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ouble Shot(더블 샷)-17화 (17/86)

17

머리는 지끈거리고 속은 쓰리고, 어제 로버트와 대화를 하긴 했지만 정확히 제가 해야 할 일이 뭔지도 모르겠다.

“아침 먹었어요?”

온달의 말에 혜담은 앞에 보이는 푹신한 소파에 드러눕고 싶은 마음을 숨기고는 안쪽으로 더 들어갔다. 도대체 집이 얼마나 넓은 거야. 부엌은 또 어디고. 주위를 두리번거린 혜담은 부엌으로 보이는 곳으로 향했다.

상대가 기분이 좋은지 안 좋은지는 모르겠고, 빵을 좋아한다고 하니 부엌에서 빵을 찾아 주면 될 것 같았다. 아일랜드 식탁 위에 있는 빵을 보곤 혜담은 피식 웃었다. 진짜 빵 좋아하나 보네. 그래서 빵 먹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나.

개수대에서 손을 씻은 후. 플레인 베이글을 집어 든 혜담은 다시금 두리번거렸다. 토스터기는 또 어딨어.

호화스럽든 누추하든 사람 사는 건 다 거기서 거기기에 혜담은 눈으로는 토스터기를 찾으며 아일랜드 테이블 서랍을 열었다. 브래드 나이프를 찾는 것도 성공, 그 아래에서 도마를 찾는 것도 성공.

플레인 베이글을 굽기 좋게 반으로 자르던 그의 눈에 한쪽에 있는 오븐이 들어왔다. 에스프레소는 이미 마시고 있으니 더 준비하진 않아도 될 것 같고. 받은 만큼 일한다는 생각에 혜담은 타인의 집 부엌을 분주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잼 드세요?”

담백하고 깔끔한 맛을 좋아한다고는 하지만 베이글엔 잼과 치즈가 필수인지라 혜담은 그의 의중을 묻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방금까지 근처에 있었던 것 같은데, 넓은 공간에 자신만 있다는 걸 확인한 혜담은 옆에 있던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도대체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기억은 못 해도 성격과 취향은 바뀌지 않는 모양이었다.

심미안적 관점이 사람마다 다른 건 인정한다만 그래도 그리 못생긴 건 아닌데. 하긴 그런 뛰어난 외모를 가진 부모님을 보고 자라면 눈이 절로 높아질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본인 얼굴도 한몫하고. 주위의 평균 외모가 천상계급인데 어쩌겠는가.

어제 아침까지만 해도 팀장님께 잘생겼다는 말을 들었는데, 오늘 아침에 듣는 말은 못생겼다냐. 딱 한 번 몇 년 전 그날을 제외하곤 자신의 외모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없던 혜담은 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했다.

어제 술을 많이 마셔서 그런가 눈과 볼이 좀 부은 거 같기도 하고.

“뭣 좀 먹었어요?”

밀려오는 자괴감에 멍하니 의자에 앉아 덜 마른 머리카락을 손으로 헤집던 혜담은 온달의 목소리에 퍼뜩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일정을 넘겨받지 못해서 그런데 제가 참고해야 할 일정이 있을까요? 개인적인 일정까지 관리가 필요하시다면 그 부분까지 말해 주시면 됩니다. 오늘 제가 알고 있는 일정은 오전 10시 마케팅팀과의 미팅이 전부입니다. 현재 마케팅팀이 진행하고 있는 업무 보고 및 같이 일하는 팀원들과의 인사 자리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난 오늘 일정 말고 혜담 씨 식사와 관련된 걸 물었는데, 그것부터 대답해 줘요.”

그새 옷을 갈아입고 온 것인지 샤워가운 대신 깔끔하게 정장을 갖춰 입은 레오는 커프스를 끼우며 다가오고 있었다.

“안 먹었습니다.”

“왜요?”

“원래 아침을 먹지 않아서요.”

“……일부러 자리 피해 줬는데.”

레오의 중얼거림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혜담은 알람음이 울리는 오븐 앞으로 가 구워진 베이글을 꺼냈다.

“혹시 매일 이곳으로 팀장님을 모시러 와야 하는 겁니까?”

집게를 이용해 구워진 베이글을 접시로 옮긴 혜담은 이제는 아일랜드 테이블의 건너편에 서 있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싫어요?”

당연히 싫지. 이놈 사회생활 안 해 본 거 여기서 이렇게 티를 내네. 어느 부하직원이 직장 상사와 오래 붙어 있고 싶어 하냐. 거기다 준석이 집에서야 이곳까지 10분이면 되지 우리 집에서는 30분 거리거든. 그 말인즉슨 난 앞으로 최소 한 시간 이상 일찍 일어나야 한다는 말이라고.

“로버트 씨고 계시고, 그 경호원이라고 해야 하나? 다른 분들도 앞에 계시는 걸 봤습니다.”

큰 손이 다가와 베이글 한쪽을 집어 갔다. 바삭하게 구워진 베이글을 한입 베어 문 그는 천천히 입을 움직였다. 자신을 빤히 쳐다보며 베이글을 먹는 모습에 혜담은 슬쩍 시선을 돌려 늘 들고 다니던 태블릿을 꺼냈다.

“빵이…… 맛있네요.”

확인할 것도 없지만 스케줄 앱을 열고 달랑 하나 적혀 있는 그의 일정을 보던 혜담은 느릿한 그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향도 좋고.”

“플레인 베이글을 좋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로버트?”

