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건청궁(乾淸宮)의 황좌는 드높았다.
태화의 황제는 감히 우러러보기 어려운 곳에 앉아, 거만한 눈빛으로 앞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간밤에 일어난 일을 두고 열리는 어전회의(御前會議)에 참여한 신료는 하나같이 두려움이 가득한 눈빛을 하고 머리를 조아린 채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고 있었다.
그들은 냉혹한 황제가 또 무슨 일을 저지를까 잔뜩 얼어붙어 있었다.
이윽고 편전 안으로 금위군이 들어섰다. 그들은 요란하게 화장한 사내를 포박하여 황좌 앞에 무릎 꿇렸다.
팔뚝이 꽁꽁 묶인 사내는 잔뜩 겁을 먹은 얼굴을 하고 바들바들 떨어 댔다.
“황제 폐하, 흥청(興淸)의 채홍준사(採紅駿使) 류영입니다.”
북진무사 이위가 고하기 무섭게, 꿇어앉은 이가 죽는소리를 했다.
“폐하! 소신은 억울하옵니다! 소신은 전혀 모르는 일이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폐하!”
꺽꺽거리며 숨이 넘어가는 소리로 아뢴 채홍준사는 이내 엉엉 통곡을 하였다.
요란하게 한 화장이 눈물에 번져 흉했으며, 거칠게 다뤄진 탓에 머리가 산발이 되어 보기에 매우 꺼림칙했다.
그를 바라보는 대신들이 시선이 좋지 못했다.
“폐하. 끄윽, 폐하! 억울하옵니다. 폐하!”
눈물 콧물을 쏟아 내는 사내를 보며 명휘는 그저 눈을 내리깐 채 무심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런 명휘의 입술이 떼인 건 채홍준사의 알량한 통곡이 조금 멎은 후였다.
“네놈은 전혀 모르는 일이렷다?”
“예, 폐하! 여부가 있겠습니까? 소신은 그저 흥청에서 제일 뛰어난 미색을 가진 아이를 연회에 올렸을 뿐이옵니다. 그 아이가 그런 끔찍한 죄를 저지르리라고는 조금도 알지 못했나이다. 소신이 알았더라면 어찌 그 아이를 연회에 올렸겠나이까.”
“그래, 조금도 알지 못하는 그 아이를 어찌 연회에 올렸느냐?”
“예…… 예?”
“말해 보아라. 네 말대로 조금도 알지 못하는 놈인데, 어찌 연회에 올렸느냔 말이다.”
“폐, 폐하…….”
채홍준사는 개구리처럼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양팔이 끈에 포박된 탓에 눈물로 얼룩진 얼굴이 바닥에 아무렇게나 처박혔다.
“폐하, 소신이 죽을죄를 지었나이다. 죽여 주시옵소서, 폐하.”
명휘가 코웃음 쳤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억울하다 소리소리 치더니 이젠 또 죽여 달라는구나.’
“이놈이! 여기가 어느 안전이라고 알량한 입을 함부로 놀리는 것이냐! 네놈의 무지로 인해 천자의 옥체가 상하였다. 이를 두고 어찌 네놈의 목숨을 거두지 아니할까!”
대신 한 명이 소리 내자 이내 기다렸다는 듯, 여기저기서 채홍준사의 죄를 묻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들의 속셈은 하나같이 뻔했다. 이번 일로 저만은 험한 꼴을 보지 않으리란 것이었다.
부디 저 힘 없고 약한 채홍준사가 혼자서 이 모든 책임을 떠안고 사라져 주었으면 하는 것이 그들의 바람이었다.
“오늘따라 경들의 열의가 꽤 높구려.”
황제의 조소에 편전의 소란이 일순 뚝, 멈췄다.
정곡이라도 찔린 것처럼 그들이 불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채홍준사 류영이라 했더냐?”
편전에 낮게 깔리는 무거운 목소리.
차라리 화를 내고 소리치면 덜 무서울 것을, 고저 없는 차가운 목소리에 채홍준사의 몸이 안쓰럽게 떨리었다.
“예, 예, 폐하. 소, 소신 류영이라 하옵니다.”
“류영아.”
“예…… 폐하.”
“그리 떨 것 없다. 설마 짐이 너를 죽이기라도 하겠느냐?”
죽이지 않겠다는 황제의 말이 그 어떤 흉기보다 매섭게 채홍준사의 살갗을 파고들었다.
“폐하! 송, 송구하옵니다. 살려 주시옵소서. 살려 주시옵소서.”
채홍준사가 다시금 눈물 콧물 쏟아 내며 엉엉 울기 시작했다.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아 대신들은 이렇다 할 말조차 꺼내질 못했다.
오로지 북진무사 이위만이 어린애처럼 울어 젖히는 죄인을 나무랐을 뿐이었다.
“어허, 이놈이! 언제까지 그리 울고 있을 것이냐! 폐하의 앞이란 것을 잊었느냐? 정녕 목숨이 아깝지 않은 게냐?”
북진무사의 호령에 채홍준사는 눈물을 뚝, 그쳤다. 여전히 몸은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리고 있었다.
“폐하께 상세히 고하거라. 그 무희를 어찌 흥청에 들이게 되었는지. 만남부터 궁에 들이기까지 상세히 고해야 할 것이다.”
이윽고 훌쩍훌쩍하며 채홍준사가 애써 말을 꺼냈다.
“여섯 해 전의 일이옵니다. 장안에서 흥청에 들일 아이를 찾고 있었는데, 그때 그 아일 처음 보았사옵니다. 이름은 수현이라 하였고, 나이는 열넷이라 하였습니다. 어느 집안 자식이냐 물었으나 대답이 없고, 행색이 초라한데 저잣거리를 맴도니, 오갈 데 없는 신세임을 짐작했습죠. 아직 발현 전이었지만 딱 한눈에 보기에도 미색이 뛰어난 것이, 분명 음인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바로 흥청으로 들였사옵니다.”
여기까지 얘기한 채홍준사는 잠시 눈알을 굴리며 주변의 눈치를 보았다. 다들 침묵하는 걸 확인하고서야 그가 훌쩍거리며 말을 이었다.
“아이는 연고지가 없어 흥청에 있는 동안에도 찾아오는 이가 없었습니다. 아이가 그저 기예를 배우는 데 여념이 없고, 배우는 것은 곧잘 따라 해 흥청에서도 별 무리 없이 지냈사옵니다. 그런데…… 그랬는데……. 그런 아이가 그런 천하의 몹쓸 짓을 하리라고는 정말 꿈에도 몰랐사옵니다. 소신의 불찰이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폐하.”
말을 끝낸 채홍준사는 다시 또 고갤 처박고 엉엉 우는 소릴 내었다.
편전 안에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신료 사이에서 웅성웅성 소란이 일었다.
말이 없는 것은 명휘뿐이었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였다.
“폐하.”
그때, 소란을 틈타 한 대신이 입을 열었다.
“폐하, 소신이 아뢸 것이 있사옵니다.”
“그래, 말해 보거라.”
“‘수현’이란 이름에 대해 소신이 기억하는 것이 있사옵니다.”
순간, 느른하게 내려앉아 있던 명휘의 얼굴에 다소 변화가 일었다.
의자에 깊게 묻었던 몸을 그가 일으켰다. 그의 눈빛이 대신의 말을 재촉하고 있었다.
“선황이신 태화시황께서 멸하신 성해 일이옵니다.”
그의 말에 명휘는 어렴풋이 어렸을 적 기억을 떠올렸다. 어린 나이였지만, 명휘는 제 아비를 따라 수많은 전장을 누렸었다.
십 년 전, 명휘의 나이 십오 세 때였다.
“그때 성해의 왕에게는 다섯 명의 자식이 있었는데, 그중 막내 왕자의 이름이 ‘수현’이었사옵니다.”
순간, 편전 안이 술렁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그럴 리가 없다고 말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통탄을 금치 못했다.
“폐하.”
이윽고 또 다른 신하가 입을 열었다.
“소신이 감히 한 말씀 올리겠사옵니다.”
“말해 보아라.”
“물론 대부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겠사오나. 두 사람이 같은 인물이라고 단정 짓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사료되옵니다. 선황께선 성해를 멸함과 동시에 그의 왕가 세력을 모조리 숙청하였나이다. 그 씨가 남아 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사옵니다.”
다시금 신료가 동요하였다. 시비를 따지며 그들이 열을 높이는 동안 어찌한 일인지 명휘는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폐하, 지금이라도 당장 옥에 있는 그놈을 끌어내 심문하소서. 진상을 토로할 때까지 고문하여 국수를 벌함이 옳아 마땅하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폐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의 관심사는 이제 채홍준사에서 죄인의 심문으로 옮겨 가 있었다.
그들이 수현을 고문하라 청하며 한목소리를 내었다. 이럴 때만큼은 단합심이 매우 빼어난 그들이었다.
“그만 되었다.”
소란스러운 신료를 보며 명휘가 손을 내저었다.
“채홍준사 류영은 국도에 어긋남 없이 벌하고 이만 끌어내거라.”
순간, 류영이 놀라 몸을 엎드린 자리에서 펄쩍 뛰며 사지를 비틀고 발악을 했다.
“폐하! 폐하! 이러지 마시옵소서! 분명 소신에게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약조하지 않으셨나이까! 폐하, 폐하!”
천자의 옥체를 상하게 했으니 죽음은 면치 못할 것이었다.
그래도 죽이지 않겠다는 황제의 말에 마음 놓고 있었건만, 뒤늦게서야 사형을 선고 받은 채홍준사는 발악하며 비명을 질러 댔다.
“폐하! 살려 주시옵소서! 폐하! 폐하!”
한바탕 난리를 피우고 나서야 채홍준사 류영은 편전 밖으로 끌려 나갔다.
그가 건청궁의 문밖으로 끌려 나갈 때까지 궁 안은 계속해서 울부짖는 소리로 시끄러웠다. 참으로 처량한 목숨 구걸이었다.
“재상(宰相)에게 묻겠소.”
“예, 폐하.”
“오늘부로 흥청을 그만 폐하는 게 어떻겠소?”
오늘 여러 번 놀란 신하들이 다시 한번 경악하였다. 흥청을 폐하라니. 그들은 황제가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싶었다.
흥청이란 본디 황제만을 위한 기구였다.
애초에 태화의 선황이 각지의 미인들을 궐에 들이고 제멋대로 즐기려 만든 기구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황제가, 그것도 포악하기 이를 데 없다고 소문이 자자한 태화의 황제가 직접 흥청을 폐하라 명하다니. 이 어찌 듣고도 믿지 못할 말이 아니겠는가.
“하오면, 폐하.”
“흥청을 빌미로 채홍준사들의 횡포가 날로 극악해진다 들었소. 궐에 들여 준다는 빌미로 어린 음인에게 제 사리사욕을 채우는 그들을 더 놔둘 필요가 있겠소?”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폐하. 소신 폐하의 명을 받들어 흥청을 오늘부로 폐지하라 이르겠나이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대신들이 일제히 외쳤다.
