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2/15)

1. 

둥둥, 황금색 종이 궐을 울렸다.

만인지상의 권위를 상징하는 황금색 복도를 따라 길게 늘어선 대소 신료가 저마다 몸을 조아리며 높은 분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신료 사이로 길게 갈라진 길에 황금색 용포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엄한 발걸음은 무거웠으며, 스치는 자리마다 한기가 서리는 듯 차가운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다. 용포에 가려져 있는 단단한 가슴은 위상을 드높이고, 동공을 반쯤 뒤덮으며 가라앉은 눈꺼풀은 냉혹한 그의 성정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선황인 태화시황(太和始皇)은 네 개의 나라를 정복하고 하나로 합쳐 거대한 제국, 태화(太和)를 건설하였다. 그는 천자(天子)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를 황제(黃帝)라 일컬으며 신으로 추앙받았다.

시황제는 살아 있는 신이자 냉혹한 폭군이었다. 그는 정복한 나라의 왕가를 모조리 숙청하여 그 씨를 멸하게 하였으며, 이후로도 더 많은 이들을 죽이며 황위를 굳건히 하였다.

그렇게 스스로를 신이라 일컬으며 천하 대지를 피로 물들였건만, 허망하게도 시황제의 천하는 오래가지 못했다. 고작 지천명(知天命)을 넘기지 못하고 숨을 거둔 것이다. 황태자 명휘가 성년이 되던 해의 일이다.

하여, 태화의 황상은 명휘가 이어받게 되었다. 그는 선황의 냉혹한 성정을 그대로 물려받았으며, 태화의 황제로서 그의 아비보다 더한 폭정을 이어 갔다. 태화의 대신들은 그의 그림자만 보아도 벌벌 떨었으며, 그의 잔혹함은 만천하에 위세를 떨쳤다. 

“봉화의 불이 오래도록 타오르니 이것이 곧 태화니라.”

제단에 도착한 황제가 향을 피워 예를 갖추니, 태상(太常)이 근엄한 목소리를 내었다.

“땅은 천연의 웅장함을 본받으니 이에 경영하였구나. 만세토록 오랜 터를 천제(天帝)님이 손수 세웠으니, 지금부터 만 년이나 해마다 잔을 올리옵니다.”

제문(祭文)에 맞춰 황제가 투명한 술이 담긴 잔을 들어 올렸다. 금색의 잔에 기다란 손가락을 넣어 손끝을 적셨다. 하늘에 한번, 허공에 한번. 손끝을 튕겨 술을 뿌린 황제가 바닥에 남은 술을 부었다.

“천제이신 시황께 절하여 제사하니 많고 많은 영광이라.”

향이 자욱하게 내려앉은 제단을 향해 황제가 몸소 절을 올렸다. 묵직한 종소리가 세 번 둥둥둥 울렸다. 종소리의 여운이 사라지자 곧 황제가 몸을 일으켰다.

“천제이시어. 천만억 년 다하도록 우리 강토 막아 주소서.”

숨죽인 채 제단을 주시하고 있던 신료가 태상을 따라 고창하였다.

“천제이시어. 천만억 년 다하도록 우리 강토 막아 주소서.”

태상이 제문의 마지막을 읊었다.

“천자를 오래 살게 하고 복을 주며, 태화에 태평성대 주옵소서.”

“태화에 태평성대 주옵소서.”

황궁을 쩌렁쩌렁 울리는 신료의 목소리를 들으며 황제는 느긋하게 뒤를 돌았다. 끝도 없이 늘어선 신료와 궁인들을 내려다보며 눈꺼풀이 무심하게 내려앉는다.

“황제 만세! 황제 폐하 만만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자리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황제 폐하 만세! 황제 폐하 만만세!”

지나는 걸음걸음마다 황제를 칭송하는 소리가 넘쳐흐른다.

“황제 폐하! 만만세!”

하지만 그뿐. 황제의 얼굴엔 그 어떤 변화조차 없다. 여전히 서늘한 표정을 유지한 채로 제단을 벗어날 뿐이었다.

* * *

대제를 끝낸 명휘는 중화전(中和殿)에 들었다. 신시에 있을 연회가 시작되기 전까지 휴식을 취하기 위함이었다.

“폐하.”

문밖을 지키고 있던 태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단한 듯 황좌에 앉아 있던 명휘는 느릿하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곧 연회가 시작되옵니다. 이제 슬슬 태화전으로 향하셔야 할 것으로 사료되옵나이다.”

“지금 나설 것이다.”

명휘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나인들이 문을 열었다. 수많은 나인을 거느린 채로 태화전(太和殿)으로 향하였다.

“황제 폐하 납시오.”

황제가 도착하자, 광장을 가득 메운 이들이 하나같이 입을 다물었다. 천자가 단상에 오르는 동안 그들은 숨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그저 고개를 조아렸다. 곧 황상에 황제가 착석하였다. 연회를 시작하는 북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수백 명의 악공이 한소리로 장엄한 음을 연주하고 태화전의 드넓은 광장을 반으로 가르며 무용수가 등장했다. 그들은 붉은빛의 옷을 입고 무리를 지어 열 맞춰 움직이며 마당을 수놓았다.

하늘에 울려 퍼지는 장엄한 음악 소리. 태화의 운을 기리고 복을 소원하는 가사에 맞춰 몸짓이 흐드러졌다. 마치 꽃잎과도 같은 붉은색이 광장을 물들였다. 횡횡한 몸짓에 보는 이들의 눈이 호사롭다.

“오황(吾皇) 만세. 만세, 만만세!”

다시 한번 둥둥 북소리가 울렸다.

순식간에 장내 분위기가 변하였다. 호기롭던 악기의 가락이 느릿하고 차분해졌다. 너른 장내를 물들이던 무용수들이 물러서고 대신 중앙으로 하얀 의복을 한 사내가 등장하였다.

허공을 가르는 하얀 옷깃. 흑색으로 물든 머릿결과 눈처럼 뽀얀 피부. 물 흐르듯 아래로 늘어진 기다란 속눈썹과 그 안에 감춰진 검은 눈동자. 그리고…… 태화전을 감싸고도 흘러넘치는 꽃향기.

실로 대단한 향기의 주인이었다. 이토록 진한 음인의 향기는 이제껏 그 누구도 맡아 본 적이 없었다. 음인의 색향은 자리한 모든 양인의 가슴을 홀리고 또 홀렸다.

