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헬로우, 곤니치와, 안녕-13화 (13/29)

[13]

<로마는 아는 만큼 보이는 곳이에요. 아무런 설명 없이는 그저 돌무더기로만 보일 뿐이죠. 저…… 미나, 내가… 같이 가도 될까요?>

간편한 복장으로 갈아입고 방을 나서는데, 엘씨오가 머뭇거리며 다가와 역시 우물쭈물 말을 건넸다. 왠지 모르게, 그가 우물쭈물해하면 할수록 나는 우울해졌다. 하루아침에 어색해질 만큼, 사람 사이의 관계는 얼마나 연약한 물거품 같은 것인가. 나는 엘씨오의 머뭇거림에서 우리 운명의 하찮음을 보았다. 갑자기 내가 활짝 웃어보이자 그는 이마를 꿈틀거리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렇게 보지 말아요, 나 미치지 않았어요. 그런데 엘씨오, 그렇게 미안한 표정 지으면서 계속 날 볼 거예요?>

<하지만 내가 당신을 때렸으니까…….>

그는 또 고개를 숙인 채 기어들어갈 듯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그 모습이 보기 싫어, 나는 일부러 그의 옆머리를 아프게 잡아당겼다. 엘씨오가 입을 헤 벌린 채 고개를 들었다.

<당신은 날 때린 적 없다고 했잖아요. 그냥 머리가 조금 뜯겼을 뿐이에요. 그 정도는 어린아이들끼리 치고받고 싸울 때 흔한 일이죠. ……. 좋아요, 마지막 선물이라고 생각할게요. 가이드, 해줘요.>

<정말, 정말 괜찮아요?>

<네. 정말, 정말 괜찮아요. 당신만 괜찮다면.>

그의 머리를 헤집으며 가방을 챙겨들자 엘씨오는 쿠당당 소리를 내며 자신의 방에서 커다란 점퍼를 입고 나왔다. 그리고 뛰다시피 계단을 먼저 내려가 복도 역시 빠른 속도로 걸어 나갔다. 저러다 넘어지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양반걸음으로 뒤따라 걸어가는데, 위에서 쿠당당 소리를 내며 누군가 내려왔다.

<엘씨오는?>

안드레아였다. 그러나 나는 계단 위에 매달린 그를 못본 척 하며, 그리고 질문도 듣지 못한 척하며 빠른 걸음으로 현관으로 달려갔다. 뒤에서 안드레아가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현관문을 열자 엘씨오가 고개를 빠끔 내민 채 내 얼굴을 확인하곤 한숨을 내쉬었다.

<얼른 나와요. …어디부터 가고 싶어요?>

<엘씨오. 내 가이드 해주겠다고 한 거, 혹시 안드레아와 같이 있기 싫어서는 아니죠?>

<…설마요.>

엘씨오는 내 시선을 피하며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나는 ‘그래요?’하고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그러다 문득, 더 이상 상관해선 안 된다는 생각에 ‘됐어요’하고 말을 잘랐다.

<저기에 미로처럼 생긴 길이 있고 구멍이 여러 개 뚫려 있죠? 거기가 검투사의 대기실 겸 무기창고, 그리고 맹수의 우리로 쓰였대요. 그리고 원래는 그 위로 천장이 있고, 천장 위에 전투장이 있었는데 모두 무너져서 저렇게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미나, 듣고 있어요? 미나.>

콜로세움. 플라비우스 원형극장. 제정기 로마의 복 받은 로마 시민의 오락시설로서, 글라디아토르의 시합, 맹수연기 등이 시행되었다. 검투사는 대부분 노예, 죄수, 전쟁의 포로였으며 한 사람이 무기를 잃고 무릎을 꿇을 때까지 경기를 하고, 황제가 엄지를 올리느냐 내리느냐에 따라 패자의 생사가 결정되었다.