“이만 다들 물러가 보시오. 오늘 조례는 이것으로 끝났소.”
명휘는 피곤한 듯 고개를 까닥여 보였다. 그렇게 이만 조례를 끝내려는데.
“하오나 폐하.”
한 대신이 감히 목소리를 내었다.
“그럼 조옥(詔獄)한 국수는 어찌하옵나이까. 이대로 그자를 방치할 작정이십니까. 당장에 큰 항아리에 불을 피워, 그 안에 머리를 처박아 매달아야 할 것이 옳은 줄로 아룁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폐하. 신하들이 또다시 똑같은 목소리를 내었다.
의자에 삐딱하니 몸을 기대앉은 명휘는 느른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특유의 높낮이가 없는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혹시, 짐이 모르는 사이 그대가 혹리(酷吏)라도 된 게요?”
그 싸늘한 음성에 감히 목소리를 내었던 대신이 흠칫하며 얼어붙었다. 그가 잔뜩 몸을 조아리며 다시 아뢨다.
“폐, 폐하. 소신은 그것이 아니오라. 황제 폐하의 안위가 걱정되어…….”
“짐의 안위가 그리도 걱정되면, 그대가 대신하여 황좌에 앉아 있는 게 어떻겠소?”
“예? 폐, 폐하. 그 무슨…….”
황제의 심기를 건드렸음을 깨달은 대신은 바닥에 납작 엎드려 읍소하며 빌었다.
“소, 소신이 잘못하였나이다. 감히 제가 어느 안전이라고……. 폐하, 부디 가엾이 여겨 주시옵소서.”
대신들은 황제의 한마디에 울고불고하는데 정작 황제는 감흥도 없다는 듯, 무심하게 그를 내려다보았다.
“폐하께서 조례를 파하라 하셨으니, 이만들 물러가시오.”
황문시랑(黃門侍郞)이 외치니, 그제야 황제께 예를 갖춘 대신들이 편전을 떠나갔다.
커다란 공간엔 황제와 몇몇 환관만이 남게 되었다. 그는 황좌에 팔을 괴고 톡톡 관자놀이를 두드렸다.
‘수현, 성해의 왕손. 수현…….’
어느덧 그는 긴 생각에 잠기게 되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십 년 전, 피로 물들었던 그날의 기억이 생생히 재생되고 있었다.
온통 화마(火魔)가 휩쓸고 지나친 자리였다.
한때 성대함을 자랑하던 성해의 궁은 화마의 흔적만 고스란히 남아 참혹하게 변해 있었다.
그을음 가득한 그곳에선 피비린내와 앓는 소리, 고통이 가득한 통곡 소리만이 가득했다.
어린 명휘는 아비가 이끄는 군대를 따라 참혹한 현장에 도착하였다.
승리를 자축하는 군사들이 소리 높여 주군을 뜨거운 함성으로 찬양했다.
환호하는 인파를 뚫고 전진하는 백마와 그 뒤를 따르는 군사들은 의기양양한 모습이었다. 그들은 승리에 도취해 있었고, 사기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단 한 명, 백마의 바로 뒤를 따르는 여린 소년만 제외하고.
어린 시절의 명휘는 여린 심성을 소유한 소년이었다. 그의 아비가 늘 다그치고 몰아세우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그 어린 시절의 성정을 보존한 채 자랐을지도 모른다.
그가 지독하리만큼 차갑게 변해 버린 것은, 어쩌면 거대 제국의 황태자로서 지켜야 할 덕목 때문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의 아비는 그를 그렇게 길러 냈다. 절대 누구도 넘볼 수 없도록, 철저히 잔인하게.
그러한 이유로 다른 모든 이가 승리를 쟁취한 기쁨에 젖어 있는 동안, 어린 명휘는 그렇지 못했다.
성년을 채 채우지 못한 어린아이의 눈이 주시하고 있는 것은, 승리자의 기쁨이 아니었다.
어린아이의 시선은 전쟁의 참혹한 이면에 향해 있었다.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시체들. 핏빛으로 물들어 썩어 가는 몸뚱어리들.
그는 생각했다.
무엇을 위하여 이토록 많은 사람이 죽어야 했던 건지. 분명, 살 방법이 있었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리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인지.
‘참으로 가여운 이들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이들이다.’
어린 명휘는 통탄하였다.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성해는 이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수많은 죽음으로도 지켜 내지 못한 약소국의 운명이 그리 끝나 버린 것이다.
이리도 허망하게 사라져 버릴 왕국을 위해 그들은 얼마나 고되었을까. 지키지 못할 것을 지켜야 하는 그 마음은 얼마나 괴로웠을까…….
죽음을 목전에 두고, 칼을 겨눈 이들에게 육신을 내던져야 했던 그 심정은…… 얼마나 두려웠을까.
‘어……?’
그렇게 남몰래 탄식하며 움직이던 명휘의 말이 자리에 멈춰 선 것은, 나뒹구는 시체들 속에서 무엇인가를 발견했을 때였다.
작은 아이였다. 이제 막 열 살 남짓해 보이는 작은 남자아이.
아이는 담벼락에 숨어 시체들 사이에 몸을 숨기고 그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저를 응시하고 있었다.
얼굴은 그을음과 흙먼지로 더러워져 있었고 산발한 머리는 어지럽게 엉켜 있었으나, 아이가 걸치고 있는 옷과 장신구만으로도 쉬이 귀족 혹은 그 이상의 신분임을 알 수 있었다.
‘저 아이가 왜 저기에…….’
아이와 눈이 마주친 명휘는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이상했다. 이토록 두려움에 떨고 있으면서도 도망가지 않고 이곳을 주시하는 아이가.
숨을 몰아쉬는 입술은 파르르 떨리고 감은빛의 예쁜 눈망울은 두려움에 잔뜩 물들어 있었다.
분명, 겁을 집어먹은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무슨 까닭에서인지 아이는 자릴 떠나지 않고 있었다.
들키기라도 하는 날엔 그대로 목숨을 빼앗길 텐데. 그대로 사지가 싸늘하게 식어 저잣거리에 버려질 텐데.
명휘는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어서 아이가 도망쳤으면 했다. 저 예쁜 눈망울로 고통일랑 잊고 살아가길 바랐다. 부디 그랬으면 했다.
분명, 그러했는데.
“여기서 뭐 하는 게냐.”
명휘의 순수한 마음을 짓밟는 순간이 곧바로 찾아오고야 말았다. 자리에 멈춰 선 명휘를 탓하며 그의 아비가 돌아선 것이다.
“아, 아바마마.”
명휘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곧 행군의 가장 선두에 있던 백마는 아예 방향을 돌려 명휘에게 향했다.
명휘는 초조했다. 황급히 시선을 돌린다고 돌렸으나, 혹여 제 시선이 향해 있던 곳을 아비에게 들킨 것은 아닐까 싶었다.
두근두근, 다가오는 백마를 보며 명휘의 심장이 요동쳤다. 떨리는 손을 들키지 않기 위해 부러 고삐를 세게 꽉 쥐었다. 두 손에 진득하니 땀이 배어났다. 두꺼운 갑옷이 뒤덮은 살갗으로 소름이 돋아났다.
“무엇이 있길래 그리도 넋을 놓고 있는 게야.”
일순, 아비의 시선이 담벼락으로 향했다. 명휘는 황급히 손을 뻗었다. 갑옷으로 툴툴 감긴 강인한 팔뚝을 잡아끌며 제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바마마!”
제 팔을 붙잡는 명휘를 보며 그의 아비가 묘한 눈빛을 보였다.
“뭐 하는 게냐.”
“저, 그것이.”
“뭐 하는 짓이냐고 묻질 않더냐.”
“소자가 잠시…… 몸이 좋지 않아 한눈을 팔았나이다.”
애써 변명하는 명휘를 보는 아비의 눈이 탐탁지 않다. 그는 못마땅하다는 듯 쯧, 혀를 찼다. 마음에 차지 않는 자식새끼를 보며 타박을 마구 퍼붓는다.
“못난 놈.”
“…….”
“사내자식으로 태어나. 고작 시신 몇 구 본 걸로 겁에 질려 있는 게냐?”
“아바마마……. 그런 것이 아니옵니다. 소자는 그저…….”
“시끄럽다. 듣기 싫다.”
이윽고 행군을 이끌던 백마는 다시 머리를 돌려 앞으로 향했다.
냉랭한 목소리가 명휘의 귓속으로 파고든다.
“꾸물거리지 말고 어서 따르거라. 곧 해가 질 텐데 어두워지기 전에 성해의 왕가를 숙청해야 할 것이야.”
“예. 아바마마.”
마음에 들지 않는 자식으로 낙인이 찍혔을지언정, 명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다행히 담벼락에 숨어 있던 아이의 존재는 들키지 않은 듯싶었다. 만약 들켰더라면 이미 사달이 나도 진작 사달이 났을 테니까.
명휘는 백마의 뒤를 따르는 내내 마음속으로 그 작은 아이의 안위를 빌었다.
부디 목숨을 부지했길, 오늘의 고통은 잊고 행복하게 살아가길.
또 돌아보았다간 정말로 들켜 버릴 것 같아서, 그렇게 마음속으로만 빌어야 했다.
“폐하, 이만 양심전으로 드심이 어떠하실지요.”
황문시랑의 말이 긴 생각에 잠겨 있던 명휘를 뭍으로 끌어 올렸다.
그는 조례가 끝나고도 긴 시간 동안 편전을 지키고 있는 황제가 걱정되었다.
이제 미시(未時)가 다가오고 있었다. 목에 자리한 상처를 치료받아야 할 때가 된 것이다.
“혹시.”
하지만 황제는 치료 따윈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오히려 그는 황문시랑에게 영문을 모를 말을 건네었다.
“그대는 올밤이에 대해서 아는가.”
“밤에 기괴하게 우짖는 새를 말씀하시나이까.”
“그러네.”
“갑자기 올밤이는 무슨 연유로 찾으시옵니까.”
“문득 재밌는 얘기가 생각나서.”
명휘는 말을 멈추고 잠시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언제나 그랬듯 기를 질리게 하는 위압감을 감춘 미소를.
“그 요물은 저를 낳아 준 어미의 배를 쪼아 잡아먹는다지?”
“그렇사옵니다. 하여, 유학에서는 올밤이를 흔히 불효를 상징하는 동물로 일컫지요.”
낮게 깔린 눈을 하고, 커다란 손이 제 턱을 느릿하게 쓸어 만진다. 싸늘한 미소가 수려한 용안에서 떠날 줄 모른다.
“은혜를 베풀어 목숨을 연명케 하였더니, 오히려 달려들어 비수를 내리꽂는다라…….”
“……….”
“참 재밌는 얘기가 아니더냐?”
“폐하…….”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 꼴이라니. 참으로 재미있구나.”