향기에 취해, 우아한 듯 단아한 춤사위에 취해…… 태화전은 고요하디고요했다. 고혹적인 음인의 자태와 향이 모두의 혼을 빼앗아 버렸다. 태화전의 그 누구도 쉬이 숨을 내쉴 수가 없었다.

“…….”

영겁과도 같은 시간이 흘렀다. 숨죽인 채로 무희의 춤사위를 지켜보던 이들은 악기의 소리가 끝나고 나서도 한참 동안 여운에 빠져 있었다. 실로 꿈 같은 순간이었다.

“황제 폐하.”

그 고요함이 깨어진 것은 명휘가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였다. 태감이 주군을 향해 고하자,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이 몸을 조아리며 같은 목소리를 내었다.

“황제 폐하.”

성큼성큼, 자리를 나서는 명휘의 얼굴엔 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것은 어찌 보면 먹잇감을 발견한 고양이의 눈빛과도 같았다. 이제껏 본 적 없는 놀잇감에 대한 기대와 욕정이 그의 얼굴을 완연히 뒤덮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라.”

음인의 앞에서, 차마 높으신 분을 마주할 수 없어 떨궈진 고개를 내려다보며 그가 말했다.

숨통을 조여 오는 숨 막히는 체향. 양인의 기에 질려 음인의 몸이 바들바들 떨리었다. 차마 누구의 말이라고 거역할 수 있겠느냐마는, 도무지 몸이 움직여지질 않는다. 지독한 사향에 몸이 마비가 온 것만 같다.

“못 들었느냐. 고개를 들라 하였다.”

결국, 힘겹게 음인이 얼굴을 들어 올렸다. 두려움이 가득한 눈동자가 용안을 마주했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에도 가려지지 않은 미색이 차라리 애처롭다. 향기에 질식해 가늘게 떨리는 눈망울이 처연하다. 벌어진 입술로 내뱉는 숨결이 불규칙하다.

달곰한 향을 머금은 숨결 위로 싸늘한 얼굴이 뒤덮인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차가운 목소리에 음인은 입술을 움직이지 못했다.

명휘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는 필요 이상으로 얼어붙은 음인의 모습이 탐탁지 않았다. 이제껏 황제의 부름에 이리도 굼뜨게 답하는 이는 없었다. 설령 그것이 양인의 체향에 취약한 음인이라 할지라도.

“어찌 대답이 없지?”

음인의 입술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제 것이지만, 하고자 하는 바를 실행할 수 없는 몸뚱이에 두려움만 더 불어났다.

“혹시 네놈은 입 병신이더냐?”

명휘는 무심하게 그리 말하곤 유려하게 손을 들어 올려 음인의 얼굴에까지 가져왔다. 분명 올라올 땐 느렸는데, 그것은 머리통에 닿자마자 맹수같이 변해 음인의 머리채를 홱 낚았다.

“읏!”

멍청한 입이 그제야 소릴 내뱉었다.

음인은 모가지를 잡힌 닭처럼 늘어져 시선을 옆으로 가져갔다. 혹독하기 이를 데 없는 신고식을 당하고 있는데, 태화전의 광장을 채운 이들에겐 일상이었는지 그들 중 누구도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다.

“어쩔 테냐. 어디 네 입이 말 같은 말을 내뱉을 때까지 쥐고 흔들어 줄까? 그래야 네 입이 뚫리겠느냐?”

음인은 어떻게든 말을 뱉어 내고자 남아 있는 힘을 끌어모았다. 당장에라도 숨이 넘어갈 듯 가슴팍이 들썩였다. 굳어 버린 안면 근육에 힘을 주고 억지로 입술을 벌렸다.

그러자 천만다행으로 소리가 조금씩 내뱉어졌다. 음인은 기어코 황제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었다.

“아, 아니. 아닙니다. 소인이…… 직접 마, 말을…….”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잡혀 있던 머리채가 풀려났다.

헉, 헉.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이 마구 터져 나왔다. 음인은 주춤거리던 몸을 수습하려고 양 허벅지에 힘을 주었다. 마치 백 리 길을 내달린 것처럼 다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고개 들어라.”

다시 서릿발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또 머리채가 잡히지 않으려면 그가 원하는 대로 해야 했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쉬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수현의 몸은 좀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

“이젠 또 몸 병신이 되었는가?”

고양이가 쥐를 잡아먹기 직전에 이리 가지고 논다고 하였던가? 앞에 무희를 두고 쥐새끼 취급을 하던 명휘가 기어이 턱을 잡아 올렸다.

잡힌 턱을 따라 자연스럽게 음인의 눈이 위로 향했다. 꿰뚫듯 직시하는 황제와 시선이 다시금 마주쳤다.

그 순간.

“아…….”

음인은 비로소 황제의 얼굴을 인지할 수 있었다.

눈썹은 각이 져 매처럼 날카로워 보였고, 매끈하게 펴진 홑꺼풀 아래는 삼면의 흰자위를 만들며 짙은 눈동자가 느른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콧등은 산등성이처럼 높았고, 뚜렷한 인중을 지나 커다란 입이 자리해 있었다. 거친 바위를 정으로 깎아 내어 만든 듯, 빈틈없이 수려한 외모였다.

그것은 그간 상상으로만 그려 오던 황제의 얼굴이 아니었다. 비열하고 저열한 모습일 줄 알았는데…… 음인의 상상이 잔인할 만큼 산산이 조각나는 순간이었다.

“자정향(紫丁香).”

혼란을 겪으며 겨우 버텨 내고 있는데, 앞에 둔 이가 낮게 지껄였다. 커다란 입이 초승달처럼 추어올라 가며 비소를 내비쳤다.

“천한 것에 딱 어울리는 색향이구나.”

들쳐 있던 것이 툭 놓였다. 음인은 얼얼한 턱을 문질러야겠다는 생각조차 하질 못하고 놓아 준 자세 그대로를 유지한 채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다시 풍악을 울려라.”

그길로 명휘가 뒤를 돌았다. 자리로 돌아가는 뒷모습을 보다가 음인은 나인들에게 이끌려 자리에서 떠나갔다.

점점 멀어지는 꽃향기 대신 악기 소리가 장내를 채웠다. 현란한 칼무를 선보이는 무용수들을 보며 신료의 웃음소리가 소란하다. 마치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다들 시끌벅적한 가운데 태감이 황제의 곁으로 붙었다.

