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아래에서 올려다본 안드레아의 얼굴은 거만함으로 똘똘 뭉쳐있었다.
<아힘은 또 누구야? 어쨌든, 뭐하고 있어? 얼른 나와. 또 붙잡히고 싶어?>
톡 쏘며 말하는 투에 한 대만 쥐어박고 싶다는 생각이 불끈 솟았다. 하지만 그의 도움을 받은 것은 분명했다. 나는 엘씨오의 다리를 밀쳐내고 엉거주춤하게 일어서며 ‘고마워’하고 중얼거렸다. 안드레아는 흥, 하고 비웃었다.
<엘씨오는…….>
<그 정도 때렸다고 죽진 않아. 그냥 잠들었을 뿐이야. 아니면 잠시 기절했거나. 그렇게 쳐다보지 마. 어설프게 쳤다가는 더 포악해진단 말이야.>
그렇게 말하고 안드레아는 다시 밖으로 나갔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 엘씨오의 코밑으로 손가락을 대어보았다. 따뜻한 콧바람이 느껴졌다. 이불을 덮어주고 나도 밖으로 나와 문을 닫았다. 안드레아는 이미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소리가 그쪽 건물까지 들렸나요?>
<둘이 뭐하고 있나 정탐하러 왔었어. 시시하게 방도 따로 쓰네.>
안드레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렇게 쏘아붙인 뒤 후다닥 사라져버렸다.
아침 식사는 안드레아와 엘씨오,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 한 테이블에 앉아 함께 먹었다. 전날 밤 요란한 신음의 주인공은 보이지 않았다. 원나잇도 아니고 아예 원타임이로군. 절로 입이 삐죽여졌다. 안드레아는 어젯밤 자신의 영웅담을 늘어놓았다. 엘씨오는 굳게 입을 다문 채 빵을 뜯었다. 그리고 나와는 시선을 마주칠 때마다 고개를 떨구었다. 그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나는 일부러 그와 눈을 마주하며 빙긋빙긋 웃어주었다. 그 모양을 본 안드레아가 빵을 씹으며 입을 삐죽거렸다.
식사를 마친 후 느긋하게 차를 마시고 정오 즈음에서야 나갈 채비를 마쳤다. 한 가지 소동도 있었고 밉살스러운 인간도 한 명 있었지만 그래도 사람이 사는 집이라는 푸근함이 마음을 풀어주어 행동까지 느긋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평화를 깨는 것은 어디에나 있었다.
<나도 같이 가. 어제 저 녀석한테 몹쓸 짓을 당할 뻔 한 걸 내가 구해줬으니까 하루 정도 같이 놀아줘야지.>
엘씨오와 내가 현관을 나서는데 안드레아가 재빨리 따라 나온 것이었다.
<방해하지 말고 들어가. 넌 모두 익숙한 데를 왜 같이 가려는 거야?>
<심심하니까!>
<됐어요, 엘씨오. 그냥 같이 가요.>
아이처럼 발을 동동 구르며 떼를 쓰는 안드레아를 바라보며 나는 혀를 쯧쯧 찼다. 말려봤자 다른 사람이 싫어하는 행동을 일부러 더 골라 할 것 같은, 심술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의 안드레아는 이겼다, 하는 표정으로 생글거렸다. 엘씨오는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혼자 멀리 앞장서 걸어갔다.
<넌 정말 구제불능이야.>
<한밤중에 이상한 짓을 하는 넌 어떻고?>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앞서 걸어가던 엘씨오가 버럭 고함을 치며 뒤돌아 안드레아를 노려보았다. 그에 안드레아는 물론 나까지 움찔했다. 그러나 안드레아는 바닥을 탁탁 치며 그를 앞질러 걸어갔다. 엘씨오는 그런 그를 계속 노려보다가 나와 걸음을 맞추어 걸었다.
<미안해요.>
들릴 듯 말 듯 사과하는 목소리에 고개를 올려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엘씨오는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당신이니까 그 정도의 트라우마만 가지고 있는 거지, 나 같았으면 벌써 신경쇄약으로 입원까지 필요했을 거예요.>
나는 앞서 걸어가는 안드레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내쉬자 엘씨오가 빙긋 웃었다. 그래서 나도 따라 웃었다. 그가 조금이라도 가벼워졌으면 했다.
이번에도 역시 도보로만 다녔다. 다리가 아프고 피곤했지만, 그게 바로 여행의 묘미 아니겠는가. 안드레아는 버스나 지하철을 타지 않는다고 내내 툴툴거렸지만, 그러면 집으로 가라는 엘씨오의 윽박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천사의 성과 빅토르 엠마누엘 기념관을 모두 둘러보자 어느새 해가 지기 시작했다.
