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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uble Shot(더블 샷)-14화 (14/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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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는군.”

침묵으로 일관하자 레오는 편안하게 의자에 기대며 말했다. 방금까지 긴장감으로 터질 듯 부풀어 오르던 공간에 숨결을 불어 넣는 것 같았다. 방금까지 제게 공격적인 것 같던 커피 향이 부드러워졌다고나 할까. 이 상황에서 커피 향에서 느껴지는 기분이나 파악하고 있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아주 잠시 잠깐 그가 제가 아는 온달이 아니라는 생각도 하려 했지만, 그의 외모와 목소리는 바꾸거나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살짝 올라간 그의 왼쪽 소매 아래로 보이는 묵직한 시계를 보자 입 안이 썼다. 비슷한 것을 가지고 있으니까.

“다른 비서팀에 저보다 유능한 비서가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혜담은 에둘러 말하며 그가 아닌 그의 어깨 너머 청명한 하늘과 높은 건물들이 만들어 내는 풍경에 시선을 두었다. 늦가을이자 초겨울의 하늘은 높고 푸르렀으며, 간간이 보이는 구름과 높은 건물들이 조화롭지 못하면서도 조화롭게 섞여 있었다. 대화는 빠르게 이어지지 않았고, 인기척이 느껴졌지만 혜담은 창 너머에 둔 시선을 굳이 옮기지 않았다.

“이제 편하게 말할 생각이 들어?”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난 후, 그가 꺼낸 말에 혜담의 입술이 다시금 꾹 다물렸다.

상대를 도무지 파악할 수가 없었다. 미친 듯이 닮은 사람은 아닐까? 그가 온달이라는 의심이 있지 물증이 있는 건 아니다. 그리고 그가 온달이라 할지라도 제가 그에게 뭐라고 할 자격이 있을까? 그냥 잠시 스쳐 지나간 인연이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때는 대가를 바라지 말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한데 가슴이 왜 이리 답답한지. 속이 상한지. 짜증이 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몇 달 전도 아니고 몇 년 전 일인데, 그리고 그때 그는 머리를 다친 상태였다. 일주일 전 저녁 식사 메뉴를 물어도 가물가물한 판국에 지난 이야기를 꺼낸들 상대가 잊었다고 뭐라고 할 수 있을까?

혜담에게는 머리와 가슴에 새겨질 만큼 큰일이지만 상대에겐 아닐 수도 있었다. 뒤엉킨 감정과 복잡한 머릿속에서 망상이 무럭무럭 자라는 걸 멈추게 한 건 레오였다.

“꽤 파격적인 제안이 많이 들어간 것으로 아는데.”

계속 눈앞의 사람과 온달을 떼어 놓으려 해도 목소리나 체격, 얼굴이 딱 그놈이었다. 맞다면, 이놈은 저보다 세 살이나 어렸다.

처음부터 만났을 때도 제게 반말을 찍찍 하더니. 지금은 상황이 그래서 그런 것인지 반말과 존대가 섞여 있지만 반말이 베이스인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았다. 그래도 다행이네. 그때 네가 미자가 아니어서. 같이 술 마시고 뒹군 게 죄는 아니니까.

“퇴사 의사를 전달 드렸기에 상세한 내용은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퇴사 의지가 있는 사람을 사측에서 추천했다? 어처구니가 없군.”

“지난 2주간 휴가였고, 오늘 팀장님께 보고를 올려서 사측에서는 제 퇴사 의향을 모르고 진행한 일 같습니다.”

“왜?”

언제 대화가 느렸고, 멈췄었냐는 듯 둘의 대화는 탁구공을 주고받는 듯 빠르게 이어졌다.

“네?”

“퇴사의 이유.”

“개인사입니다.”

“어떤.”

“개인적인 일이라…….”

“난 그 개인적인 일이라는 게 궁금하거든.”

씨발. 이 새끼. 지금 나랑 뭐 하자는 거야.

갑자기 나타나서 자신을 알아보지도 못하는 주제에 왜 치근덕거리는 거 같냐고.

욱하고 치솟는 기분에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혜담은 다행히 입 안을 가득 채운 욕설을 내뱉지는 않았다.

아직 뱉지 않은 것이지 조금만 더 자제심을 잃었다면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을 테고, 정말 난감한 상황을 맞을 뻔했다.

제가 이렇게나 감정적인 사람인지 몰랐다. 앞에 있는 사람이 온달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혜담은 날뛰는 제 감정을 추스르기가 어려웠다. 방금까지 자신과의 대화가 재밌는 듯 싱긋 웃고 있던 그가 제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더니 크게 웃어버렸다.

“앉아요. 혜담 씨. 화나게 할 생각은 아니었으니까.”

뭐가 그리 재밌다고 혼자 웃고 존대하고 지랄이야. 더 열받게.

“그런 것 아닙니다.”

웃음을 겨우 참는 듯 한 손으로 하관을 가리고는 다른 손으로 앉으라는 손짓하는 레오를 보며 혜담은 나가고 싶다는 의미를 담아 공손한 자세로 고쳐서 섰다.

“기분 나빴다면 사과하죠. 원하는 조건 있으면 말해 봐요. 최대한 맞춰 줄 테니까.”

“없습니다.”

“연봉 100% 인상.”

“…….”

“개인 차량 제공. 물론 차도 혜담 씨가 원하는 걸로 준비하죠.”

“…….”

“휴가 두 배.”

“…….”

이판사판개판. 도대체 이 판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제대된 사고가 멈춰 버린 혜담은 입만 꾹 다물고 서 있었다.

