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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혜담 씨가 마음에 들어요. 눈치 보고, 비위 맞추면서 일할 스타일이 아닌 것 같고요. 방금 여러 가지 제안을 했는데 물질적인 것에 크게 흔들릴 것 같지도 않고, 아닌 건 아니라고 정확히 말해 줄 것 같아서요. 말 그대로 지금 내게 필요한 사람은 개인 비서예요. 업무적인 스케줄이나 그런 것만 관리해 줄 사람은 널리고 널렸거든요.”
아닌데? 나 돈 겁나 좋아하는데. 없어서 못 쓰는데. 실상 연봉 인상이나 현 조건과 변동이 없다고 해도 난 너만 아니었다면 누구를 상사로 모시든 아무 문제 없이 즐겁게 해냈을 텐데?
그리고 난 지금 네게 악감정이 있어서 눈에 보이는 게 없는데, 나랑 일하면 내가 너한테 무슨 짓을 할지도 몰라.
“업무적인 일을 도와드리는 일은 제 일이었기에 큰 문제가 없겠지만, 개인 비서는 해본 적이 없습니다. 실수나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개인 비서나, 일반 비서나 뭐 다를 게 있겠어요. 좀 다르다면 아침 모닝콜 정도?”
개소리도 참 정성껏 한다. 혜담은 한참을 그를 바라보았다. 자신과 시선이 엮인 초록빛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았고, 담담함을 가득 담은 채 제 시선을 그대로 받아 냈다. 피하지도 않고 밀어붙이지도 않으면서 그저 제가 보내는 시선을 그대로 담았다.
어차피 그는 자신을 만났던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분명하고 앞으로 할 것 같지도 않다. 기억을 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다. 그가 기억을 한다면 제가 기억을 잃은 척하면 되니까. 아니면 제겐 그런 일이 없었다고 잡아떼면 그만이었다.
조금 전 그가 계속해서 제시한 것을 떠올렸을 땐 이보다 좋은 직장은 없었다. 보고 있던 15평 원룸이 아니라 투룸 아파트도 넘볼 수 있을 것 같은데? 5년 이내 잘리지만 않는다면.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기를 두드린 혜담은 입을 꾹 다물었다가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연봉 두 배 인상. 연 휴가는 45일 이상. 휴가는 제가 원할 때, 차량 제공. 원하는 차는 며칠 내로 보고서 올리죠. 9 to 6. 추가 근무 시 시간으로 환산해서…….”
네가 원한다면 일해 주지. 돈도 많이 주고 워라벨도 올려 준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잖아. 서로 필요한 것만 갖자고.
이렇게 재회한 이상 그와 다른 쪽으로 얽힐 일은 없었다. 학벌, 배경, 능력 그 어느 것을 보더라도 그와 자신을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그가 왼쪽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하곤 손끝을 튕기는 행동에 혜담은 말을 멈췄다. 제가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조건들이었다.
그래 피차 서로 시간 낭비지? 그냥 나를 제 자리에 돌려놔 줄래? 너만 여기서 포기해주면 난 사무실로 돌아가 우리 아름다운 서윤 씨와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계속 이사님 비서팀에서 일하겠다는 의지를 밝혀야 하거든.
조금 전엔 너무 감정적이었고, 충동적이었으니 당장 사직과 관련된 이야기를 꺼낸 것부터 수습해야 했다.
“그런 부분은 로버트와 이야기하고, 오늘 내로 내 사무실로 짐 옮겨요. 일은 내일부터 시작. 내일 오전 7시 내 집에서 혜담 씨를 만나는 것으로 알고 있을 테니까.”
제 말을 자른 레오가 문가로 향하기에 혜담은 지금껏 상사를 모시며 몸에 익은 버릇대로 그보다 몇 걸음 앞서 걸어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
상사가 나가면 문을 열어 드려야…….
문고리를 잡고 있던 제 손 위로 커다란 손이 겹쳐지는 순간 혜담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타인의 체취와 체온 그리고 체취가 방심하던 틈에 파고든 것이었다.
몸을 움츠리며 문손잡이에서 손을 떼려는 찰나 레오는 솜은 겹쳐 잡은 채 닫혀 있던 문을 열렸다.
“로버트, 혜담 씨 같이 일하기로 했으니까 요구사항 최대한 수렴해서 계약서 작성해요.”
“네, 차 준비해 뒀으니 바로 내려가시면 됩니다.”
순식간에 자신을 감싸고 있던 모든 것들이 사라졌고 냉기가 등 뒤에 맴돌았다.
갑자기 나타났다가 사람을 뒤흔들어 놓고 순식간에 사라졌던 순간처럼 그는 똑같이 자신을 뒤흔들어 놓고 사라졌다. 어떤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그때와 다른 점이라고는 체격 좋은 금발 머리의 한 남자가 있다는 것이었다.
원하는 건 뭐든 말하라는 상대와 협상하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음 같아서는 무노동 고임금을 외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로버트만 있는 것도 아니고 회사 고문 변호사까지 있는 상황에서의 연봉 협상이라는 새로운 경험 앞에서 잔뜩 위축된 혜담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개인 비서가 하는 일이 정확히 뭘 명시하는지부터 알고 싶습니다. 회사의 비서팀 팀원으로 제가 맡았던 부분은 회사 보고서 및 사내 스케줄 관리였습니다. 상사의 개인적인 부분은 다른 분들이 전담을 하셨기에 미숙한 부분이 많을 겁니다.”