저녁은 집에 들어가서 먹을 것인가, 밖에서 먹고 들어갈 것인가를 두고 엘씨오와 안드레아가 각축을 벌였다. 이번에는 엘씨오의 윽박도 소용없었다. 나도 이왕 나온 것 밖에서 먹고 들어갔으면 좋겠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엘씨오가 고개를 끄덕이자 안드레아는 또 바닥을 탁탁 치며 앞질러 걸어갔다. 어쨌든 우리는 나보나 광장의 한 레스토랑에서 베르니니의 대표적인 작품인 피우미 분수를 바라보며 얌전하게 스파게티를 먹었다.
<저 오벨리스크는 이집트에서 가져온 거예요. 약탈해 왔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지만 이탈리아 사람들은 그런 표현을 싫어하죠.>
내가 한참을 피우미 분수의 오벨리스크를 바라보자 엘씨오는 옆으로 다가와 차분히 설명해주었다. 자기 나라의 문화에 대해 자부심과 동시에 객관적인 시선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멋있어 보였다. 새삼, 내가 참 근사한 남자를 차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탈은 나쁜 거야. 남의 것을 가로채는 건 도둑질이지.>
내가 엘씨오와 나란히 앉아 소곤거리자 안드레아는 나를 잡아먹을 듯 쏘아보았다. 저게 또 왜 저러나 싶었지만, 그냥 콜라만 들이키고 말았다. 그리고 계산을 마치고 내게만 특별히 상냥했던 웨이터에게 팁을 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코스메딘 산타마리아 성당을 지나치게 되었다. 특별해 보이지 않는 성당을 그저 지나치려 했는데 안드레아가 나를 불러 세웠다.
<여기, 안 들어가요? 동양인 관광객들은 모두 여기에 환장하던데.>
그가 손가락질 한 곳은 성당 입구의 한쪽 벽면이었다. 무언가 거뭇한 것이 걸려있어 가까이 다가가 보았더니 영화 ‘로마의 휴일’에 나왔던 ‘진실의 입’이었다. 진실을 심판하는 입을 가진 얼굴 모양의 원형석판. 안드레아는 내 팔을 끌고 그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묘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넣어보라고 채근했다.
<알죠? 거짓을 말하면 손이 잘려, 댕강.>
자신의 손이 잘리는 시늉을 하며 안드레아는 겁을 줬다. 피식 웃었지만, 조금 무서웠다. 엘씨오는 안드레아와 내 사이로 다가와 서서 그를 슬쩍 노려보곤 또 차분히 설명을 시작했다.
<이건 해신 트리톤의 얼굴을 조각한 거예요. 지금은 이렇게 호강하고 있지만, 사실 옛날엔 하수도 뚜껑으로 사용된 거죠. 그래도 기념이니까, 한번 넣어 봐요.>
하수도 뚜껑이라. 나는 여유롭게 웃으며, 그러나 조금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트리톤의 입 속으로 손을 넣었다. 그리고 가만히 있었더니, 안드레아가 비웃으며 ‘진실이든 거짓이든 말을 해야지!’하고 닦달했다. 손은 그대로 넣은 채 나는 잠시 고민했다. 글쎄, 나도 확신이 서지 않는 것을 말해보면 어떨까. 손이 잘리느냐 마느냐로 판가름하기에는 너무 큰 모험인가 싶었지만, 어떤가, 엘씨오의 말처럼 기념이니까.
“나는 이제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나는 작게, 그러나 또렷하게 발음했다. 그리고 잠시 기다렸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손을 흔들며 빼내자 엘씨오는 싱긋 웃었다.
<다행이네요. 손이 잘리지 않아서. 하긴, 당신은 너무 진실해서 탈인 사람이니까.>
<뭐야, 도대체 무슨 말을 한 거야? 왜 영어로 말하지 않아?>
안드레아는 뭔가 분한 듯 씩씩거리며 따져 물었다. ‘한국 사람이니까’ 대답한 뒤 나는 개운한 기분으로 성당을 빠져 나왔다.
당신은 너무 진실해서 탈인 사람이니까. 엘씨오의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그가 나의 지난 20년을 알아도 그런 말을 할까. 그리고 지금의 나는 어떤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는 걸까. 그의 말에 기쁘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한 복잡한 심정으로 나는 찬바람을 입안으로 한껏 들이마셨다.
