라마 같은 상황이더니 재회까지 신데렐라 이야기의 폼을 벗어나지 않고 있었다. 이제 이놈이 저 좋다고 매달리고 자신은 튕기고 그러다가 받아 주고, 그렇게 끝나면 그게 해피엔딩일까.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동안 망상에 망상을 거듭하던 혜담은 도착음과 함께 입을 꾹 다물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림과 동시에 옅게 느껴지는 커피 향에 실소를 흘린 혜담은 커다란 문 앞에 서 있는 이에게 살짝 머리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같이 고개를 숙여 인사에 답을 해 주고는 바로 문을 열어 주는 로버트의 행동에 혜담은 쭈뼛거리며 햇살이 환하게 쏟아져 들어오는 공간으로 들어갔다.

아침부터 제가 이곳에 와서 할 일이 뭐가 있을까? 이 시간대에 부를 만한 사람으로는 개인 쇼퍼가 가장 적합할 것 같았다. 아니면 이 넓은 집을 관리해 주는 관리사분이든가.

“술 마셨어요?”

신발을 벗고 놓여 있던 슬리퍼에 발을 꿰던 혜담은 웃음기 스민 목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누구는 눈 뜨자마자 미친 듯이 날아왔건만 그는 이제 막 샤워를 끝냈는지 샤워가운을 걸친 채 작은 에스프레소 잔을 들고 있었다.

나도 카페인. 본의 아니게 커피 끊은 지 몇 년이건만 오늘만큼 커피가 마시고 싶었던 순간은 없었던 것 같았다. 진한 에스프레소가 아닌 얼음 넣어서 시원한 아메리카노지만 말이다.

“아, 네.”

멀뚱히 현관에 서 있을 수만은 없기에 혜담은 머쓱함에 목덜미를 만지며 안으로 들어갔다.

“누구랑?”

“친구…….”

말을 편하게 하기로 마음먹은 것인지 자연스러운 반말에 혜담은 대답하다 말고 입을 닫았다.

“어제도 생각했는데, 혜담 씨. 참 못생겼다. 그죠?”

이 새끼가 보자 보자 하니까. 거기다 못생긴 거면 못생긴 거지 ‘그죠?’라는 말은 왜 더해 제게 동의를 구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팀장님은 잘생기셨고요.”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적당한 말을 고르던 혜담은 예의를 곁들인 진심을 건넸다.

“제가 잘생겼어요?”

대답할 가치조차 없는 것 같아 혜담은 고급스러운 무늬가 새겨진 대리석 바닥만 내려다보았다. 한 시간이나 일찍 회사도 아닌 집으로 불렀으면 거기에 마땅한 일을 시키든가. 받는 돈이 있으니 어제처럼 치받을 수도 없었다. 정신없이 달려오는 동안에는 느끼지 못한 숙취가 한 번에 몰려들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