황문시랑이 황제의 눈치를 보았다. 높으신 분의 뜻을 감히 헤아릴 수는 없으니, 그는 그저 고개만 조아리며 읊조렸다.
“폐하. 혹, 염두에 두신 일이 있으신 것인지요.”
황문시랑의 말에 황제는 조소했다.
“글쎄…… 무어라 얘기해야 할까.”
명휘는 다시 생각에 잠기었다. 그 요망하고 가소로운 이에 대해.
비록 방심하여 어린것에게 목을 내주었을지언정, 명휘는 그 어린것이 전혀 두렵지 않았다. 아니, 되려 반대였다. 그의 사정을 알고 나니 흥미마저 생기는 것이었다.
저는 태화 제국의 황제이자 신의 아들, 천자다. 하지만 상대는 고작 연고 없는 망국의 왕자였다.
범 앞에서 하룻강아지가 앙앙대는 꼴이니 이 어찌 귀엽지 아니하겠는가?
이쯤 되니 명휘는 그가 앞으로 어찌 나올지 기대되기 시작했다. 죽이지 않고 살려 두면 또다시 죽이겠다 달려들까?
이번엔 또 무얼 들고 덤빌까? 체취만 흘려도 벌벌 떨어 대면서, 대체 무얼 할 수 있다고.
“오냐, 기꺼이 받아 줄 것이다.”
침묵 끝에 황제가 말했다.
보는 이로 하여금 소름 돋게 만드는 미소를 얼굴에 완연하게 띤 채, 광기가 가득한 눈을 빛냈다.
“가까이 두고 내 즐거움으로 삼을 것이다.”
“폐하…….”
“비수를 꽂든, 독을 타든, 목을 조르든. 내 기꺼이 무슨 짓이든 받아 줄 것이다.”
“…….”
“저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 절망에 잠식되어 자괴감에 처절히 몸부림칠 때.”
“……….”
“그때가 오히려 죽음보다 더 괴롭지 않겠느냐?”
편전에 낮게 깔리는 목소리를 듣고 있던 황문시랑의 살갗을 타고 살기가 돋아났다.
하지만 그는 절대 내색하지 않았다. 그것은 잔혹한 폭군의 옆에서 지내 오며 터득한 지혜라면 지혜였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태감이 앵무새처럼 읊조렸다. 곧 편전 안이 정적으로 휩싸였다.
* * *
까마득한 밤. 왕부정의 옥사에 갇힌 수현은 문득 느껴지는 인기척에 떨군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사방이 어둑한데, 수현이 갇힌 곳만 유난히 밝았다. 한 병사가 그의 앞에 횃불을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한 손으로 지글지글 타오르는 횃불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바지춤을 내리고 있었다.
“…….”
말할 기력조차 없어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 몸을 한 수현은 힘없이 앞을 주시했다. 희미한 시야에 저를 두고 희롱하는 음란한 손짓이 보였다.
하루에도 몇 번씩 왕부정의 하급 병사들은 수현이 갇혀 있는 수옥을 찾았다. 그들은 수현에게 능욕의 언사를 퍼붓고 보란 듯이 수음하며 희롱하였다.
수현은 좀처럼 보기 드물게 옥사에 갇힌 음인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이 평인인 하급 병사들이 높은 분들만 맛볼 수 있다는 음인을 앞에 두고 끓어오르는 음욕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들은 수현의 형벌이 정해질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죽을 날이 정해지면 그 전에 반드시 취하리라, 그들이 웃으며 그리 수현을 조롱하였다.
비록 천자의 목에 비수를 꽂을 만큼 겁대가리는 상실한 놈일지라도, 여러 명의 장정이 함께 덮치면 저도 꼼짝하지 못할 터였다.
수음하는 병사의 손짓이 빨라졌다. 여린 입술에 여러 개의 남근을 물리고 뒤로 개같이 붙어 드나들 생각에 빠진 병사는 벌써 침이 고여 들었다.
“흐으으…….”
더러운 숨소리가 병사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어두운 바닥으로 탁한 액체를 뿜어내며 훤히 깐 엉덩이가 부르르 떨리었다.
“……….”
주섬주섬 바지춤을 여미는 병사를 보는 수현의 눈빛은 그저 공허했다. 이미 화를 낼 의지조차 상실한 상태였다.
저를 보며 입맛을 다시는 병사의 징그러운 얼굴 따위, 그의 메마른 감정에 일말의 흠집조차 내질 못했다.
‘공허하다. 괴롭다. 살아 있는 것이 저주스러울 만큼…… 자괴감이 든다.’
수현의 상실감은 텅 빈 옥사를 꽉 채우고도 남을 만큼 컸다.
그것은 끝내 적의 숨통을 끊지 못한 제 능력에 대한 혐오이자, 지키지 못한 동족을 향한 죄스러움이었다.
반드시 죽였어야 했다.
오로지 그 하나를 위해 이날 이때까지 살아왔거늘, 절대로 실패해서는 안 되었다.
하지만 원수는 보란 듯 앞에 나타나 목에 칼을 겨누었고, 오히려 저를 희롱하듯 목숨까지 살려 주었다.
수현은 목숨을 구걸한 적 없었다. 오히려 적의 칼날에 깔끔히 숨을 거두어 명예만이라도 지키고 싶었는데…….
상대는 너무도 잔혹했다. 그런 수현의 마지막 바람마저도 그는 무참히 짓밟았다.
목숨을 취하지 않겠다며 돌아서는 그 모습에 수현은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서서히 식어 가는 몸뚱어리가 어서 수명을 다하길 바랄 뿐이었다.
“거기서 무얼 하는 게냐.”
일순, 힘없이 축 늘어진 수현의 귓가에 낮은 목소리가 꽂혔다.
그러곤 곧 짙은 사향이 확 몰려왔다.
“폐, 폐하.”
감히 쳐다볼 수조차 없는 하늘 같은 분을 마주한 옥 앞의 병사가 몸을 벌벌 떨며 조아렸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명휘의 눈길은 싸늘했다. 그는 그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다시 물었을 뿐이었다.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고 짐이 물었다.”
“폐, 폐하. 그, 그것이…….”
차마 제가 한 짓거리를 얘기하지 못하고 병사는 그저 벌벌 떨기만 하였다. 그 한심한 꼬락서니를 보며 북진무사 이위가 엄한 목소리를 내었다.
“이놈이! 어느 안전이라고! 어서 바른 대로 고하지 못할까!”
결국, 하급 병사가 바닥에 엎드려 읍소하였다.
“폐하! 소, 송구하옵니다! 신이 죽을죄를 지었나이다! 그, 그만. 음인에 눈이 멀어…… 죽여 주시옵소서! 폐하!”
흐어엉, 우는 소릴 내는 병사를 보며 명휘는 고개를 모로 틀었다. 그가 제법 의뭉스러운 얼굴을 하고 다시 물었다.
“이상하구나. 짐은 네놈이 무얼 했느냐 물었는데, 어찌 돌아오는 건 죽여 달라는 말인 게지?”
“폐, 폐하.”
이위가 다시금 호통했다.
“어허! 어서! 바른대로 고하거라!”
결국 끅, 끅 숨넘어가는 소리로 울어 젖히며 하급 병사가 대답했다. 여전히 바닥에 고갤 처박은 채였다.
“그것이…… 옥 안에 든 죄인이 유, 유혹하여, 미천한 소, 소인이 그만 넘어갔나이다.”
뜻밖에 얘기에 위엄을 갖춘 얼굴이 다시 한번 반대로 기운다.
“유혹이라?”
“예, 예.”
“상세히 말해 보아라.”
“저자가 끙끙 앓는 소릴 하며 가랑이를 벌리고 저리 찢어진 옷 사이로 속살을 보이며 유, 유혹했나이다. 소인은 정녕 아무런 뜻이 없었는데, 음인이 그리도 농락하는 바람에 그만…….”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수현은 결코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그저 목숨이라도 구걸해야 했던 하급 병사가 지어 낸 비겁한 변명일 뿐이었다.
“저자가 그리하였단 말이냐.”
“예, 예. 폐하.”
하지만 뻔히 속이 보이는 말에도 어쩐지 명휘는 수긍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래. 아랫도릴 달고 있는 사내라면 의당 음기에 약한 법이지.”
그가 흙바닥에 고갤 처박은 이의 앞에 쭈그려 앉았다. 손을 내밀어 바닥에 처박힌 얼굴을 들어 올렸다. 황제의 얼굴에 온통 인자한 미소가 완연하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소, 소인 조우정이라 하옵니다.”
“그래, 우정아.”
“예. 폐, 폐하.”
“고개를 들어 보아라.”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눈을 마주하겠느냐마는, 황제의 명이니 거역할 수 없었다. 파르르 떨리는 고개가 높으신 분을 향해 추어올라 갔다. 명휘는 그가 고개를 드는 대로 슬며시 잡아 옥으로 향하게 하였다. 그들이 동시에 옥 안에 든 이를 바라보았다.
“우정아.”
“예, 예. 폐하…….”
“이제 다시 말해 보아라.”
“예……?”
“저자가 널 어찌 유혹했다고?”
꿀꺽. 마른침 넘어가는 소리가 허공을 울렸다.
조우정은 거짓을 다시 이르기 위해 앞에 있는 죄인을 쳐다보았다.
가는 두 팔은 손목이 묶여 천장에 매달린 끈에 달려 있고, 축 늘어진 몸은 수양버들처럼 떨궈져 바람이라도 불면 휩쓸려 갈 것만 같다. 군데군데 찢어진 옷 사이로 붉게 물든 피가 들러붙어 있고, 간혹 보이는 살색은 너무도 새하얘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새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분명 살기 위해선 무어라도 지껄여야 했는데, 다 죽어 가는 꼴을 하고 매달려 있는 음인의 모습을 보자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저건 누가 봐도 생의 의지가 느껴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감히 떠들어 댔던 그 요망한 말이,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형상이었다.
결국, 거짓을 고하던 이는 고개를 떨구고야 만다. 이제 그는 어떤 것도 고하지 못하고 으헝, 흐어엉, 우는 소리만 낸다.
그 꼴은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명휘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한 발짝 뒤로 물러나 무심한 얼굴로 방관하려니, 이윽고 북진무사가 곁으로 섰다. 황제의 앞에 고개 숙여 예를 갖춘 뒤, 제 허리춤에 달려 있던 칼집에서 장검을 꺼내 든다.
챙, 한순간에 바람을 가르며 시퍼런 칼날이 하급 병사를 스쳤다. 욱, 비명조차 못 지르고 조우정은 그 자리에 철퍼덕, 쓰러졌다. 시뻘건 선혈이 조금 전까지 엉엉 울어 젖히던 몸에서 흘러나온다.
“치워라.”
북진무사의 외침에 금위군 군사 두 명이 달려와 재빨리 바닥에 널브러진 시신을 수습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아마 한 명이 아닐 게다.”
“송구하옵니다, 폐하. 진상을 파악하여 모두 처벌하겠습니다.”