다음날은 아예 정오가 다 되어 일어났다. 그래도 남의 집인데 이렇게 늘어지게 자다니, 조금 민망해서 얼른 눈곱만 떼고 밑으로 내려갔더니 엘씨오 역시 이제 막 일어난 듯 까치집이 된 머리를 북북 문지르고 있었다. 서로 마주보며 흠칫 굳었다가 곧 둘 다 베시시 웃어버렸다.
<그런데 엘씨오. 오랜만에 고향에 온 건데, 이곳 친구들 만나봐야 하지 않아요? 나한테 너무 시간 빼앗기는 것 같아서요.>
토스트를 굽는 엘씨오의 등에 대고 나는 오늘의 일정에 대해 물었다. 애둘러 말하긴 했지만, 혼자 있고 싶다고 표현한 것이었다. 그런데 엘씨오는 로마청년이 아니라 강원도 산골 청년처럼 순박하게 웃으며 계속 ‘괜찮아요’만 연발했다. 로마 공기가 그리 좋지는 않은 것 같은데, 왜 저 남자는 저렇게까지 때 묻지 않은 걸까.
<그래도 오랜만인데 인사 해야죠. 난 어제 둘러봤던 나보나 광장이나 한 번 더 가볼 생각이에요. 어차피 이렇게 늦었으니까 오늘은 그냥 분수 구경하면서 커피도 마시고…….>
<하긴, 혼자 하는 여행이라는 묘미도 있죠. 알았어요. 그럼 나도 오랜만에 친구들 만날게요. 그런데 혼자 갈 수 있겠어요?>
순박한데 눈치는 빠르다. 순간 ‘나 하긴 싫고 남 주긴 아깝다’는 말이 떠올랐다. 나이를 한 살 한 살 먹을수록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악역들이 마냥 악당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조금씩 이해도 된다는 말이다. 그런 게 이해가 된다는 게 조금 슬프지만, 한 꺼풀만 벗겨보면 사람은 다 거기서 거기다. ‘행복’이라는 지극히 아름다운 단어도 따지고 보면 그 밑바닥에는 욕심이 숨어있다.
<데려다 줄까요?>
대답하지 않고 멍하니 앉아있으니 혼자 갈 수 없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엘씨오는 또 싱글싱글 웃으며 고개를 내밀었다. 나는 내 밑바닥에 가라앉은 욕심이 그저 계속 가라앉아있기만을 바라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혼자 갈 수 있어요. 그런데 엘씨오. 순간 내가 엄청난 악당이 될 뻔 했다는 거 알아요? 다른 사람 앞에서 그렇게 웃지 말아요, 인류 평화가 흔들릴 지도 모르니까. 클레오파트라는 영웅들을 파멸시켰죠.>
<갑자기 무슨 말이에요?>
<몰라도 돼요.>
엘씨오는 고개를 갸우뚱거렸지만 나는 묵묵히 스프를 떠 입안에 넣었다. 후루룩 소리가 조용한 거실을 울렸다. 그러고 보니, 뭔가 허전했다. 굉장히 조용하고-
<안드레아는 안 보이네요?>
<또 어딘가에서 민폐를 끼치고 있겠죠, 뭐.>
뾰로통하게 대답하는 말에 나는 피식 웃었다. 얼핏 사이가 나빠 보이긴 하는데, 그게 어쩐지 귀엽게 보이기도 했다. 아이들끼리 몇 대 치고 박고 싸우다가 서로 삐친 것 같은 느낌이었다. 트라우마를 들키고 성추행설로 기숙사에서 퇴사를 시키고 또 다른 트라우마를 얻는 과정이 그저 몇 대 치고 박고 싸우는 것과는 비교되지 않지만. 그래도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여전히 한 집에 살고 있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다. 하긴, 사촌이니까 어쩔 수 없었던 걸까.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이번에는 엘씨오가 후루룩 소리를 내며 스프를 떠 넣었다.
혼자 둘러보는 나보나 광장은 또 다른 운치가 있었다. 세 개의 분수를 차례로 유심히 살펴보고 조용한 카페를 찾아 커피를 마시며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하다보니 어느새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커피 값을 테이블 위에 놓아두고 밖으로 나와 또 한동안 멍하니 모로 분수 주위를 서성거렸다. 바람이 꽤 쌀쌀했다. 관광객으로 보이는 한 무리가 종종 걸음으로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갔다. 나보나 광장은 여행객들에게도 그리고 로마 시민들에게도 인기 있는 곳이었다.