“휴가비 지원?”

대답을 하지 않자 그가 제시하는 것은 점차 커졌다.

“팀장님, 의중을 모르겠습니다.”

대답을 하지 않자 그가 제시하는 것은 점차 커졌고, 계속해서 대답을 거부할 수도 없기에 혜담은 머릿속을 가득 채운 욕설을 수십 번 필터링하고 나서야 그나마 정상적으로 느껴지는 답을 내놓을 수 있었다.

“내가 장난하는 걸로 보여요?”

제 귀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현재 상대는 즐거워하고 있었다.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고, 목소리 역시 살짝 들떠 있는 것 같았다. 방금까지 앉아 있던 그가 몸을 일으키자 혜담의 고개가 절로 그를 따라 움직였다.

커피가 없는 공간에서 그의 등장과 함께 나타난 커피 향의 농도 역시 제멋대로 날뛰는 것 같았다. 어떨 땐 폐를 가득 채울 만큼 진한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엔 느껴지지 않았다.

“일반적인 연봉 협상이나 제안과는 다르게 느껴집니다.”

둘 사이를 갈라놓고 있던 넓고 긴 테이블을 돌아 제게로 다가오는 레오를 보며 혜담은 혀끝을 내밀어 바싹 마른 입술을 적셨다.

“회사에서 추천하는 유능한 비서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

두세 걸음 떨어진 곳에서 멈춰 선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 혜담은 고개를 뒤로 젖혀야만 했다.

아래에서 그를 올려다보던 혜담의 눈에 턱과 목 사이에 있는 작은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 생명에 치명적일 수 있는 목 쪽에 상처가 나는 일은 그리 흔하지 않았다.

레오를 온달과 겹쳐 보았다가 따로 떼어 보았다가 동일시했다가 결국 다른 사람일 거라고 믿고 싶던 혜담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결국 맞네. 같은 놈.

원래 이상한 놈이었다. 곱게 미친 놈.

그런데 그동안 그 미침의 강도가 더 심해졌나 보다. 곱게 미친 놈에서 제대로 미친 놈이라고나 할까.

씁쓸하지만 그래도 자신이 제일 힘들 때 옆에 있어 준 사람이다. 그렇게 떠나갔지만, 춥고 허전한 밤이면 등 뒤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그리울 때도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제가 좋아하는 커피에 퐁당 빠진 것 같은 느낌을 떠올리는 순간도 많았다. 길을 걸어가다 느껴지는 커피 향에 발걸음이 묶여 한참을 서 있기도 했다.

우습게도 그렇게 좋아하던 커피를 이제는 마시지 못했다. 이상하게 마실 수가 없었다.

그 향이 아니라서 그 맛이 아니라서. 오늘 아침 커피를 산 건 상당히 충동적인 일이었다.

어둠의 자식인지 정말 부잣집 자제인지 졸지에 이세계로 워프당한 귀족인지 상상 속에서 그에게 다양한 프레임을 씌우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 그런 프레임 따위는 필요 없었다. 정말 그가 동화 속 왕자님이라는 것을 알았으니까. 다시는 그와 드럼통에 삼겹살을 구워 먹지 못하고, 작은 상에서 소주를 나눠 마시지 못한다.

환상과 꿈은 그대로 있는 게 좋은데.

꿈과 환상에서 깬 대가는 생각보다 더 아프고 썼다. 천천히 고개를 숙여 두 사람의 구두코 끝에 시선을 둔 혜담은 조금 더 상체를 숙였다.

회의실에서 나가는 대로 부동산에 전화를 걸어 집을 내놓아야겠다.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그 집을 안 팔고 그대로 안고 있었던 걸까. 1년에 두세 번 내려가 누군가가 왔다 간 흔적이 있는지 둘러보고 청소도 해놓고 왔다.

“우리 만난 적 있습니까?”

적당하고 완곡한, 그러면서도 기분을 거스르지 않을 수 있는 거절의 문장을 찾던 중 들린 말에 숨이 턱 막혔다.

그가 눈앞에 보이기도 전 복도가 커피 향으로 가득 찰 때부터 알았다. 분석하듯 자신을 뜯어보는 차가운 녹색 눈동자에 설마 했지만 그가 정확한 답을 알려 주었다.

이렇게 마주하고 대화를 하는데도 그의 눈빛은 제가 아는 그 눈빛이 아니었다.

모르는구나. 넌 정말 모르는구나.

우리가 짧은 시간 만났다는 사실을.

바닥을 보고 서 있던 혜담은 느릿하게 뒷걸음질을 쳐 둘 사이의 거리를 만들었다.

삐딱하게 선 채로 팔짱까지 낀 그는 자신을 올곧게 바라보고 있었다. 연신 연하게 피어 있던 미소도 사라진 상태였다.

“영국이나 미국에서 거주한 적은?”

사는 게 퍽퍽해서 비행기 타고 가 본 건 제주도가 전부다. 여권을 만들어 본 적조차 없다.

“없습니다.”

“여행이라도.”

“역시나 없습니다. 팀장님과 제가 살아온 환경과 상황이 완전히 다르지 않습니까? 스쳐 지나갈 정도의 접점조차 없는 것 같습니다.”

감정을 보이지 않은 사무적인 표정과 눈빛을 본 혜담은 고개를 숙여 그의 시선을 외면한 채 말했다.

“이혜담 씨. 같이 일하죠.”

“네?”

어이없는 상황이 계속 이어지고 계속된 감정 소모에 부친 혜담은 천천히 머리를 쓸어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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