“폐하.”

귓가에 속삭이는 소리가 은밀하다.

“저 무희를 침상에 들라 이르나이까.”

태감의 말을 듣고 명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비틀어 올라간 한쪽 입꼬리만으로도 그는 이미 황제의 대답을 알 듯했다. 태감이 몸을 조아리며 뒤로 물러났다.

* * *

연희가 끝나기 무섭게 수현은 궁인들에 이끌려 어디론가 향하게 되었다.

그들에 의해 수현은 살아생전 본 적도 없는 훌륭한 욕탕에 몸을 맡기게 되었다. 물은 따뜻하며 꽃향기 나는 향유가 넘쳐흘렀고, 온갖 꽃잎이 둥둥 떠다녔다.

그곳에서 나인들은 발가벗은 수현의 몸을 부드러운 천으로 문지르며 닦아 주었다. 미끈한 물이 살 위로 흘러내릴 때마다 몸이 녹아드는 것 같은 느낌이었으나, 수현의 기분은 그리 좋을 수 없었다.

그는 여전히 떨고 있었다. 아까 맡았던 황제의 체향이 아직 폐 속에 남아 저의 살을 야금야금 갉아먹는 것만 같았다.

평생을 한 사람의 모습을 마음속에 그리며 살았다. 괴롭고 고된 날의 연속이었지만, 그는 오로지 신념 하나로 지금까지 버텨 왔다.

국가의 원수. 가족의 원수. 그의 이름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굶주린 배를 증오로 채우고, 사무치는 원한을 뼈에 새겨 긴 시간을 버텨 냈다.

오로지 그에게 비수를 꽂을 날만을 기다리며. 민족의 한이 서린 복수의 칼날을 그에게 겨누기 위해.

그리하여 이 자리에 왔고, 결국 그렇게 기다리던 날을 맞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막상 황제의 얼굴을 마주했을 때, 수현은 제 처지가 지나칠 만큼 초라하게 느껴졌다.

지독한 패배감. 끝없이 무너지는 자존감.

그의 체향만으로도 온몸이 마비된 것만 같았다. 무엇을 하려 했는지 생각지 못할 정도로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워졌다. 감각은 예민해져 아프게 온몸을 찔러 댔고, 멈춰 버린 사고는 그 흔한 몇 마디조차 꺼낼 수 없게 만들었다.

마주한 것만으로도 이렇게 두려운데…… 내가 잘할 수 있을까? 적장의 숨통을 끊어 놓고, 물밑으로 사라진 나의 왕국의 명예를 되찾을 수 있을까…….

‘수현아. 살아남아야 한다. 너는 꼭 살아남아 너의 자릴 지켜야 한다. 그것이 우리를 위한 길이다. 수현아, 반드시 살아남아라.’

머릿속에 그날의 외침이 계속해서 되풀이된다.

달곰한 향유의 냄새조차 역하다. 뜨듯한 물에 지지는 몸뚱어리가 차라리 고통스럽다. 욕탕에 차오른 물만큼, 괴로움에 온몸이 잠긴다. 

“이제 되었습니다, 상궁 마마님.”

수현의 피부를 촉촉이 적시던 손길이 멎었다. 욕탕에 몸을 맡긴 이를 꼼꼼히 살펴보던 상궁이 나인들에게 눈짓해 보였다.

시중을 드는 이들이 수현을 일으켰다. 촉촉이 젖은 몸 위를 마른 무명의 천이 훑는다. 젖은 몸이 찬바람을 만나 오돌오돌 떨린다.

“폐하께서 묻는 것이 있거든 지체하지 않고 답해야 할 것이며, 폐하께서 요구하는 것은 무조건 따라야 할 것이다.”

불안에 떨리는 수현의 얼굴을 보며 노상궁은 계속해서 엄격한 목소리를 내었다.

“양인과의 경험은 아직 없으렷다?”

순간, 수현의 동공이 크게 확장하였다. 차마 뭐라 대답조차 하지 못하고 벌어진 입술을 보며 노상궁이 피식 웃었다.

그녀가 자리에 선 수현의 뒤로 몸을 옮겼다. 하얗게 볼록 솟은 엉덩이의 살집을 죽 잡아당겨, 밀문이 위치한 곳을 눈으로 훑었다.

꽉 다물린 분홍색 주름의 모습이 드러나자, 수현이 흠칫 몸을 떨었다. 파르르 살갗 위로 닭살이 돋아났다. 이제껏 누구에게도 내보인 적 없는 부위를 주무르는 타인의 손길에 하얀 살이 붉게 물들어 갔다.

“선명한 분홍빛에 주름이 빼곡한 것을 보아 아직 경험이 없는 듯하니, 이 어찌 폐하께서 반기지 않으실까.”

말을 끝마친 상궁이 차갑게 손을 떼어 냈다.

그녀는 다시 몸을 돌려 수현의 앞으로 다가섰다. 불안에 잠긴 눈동자를 보며 그녀는 엄격하게 말했다.

“너는 오늘 밤 폐하를 직접 모시게 될 것이다.”

그녀의 말에 수현의 몸은 한층 더 심하게 떨리었다. 갈 곳을 잃은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설마 모신다는 뜻을 모르진 않을 테지.”

꿀꺽, 목구멍으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네 뒷문을 통해 폐하의 옥근이 드나들 것이다. 네 재주가 뛰어나 폐하의 마음에 들면 그분이 친히 네 안에 씨를 뿌려 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너는 즉시 궁에서 내쫓김을 당할 것이다.”

상궁이 수현에게 바짝 다가섰다.

“궁에서 내쫓김을 당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고 있겠지?”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하고 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노상궁은 흡족한 얼굴로 뒤를 돌았다.

“아프다고 밀치거나 폐하의 손길을 거부해서는 아니 된다. 너는 폐하의 인형이다. 잠자코 누워 그분이 원하는 대로 몸을 맡기거라.”

노상궁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수현을 물에서 끄집어 낸 나인들이 그에게 얇은 비단옷을 입혔다. 그것은 너무도 얇고 반은 투명하여 수현의 살결이 다 보일 정도였다.

‘역겨워…….’

발가벗으니만 못한 의복을 입고 수현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보일 듯 말 듯 드러나는 제 몸이 한없이 수치스러워 얼굴이 붉어진다.