“도련…… 팀장님은 뭐라고 하시던가요?”
“딱히 언급은 없으셨는데, 모닝콜?”
로버트의 반문에 조금 전 그와 나눴던 대화를 상기하던 혜담은 제가 말해 놓고도 답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제대로 된 대화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상황은 마치 기 싸움 같았다. 승자도 패자도 없는, 현재 이렇게 연봉 협상을 하고 있으니 그가 이긴 것 같기도 했다.
“지금껏 하시던 일과는 크게 다르지 않으실 것 같습니다. 마케팅 팀장이라는 직책이긴 하시지만 대외적으로 나가는 일도 많고, 모임이나 컨퍼런스에 참석하는 일도 많을 것입니다. 필요에 따라선 회사가 아닌 팀장님의 자택으로 출퇴근을 할 수도 있고, 모임과 컨퍼런스에 동행할 경우도 있을 테고요.”
로버트의 입을 빌어 상식적인 선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혜담은 입에 고인 침을 삼킬 수 있었다.
짧은 대화가 오간 후 손을 잠깐 들어 양해를 구하는 제스처에 혜담은 시선을 돌려 테이블만 바라보았다.
“현 연봉의 두 배. 개인 차량 지급, 휴가는 편할 때 써도 되나, 최소 일주일 전까지는 보고하는 걸로 하죠. 공백이 생기지 않게 저희도 예비 인력을 마련해야 하니까요. 업무 시간 외 추가 수당은 현 회사에서 지급하는 수준으로 하면 될 것 같은데, 더 추가하실 사항 있습니까?”
로버트의 말에 혜담은 방금 그에게 메시지를 전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너무 파격적인 조건들이라 저도 뭘 더 추가하고 빼야 할지 모르겠네요.”
“좀처럼 사람을 믿지 않으시는 분인데, 대화가 잘되셨나 봅니다.”
과연 그 대화가 잘된 대화일까요. 혜담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고, 변호사는 방금 조율한 부분을 바탕으로 계약서를 만들어 오겠다는 말과 함께 먼저 자리를 떠났다.
“로버트 씨.”
“네.”
“팀장님이 어떤 분인지 묻는다면 실례일까요? 저희 팀에 있던 팀장님의 파일을 잠시 보긴 했는데 기본적인 사항만 있더라고요. 비서님이시니 잘 아시겠지만 대외적인 것보다 상사의 취향이나 성격 같은 걸 아는 게 보필하는 데 도움이 많이 되잖아요.”
“따뜻하고 다정하고, 좋으신 분이시죠.”
“모시는 동안 제가 참고해야 하거나 조심해야 할 부분은요?”
조심스러운 질문에 형식적인 답이 돌아오자 혜담은 다른 식으로 질문을 돌렸다.
“빵을 좋아하시니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을 땐 빵과 에스프레소를 준비해 주세요. 기름지고 첨가물이 많은 빵보다 담백하고 깔끔한 맛을 선호하십니다. 베이글도 괜찮고요. 약속을 중시하고, 무엇보다 솔직한 걸 좋아하십니다. 재력과 영향력이 있는 귀족가의 자제로 사는 건 그리 평탄하지 않으니까요.”
“빵을 좋아해요?”
“맛있는 빵집을 소개해 주면 아주 좋아할 겁니다.”
“저에 대한 조사는 다 하셨고, 문제가 없다는 결정을 내리신 것 같네요.”
“네.”
“팀장님도 아시고요?”
“물론입니다.”
로버트의 말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영향력 있는 귀족가 자제의 삶이라. 최고의 엘리트 코스를 그대로 밟은 수재에, 돈 있어, 능력 있어, 집안 빵빵해, 외모까지 무엇하나 빠지는 것이 없다.
가십난에 오르는 헐리웃 셀럽들의 삶만 봐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 가득했다. 조깅을 좋아하는 세계적인 기업 오너가 경호원들에게 둘러싸인 채 조깅을 하는 사진이 떠올랐다. 그를 데리러 왔던 차량의 수라든가 오늘 아침 카페 앞에서 본 차만 떠올려도 등골이 서늘했다.
천애 고아에 가진 것도 없고 잃을 것도 없는 자신의 상황이 이들 마음에 들었을 것이다. 그와 비슷한 또래에 베타이니 구설에 오를 일도 사고 칠 일도 없을 테고, 어쩌면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사람이 자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짧은 시간 함께하면서 비슷한 점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공유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는 삶이다.
담담하게 이어지는 대화 속에서 문득 하나가 떠오르자 혜담은 바싹 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살짝 축이고 입을 열었다.
“로버트 씨, 이건 꼭 대답해 주지 않으셔도 되는 건데요. 사소한 호기심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혹시 팀장님 못생긴 거 좋아하세요?”
“흠. 꽤 독특한 질문이군요. 심미안적 기준이 꽤 높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다른 궁금한 사항이 있으실까요?”
그 대화를 끝으로 혜담은 회의실을 나섰다.
일하던 사무실로 돌아와 오후 내도록 짐을 정리하고 새로운 자리에 짐을 풀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