명휘는 그대로 북진무사를 지나쳐 옥 앞으로 향했다. 황제의 움직임을 보고 북진무사가 명령했다.
“죄인을 끌어내라.”
이윽고 커다란 수옥의 문이 열리고 묶여 있던 죄인이 풀려났다. 밖으로 끌려 나온 죄인의 몰골은 더욱 처참하였다.
광장에서 그토록 수많은 양인을 홀렸던 꽃향기는 옅어져 온데간데없고, 가무를 익히며 만들었을 다부진 몸은 그새 살이 쪽 빠져 뼈만 앙상했다.
다만, 시들어 버린 꽃일지라도 황제의 환심을 단번에 사로잡은 그 얼굴만은 여전했다. 아니, 오히려 처연하게 내려앉은 긴 속눈썹과 눈물 같은 점을 매단 눈매는 오히려 평소보다 더 보는 이의 마음을 동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몸이 많이 상했구나.”
고양이가 쥐를 이리 걱정한다 했던가? 다정함을 가장한 능욕에 수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잔뜩 미간을 좁히고 죽일 듯 노려보는 얼굴로 명휘가 천천히 손을 내뻗었다.
핼쑥해져 움푹 파인 볼을 따라 손을 놀리며 그가 천천히 얘기했다.
“짐이 어찌 그대를 이리 대접하겠는가. 그래도 한때 왕자의 신분이었던 귀하신 몸을.”
순간, 수현의 두 눈이 일렁였다.
‘태화의 황제가 알고 있어.’
심장이 턱 막히고 숨이 차오는 가운데 갈 곳을 잃은 동공이 마구 흔들렸다.
“비록 망국일지라도. 왕가의 출신인 건 여전하지 않겠는가? 아니 그러한가?”
수현의 얼굴에 절망이 흘러넘친다. 결국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그의 정체가 고작 하루 만에 이리 허무하게도 발각되고야 만 것이다.
아니, 이것은 어쩌면 예견된 수순. 흥청에 들어서면서 경황이 없어 제 이름을 감추지 못한 것이 화근일 터였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이리 빨리 발각될 줄 몰랐다. 지독한 패배감이 다시 한번 그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흠…….”
절망에 찬 수현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명휘의 얼굴엔 조소가 흘러넘쳤다. 낙망한 음인의 눈망울만큼 그를 즐겁게 하는 것 또한 없으리라.
“그대의 출생에 걸맞은 대우를 해 줄 것이다. 비록 그대가 지은 죄가 한없이 무거워 죽음으로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나, 짐은 그대에게 자비를 베풀고자 하노라.”
황제는 진심으로 기뻐하여 말을 이었다.
“그대를 짐의 후궁으로 맞이할 것이다.”
자리에 있던 모든 이가 화들짝 놀랐다.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될 일이었다. 감히 황제의 목을 겨눈 이를 후궁으로 들인다니,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가장 놀란 것은 장본인, 수현이었다. 그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얘기에 제 귀를 의심했다.
‘태화의 황제가 미쳐 버린 걸까? 아니, 내가 미쳐 버린 걸까? 내가 미쳐 헛것을 듣는 걸까?’
“이리도 자비를 베풀어, 모든 이를 챙기니. 짐은 참 성군이 아니더냐.”
하지만 농담처럼 내던지 명휘의 다음 얘기를 듣고서야 수현은 현실을 직시할 수 있었다. 정말 저 미친 황제가 저를 후궁으로 맞이하겠다는 거였다.
수현은 이제 넋을 놓아 버렸다. 사지가 마비되고 심장이 멈춰 버린 것만 같았다. 사고를 거부하는 머릿속에는 계속 같은 얘기만 되풀이되고 있었다.
후궁. 황제의 후궁. 태화 황제의 후궁. 후궁…….
“그럼. 거처가 정리되는 대로 궁으로 부를 테니, 그때까지만 참고 있거라.”
명휘가 그대로 자리에서 돌아섰다. 그렇게 넋을 놓은 수현을 두고 걸음을 옮기려는데.
“그렇게는 되지 않을 것이오.”
처음으로 음인이 입을 열었다.
“황제의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오.”
자리에 선 채로 명휘가 고개를 까닥였다. 다소 의아하다는 얼굴을 하고 그가 천천히 뒤를 돌았다.
수현은 다시금 저에게로 다가오는 황제를 보며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그는 단호한 표정으로 황제를 똑바로 직시했다. 전혀 거리낌 없는 얼굴이었다.
“태화 황제의 후궁이 되느니 차라리 이 자리에서 자결하겠소.”
그의 말에 명휘는 기가 찬 듯 웃었다.
“자결이라…….”
웃음이 걷힌 얼굴엔 느른함이 맴돌았다. 음인의 얼굴을 한 손에 쥘 정도로 커다란 손이 느릿하게 들어 올려졌다.
“어디, 할 수 있다면 그리해 보아라.”
기다란 손가락의 끝이 수현의 얼굴 옆선을 따라 느릿하게 흘렀다.
“짐의 손안에 있는 이상 그대의 몸은 그대의 것이 아니다.”
진한 사향이 맴도는 손끝이 천천히 수현의 입술을 매만진다.
“그대의 입술도.”
단단한 턱을 지나쳐 가는 목을 훑는다.
“목도.”
옴폭 파여 앙상하게 드러나 빗장뼈를 지나, 가슴으로 향한다. 얇은 천을 사이에 두고 살짝 솟은 유실을 짓궂게 꾹, 누른다.
“그대의 심장마저도.”
느른하게 내려앉은 눈빛으로 제 손이 멎은 곳을 쳐다본다. 손끝을 타고 음인의 심장 박동이 전해진다.
“…….”
두근두근. 급하게 뛰는 그 울림을 느끼며 명휘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린다. 여전히 죽일 듯 저를 노려보는 음인과 눈을 마주한다.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지독한 검은빛의 눈동자.
터뜨리고 싶다. 터뜨리고 짓밟고 싶다.
공포로 물들어 다시는 저 어여쁜 빛을 발하지 못하도록 그렇게 망가뜨리고 싶다.
그렇게 불구가 되어, 망가진 눈을 한 너를 기어이 안으리라. 네가 내 앞에 스스로 무릎 꿇는 날, 나는 기꺼이 너를 품에 안고 조롱하리라.
결국, 너는…….
“짐의 것이 될 것이다.”
그대로 명휘가 손을 거두었다.
숨 막히는 사향이 걷히자, 수현은 그대로 맥이 탁 풀리며 자리에 주저앉고야 말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죽겠다고 그리 자신 있게 말했던 그였건만, 거짓말처럼 그의 몸은 다시 떨리고 있었다.
“그만 가자.”
자리에 앉은 음인을 두고 황제가 돌아섰다.
“죄인을 한시도 빠뜨리지 말고 감시하라. 혹여나 죄인이 허튼짓이라도 하여 저 몸에 작은 상처라도 발견하면, 그대의 목을 내놓아야 할 것이야.”
그는 북진무사에게 명하고는 그대로 발걸음을 옮겨 옥사를 벗어났다.
황제의 그림자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금위군 병사들은 굽힌 허릴 펼 줄 몰랐다. 그들은 사향이 완전히 걷히고 나서야 몸을 움직였다. 죄인의 몸을 포박하고, 다시 옥 안에 집어넣었다.
옥에 끌려가면서도 수현의 머릿속엔 오직 같은 형상이 맴돌고 있었다.
지독한 사향과도 닮은 그 눈빛. 마치…… 저를 잡아먹는 것으로도 모자라, 질겅질겅 씹어 삼킬 것처럼 노려보던 황제의 눈빛.
온몸에 돋는 살기처럼 어스름한 달이 밤하늘에 차올랐다. 흐릿한 구름이 빛을 가려 더욱 싸늘한 밤이었다.
* * *
씨익, 씨익. 꽉 조여 맨 가슴이 화를 삭이지 못하고 잔뜩 들썩였다. 분을 칠한 하얀 얼굴은 열기로 붉어졌고, 연지를 바른 붉은 입술은 앙다물어져 있었다.
수많은 나인을 이끌고 궁을 가로지르는 황후를 보며 궁인들이 고개를 조아렸다. 긴 머리를 용이 음각진 황금색 비녀가 감싸고, 금은보화로 만든 장신구를 치렁치렁 장식하였다. 붉은색과 황금색 염료로 물들인 옷자락이 바닥에 길게 늘어졌다. 궁의 안주인답게 화려함이 극치에 달한 모습이었다.
태화에서 황제 다음으로 위세를 떨치고 있는 그녀였지만, 무엇이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기라도 한 것인지 표정이 상당히 불편해 보였다. 잔뜩 찌푸린 미간이 도무지 펴질 줄을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 아침 궁이 발칵 뒤집혔다.
국수를 후궁으로 들이겠다는 황제의 선언에 조례에 참석한 신하들은 하나같이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그들은 안될 말이라며, 부디 뜻을 거두어 달라 청하며 읍소하였다. 하지만 결국 그들 중 누구도 황제의 뜻을 꺾진 못했다. 편전 안에 흩뿌려지는 몇몇 대신의 피를 보고선 하나같이 입을 다물어 버린 것이다.
소문은 날개 돋친 듯 빠르게 궁을 돌아 황후가 머무는 곤녕궁(坤寧宮)에까지 퍼졌다. 그걸 전해 들은 황후가 멀쩡할 리 없다는 건 불 보듯 뻔했다. 그녀는 격분해 경대를 집어던지며 분통을 터뜨리고 고함을 질러 댔다.
화를 채 삭이지 못한 황후가 기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후는 외출을 준비하며 평소보다 더 화려하게 치장하였다. 황제의 눈에 어떻게든 들기 위해서였다.
‘내 무슨 짓을 해서라도 황제의 마음을 돌릴 테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자를 후궁으로 들이는 일 따윈 없어야 할 것이야!’
그렇게 황후가 이끄는 무리가 양심전에 도착하였다. 미시로 막 접어들 무렵이었다.
근육이 강건히 자리 잡은 명휘의 한쪽 어깨가 훤히 드러나 있었다. 검은색 용포는 팔뚝 위에 걸쳐져 강인함을 부각하고, 한 손으로 채 다 가리지 못할 커다란 흉근은 가슴팍에 자리해 사내다운 면모를 가감 없이 보여 주고 있었다.
“폐하. 황후마마께서 뵙길 청하나이다.”
목의 상처를 치료받으며 두 눈을 감고 있던 명휘는 태감이 고하는 소리에 천천히 눈을 떴다. 그가 우아하게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용태를 살피던 태의의 손이 멎었다. 그가 천천히 황제에게서 몸을 물렸다.
“들라 일러라.”
곧 문이 열리고 옥발을 헤치며 황후가 안으로 들어섰다.
“폐하를 뵈옵니다.”
황후는 들어서자마자 황제께 예를 갖춰 올렸다. 기다랗고 풍성한 속눈썹을 들어 올리며 높으신 분을 마주했다.