“폐하의 마음에 들어 네 몸 안에 씨라도 품게 되는 날엔 끝없는 부귀영화를 누리게 될 터이니. 너는 성심을 다하여 폐하를 모시거라.”

비단같이 부드러운 흑발이 휘감아지며 날카로운 비녀가 꽂혔다. 치렁거리는 금붙이가 머릴 장식하는 동안 새빨간 염료가 입술 위로 발렸다.

“상궁 마마님, 모든 준비를 끝마쳤사옵니다.”

한 나인이 고하자 노상궁이 힐끔 경대를 통해 수현의 모습을 훑었다.

“가자.”

짧게 말하고 그녀가 먼저 앞장섰다. 노상궁의 뒤를 수현과 궁인들이 뒤따랐다. 수현의 무리는 연희당(燕禧堂)으로 향했다. 황제가 후궁들과 잠자리를 갖는 곳이었다.

“자시가 되면 폐하께서 당도할 게다. 그때까지 마음가짐을 단단히 하고 있거라.”

노상궁은 그대로 넓은 방 안에 수현을 놓아둔 채 밖으로 향했다.

덩그러니 남아 버린 수현은 천천히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몸은 여전히 떨리고 심장이 발칵발칵하였지만, 그는 자신을 스스로 다독였다.

‘침착하자. 침착하자. 일을 그르쳐서는 안 된다.’

새빨갛게 칠해진 입술을 깨물며 그가 주변을 살폈다. 황실을 상징하는 황금색 수가 놓인 붉은 천이 감싸고 있는 커다란 침상이 보였다. 문까지는 수현의 보폭으로 족히 스무 걸음은 되니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았다.

수현은 술상이 마련된 탁자에 앉아 머릿속으로 수년간 되풀이했던 생각을 되새기고 또 되새겼다.

단 하루였다. 오늘이 아니면 안 된다. 더 이상의 기회는 없다. 몸이 뜨겁게 타들어 갔다.

그렇게 수현이 마음을 다지길 몇 시간. 고요하던 문밖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그것은 문지방을 타고 들어오는 소리나 음영 때문이 아니었다.

냄새, 냄새 때문이었다. 침묵 속에 느껴지는 지독한 사향이었다.

점점 가깝게 느껴지는 사향에 수현은 숨을 훅, 들이마셨다. 두근두근. 심방이 곧 터질 것 같이 뛰어 대고 피가 거꾸로 솟았다. 손끝이 떨리어 가만두기가 어려웠다. 앉은 자리에서 몸이 꼼짝을 하지 못했다.

거만한 향을 내뿜는 음영이 창호지 위로 드리워졌다. 수현의 동공이 단번에 확 커졌다.

“황제 폐하 납시오.”

이윽고 태감의 목소리가 문을 타고 들려왔다. 천천히, 문이 열리며 사람의 형상을 한 음영이 색을 입기 시작한다.

수현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려 오기 시작했다. 다시금 마주한 황제의 얼굴에 오금이 저린다. 숨 막히는 향기만큼이나 압도적인 풍채에 다시금 감각이 굳어 간다.

거만한 향의 주인이 기어이 방 안에 들어섰다. 자리에 앉은 채로 굳어 버린 수현을 보고 태감이 엄한 목소리를 내었다.

“어느 안전이라고! 어서 예를 갖추시게!”

수현은 떨리는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고개를 조아리며 작은 목소릴 내었다.

“폐하를…… 뵈옵니다.”

명휘는 수현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그대로 지나쳐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곧 나인들이 문을 닫았다. 적막한 곳에 양인과 음인 두 사람만이 남겨졌다.

“…….”

“…….”

잠시간 방 안에 침묵이 흘렀다.

고요함을 먼저 깨뜨린 것은 명휘였다. 그가 유려한 손놀림으로 상위에 준비된 잔을 들어 올렸다. 폭 넓은 소매가 단단한 팔뚝 아래로 길게 늘어졌다.

수현은 채워지지 않은 잔을 빤히 쳐다보다가 천천히 손을 술병으로 옮겼다. 숨 막히는 황제의 체향에 손이 떨리고 헛구역질이 나왔지만 그걸 꾹 참아 넘겨야만 했다.

이윽고 빈 잔을 투명한 액체가 채웠다. 명휘는 말없이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눈을 내리깐 채 들고 있는 술잔에 시선을 꽂았다. 느른하면서도 차가운 눈빛이 그의 체향과 닮았다.

잔을 비운 명휘는 그대로 수현에게 내밀었다. 수현은 자리에 선 채로 그것을 받아 들었다.

술병의 주둥이로부터 청아한 향의 술이 조금씩 흘러내렸다. 아래로, 아래로. 투명한 액체는 하얀 도자기를 채우며 조금씩 차올랐다. 바람 앞에 놓인 호롱불처럼, 술잔을 든 수현의 손은 위태롭기 그지없었다.

“아직 너의 이름을 듣지 못했구나.”

술잔이 거의 차오를 때쯤, 처음으로 명휘가 입을 열었다.

낮게 귓가를 울리는 목소리에 수현은 흠칫하며 명휘를 주시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리는 눈빛의 주인은 여전히 무심하게 술잔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또 벙어리가 된 게지?”

수현이 대답을 망설이는 사이, 빈 잔을 가득 채우고도 남은 술이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차가운 액체는 하얀 잔을 타고 흘러 수현의 손을 적시고, 손목을 타고 내려와 바닥으로 뚝, 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분명 시선을 술잔에 두고 있었음에도, 명휘는 모른척하며 계속해서 술을 따랐다.

하얀 손목을 가로지르는 술은 수현의 옷깃을 젖게 하고, 질척해진 옷감은 살갗에 달라붙어 농염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바닥에 고여 드는 술처럼 수현의 손목을 바라보는 명휘의 눈빛이 점점 촉촉해지기 시작했다.

“마셔라.”

가는 손목과 소매가 완전히 술에 절어 버리고서야 명휘는 술병을 거두었다. 찰랑, 찰랑. 떨리는 잔 안에 술이 물결치며 흔들렸다.

수현은 애써 두 손을 모아 술잔을 포개 잡았다. 앞에 두고 있는 것이 사약이라도 되는 듯, 들어 올리는 손길이 힘겹다.