무리로 모여 다니는 사람들과 한 둘씩 다니는 사람들 모두를 유심히 살펴보았지만, 내가 찾는 금발의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안 되는 걸까. 밀라노에서 이틀을 묵었고 로마에서도 벌써 삼일 째를 보내고 있다. 나는 그에게 로마에 며칠 동안 머물 것인지 물어보지 않았다. 멍청이. 나는 내 머리카락을 꽉 잡아당겼다. 제길.
집에 돌아왔을 때 엘씨오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안드레아가 문을 열어주었다. 또 무슨 시비를 걸까, 얼른 내 방으로 달아났는데 정말 무슨 시비라도 걸어야 할 심산인지 종종걸음으로 바짝 따라왔다. 안 그래도 우울한데 또 밉살스런 말을 지껄이면 이번에야 말로 꿀밤을 먹여 주리라 생각하며 방문을 열기 전 몸을 홱 돌렸다.
<무슨 일이죠? 나한테 할 말 있어요?>
<이거.>
<에?>
갑자기 얼굴 앞으로 내미는 종이에 나는 눈을 깜박이며 경계했다. 이건 또 무슨 수작인가 싶어 조심스럽게 그것을 받아들었더니, 티켓이었다. 거기에는 ‘바티칸 시국 가이드 투어’라고 한글로 또박또박 적혀 있었다.
<한국인 가이드 팀 찾느라 꽤 고생했어. 내일 아침 지하철 a선 비오또리역에서 모인대.>
<이걸 왜->
<엘씨오가… 사과하지 않으면 앞으로 말도 안 한다고 해서. 그거 20유로야, 버리지 마! 그리고 바티칸 가이드는 꽤 재미있으니까…….>
우물쭈물 말하는 게, 귀여웠다. 피식 웃었더니 비웃는 걸로 알았는지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또 무슨 폭언을 터뜨릴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얼른 고맙다고 말하자 안드레아는 고개를 빳빳하게 세운 뒤 쾅쾅거리며 계단을 내려갔다.
유럽 여행은 꿈도 꾸지 않던 때에도 어렴풋하게 언젠가 바티칸 시국에는 꼭 한번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나라 안의 작은 나라. 그러나 세상과는 완전히 분리된 느낌의, 오히려 신의 영역에 가까운 나라. 종교를 떠나, 그곳에서 단 한번만이라도 기도를 올린다면 이루지 못할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막상 로마에 왔지만 바티칸 투어는 생각도 못하고 있었는데, 의외의 사람이 그 기회를 준 것이다. 안드레아는 사과의 의미라고 했지만 그것은 오히려 선물에 가까웠다. 당장이라도 뛰어 내려가 그의 볼에 키스하고 싶었지만, 그건 오히려 그가 더 싫어할 것 같아 참았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새벽 늦게 들어와 아직 잠들어 있는 엘씨오의 얼굴만 확인하고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하늘이 맑았다. 겨울이 우기라더니, 정말 운이 좋은 것 같았다. 역에서 여럿 모여 있는 한국인들을 향해 다가갈 때는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타지에서 모국어를 쓰는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무선 수신기를 귀에 걸고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면서도 나는 곁의 사람들과 수다를 떨기에 바빴다. 시스티나 예배당에서는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을 향해 손가락질하면서 수학책 표지라며 웃고 떠들다가 주의를 들었다. 그러나 성베드로 대성당 입구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상을 보면서는 비종교인들까지도 숙연하게 입을 다물었다. 임종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의 표정이 도저히 조각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처연한 느낌을 주었다.
가이드는 점심을 먹고도 몇 시간 더 계속 되었다. 사람들은 내가 여행 중 사귄 이탈리아 친구의 집에서 묵고 있다는 사실을 부러워했다. 실은 좀 복잡한 사정이 있다는 것을 그들이 알 리는 없지만, 내가 그리 좋은 상황은 아니라고 말하자 ‘에이-’하고 야유를 퍼부었다. 그리고 저녁을 함께 하고 들어가자고 말했지만, 나는 선약이 있다는 핑계를 대고 아쉽게 무리에서 빠져나왔다.
만 하루 동안 얼굴을 보지 못한 엘씨오가 걱정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렇게 또 하루를 보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곧장 역시 로마를 찾는 여행객들의 필수 코스, 트레비 분수로 향했다.
서서히 해가 지기 시작하고 분수의 조각은 조명을 받아 꿈처럼 몽환적인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비록 분수 주위의 인파가 조용한 꿈을 시끌벅적하게 만들어버렸지만, 한 순간 입을 헤 벌리고 감상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곧 눈을 비비고 정신을 차렸다. 멍청하게 굴면 안 돼. 이상한 오해를 받아서도 안 되지만 찾아야 할 것을 놓쳐서도 안 된다. 나는 주먹을 불끈 쥔 채 인파의 한쪽에 물러서서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춥다…….”