명휘는 여전히 옷섶을 풀어 헤친 채로 느긋하게 자리에 앉아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설레게 하는 그 자태에 황후의 얼굴이 붉어졌다. 당장에라도 뛰어들고 싶은 넓은 어깨와 흉근을 보고 가슴이 콩닥콩닥하였다.
곧 나인들이 달라붙어 황제의 옷을 바르게 하였다. 훌륭한 몸이 단숨에 용포에 가려져 모습을 감추었다.
“그래. 황후가 양심전까지 무슨 일인 게요.”
느른한 눈길로 명휘가 몸을 늘어뜨렸다. 그가 한 손을 내밀자 옆에 있던 나인이 연죽(煙竹)을 찾아 대령했다. 곧 긴 대나무 대의 끝에 달린 금으로 만든 통에 빼곡히 연초 잎이 채워졌다.
“어찌 신첩이 폐하를 뵈옵는데 이유가 있겠사옵니까. 날이 화창하여 봄에 가까워지니, 폐하의 연정이 그리워진 게지요.”
남초(南草)에 불이 붙자 회색빛 연기가 한 줄기 피어올랐다.
물부리를 입에 물고 명휘는 연기를 한껏 들이마셨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오른 콧대 아래, 붉은 입술 사이로 연기가 흘러나왔다. 빨아 마시고 내뱉는 연기는 묘하게도 사람을 홀리는 구석이 있었다.
“그리 서 있지 말고 앉으시지요.”
“예, 폐하.”
이윽고 나인들이 차와 과자를 내어 왔다. 황후는 우아한 손짓으로 꽃분홍으로 물든 과자를 한입 베어 먹고, 차로 입을 가시었다. 명휘는 딱히 앞에 놓인 음식에 관심이 없는 듯했다. 그는 여전히 느른한 눈빛으로 연초의 연기를 내뿜고 있을 뿐이었다.
“폐하. 옥체는 강녕하신지요.”
찻잔을 내리며 황후가 물었다. 그녀의 시선은 황제의 목에 향해 있었다. 용포의 깃 위로 목을 감싼 붕대가 단단히 묶여 있었다.
“황후가 마음 써 준 덕분에 이리 쾌차하게 되었소.”
황후의 덕이라는 말이 무색하리만큼, 말하는 이의 표정은 무심하기 그지없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신첩, 기쁨이 넘치어 몸 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요망한 웃음이 입가를 적셨다. 섬섬옥수가 찻잔을 다시금 붙잡는다.
“하온데, 폐하. 신첩이 재미난 얘기를 들었나이다.”
본론을 꺼내기 위해 황후는 두꺼운 가면을 뒤집어썼다. 들끓는 속의 화를 억누르고 온화한 미소가 꽃처럼 얼굴 위에 피었다.
“감히 폐하의 옥체를 상하게 한 이가 사라져 버린 성해의 왕자였다지요? 신첩은 감히 상상조차 어렵사옵니다. 망국의 왕자 따위가 어찌 폐하께 그리할 수 있단 말입니까. 정녕 경을 쳐도 모자랄 놈이 아니옵니까?”
느른하게 연기를 내뿜던 입이 멈추었다. 연죽을 물리자 나인들이 받아 들었다. 높으신 분이 친히 손을 내미니 나인들이 빈 잔에 차를 채운다.
“황후는.”
모락모락 연기를 내뿜는 찻잔을 손에 들고 느른한 시선이 그곳으로 향한다.
“참으로 모진 사람 같습니다.”
뜨거운 액체를 입 안에 머금고 그 향을 음미한다.
“어여쁜 얼굴을 하고 어찌 그리 무심하게 말씀하시오.”
정곡을 찔린 황후의 얼굴이 붉어진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채로 그녀가 황급히 말을 꺼낸다.
“폐하, 신첩은 그저 황실의 안위가 걱정될 뿐이옵니다. 감히 망국의 왕자가 그리 나대니 황실의 권위가 땅에 떨어질까 두렵사옵니다.”
“황실의 권위가 땅에 떨어질까 두렵다고요?”
“폐하.”
“참으로 놀랍군요. 황후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
“황후의 말이야말로 짐과 그대를 욕보는 게 아니오.”
“폐하!”
“아니라 할 수 있소?”
여태껏 숨겨 왔던 감정이 삽시간에 툭, 툭 터져 나왔다. 더는 숨기지 못하고 황후가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어찌 신첩의 마음을 그리 받아들이시는 겝니까. 신첩이 감히 폐하를 욕뵈고자 그리 말씀드렸겠습니까?”
명휘는 마시고 있던 찻잔을 탁자 위로 올렸다. 감정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얼굴로 그가 황후를 마주했다.
“이 문제는 황후가 그리 나서서 걱정해 주지 않아도 될 문제인 것 같습니다.”
뻔히 속이 보이는 황후의 태도에 명휘는 소리 없이 계속 다그치고 있었다. 네 본심을 꺼내 놓으라고.
그리고 그것을 모를 리 없는 황후는 결국 항기를 들어 올렸다.
“금일 조례에서 선언하신 것을 철회하여 주시옵소서.”
“그 또한 황후가 간섭할 일은 아닌 것 같소만.”
“아니요. 그렇지 않사옵니다. 망국의 왕손을 내명부에 들이신다니요. 이는 내명부의 주인으로서 절대 용납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신첩은 그자가 궁에 들어오는 것을 결코 가만히 보고 있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명휘가 고개를 까닥였다. 언뜻 참으로 유감이라는 표정이 그의 얼굴에 서렸다.
“폐하.”
간곡한 여인의 청에 명휘는 잠시 말이 없었다. 빤히 쳐다보는 느른한 눈빛에 황후는 숨이 콱 막히는 것만 같았다.
“혹, 황후는 나의 체향에 대해 들은 바가 있소?”
황제의 말이 여인의 가슴을 아프게 파고들었다. 그랬다. 황후가 가장 격분하였던 것은 후궁으로 들이겠다는 왕국의 왕자가 음인이라는 것 때문이었다.
그녀는 평인이었고, 덕분에 한 번도 황제의 결착(結着)을 받아 낸 적이 없었다. 황제가 뿌려 주는 씨만으로 태임을 할 수 있는 몸이긴 하였으나, 대대로 극양인 자손을 봐야 하는 황실에 유일한 오점이기도 했다.
“폐하. 어찌 이리 신첩이 당황토록 이러십니까.”
“문득 궁금하여 그러오. 황후가 짐의 향에 들은 바가 있는지.”
“폐하.”
“황후도 들어 봤을 테지.”
“…….”
“어디 말씀해 보시오. 짐의 체향에 대해.”
꿀꺽, 마른침이 여인의 목구멍을 타고 흘렀다. 결국 망설인 끝에 황후가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사향과 닮았다 들었습니다. 어찌 맡으면 한없이 달아 상대의 애간장을 녹이고. 또 어찌 맡으면 한없이 독하여 상대를 질식시키기에 모자람이 없다 하였습니다.”
“그리 들었소?”
“예, 폐하.”
제 향에 대해 논하는 황후의 말에 명휘는 나름 만족한 표정이었다. 질식, 그 표현이 마음에 들었다. 저의 위치를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이라고 그가 생각했다.
“그리 잘 알고 있다면 황후가 걱정할 게 무엇이오.”
“폐하…….”
“짐은 절대 무너지지 않을 대제국의 황제요. 체향만으로도 상대의 숨통을 조일 수 있는 권세와 능력이 짐에게 있소.”
“…….”
“그리고 그대는 짐의 총애를 받는 황후가 아니었소?”
“폐하, 신첩은…….”
“성해는 이미 뭍 아래로 사라진 망국일 뿐이오. 어찌 한없이 모자란 이를 두고 황후가 질투한단 말이오?”
황후가 화들짝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
“지, 질투라니요. 폐하, 당치 않사옵니다. 신첩은 그저…….”
“그저.”
“그것이…… 그러니까…….”
황후의 마음은 어느새 누그러져 있었다. 황제가 친히 ‘짐의 총애를 받는’이라는 표현을 쓴 덕분이었다.
평소 제 감정을 극도로 내비치지 않던 황제였다. 비록 얼음장같이 차가운 목소리였지만, 그런 표현을 썼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황후의 가슴은 뜨거워질 수 있었다.
“속국의 왕손과 혼인하는 것은 선대에서부터 이어져 오는 관례요. 비록, 성해가 태화에 의해 완전히 맥이 끊겼다고는 하나, 왕손이 살아 있음을 알게 된바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소. 왕손의 예우를 갖춰 궁으로 불러들이고 후궁으로 맞이한다면, 옛 성해의 백성이었던 이들의 민심을 살 수 있을 것이오.”
황후는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태화를 하늘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봉기를 준비하는 옛 성해의 백성들이 이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하였다. 딱히 반박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폐하. 신첩의 생각이 짧았나이다. 폐하의 말씀이 모두 맞사옵니다.”
“황후가 그리 이해해 준다니 짐은 기쁩니다.”
“아니옵니다, 폐하. 폐하의 하해와 같은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신첩이 그저 부끄럽사옵니다.”
이 정도면 충분한 얘기를 나누었다고 생각한 황후는 눈치껏 자리에서 일어섰다.
“신첩은 그만 물러갈까 하옵니다. 폐하의 심신의 안정을 위해서 신첩이 자릴 비켜 드려야지요.”
명휘는 예의상으로도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그저 자리에 앉은 채로 거만한 시선을 들어 올려 황후와 마주했을 뿐이었다.
“그럼, 폐하. 편히 쉬십시오.”
“들어가시오.”
그대로 예를 갖춘 황후가 물러났다.
옥발을 헤치며 다시금 황후가 황제의 침전을 나섰다. 끝없이 궁인들이 늘어선 복도를 지나쳐 곤녕궁으로 향하는 얼굴이 불긋불긋하다.
“성해의 왕자라…….”
궁에 들어온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게 해 주마.
그녀는 쓰디쓴 뒷말을 입안으로 집어삼켰다.
* * *
짝, 소년의 뺨이 세차게 돌아갔다.
붉어진 뺨을 하고도 소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자리에 서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저보다 키가 한 척이나 높은 사내가 저를 노려보고 있었다.
“내 너를 가엽게 여겨 거두었거늘. 어찌 이리도 기예를 익힘에 게으르단 말이더냐.”
소년은 아무것도 모르고 이곳에 들어오게 되었다.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는 어미의 말을 떠올리며, 밥을 주고 재워 준다길래 낯선 이를 따라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이다.
“어디 그래서 궐에 한 발짝이라도 들여놓을 수 있겠느냐.”
발을 들이고서야 소년은 알 수 있었다. 이곳이 태화의 황실로 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임을.
소년은 생각을 바꿔먹었다. 저에게 찾아온 유일무이한 기회를 절대 내버리지 않기로 한 것이다. 어떻게든 이곳에서 살아남아 태화의 황실에 들어갈 것이다. 어린 소년은 그리 마음먹었다.