온기를 내뿜으며 벌어진 붉은 입술 사이로 알싸한 술이 흘러 들어가기 시작했다. 입술을 적시고 입안을 훑던 차가운 액체는 목구멍을 지나치며 뜨겁게 변해 수현의 내장을 훑었다.

가뜩이나 온전히 두기 힘든 몸뚱어리가 빈속에 들이켠 술기운에 훅 하고 달아올랐다. 급히 뛰는 심장에 두 다리가 휘청했다. 눈앞이 뜨끈하여 정신을 바로 두기가 어렵다. 그대로 다리가 풀려 버릴 것만 같았다.

술 한잔에 취한 음인을 보며 차갑게 내려앉아 있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새빨갛게 익은 볼이, 열기를 담아 내뿜는 자정향이 그의 음심을 자극했다.

“흣!”

다 비운 술잔을 내려 두기가 무섭게 명휘가 수현의 손을 낚아챘다. 수현이 놀라 토끼 같은 눈으로 그를 쳐다보려니, 명휘는 재밌다는 듯 이죽 웃어 댔다.

손아귀에 들어찬 얇은 손목을 쳐다보다 명휘는 천천히 제 얼굴로 가져갔다. 손목에 코를 묻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폐 속에 깊게 스며드는 향기에 양기가 더욱 솟구쳤다.

이미 방 안을 가득 채우고도 남아도는 양인의 체향이 더할 나위 없이 짙어졌다.

“흠…….”

한참 동안 음인의 향을 취하던 황제는 여운을 담아 탄성을 내뱉었다. 나른하게 눈을 내리깔고 천천히 제 입술 위로 손목을 옮겼다. 커다랗고 두툼한 입술이 열리고 뱀의 것처럼 끝이 뾰족한 살덩이가 그 안에서 빠져나왔다.

손목에 남아 있는 술을 핥으며 명휘는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불안한 듯 떨리는 눈동자를 직시하며 수현의 손목을 타액으로 적셨다.

끝없이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검은빛의 눈동자. 사람을 꼼짝 못 하게 만드는 시선.

뜨끈하게 달아오르는 손목처럼 수현의 체온은 높아져만 갔다. 향에 취해, 눈빛에 취해. 그는 정신이 혼몽하고 사지에 힘이 빠져나갔다.

양인의 향이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숨통을 끊어 놓을 듯 달려들다가도 이젠 또 수현의 몸을 적시고 있었다.

제 아래가 점점 젖어 드는 느낌에 수현은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그의 의지가 아니었다. 저항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명휘가 가는 손목에서 입술을 떼어 냈다.

“이름 따위,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겠군.”

그가 한쪽 입꼬리를 추어올렸다. 그러곤 곧장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지금껏 잡혀 있던 손이 놓이자 수현은 턱 막힌 숨을 한꺼번에 몰아쉬었다. 저를 지나쳐 뒤편으로 향하는 황제를 차마 바라볼 수 없어 자리에 선 채로 어깻숨을 내쉬었다. 잡혀 있던 손목이 뜨겁다. 불에 덴 양 타들어 가는 느낌이었다.

“벗어라.”

침상에 걸터앉으며 명휘가 말했다.

그 짧은 한마디에 수현의 심장은 그대로 내려앉았다. 제 귀가 환청을 들은 것이라고 치부하고 싶었지만, 짙은 향기가 담고 있는 음욕만큼은 이것이 현실이라고 알려 주고 있었다.

“…….”

어차피 예상한 수순이었다. 반드시 치러야만 하는 절차다.

수현은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황제를 등지고 떨리는 손으로 옷고름을 잡았다. 사악, 수현의 어깨에 걸쳐 있던 얇은 천이 서서히 벗겨졌다. 둥글고 하얀 어깨가 드러나며 팔뚝 위로 옷이 걸쳐졌다.

길고 치렁치렁한 상의가 완전히 바닥 위로 떨궈지자 하얀 두 가슴이 모습을 나타냈다. 춤사위를 몸에 익히느라 단련된 가슴은 단단하게 자리 잡혀 있었지만, 그렇다고 양인의 것처럼 우락부락하진 않았다. 하얀 가슴을 장식하고 있는 연분홍빛 두 돌기, 적당한 근육과 매끈한 복부. 촛대만큼 가는 허리는 분명 음인의 것이 맞았다.

수현의 벗은 상체를 뒤에서 감상하고 있던 명휘는 즐거운 듯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메마른 입술을 제 혀로 훑으며 몸을 느긋하게 뒤로 늘어뜨렸다. 그의 체향이 점점 달큼해졌다. 차오르는 육욕만큼 그의 가랑이 사이도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이상해…….’

변해 버린 체향을 느끼며 수현의 심장은 더욱 급하게 뛰기 시작했다. 진득하게 젖어 드는 아래에 당혹감을 느끼며 그는 떨리는 손으로 바지춤을 그러잡았다.

사르륵, 묶여 있던 끈이 풀리며 얇은 비단이 수현의 다릴 타고 흘러내렸다. 무용으로 다져진 매끈한 두 다리가 한꺼번에 양인의 시야에 처박힌다.

명휘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선이 고운 종아리에서부터 살집이 붙은 허벅지로. 허벅지에서 둥글게 솟아 있는 둔덕으로 집요한 시선을 훑고 올라간다.

가는 끈으로 된 속곳을 감싼 볼기짝이 음란하기 그지없었다. 보는 이로 하여금 당장에라도 쥐고 주무르고 싶은 욕구를 부추겼다.

“흣!”

명휘가 그대로 수현을 낚아챘다.

허리를 휘감아 품에 안고 그대로 입술을 부딪친다. 도톰한 입술이 가는 입술을 덮치고, 뜨거운 열기를 내뿜는다.

단번에 입술을 뚫고 들어선 혀끝이 여린 점막을 제멋대로 훑는다. 서로의 타액이 섞이고 끈적해진 살덩이가 애무하며 휘감아 온다.

입안을 유영하는 뜨거운 살덩이에 머릿속이 그대로 녹아드는 것만 같다.

“흐으.”

그대로 명휘가 수현을 안고 침상 위로 엎어졌다. 거칠게 숨을 내쉬는 아랫입술을 빨며 한 손으로 하얀 가슴팍을 그러잡았다.

“읏!”

여린 입술에서 짧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명휘는 손안에 쥔 살을 주무르며 새빨개진 귓가에 입술을 묻었다. 하아, 하. 숨소리가 수현의 귀를 울리고 진한 양인의 체향이 콧속을 파고들었다.