나는 콜로세움의 거대한 위압감에 숨이 막혔다. 하지만 지금 보고 있는 것과 엘씨오의 설명에 집중하려고만 하면 어김없이 머릿속을 들쑤시는 안드레아의 버르장머리 없는 행동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재건된 전투장 위에 검투사의 복장을 한 나와 안드레아가 치고 박고 싸우는… 아니, 무시무시한 칼과 방패를 이용해 싸우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었다. 물론 상상 속에서는 그 버르장머리 없는 안드레아를 죽도록 패줬다. 그렇다면, 패자의 생사를 결정할 엄지를 가진 황제는 누구인가. 설마,

<엘씨오?>

<네?>

<아- 아니에요. 계속 말해요.>

<저기, 미나. 안드레아가 무례하게 군 건 내가 대신 사과할게요. 기분 풀어요.>

엘씨오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중얼거렸다. 대신 사과하겠다니. 그렇다면, 엄지를 위로 올린다는 것인가? 살려주겠다는 말이군. 나는 팩-하니 고개를 돌렸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모두 괘씸했다.

<됐어요. 나 그렇게 속 좁은 사람 아니에요. 저기 보이는 게 포로 로마노죠? 가요. 가서 또 설명해줘요.>

나는 경쾌한 걸음으로 엘씨오를 끌었다. 로마는 그리 춥지 않았다. 이탈리아는 겨울이 우기라는 말에 우산도 미리 챙겼는데 날씨가 우중충하기는커녕 햇빛이 내려쬐어 한국으로 치자면 조금 쌀쌀한 가을 날씨 같았다. 엘씨오는 내게 운이 좋다고 말했다. 럭키, 라는 말을 들으니 불쾌했던 기분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로마 도시가 생각보다 그리 넓지 않은데다가 주요 관광지가 모여 있는 탓에 웬만해서는 여유롭게 걸어 다닐 수 있었다. 포로 로마노 또한 콜로세움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였다. 작은 언덕을 넘어 개선문 아래를 득의양양한 장군처럼 지나가자 바로 포로 로마노가 보였다. 하지만, 말이 ‘포로 로마노’지 기둥과 건물의 기초만 남아있어 거의 폐허처럼 보일 뿐이었다. 내가 실망한 표정을 짓자 엘씨오는 차근차근히 그 ‘폐허’에 관한 신화와 역사를 설명해주었다. 그제야 꽤 그럴 듯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이게 바로 베스타 신전이에요. 불의 여신을 모신 곳이죠. 귀족의 딸 중에 선정된 여섯 명의 처녀가 베스타의 불꽃을 지켰대요. 그런데 30년간의 직무기간 동안 반드시 처녀성을 간직해야 한->

<그런데 엘씨오.>

포로 로마노에서 가장 신성하고 아름답다는 신전을 올려다보며 나는 문득 엘씨오의 말을 잘랐다. 엘씨오는 전혀 기분 상하지 않은 듯 다정하게 ‘네?’하고 대답했다.

<그런데 안드레아는 왜 다른 가족들과 같이 휴가를 가지 않았대요?>

<아… 그건…… 겨울에 무슨 휴가냐고… 하던데요.>

<그랬구나->

나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발부리에 걸리는 돌덩이를 걷어찼다. 그러자 엘씨오는 물론 주위의 관광객들이 깜짝 놀라며 수군거렸다. 엘씨오를 쳐다보자 ‘그건 그냥 돌이 아닌데요’하며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제야 내가 걷어찬 것이 신전의 한 모퉁이인 것을 알아차렸다. 나는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쓰미마셍, 쓰미마셍.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리자 엘씨오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일본어 아닌가요? 라는 질문이 나올까봐 나는 얼른 세 개의 커다란 기둥을 가리켰다.

<저건 뭐죠?>

<저… 미나. 역시 아직 기분 나쁘죠? 난 괜찮아요, 당신이 불편하면 그냥 호텔로 옮기도록 해요.>

<아니라니까요. 그저 궁금했을 뿐이에요. 그리고 엘씨오. 난 당신한테 책임이 있어요. 당신의 트라우마는 내 탓이 아니지만, 거기서 벗어날 수도 있었잖아요. 나한테 진심이었다고 했죠? 그 기회를 깨뜨린 건 나예요. 떠나기 전에 당신이 조금이라도 편안해진 모습을 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어눌한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엘씨오는 주먹을 불끈 쥐며 또 다시 ‘이번에는 반드시’ 어쩌고 하며 전의를 불태웠다. 힘줄이 튀어나온 그의 주먹을 문지르며 나는 릴렉스를 외쳤다. 어쩐지 그가 자꾸만 안절부절 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그것이 그저 자신의 트라우마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는 두려움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다.