“못난 놈.”
그렇기에 소년은 단 한 번도 배움을 게을리한 적이 없었다. 교방(敎坊)의 수업이 끝나면 그는 배운 내용을 되풀이하고 또 되풀이했다. 형님들이 연초를 태우며 수다를 떨며 휴식을 취할 때도, 그는 교방을 떠나지 않고 계속 연습에만 매진하였다.
“나리, 소인이 잘못했사옵니다.”
그럼에도 이곳의 주인은 항상 소년을 나무랐다. 매번 실력이 일취월장함에도 늘 소년만 유난히 물고 늘어지며 배움이 부족하다 타박이었다.
억울하다 한들, 그걸 티 내선 안 되었다. 뱀 같은 눈을 징그럽게 빛내며 쳐다보는 저 사내의 눈밖에 조금이라도 나는 날엔 그걸로 끝장이었으니까. 그럼 모든 게 끝나 버리는 거였으니까.
“하늘 같은 채홍준사님의 은혜를 잊고 이리 방자하게 굴었사오니, 나리는 부디 소인을 벌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소년은 알고 있었다. 어찌해야 이 비겁한 사내의 마음을 달랠 수 있는지도.
“그래. 네놈이 그리 청하니, 내 너를 벌로써 훈육해야겠구나.”
문이 꽉 닫힌 방 안, 소년이 바지를 끌어올렸다. 새하얗고 깡마른 종아리가 단번에 모습을 드러냈다. 얼마나 많이 맞은 것인지, 가는 다리를 새빨간 줄이 빼곡히 뒤덮여 있었다.
단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애처롭기 그지없는데, 사내는 소년의 가는 다리를 노려 잔인하게 회초리를 휘둘렀다.
“읏!”
저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은 소년이 황급히 입술을 다물었다. 감히 벌을 받는 처지를 까먹고 소릴 내뱉은 방자한 입을 탓하며 그가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어느 안전이라고 소릴 내느냐.”
그걸 가만히 넘어갈 사내가 아니었다. 말로는 아일 탓하는 듯했으나, 그의 얼굴엔 징그러운 미소가 완연했다. 참으로 뱀과 같은 얼굴이었다.
“내 너를 적당히 훈계해서는 안 되겠구나. 바짓가랑이를 꽉 쥐거라.”
짝, 다시 한번 징그러운 회초리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살집을 터뜨릴 듯 감겨 오는 가는 회초리에 소년의 커다란 두 눈에 물방울이 어렸다. 너무 아파서 소릴 지르며 엉엉 울고 싶었지만, 그래선 매질만 늘 뿐이었다. 소년은 어금니를 악물고, 입술을 짓씹으며 겨우 버텨 냈다. 다리가 후들거려 잡은 옷자락을 자꾸 놓칠 것만 같았다.
“후…….”
그렇게 쉴 새 없이 내려치던 회초리가 멎은 것은, 소년이 대략 서른 대의 매질을 견뎌 냈을 때였다.
사내는 방바닥에 회초리를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대신 그는 가는 눈을 하고 소년을 쳐다보고 있었다.
긴 속눈썹을 적시고 매달려 있는 눈물. 벌게진 볼과 하도 깨물어 핏기가 가신 얇은 입술. 기다란 목선과 가는 어깨선. 건드리면 부러질 것 같은 두 다리와…… 그 하얀 살결을 뒤덮은 붉은색의 상흔.
“…….”
사내는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짐짓 다정한 척 굴었다.
“내 너를 이리도 훈계하는 것은 그만큼 너를 아껴서 그러는 것이니.”
장에서 무언가를 꺼내든 그가 소년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작은 통의 뚜껑을 열고 번들번들한 고체를 손가락을 푹, 떠 올렸다.
“너는 이를 조금도 서운해하지 말아라.”
빨간 줄이 좍, 좍 그어진 종아리 위로 끈적한 약이 처발렸다. 사내는 손끝을 부드럽게 놀려 소년의 종아리를 문질렀다. 조금 전까지 매질을 당하던 종아리는 뜨거웠고, 맞은 곳을 따라 울퉁불퉁하게 부어 있었다.
“흐음…….”
끈적한 약을 사이에 두고 사내의 손가락 끝은 계속해서 같은 곳을 맴돌고 있었다. 약재를 바르는 사내의 손짓이 느릿하다. 그는 탄복하듯 가끔 숨소리를 내뱉으며 오랫동안 소년의 종아리를 문질렀다.
‘싫어…….’
소년은 매질을 당하는 순간보다 지금 이 순간이 더 싫었다. 사내의 징그러운 눈빛도, 아픈 곳을 계속해서 매만지는 손길도 토악질이 날 만큼 싫었다. 그렇다 한들, 소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그저 마음속으로 빌어야 했을 뿐이었다.
“그만 되었다.”
사내가 종아리에서 손을 떼어 내며 말했다.
소년은 다급히 잡고 있던 옷자락을 손에서 놓았다. 맞은 곳의 아픔보다는 이 지긋지긋한 시간이 끝났다는 것에 안도하며, 그가 작게 숨을 몰아쉬었다.
“이제 너도 성년이 되었으니, 멀지 않았구나.”
소년을 보며 사내가 다시금 징그러운 미소를 보였다.
“네가 궁에 들어갈 날 말이다.”
사내의 말에 소년의 심장이 요동하기 시작한다.
“네놈도 알고 있을 테지? 연회에 올릴 아이를 누가 결정하는지.”
또 한 번 뱀 같은 눈빛으로 사내가 소년을 쳐다본다. 뱀에게 가슴을 물린 것처럼 심장이 쿡쿡 쑤셔온다.
“수현아, 너는 똑똑한 아이니까. 어찌 처신해야 할지 잘 알고 있겠지.”
결국, 소년은 모든 것을 놓아 버린다. 체념하듯, 한숨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예…… 소인, 잘 알고 있사옵니다.”
한참 동안 자리에서 입술만 짓씹던 소년은 결국 자리에 무릎 꿇어앉는다. 바닥에 몸을 낮추고 엎드리듯 기어 사내에게로 향한다.
‘참자. 지금은 참아야 한다. 뜻을 이루기 위해…… 지금은 참아 내야만 한다.’
곧 내벌린 사내의 가랑이 사이로 소년이 얼굴을 들이민다. 바지춤을 손으로 잡고 슬며시 숨겨진 살을 꺼내 잡는다.
“흐음…….”
어둠이 내려앉은 밤. 곧 방 안엔 사내의 깊은 신음이 울려 퍼진다.
“정신이 드느냐.”
귀를 울리는 소리에 축, 늘어진 몸을 하고 수현은 힘없이 앞을 응시했다. 흐릿한 시야 속에서 빤히 저를 직시하는 두 개의 눈동자가 보였다. 몽롱한 정신을 일깨우는 사향에 비릿한 웃음이 새어 나온다.
기나긴 꿈에서 깨어나 수현이 마주한 것은 칠흑 같은 어둠과 절망이었다. 악몽보다 더한 현실이었다. 이곳이 나락이었고, 생의 끝자락이었다.
더는 갈 곳도, 기댈 곳도 없었다.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의 밑바닥으로 자꾸만 끌려 가고 있었다.
몰살당한 가족. 왕국의 몰락. 복수를 위해 살아온 지난 십 년의 세월. 실패해 버린 복수. 그리고…… 원수의 첩으로 살게 될 앞으로의 나날.
지금까지의 삶이 고통스러웠다 한들, 앞으로 있을 일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태화 황제의 후궁으로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았다. 그 수치와 치욕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수현은 이대로 옥에서 삶을 마감하리라 생각했다. 이미 더러워진 몸뚱어리일지라도, 절대 태화 황제의 손에만큼은 꺾이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하지만 그것도 그의 맘대로 쉬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수현이 혹여나 혀라도 깨물까, 목이라도 맬까, 입에 재갈을 물리고 기둥에 몸을 묶은 탓이었다.
태화의 황제는 그렇게 마지막까지 수현에게 잔인했다. 목숨조차 끊지 못하게 하는 것. 그것이 태화 황제가 선택한 잔인한 복수 방법이었다.
“그만 재갈을 풀어 주어라.”
수현의 입에 물려 둔 재갈이 풀렸다. 입가에 가득 고인 침이 나무 막대를 타고 바닥에 뚝, 뚝 떨어졌다. 볏짚을 깔아 둔 바닥이 타액에 흥건히 젖어 들었다.
“이곳에서 지내기 고되었을 테지.”
황제가 다정한 척, 수현의 얼굴을 쓸었다. 친히 귀한 몸을 낮춰 죄인과 얼굴을 마주하며 눈을 맞췄다.
“그대의 모습이 이리도 처량하니, 짐의 마음이 아프구나.”
‘역겨워.’
수현은 구역질이 올라올 것만 같았다. 잔인하게 성해를 짓밟고 한 나라의 왕가를 몰살하던 이가 지금 뭐라 지껄이는가. 마음이 아프다고? 처량한 모습에 마음이 다 아프다고?
“이제 그대를 궁으로 들여와 좋은 의복과 따뜻한 잠자리를 짐이 내줄 터이니…….”
퉤, 역겨움을 참지 못하고 수현이 그대로 황제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
진한 타액이 명휘의 볼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다. 이제껏 한 번도 있어 본 적 없는 놀라운 광경에 자리에 있던 이들이 일순 얼어붙었다.
“폐, 폐하!”
이윽고 뒤늦게 정신을 차린 태감이 눈을 부릅떴다. 그가 노발대발하면 수현에게 호통하였다.
“아니, 이놈이!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이를 듣고 명휘가 왼손을 들어 올렸다. 그만하라는 황제의 수신호에 태감의 입이 다물어졌다. 순식간에 사방은 고요해졌고, 귀신이 지나간 듯한 정적이 흘렀다.
명휘는, 난생처음으로 얼굴에 침 세례를 받게 된 명휘는 싸늘하게 굳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곧 나인 중의 한 명이 다가와 용안에 흐르는 침을 닦으려 했으나, 명휘는 그것마저 물렸다. 그저 제 손등으로 볼을 훑으며 수현을 노려보았을 뿐이었다.
“다들 물러가라.”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허공에 퍼졌다.
“하, 하오나 폐하.”
“물러가라 하였다.”
감히 누구의 명이라고 거역하겠냐마는, 태감은 차마 그리할 수 없었다. 지엄한 분께 무엄한 을 저지른 죄인을 가만히 두고 돌아가기엔 그의 충심은 너무도 깊었던 탓이었다.
“폐하. 어찌 소신에게 물러가라 하시나이까. 소신이 어찌 폐하께 떨어질 수 있겠사옵니까.”
“분명 물러가라 일렀다.”
하지만 결국 태감은 황제의 말을 거스르지 못했다. 그를 포함한 궁인들이 저마다 발걸음을 물렸다. 황제에게 등을 보이지 않은 채 그들이 멀어졌다. 어느덧 횃불이 밝힌 옥 안에는 명휘와 수현 둘만이 남겨지게 되었다.