뱀의 것처럼 날카롭게 변한 명휘의 혀가 수현의 귓구멍 구석구석을 계속 훑는다. 뜨겁고 끈적한 느낌을 견디기가 어려워 수현은 자꾸만 몸을 뒤튼다.

그가 꿈틀댈수록 귓구멍을 적시는 명휘의 혀는 더 집요해진다. 움켜쥔 가슴을 비틀고 더 세게 잡아 올린다. 손안에서 뭉개지는 느낌이 양인의 체온을 더욱 달군다.

“천박한 향만큼이나 음란한 몸이구나.”

타액으로 질척하게 젖은 귓가에 대고 명휘가 속삭였다.

수치심을 이기지 못하고 수현은 눈을 질끈 감았다. 괴로운 듯 몸을 뒤틀자 희롱하던 이가 고개를 들어 올린다.

‘열에 들뜬 몸을 하고 억지로 참아 내는 모습이라니.’

명휘의 입가에 얄팍한 미소가 걸린다. 음인의 위에 엎드린 채로 한쪽 다리를 접어 가랑이를 강제로 벌리게 했다. 단단한 무릎으로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은밀한 부위를 문질러 댄다. 신음하는 음인을 보니 자꾸만 웃음을 새어 나온다.

“부끄러운 척이라도 하고 싶은 게냐. 아래는 이리도 적셔 놓고.”

끈적한 액체로 물든 얇은 속곳 위를 문지르는 통에 수현은 소름이 끼쳤다. 대놓고 희롱하는 몸짓에 수현의 몸은 하릴없이 자꾸만 뒤틀리고 튀어 올랐다.

명휘는 수현의 반응을 즐기며 더욱 집요하게 가랑이 사이를 문질렀다. 언덕처럼 솟구친 속곳 안에서 은밀한 부위는 계속 꿈틀댔고, 둥근 두 개의 알을 담은 주머니는 늘어져 단단한 무릎에 비벼지며 뭉개졌다.

혀를 내밀어 떨리는 목울대를 핥아 올렸다. 사악 소름이 돋고 잔털이 일어선 게 혀끝으로 전해져 왔다. 명휘는 아랫입술을 말아 물고 신음을 삼키는 모습을 즐기며 여린 목선을 따라 혀로 훑는다.

타액으로 적시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 입술에 물고 빨아들인다. 새하얀 목에 분홍색의 꽃이 피어난다.

이성을 앗아가 버리는 뜨거운 전희. 

‘안 돼. 정신 차려!’

본능은 지독한 향기의 주인에게 모든 것을 허락하라 얘기하고 있었지만, 수현은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는 안 되었다. 이제껏 그를 지탱해 온 모든 이유를 부정하고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었다.

거부할 수 없는 양인의 향을 이겨 내기 위해 수현은 안간힘을 썼다. 무너지지 않기 위해 아프도록 세게 입술을 깨물었다.

침구를 거머쥔 손을 풀고, 무겁게 짓눌린 몸으로 자유로움을 되찾기 위해 애를 썼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에 억지로 힘주며 손을 움직였다.

이미 음인의 단맛에 흠뻑 빠진 황제는 이제 수현의 가슴을 희롱하며 볼록하게 솟은 돌기를 빨기 시작한다. 세게 그러쥔 채 올라온 살집에 입술을 대고 작은 돌기를 후후 불며 쪽쪽 빤다.

제 가슴을 빠는데 정신이 팔린 황제를 두고 수현은 힘겹게 손을 머리 뒤쪽으로 옮겼다.

‘조금만. 조금만 더…….’

숨이 할딱할딱 가빠 오고, 땀이 송송 맺혀 이마가 축축했다. 눈동자는 한없이 떨리고 입술이 새파랗다.

힘겹게, 힘겹게 수현의 손이 원하는 곳을 향해 뻗어 나간다. 삼단 같은 흑발을 휘감아 꽂은 그것으로. 황제의 동맥을 끊고 안쪽 깊숙이 찌를 수 있는 그것으로.

그리고.

“큭.”

외마디 비명이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비녀의 뾰족한 선단이 강인한 목에 꽂혔다. 살을 뚫고 처박힌 비녀를 타고 새빨간 선혈이 새어 나오더니, 이내 목선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크윽, 컥.”

명휘의 눈알에 시뻘건 핏줄이 솟았다. 땀으로 흠뻑 젖은 얼굴은 새파랗게 핏기가 가셨다. 제 목이 꽂힌 비녀를 잡고 그가 몸을 일으켰다. 우당탕당. 거구가 비틀거리니 방 안의 가구가 쓰러지고 장식품이 떨어져 내렸다.

“크아악!”

괴성을 쏟아 내며 명휘가 살을 파고든 비녀를 억지로 뽑아냈다. 막혀 있던 곳이 뚫리자 시뻘건 피가 샘솟았다.

붉게 물든 비녀를 바닥에 내던지고, 명휘는 뚫린 생살을 꽉 잡았다. 그럼에도 줄줄 흘러나오는 피에 시야가 흐트러지고 호흡이 가빠졌다.

“네, 네놈이…….”

점점 정신이 희미해지는 와중에도 명휘는 끝끝내 제 목에 비녀를 꽂은 음인을 노려보고 있었다.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이 소름 끼치도록 징그럽다. 마치, 목이 뚫린 고통 따윈 이 타오르는 분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란 듯, 그의 몸뚱어리는 오로지 격분에 휩싸여 있었다.

“폐하!”

황제의 비명을 듣고 문밖을 지키고 있던 시위가 방 안으로 들이닥쳤다.

“이, 이게 무슨……!”

그들은 피투성이인 황제를 보곤 어찌할 줄 몰라 발을 구르며 난리를 쳤다. 제 옷으로 황제의 목을 지혈하고 부축하며 다급히 태의(太醫)를 찾았다.

“폐하, 폐하를 모셔라! 어서!”

이윽고 시위들이 피로 범벅된 황제를 모시고 방을 나섰다. 그와 동시에 소란을 듣고 찾아온 금위군(禁衛軍)이 쳐들어와 수현의 양팔을 포박하였다.

“이노옴!”

황제가 떠난 방, 분노한 태감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감히 네놈이 여기가 어디라고!”