“네. 기분이 좋지 않으실 때 플레인 베이글과 에스프레소를 드리면 된다고.”

“출근합시다.”

맛있다고 해 놓고는 겨우 한입 베어 문 베이글이 접시 위에 다시 놓였고, 앞장서 걷는 레오를 뒤따르며 혜담은 혀끝을 내밀어 마른 입술을 적셨다.

카페인이 필요했고, 커피를 마시고 싶다고 생각했다. 한데 지금은 질 좋은 커피를 원 없이 마신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여전히 속이 쓰리긴 했지만 두통은 조금 가신 것 같았다.

“커피 좋아해요?”

앞서 걷던 그의 질문에 혜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로 뱉은 것도 아니고 그의 뒤에서 한 작은 고갯짓이 그에게 닿을 리가 없었지만 나름대로의 응답이었다.

로버트나 레오 둘 다 키가 크니 보폭이 넓은 것도 당연했다. 앞서 걷는 뒷모습을 보자니 새록새록 생각나는 것들이 있었다. 좁은 시골길을 걸을 때도 그와 점점 멀어졌다. 길도 모르면서 뭐 그리 열심히 가는지.

딱히 빠질 샛길도 없었기에 거리가 멀어지든 말든 뒤따르던 혜담은 어느 순간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서도 혜담은 자연스레 그의 뒤쪽에 섰다. 개인 비서가 된 지금. 앞으로 어깨 나란히 하고 걸은 일은 없겠네.

차를 탈 때도 누가 정해 준 것처럼 로버트가 운전석으로 향하자 혜담은 조수석으로 향했다. 자율주행차에서 운전석이니 조수석이니 하는 것이 뭐가 중요하겠냐마는 어쨌거나 남아 있는 관습대로 앉은 혜담은 푹신한 의자의 감촉을 느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뭐든 최고였다. 지금 타고 있는 차도 국내에는 아직 정식 수입이 되지 않은 최신형 자율주행 전기차였다. 자동차 안의 모든 좌석이 원하는 각도만큼 돌아가고 리클라이너처럼 편안하게 젖혀지며 안락함을 강조한 홍보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있었다.

어색한 침묵. 차 안엔 클래식 음악이 흘렀고, 뒤에 앉은 레오를 쳐다볼 생각도 없었기에 혜담은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는 작게 하품을 했다. 개인 비서 괜히 한다고 했나? 매번 이런 식의 출근을 하며 같은 공간을 이렇게나 오래 공유하는 건 꽤 곤란할 것 같았다.

그냥 스케줄 관리하고 회사에서 만나서 일정 브리핑하고 일정 조율을 위해 다른 사람들과 통화하는 평소의 삶이 벌써 그리웠다. 차가운 차창에 머리를 기댄 혜담은 우울해지는 생각을 떨치고 오늘 먹을 메뉴를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오늘 점심 메뉴와 정시 퇴근 가능? 이 두 가지 외에 직장인에게 중요한 것이 뭐가 있단 말인가.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멍하니 오늘 먹을 메뉴를 떠올리던 혜담은 코끝을 스치는 커피 향에 창가에 대고 있던 머리를 바로 했다.

레오의 집 안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커피에 빠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나중엔 커피 향이 나는지 나지 않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는데, 갑자기 훅 짙어지는 향에 혜담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의자를 편히 눕히고 긴 다리를 꼰 채, 무언가를 집중해서 보고 있는 레오를 본 혜담은 잠시 숨을 멈췄다. 커피가 없는 공간에서 커피 향이라. 그때도 어영부영 깊게 생각지 않고 넘어갔던 부분이다. 그리고 그때도 같은 의문을 가졌고, 같은 질문을 했다.

“팀장님.”

“네.”

“베타를 희망한다고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랬죠.”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번거로운 일에 휩싸이고 싶지 않아서요.”

“알파이십니까?”

질문에 바로바로 대답을 해 주긴 했지만 보고 있던 것에서 시선을 떼지 않던 레오의 초록 눈과 마주한 혜담은 입을 꾹 다문 채,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알파지만 알파가 아닙니다.”

“제가 오메가였다면 팀장님의 개인 비서 제안은 오지 않았겠죠?”

형질을 묻는 것부터가 무례한 질문이었다. 빠르게 움직이는 차 사이로 햇살이 들어왔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그의 초록 눈동자의 색은 매 순간 다양한 색으로 변했다. 정말 예쁘고 아름다운 보석을 보고 있는 기분을 느끼던 혜담은 천천히 눈을 내리깔았다.

그의 시선을 피했지만 그의 시선에서 벗어난 건 아니었다. 의자에 앉은 채, 상체만 뒤돌아 그를 보고 있던 혜담의 의자가 천천히 움직였고, 어느새 그는 레오와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갑작스러운 의자의 움직임에 움찔한 것도 잠시 죄송하다는 말로 자신의 무례한 질문에 대한 사과를 건네야 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지금 그와 하는 대화는 앞으로 제 행동에 많은 영향을 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원하는 조건을 다 들어주지 않았다면 제 비서를 하지 않았을 겁니까?”

제일 중요한 질문에 돌아온 건 답이 아닌 질문이었다. 묵직하게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던 커피 향이 점차 옅어졌다. 이 공간에서 커피 향을 느꼈던 것이 모두 환상이었던 것처럼 제가 들이마시고 내뱉는 공기엔 어떤 향도 스며 있지 않았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