어둠 속에서 명휘가 몸을 굽혔다. 수현의 시선에 맞추어 그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색색, 숨이 드나들 때마다 뜨거운 열기가 명휘의 얼굴을 데웠다. 힘없이 축 늘어진 눈꺼풀이 어둠에 파묻힌 눈동자 위로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명휘는 손을 들어 홀쭉해진 음인의 볼을 매만졌다. 그새 열이 올랐는지 볼이 뜨겁게 느껴졌다.
“음…….”
볼을 맴돌던 손길은 어느덧 수현의 입술에 닿아 있었다. 힘에 겨운 듯 뱉어 내는 숨결이 명휘의 손끝을 간질였다. 그가 손끝으로 천천히 수현의 입술을 덧그리듯 움직였다.
징그러운 손짓에 수현의 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그가 몸서리치며 몸을 뒤틀었다. 입술에 닿아 있는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갯짓을 했다. 두 발이 번갈아 가며 앉은 자리의 바닥을 긁어 댔다.
이제껏 느른하게 내려앉아 있던 명휘의 눈이 단번에 확, 떠졌다. 미간을 좁힌 채로 수현을 쏘아보았다. 여태껏 부드럽게 입술을 훑던 손길이 우악스럽게 수현의 턱을 그러잡았다. 포식자의 것처럼, 그의 목소리가 낮게 가르릉거렸다.
“너에게 얼마나 더 아량을 베풀어야 할까.”
그가 제게 시선을 맞춰 수현의 턱을 잡아 돌렸다.
황제와 눈을 마주한 채로 수현은 어금니에 아득, 힘을 주었다. 감히 그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네놈은 짐이 황제임을 잊은 것이냐?”
명휘가 억지로 수현의 턱을 끌어 제게 잡아당겼다. 강제로 입술을 맞추려는 그 때문에 수현이 세게 발버둥 치며 저항했다. 하지만 그 무엇도 제대로 들어 먹힐 턱이 없었다. 턱을 잡고 있는 양인의 손힘이 너무도 거세었기에, 수현은 끝끝내 그와 입술을 부딪쳐야만 했다.
억지로 다물어진 입술을 뚫고 명휘가 혀끝을 들이밀었다. 그의 혀가 마치 뱀처럼 수현의 입속을 헤집었다. 억지로 수현의 혀 천장을 핥고 혓바닥을 비벼 댔다. 수현의 혀를 뽑아먹을 것처럼 빨아들이며 옭아맸다.
“흐읏!”
결국, 견디지 못한 수현이 무자비한 폭군을 향해 이를 세웠다.
혀가 씹힌 황제가 황급히 얼굴을 떼어 냈다. 믿을 수 없는 일을 당한 그의 얼굴이 돌처럼 굳어 버렸다. 얼얼한 느낌이 혀끝에서부터 알싸하게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하윽, 하. 하아. 하…….”
가쁜 숨을 몰아쉬는 수현을 명휘가 노려보았다. 억눌려 있던 화가 치솟았다. 곧 그의 눈빛만큼이나 사나운 기운을 담은 체향이 수현을 덮쳤다. 너절한 몸뚱어리가 오들오들 떨리며 순식간에 마비가 찾아왔다.
“윽!”
명휘가 수현의 머리채를 낚았다. 고개가 꺾인 채로 수현은 바들바들 떨며 황제를 노려보았다.
“정녕. 네놈이 겁대가리를 상실한 게로구나.”
명휘의 체향이 짙어지면 짙어질수록 수현의 몸은 점점 더 굳어졌다. 미천한 몸뚱어리를 어떻게든 움직이고 싶었으나, 그것은 오로지 머릿속에서만 맴돌 뿐, 실제로 이뤄지지 않았다.
“네놈은 대체 태화의 황제를 무어라 생각하는 것이냐.”
명휘의 손아귀엔 힘이 더 들어갔고, 턱을 추어올린 채로 수현의 고개가 뒤로 더 꺾였다. 감히 무엇도 뱉을 수 없는 입술이 벌어져 달뜬 숨을 뱉어냈다. 저도 모르는 사이 눈물이 볼을 타고 기다란 목선을 따라 흘러내렸다.
“…….”
명휘는 수현의 곁으로 얼굴을 더 바짝 붙였다. 그의 눈동자는 수현의 몸을 천천히 훑고 있었다. 툭, 하고 건드리면 부러질 것 같은 얇은 목에 드리워진 한 줄기 빨간 칼자국이 그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네놈이 배운 것이 없어 이리도 방자한 것일 테지.”
명휘는 천천히 얼굴을 숙였다. 수현의 기다란 목으로 그가 혀끝을 가져갔다. 잡티 하나 없이 매끈한 피부 위로 칼자국을 그가 천천히 핥아 올렸다. 빗장뼈가 가까운 부근에서부터 귓불까지. 명휘의 혀가 지나치는 길을 따라 끈적한 타액이 묻어났다.
“어찌해야 할까. 너에게 알려 주어야 할까.”
그가 수현의 목덜미에 입을 묻었다. 두툼한 입술이 수현의 여린 살갗을 지그시 짓눌렀다. 뜨거운 숨결이 수현의 목을 데웠다. 끈적하게 닿아 오는 살덩이에 수현이 움찔했다.
“흣!”
그대로 명휘는 수현의 살갗을 빨아들였다. 수현의 동공이 확장되며 크게 뜨였다. 갈 곳을 잃은 채 뒤흔들리는 그의 동공이 무색하게도 명휘는 입안에 든 살갗을 세차게 흡입했다.
목선을 따라 명휘의 입술이 천천히 아래로 움직였다. 그의 입술이 지나친 자리, 자리마다 붉은 자국이 부끄럽게 뒤를 이었다.
“아무래도 짐이 직접 알려 주어야겠구나.”
수현의 목을 온통 꽃밭으로 만들고서야 명휘의 입술이 떨어졌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감상하듯 제가 만들어 놓은 자국들을 그는 바라보았다. 밧줄로 꽁꽁 묶여, 꼼짝달싹도 하지 못하는 주제에 빨갛게 물든 목이 탐스러웠다.
“똑똑히 새겨 두거라.”
수현을 두고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분노 반, 두려움 반으로 정처 없이 흔들리는 눈동자를 바라보며, 그가 천천히 옷깃을 풀었다.
“태화의 황제가 어떤 의미인지를.”
길게 드리워진 용포를 들추고 바지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곧 여미어진 바지 끈이 스르륵 풀리었다.
명휘의 골반에 걸쳐 있던 바지가 아래로 툭, 떨어졌다.
강인한 허벅지 사이에는 둥근 두 개의 알을 품고 기다란 살덩이가 늘어져 있었다. 그것은 아직 채 빳빳하게 서지 않았으나, 그 길이가 여느 사람의 남근이 발기한 것보다 길었다.
한 손에 채 다 잡히지 않는 살덩이를 쥐어 들고 명휘가 가볍게 쓸었다. 그는 느릿하게 손을 놀리며 눈으로는 수현의 몸을 훑고 있었다.
꽉 졸라맨 밧줄에 집혀, 불룩 튀어나온 젖살이 가장 먼저 그의 시선을 끌었다. 볼록 튀어나온 살 모양도, 그리고 그 중앙에 뾰족하게 솟은 꼭지의 모습도 모든 게 다 적나라해서 보는 것만으로도 금방 성욕이 끓어올랐다.
점점 차오르는 살덩이의 부피를 느끼며 명휘는 슬슬 시선을 수현의 얼굴로 옮겼다. 열이 올라 붉어진 볼과 땀에 젖은 살결, 사슴처럼 커다란 눈이 차례대로 그의 망막에 새겨졌다. 잔뜩 겁을 집어먹은 작은 짐승 같은 눈빛은 도무지 그냥 지나치기가 어려웠다.
그 눈빛만으로도 이미 명휘의 것은 집어넣기에 모자람 없이 딱딱해져 버렸다.
“이것이 보이더냐.”
완전히 발기한 좆을 명휘가 수현의 얼굴 앞으로 내밀었다.
일순, 그것을 바라보던 수현의 눈이 하릴없이 떨리었다. 적어도 세 뼘은 넘길 것같이 기다란 그 살덩이는 잔뜩 덩치를 부풀린 채 꺼떡거리고 있었다. 붉은빛의 기둥은 명휘의 커다란 손아귀에 겨우 들어갈 정도로 두꺼웠고, 핏줄이 잔뜩 올라 흉측스럽게 보였다.
살이 포동포동하게 오른 기둥의 앞머리가 반질거리며 빛났다. 감히 사람의 주먹에 빗대어도 모자람이 없는 크기는 보는 이를 질려 버리게 만들기 충분했다. 마치 저에게 먹일 달라는 듯 침을 질질 흘려 대는 좆 머리를 보며 수현의 두려움은 한층 깊어져만 갔다.
“양인의 양물을 네놈은 처음 보았을 테지?”
명휘는 선 자리에서 허리만을 움직여 수현의 얼굴에 더 바짝 달라붙었다.
팔뚝만큼이나 기다란 살덩이가 수현의 볼에 붙었다. 명휘가 느릿하게 허릴 움직이며 수현의 볼에 좆을 문대었다. 기둥을 감싸고 있는 살 껍질이 볼에 쓸려 움직일 때마다 수현의 몸이 파르르 떨려 왔다. 뜨겁게 달아오른 살덩이에 살이 그대로 데는 것만 같았다.
“짐이 직접 네 몸을 뚫고 들어갈 것이다. 네 아래로 파고들어 배 속을 헤집고, 안을 긁고, 자궁을 뚫을 것이다.”
수현은 제 볼에 비벼지는 이 거대한 것이 제 몸에 들어온다고 생각하니 끔찍하고 소름이 돋았다. 분명 저에게도 달린 것이었지만, 명휘의 것은 전혀 달랐다. 저걸 아래로 집어넣느니, 차라리 사람의 팔뚝을 집어넣는 게 나을 것만 같았다.
명휘가 뒤로 길게 허리를 내빼었다, 그대로 쑥 내밀었다. 수현의 얼굴보다 긴 살덩이가 볼에 세게 비벼지며 턱에서부터 광대를 지나 머리끝까지 추어올라 갔다.
일순 수현의 동공이 거세게 떨리었다. 깜빡일 수조차 없이 커다랗게 뜨인 눈에서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볼을 타고 그것이 아래로 향하는 동안 입술이 미세하게 떨려 왔다. 뒤통수를 한 대 때려 맞은 것처럼 정신이 아득해졌다.
“…….”
두려움에 떨리는 눈동자를 바라보며 명휘는 오래도록 침묵을 지켰다. 앞에 둔 가엾은 이에게 연민을 느낄 법도 한데, 그의 아래는 전혀 그럴 수 없었는지 여전히 껄떡대기에만 바빴다.