군사들에게 붙들린 수현의 사지가 늘어졌다. 식은땀이 벌거벗은 온몸을 뒤덮고 풀어헤친 긴 머리가 젖은 살갗에 들러붙었다.

“저놈을 당장 옥에 가둬라!”

서릿발 같은 소리에 군사들이 수현의 몸을 잡아끌었다. 젖은 몸은 사나운 사내들에게 붙들린 채로 마르지 못한 빨래처럼 늘어져 바닥에 질질 끌렸다.

흡사 시체 같은 모습으로 끌려가는 수현이었지만, 그의 입술엔 뜻 모를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이제 되었다. 모든 것이 끝나 버렸다…….’

그렇게 점점 멀어지는 정신에 수현은 곧 모든 것을 놓아 버렸다. 의식을 잃은 죄인을 두고 군사들은 발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달이 낮게 뜨고, 꽃향기는 점점 연희당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 * *

붉은빛이 감도는 천 위로 황금색 용이 꿈틀거린다. 황제의 위상만큼이나 화려하고, 장엄하게 꾸며진 커다란 방 안에 진한 향냄새가 가득하다.

침전을 지키는 나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침상에 누운 이는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두 눈을 감은 수려한 얼굴은 땀에 절어 끈적였고, 낯빛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따금 들려오는 숨소리만이 그가 살아 있음을 암시하고 있었다.

“폐하!”

별안간 곤히 감긴 눈이 꿈틀거렸다.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침상을 주시하고 있던 태감이 그 모습을 보고 놀라 연이어 소리쳤다.

“정신이 드시나이까, 폐하!”

단번에 눈을 번쩍 뜬 명휘가 천장을 주시했다.

요란한 태감의 말에 나인들이 서둘러 태의(太醫)를 안으로 들였다. 조용하던 방 안에 순식간에 소란이 찾아왔다.

“폐하!”

정확히 태감이 세 번 황제를 불렀을 때, 시체 같은 몰골로 누워 있던 명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가운데, 골을 짚고 숨을 몰아쉬었다. 아직 채 돌아오지 않은 정신이 혼몽했고 심신이 어지러웠다.

“폐하. 괜찮으시옵니까…….”

태감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황제의 안위를 여쭈었다. 태의는 달라붙어 맥을 짚으며 황제의 혈색을 살폈다.

“비켜라!”

의원의 손길을 뿌리치며 명휘가 불편한 내색을 보였다. 인상을 찌푸리며 잠긴 목소리로 그가 말을 했다.

“……을 다오.”

“예?”

“옷을 달라 하였다.”

나흘 내내 생사를 오가며 자리에 누워 있던 황제가 정신을 차리고 내뱉은 말은 매우 의외의 것이었다. 놀란 태감만 어안이 벙벙하여 그저 쳐다보는데, 명휘가 다시금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무얼 하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하오나 폐하. 나흘째이옵니다. 꼬박 나흘 동안 누워 계셨나이다. 아직 몸이 성치 않사온데 옷을 어찌 찾으시나이까.”

감히 고하는 충언에 명휘는 죽일 듯 그를 노려보았다. 침묵이 선사하는 살기를 느끼며 태감은 더 몸을 조아렸다.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태감이 다시 아뢰었다.

“소신이 폐하의 심신이 걱정되어 감히 불충을 저질렀나이다. 폐하, 부디 살펴 주시옵소서.”

그가 자리에서 물러나며 환관을 찾았다.

“여봐라. 황제 폐하의 옷을 대령하라.”

이윽고 나인 무리가 침전에 들어섰다. 명휘는 태감에게 부축을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 위에 범벅이던 땀을 하얀 비단으로 닦은 뒤, 거구의 몸 위로 흑색의 옷이 걸쳐졌다.

나인들이 황제에게 옷을 입히느라 분주한 사이, 명휘는 시퍼렇게 날이 선 눈길로 허공을 노려보고 있었다. 

“치워라.”

옷섶을 여미는 나인의 손을 명휘가 쳐 냈다.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라 떨어져 나가는 나인을 지나쳐 그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폐하!”

놀란 환관들과 나인들이 그의 뒤를 쫓았다. 채 여미지 않은 검은색 옷깃이 펄럭이며 휘날렸다.

“폐하! 아직 날이 춥사옵니다! 이러다 옥체가 더 상하실까 두렵사옵니다.”

종종걸음으로 황제를 쫓으며 태감이 계속 아뢰었다. 하지만 명휘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의 눈빛은 분노로 이글거렸으며, 새하얗게 질렸던 얼굴은 어느새 붉게 변해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

“어디 있느냐.”

“폐하, 무슨 말씀이시온지…….”

“그 오만방자한 것이 어디 있는지를 물었다.”

태감은 고개를 더욱 조아리며 아뢨다.

“왕부정(王府井)에 하옥하였나이다.”

“그리로 갈 것이다.”

길게 늘어선 복도를 명휘가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하얀 침의 위에 여미지 않은 흑룡포를 걸친 황제의 모습을 보고 복도를 지키고 있던 나인들이 흠칫 놀라며 비켜났다.

끝없이 이어지는 복도를 지나쳐 명휘는 양심전(養心殿)을 빠져나갔다.

어둠을 가르며 등불이 황제의 앞길을 밝혔다. 빠른 보폭으로 앞서 나가는 황제를 따라가느라 환관들의 걸음걸이가 바빴다. 그들은 한참을 걷고 나서야 양부정에 당도할 수 있었다. 좀처럼 황제가 드나든 적이 없는 곳이었다.

“폐하를 뵈옵니다!”

왕부정의 옥사를 지키고 있던 병사들이 황제를 보고 예를 갖추었다. 밤하늘을 쩌렁쩌렁 울리는 그 소리에도 명휘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폐하!”

이윽고 금위군 대장이 서둘러 나와 황제를 맞이했다.

“금의위(錦衣衛) 북진무사(北鎭撫司) 이위, 폐하를 뵈옵니다.”

“죄인이 이곳에 있으렷다?”

“예. 나흘 전 이곳에 하옥하였나이다.”

“앞장서라.”

“예, 폐하. 소신이 폐하를 모시겠나이다.”

북진무사 이위는 국수가 갇힌 곳으로 명휘를 안내했다. 푹 꺼진 눈을 하고 살아 있느니만 못한 표정의 죄수들을 지나쳐 마침내 황제의 무리는 마지막 수옥에 다다랐다.