손목시계를 차고 나오지 않아 시간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야경을 보러 나온 인파는 더욱 늘고, 완전히 캄캄해진 배경에 분수의 조명은 더욱 밝게 느껴졌다. 흔히 야경을 혼자 보러 나오지는 않는다. 특히 위험한 도시로 손꼽히는 로마에서는 말이다. 사람들은 모두 최소한 둘이나 셋 이상 무리지어 다녔다. 나는 한 자리에 오랫동안 서서 사람들이 도착하고 떠나가고 그냥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 많은 사람들 중에 그는 찾을 수 없었다. 턱이 덜덜 떨렸다.
“실례합니다. 한국인이세요?”
누군가 등을 두드려 뒤를 돌아보니 한국인 신혼부부였다.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함박웃음을 지으며 카메라를 내밀었다. 사진을 찍어달라는 뜻이었다. 나는 호주머니에서 손을 빼기 싫은 것을 억지로 빼내어 카메라를 받아들었다.
“우리 둘 다 이렇게, 동전을 던지는 순간 찍어주세요. 타이밍 잘 맞춰주셔야 해요.”
나는 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프레임 안에서 그들은 분수를 배경으로 자리를 잡고 각자 동전을 오른손에 쥔 뒤 동시에 ‘하나, 둘, 셋’ 구령을 붙인 뒤 그것을 등 뒤로 던졌다.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그들도 나도 주위의 모든 것들이 잠시 멈춘 느낌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신혼부부가 내 손안의 카메라를 받아가 찍은 사진을 확인하는 중이었다.
“한 번 더 찍을까?”
“이만하면 잘 나왔는데? 그리고 두 번째 던지면 평생의 연인을 만난다잖아. 우린 이미 이뤘는데 뭘 또 그런 소원을 빌어. 됐어. 저기- 그쪽도 사진 찍어드릴까요?”
남자가 카메라의 렌즈를 내 쪽으로 향해 쥔 채 물었다. 나는 이번에도 말없이 그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신혼부부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는 듯 웃으며 팔짱을 낀 채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다시 점퍼의 호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문득 호주머니 안에 동전 몇 개가 손끝에 만져졌다. 꺼내어보니 백 원짜리 동전 세 개였다. 한국에 있었을 때부터 계속 넣어두었던, 아니 방치해두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그것을 쥔 채 분수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뒤를 돌아 동전 하나를 오른 손에 쥐었다.
첫 번째 동전, 로마에 다시 올 수 있기를.
두 번째 동전, 평생의 연인을 만날 수 있기를…….
나는 두 개의 동전을 던지고, 나머지 하나의 동전은 다시 호주머니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어둡고 황량한 거리를 걸어 집으로 돌아갔다.
* * *
-어디 한번 보자, 강민하. 어째 인상이 전보다 더, 더 고약해 뵌다?
-원래 이렇게 생겨먹었는데 어쩌란 말이야?
-약속 펑크 한번 냈다고 단단하게 삐쳤구나? 어휴… 난 지희보다 네 눈치를 더 보는 것 같다. 밥 먹듯이 야근 하는 거 알잖아. 응? 밑천이 없으니 결혼 자금 마련하려면 뼈 빠지게 일해야지, 할 수 있어?
-결혼… 해?
-뭐, 지금 당장은 못하겠지만 언젠가 하긴 해야지.
-……. 하지 마.
-응?
더스틴 호프만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 <졸업>의 마지막 장면, 기억나?
남자주인공이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있는 여자주인공을 찾아가 크게 이름을 부르지.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목청껏 여자의 이름을 외치면 여자도 마침내 남자의 이름을 외쳐. 그리고 둘은 함께 도망치는 거야. 그 둘이 교회를 빠져나가는 것을 막는 사람들에게는 십자가로 위협을 하지.
달리고 달려 겨우 세운 버스에 타서는 제일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 가는데, 그렇게 격정적이고 로맨틱한 상황 뒤에 둘의 표정은 의외로 담담하기도 하고 암담해 보이기도 해. 그게, 기가 막히게 현실적이더라 이거지.
D, 그 장면을 몇 번이나 되돌려 봤어. 웃기게 들리겠지만, 난 정말 그걸 시도해보려고도 했다. 그런데, 내가 네 이름을 외치면 너는 과연 내 이름을 불러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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