기어이 수현의 볼에 닿아 있던 살덩이가 떨어져 나갔다. 느릿하게 허리를 돌려 움직이는 명휘의 몸짓을 따라 커다란 귀두가 자릴 옮겼다. 선액으로 젖어 번들거리는 좆의 머리가 향한 종착지는 수현의 입술이었다. 수현은 감히 고개조차 꺾지 못한 채로 눈동자만 굴려 입술에 닿은 살덩이를 쳐다보아야 했다.
“어떡할까. 이대로 내가 너를 여기서 탐할 수도 있을 텐데. 그래야 네놈이 제 주제를 알게 될 것 같은데.”
수현은 마음속으로 수백 번이고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수현의 상상일 뿐, 극양인의 체향에 절은 그의 몸은 정작 그 어떠한 것도 할 수 없었다.
“입 열거라.”
그런 수현을 보며 명휘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목소릴 내었다. 살얼음처럼 차가운 그 목소리에 수현의 입이 하릴없이 벌어졌다.
이윽고 벌어진 입술 사이로 명휘가 귀두를 밀어 넣었다. 부드럽고 탱글한 입술을 지나 좆의 머리가 점점 안쪽으로 향했다.
“음…….”
명휘의 입에서 낮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의 시선이 제 좆이 박혀 있는 수현의 입술로 향했다. 감히 다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좆을 물고 있는 빨간 입술이 탐스러웠다.
축축하고 미끌거리는 입안을 느끼며 뜨거운 살덩이가 더 깊을 곳을 향해 움직였다. 뚫고 들어가기 좋게 생긴 귀두가 천천히 밀고 들어오면, 불룩 튀어나온 귀두관이 입천장을 긁었다. 핏줄이 솟아 울퉁불퉁한 살결이 수현의 혓바닥을 문질렀다.
점막으로 뒤덮여 흡사 아래 구멍처럼 느껴지는 입 속에서 명휘의 좆은 한 번 더 덩치를 키워 냈다. 너무도 빠듯하여 수현의 입아귀는 그만 찢길 것만 같았다. 그런 수현의 사정은 상관치 않고 명휘는 계속해서 허릴 들이밀었다. 귀두를 전부 삼킨 입안으로 음경 몸통이 차차 모습을 감추었다.
“후…….”
수현의 입안에 좆을 꽂아 넣고 명휘가 크게 숨을 내쉬었다. 이대로 계속 밀고 들어가는 것은 무리라 생각했는지, 그가 천천히 허릴 물렸다. 귀두관이 혓바닥을 다시 긁으며 밖으로 빠져나오자, 그는 다시 천천히 안으로 밀어 넣었다.
이번에 그는 조금 더 깊숙이, 안쪽까지 좆을 밀어 넣었다. 그래 봤자 수현의 목구멍에 가로막혀 채 반도 쑤셔 넣을 수 없었다. 황제의 옥근이 너무도 긴 탓이었다.
명휘는 수현의 혓바닥에 대고 비비며 제 성기를 자극했다. 푹신하면서도 미끄러운 수현의 입은 훌륭히 좆집 역할을 소화해 냈다. 작은 돌기들로 섬세하게 이뤄진 신체 기관이 부드럽게 좆의 표피를 감싸며 명휘에게 쾌감을 선사했다.
명휘는 오랜 시간을 들여 수현의 입속을 헤집었다. 부드럽게 빠져나갔다가 조금 빠르게 안으로 치고 들어오는 좆질에 수현은 머리가 울리는 것만 같았다. 벌어진 턱이 아리고 물고 있는 좆을 따라 침이 자꾸만 흘러내렸다.
그쯤 수현은 점점 바뀌어 가는 명휘의 체향에 조금씩 몸을 늘어뜨리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수현의 목숨을 끊어 버릴 듯 옥죄어 오던 향이 점차 달콤한 향기로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이걸로는 부족하다.’
점점 가라앉는 수현의 눈꺼풀을 보며, 별안간 명휘는 더한 쾌락을 원하는 자신을 깨닫게 되었다. 단지 좆의 앞부분을 수현의 입안에 처넣는 것으로는 그의 욕망을 다 해소할 수 없던 것이다.
“네놈이 그리 잘 먹어 치우니. 너에게 이보다 더한 걸 주어야겠구나.”
일순, 수현의 입안에 들어 있던 귀두가 더 깊게 밀려 들어왔다. 그것은 단지 수현의 입안에 머무르려 하지 않고, 좁은 목구멍을 있는 대로 비집으며 짓쳐 들기 시작했다.
“욱.”
커다란 귀두가 목젖을 건드리자 수현의 목구멍에서 헛구역질이 터져 나왔다. 그렇다 한들, 명휘의 행동은 멈추어지지 않았다. 그는 보란 듯 더 깊숙한 곳까지 귀두를 밀어 넣었다. 좁디좁은 구멍이었지만, 곡선을 그리고 있는 귀두는 수현의 목구멍을 참으로 잘 쑤시고 들어갔다. 그것은 좁은 동굴을 지나 점점 밑으로 향해, 식도와 기도가 만나는 부근에까지 이르렀다.
단번에 목구멍이 꽉 막혀 버린 수현은 기겁하며 몸을 떨었다. 명휘의 체향은 무르익어 완연히 달콤한 냄새로 바뀌었지만 그것만으로는 견디기가 힘들었다.
어느덧 헛구역질조차 잊을 만큼 숨이 꽉 막혀 왔다. 세상이 새하얗게 변해 버린 가운데, 입안을 뚫고 들어오는 뻘건 기둥만 선명하게 보였다.
생리적으로 쏟아져 나오는 눈물이 수현의 볼을 마구 적셨다. 그가 괴로워하며 욱욱대는 통에 되려 명휘의 좆으로 짜릿한 감각이 더해졌다. 명휘의 미간이 구겨졌다. 과한 쾌감에 그가 몸을 떨며 달은 숨을 뱉어 냈다.
수현의 목구멍 안으로 좆의 뿌리까지 처박혔다. 수현의 콧등을 명휘의 음모가 잔뜩 뒤덮었다. 복숭아 두 개를 담아 둔 것같이 커다란 고환이 수현의 턱에 척 달라붙었다. 수현은 그대로 버거운 것을 문 채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욱, 우욱.”
목구멍이 잔뜩 눌리고 식도가 콱 막혔다. 수현이 괴로워 몸부림치자, 명휘는 오히려 그걸 즐기기 위해 허리를 이리저리 뒤틀었다. 일말의 남은 공간 없이 목구멍을 가득 채운 좆이 그의 허리 짓을 따라 문대졌다.
“그리 순진한 얼굴로 괴로운 척을 해 대더니. 후…… 네놈의 입은 사내 좆을 물고 신이 났구나.”
눈물로 범벅이 된 수현을 얼굴을 보면서 명휘는 그리 능욕했다. 그러곤 수현의 작은 머리를 그러잡았다. 한 손에 쏙 들어오는 머리통을 손에 쥐고, 그가 어깨를 뒤로 내빼었다. 상대적으로 고간이 앞을 향해 툭, 튀어나오자 그는 탄력 있게 허리 짓을 하기 시작했다.
“욱!”
명휘의 허리가 뒤로 내빼졌다가 앞으로 튕기어 쳐들어올 때마다 수현은 한 번씩 토기가 몰려왔다. 굵은 살덩이는 계속해서 일자로 수현의 목구멍을 뚫고 드나들었다.
좁고, 따뜻하고 미끄러운 곳에 좆을 쑤셔 박으면서 명휘는 점점 더 쾌락에 깊이 빠져들고 있었다. 수현의 목 안 점막이 너무도 쫀쫀하게 달라붙어 쑤실 때마다 짜릿함이 극심했다.
수현의 입이 아랫구멍인 양 좆으로 치댈 때면, 커다란 불알이 탁탁 수현의 턱을 때려댔다. 입안에서 침이 마찰하며 쩍, 쩍 야한 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달아오른 명휘의 숨소리가 수옥을 울렸다.
수현의 머리통을 쥔 명휘의 손에 더 힘이 들어갔다. 그는 아예 두 손으로 수현의 머리통을 그러잡았다. 수현은 온몸이 묶인 채로 발버둥 치며 그의 고간에 얼굴을 처박았다. 퍽, 퍽 명휘의 배에 얼굴을 갖다 박을 때마다 살 부딪치는 소리가 살벌하게 울려 퍼졌다.
“허억, 헉. 읏!”
명휘의 좆이 요동하기 시작했다. 명휘는 두 손으로 수현을 머리통을 잡아 누르며 자꾸만 빠져나오려는 좆을 더 깊게 찔러 넣었다.
그대로 폐까지 뚫을 기세로 명휘의 좆이 처박혔다. 그러고도 모자랐는지 명휘는 더 세게 머리통을 누르며 고간을 밀어붙였다. 그는 미간을 구기며 입으로 악을 썼다. 흥분에 찬 그의 몸짓에 수현의 얼굴이 음모 속으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흣!”
명휘가 수현의 머리통을 끌어안으며 몸을 마구 떨기 시작했다. 두꺼운 허벅지 파묻힌 채로 수현이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의지와 상관없이 목구멍으로 미끈한 액체가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목구멍을 가득 메운 살덩이가 발광한다.
쾌락에 절은 채로 명휘가 목을 뒤로 꺾었다. 여전히 수현의 머리통을 끌어안고 천장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엔 온통 환희가 가득했다. 황홀한 눈빛으로 명휘가 쾌감을 즐기는 동안에도 뜨거운 액체는 계속해서 수현의 목구멍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하음…… 아…… 하아…….”
길고 긴 신음이 계속되었다. 마지막 한 방울의 정액까지 토해 낸 그가 마지막으로 허리를 부르르 떨었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떨어뜨렸다. 몸을 조금 내빼어 혼절한 듯 시야가 풀려 있는 수현을 내려다보았다.
버거운 좆을 문 채로 동공이 풀려 있는 수현을 바라보는 명휘의 입가엔 비릿한 미소가 걸리었다. 씨물을 다 쏟아 내고도 아직 죽지 않은 좆을 천천히 빼내며 수현의 볼을 매만졌다. 좆 머리에 묻어 있는 침과 정액이 좆의 끝을 따라 입술에서부터 길게 늘어졌다.
명휘는 손끝으로 그것을 쓸어내리는 것을 마지막으로 수현에게서 몸을 완전히 떼어 냈다.
“이제 좀 알겠느냐?”
그가 정액과 침으로 얼룩진 수현의 입술을 계속해서 매만졌다.
“태화의 황제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명휘의 말은 수현에게 멀게만 들려왔다. 정신이 온통 혼미한 가운데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메아리쳤다.
“오늘은 이 정도에서 끝내는 것을 다행으로 알거라.”
수현의 입술을 맴돌던 그의 손길이 떨어져 나갔다.
“다음엔 정말 네놈의 자궁을 뚫어 줄 테니.”
그대로 수현이 정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