태감이 눈짓하자 감옥을 지키고 있던 병사가 등불로 안을 비추었다.

어둠을 걷어 낸 옥 안에서 쥐 죽은 듯 묶여 있는 한 명의 음인이 보였다. 깡마른 두 손은 포박당한 채 천정에 연결되어 묶여 있었고, 죄수복을 입은 옷은 군데군데가 찢겨 여린 속살을 내보이고 있었다.

중죄인이 갇혀 있는 곳은 더럽고 습했으나, 옅게 퍼지는 향기처럼 음인의 미색은 감추어질 줄 몰랐다. 고된 고문에 힘이 빠져 초점을 잃은 눈도, 핏기를 잃어버린 피부도 안쓰러우리만큼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끌어내라.”

북진무사의 명령에 병사들은 허리를 굽혀 응답하고 곧장 열쇠를 찾아 들었다. 철그렁거리는 쇳소리에 이어 끼이익, 커다란 문이 열렸다. 병사 두 명이 안으로 들어가 천장에 달린 줄에서 꽉 묶인 손목을 풀어 주었다.

옥 밖으로 나오고 나서야 수현은 조금씩 의식을 되찾기 시작했다. 병사들에 붙들려 까무러칠 듯 고개를 연신 꾸벅이던 그는 어느 순간엔가 바짝 정신 차려 두 눈을 크게 떴다.

‘사향. 사향 냄새다.’

그를 일깨운 것은 제 양팔을 그러쥔 우악스러운 손길도, 흐릿한 황제의 모습도 아니었다. 그것은 양인의 체향, 살기를 담고 달려드는 숨 막히는 체향이었다.

실로 소름 돋는 냄새였다.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며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듯 달려드는 승냥이의 것과 닮아 있는 냄새였다.

수현은 지독한 체향을 느끼며 간신히 고개를 들어 올려 제 앞에 있는 양인을 주시했다. 그토록 숨통을 끊어 놓으리라 다짐했건만…… 제 처지를 비웃기라도 하듯 다시 눈앞에 나타나다니.

수현은 황제를 보며 절망했다.

“폐, 폐하!”

일순, 날카로운 굉음이 밤하늘을 울렸다. 서슬 퍼런 칼날이 하늘로 치솟고, 제 검을 빼앗긴 북진무사는 놀라 몸을 휘청였다.

은빛 검은 들고 명휘가 성큼성큼 수현의 앞으로 다가섰다. 허공을 가르며 기다란 칼날이 음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어둠 속에서 날이 선 칼이 소름 끼치게 빛났다.

“……!”

당장에라도 베어 버릴 듯한 기세로 내리꽂히던 칼날은 끝내 수현의 목을 코앞에 두고 멈추어 섰다.

조금만 더 내밀면 바로 닿을 거리에서 날카로운 칼날이 수현의 목을 노리고 있었다.

“……무엇 때문이냐.”

명휘가 수현의 코앞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칼자루를 잡은 손은 바들바들 떨리고, 분노에 휩싸인 얼굴은 무섭게 일그러졌다.

“말하라. 무엇 때문에 그리했느냐 물었다.”

오금을 저리게 만드는 군주의 목소리를 들으며 오히려 지켜보는 이들이 사지를 떨어 댔다.

“…….”

바람만 무성한 사지에서 정적이 휘감아 돌았다. 누구 하나 군소리 꺼내지 않는 가운데 침묵이 이어졌다.

그때.

“……죽이시오.”

여전히 으득, 이를 가는 명휘를 보며 수현이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나를…… 죽여 주시오.”

그의 입술을 파르르 떨리고 얼굴은 사색이 되었으나, 미련 없이 말을 내뱉었다.

“황제의 숨을 거두지 못했으니, 내가 죽어 마땅하리오. 생에 미련 없으니 차라리…… 이 자리에서 죽여 주시오.”

감히 무서운 줄을 모르고 내뱉는 오만방자한 말에 분노한 태감이 외쳤다.

“이놈이! 정녕 네 목숨이 아깝지 않아 이리 구는 것이냐!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이리도 방자하게 군단 말이냐!”

태감의 호통에 명희가 왼손을 들어 보였다. 그만 입 다물라는 신호였다.

“…….”

명휘는 잠시 말을 아꼈다.

분노로 이글거리던 눈빛이 잠잠해졌다. 그가 묘한 시선으로 수현을 응시했다.

“죽여 달라 하였느냐.”

“…….”

“네 분명 짐에게 그리 간청하였느냐. 네놈을 죽여 달라고.”

날카로운 칼날의 끝이 수현의 목을 긁었다. 깊지 않게. 상처만 살짝 남을 정도로 아주 얇게.

음인의 목을 긋는 명휘의 얼굴엔 어느덧 뜻 모를 조소가 어려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리는 섬뜩한 웃음이었다.

“너에게 죽음이 안식인 것을 짐이 모를 리 없는데. 내 어찌 그 청을 들어주어야 하느냐.”

긴 칼날은 기어이 수현의 목에 붉은빛 선을 만들어 냈다. 선혈이 묻은 칼날이 징그럽게 어둠 속에서 빛났다.

“끝까지 살려서 네놈이 땅을 치며 후회하는 꼴을 봐야 하지 않겠느냐?”

살갗을 가르던 칼날이 떨어져 나갔다.

“짐이 앞으로 너에게 지옥을 보여 주마. 죽음보다 더한 지옥 말이야.”

명휘가 몸을 돌렸다. 분명, 정신을 차리자마자 죽여 버리겠다는 듯 이곳까지 쫓아온 그가 고작 죄인의 목에 작은 상처를 내는 것으로 돌아선 것이다.

“가자.”

핏로 물든 칼을 떨구고, 그대로 명휘가 발걸음을 옮겼다.

“폐, 폐하.”

넋을 놓고 있다던 환관들이 헐레벌떡 뒤를 쫓았다. 그들의 얼굴엔 잔혹한 황제가 베푼 너그러움을 보고도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

이윽고 수현을 남겨 둔 채로 황제의 무리가 자리를 떠났다. 죽지 않고 살아남은 죄인은 자리에서 사지를 늘어뜨린 채로 넋을 놓아 버렸다.

그렇게 밤하늘에 달이 차올랐다. 나락에서 맞이하는 수현의 첫날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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