한밤중이 되어서야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너무 오래 걸어 다녀서 피곤한데다 저녁을 너무 배불리 먹어서 현관을 들어설 때는 둘 다 혀를 빼낸 채 헉헉거리고 있었다. 한 채의 집을 지나고 엘씨오 가족이 거주하는 집으로 건너가기 위해 복도를 건너는데 위층에서 들려오는 요란한 신음소리가 넓고 조용한 집안을 광광 울렸다. 절정을 향해 치솟다가 마침내 고요해졌다.

빠르게 걷는 엘씨오의 옆얼굴이 붉게 달아올라있었다. 턱 근육이 불끈 솟아있는 것으로 보아 이를 악물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말없이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런데 요란하게 계단을 뛰어내려오는 소리가 걸음을 붙잡았다. 엘씨오는 벌써 그의 집 현관문에 열쇠를 끼워 맞추고 있었다. 나는 요란한 소리의 주인을 향해 뒤돌아섰다.

<로마에서의 첫 날은 어땠어요? 재미 좀 봤어요?>

안드레아 역시 우리처럼 숨을 고르지 못하고 있었다. 그 이유가 우리와는 전혀 달랐지만. 트렁크 차림의 그는 계단 귀퉁이에 불량스럽게 기대어 서 있었다. 짜증이 치밀었지만, 더 이상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엘씨오는 신경질적으로 열쇠구멍에 열쇠를 끼워 넣었다가 다시 뒤돌아 내 옆에 와 섰다.

<천박한 말씨 좀 쓰지 마. 그리고 소리도 좀 줄여.>

<아무도 없는데 뭘.>

<미나가 있잖아. 미나는 우리 집 손님이야.>

<……이쪽도 우리 집 손님이야.>

그리고 그는 뒤에서 손을 내미는 남자에게 안기다시피한 채로 이층으로 다시 올라갔다. 엘씨오는 알아들을 수 없는 이탈리아어로 짧게 그러나 강한 악센트로 무어라 중얼거린 뒤 현관문을 열었다. 그리고 게스트 룸으로 사용되는 방으로 나를 안내할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화난 얼굴의 그는 조금 무서웠다. 그러고 보니, 그는 항상 내게 웃는 얼굴만 보여주었었다.

<샤워실은 저쪽 문이에요. 잘 자요, 미나.>

<고마워요. 잘 자요.>

바로 옆의 자신의 방으로 힘없이 터덜터덜 걸어가는 것을 바라보며 나는 문을 닫았다. 기분을 풀어주고 위로를 해줘야 할 것 같긴 한데, 어떤 것이 문제인지 알 수 없었다. 하긴, 안드레아 같은 사촌과 한 집에 살아야 한다면 누구라도 무서운 얼굴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엘씨오가 한국이라는 생소한 나라에 교환학생으로 온 것도 조금이라도 안드레아를 피하기 위해서였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며 옷을 벗었다.

로마의 흙먼지를 씻어내기 위해 따뜻한 물로 오랫동안 샤워한 뒤 침대로 꿈틀거리며 기어 들어갔다. 소화도 다 되었고, 이제 피곤함만 남았다. 푹신한 침대에 눕자마자 졸음이 쏟아졌다. 몸이 수면 아래로 한없이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깜빡, 아주 깊은 잠에 잘 수 있었다. 정체 모를 소리가 신경을 거슬리게 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것은 아주 희미하고 먼 곳에서 울려오는 듯 하다가 점점 더 가까워져 오는 것 같았다.

짜증을 내며 몸을 일으켜 시간을 확인했다. 잠깐 눈을 감았다 뜬 것 같았는데 그래도 서너 시간은 지나있었다. 이번에는 그 정체 모를 소리에 집중했다. 무언가 웅얼거리는 듯한 소리 같기도 했고 아픈 사람이 흘리는 신음 같기도 했다. 좀 으스스한 기분이 들어 이불로 몸을 감싼 채 침대에서 내려와 방의 불을 켰다. 문밖으로 나가볼까, 생각했지만 잡은 문고리를 도저히 돌릴 수가 없었다.

이불을 밟으며 방 안을 돌아다니다보니 소리의 진원지가 파악되었다. 옆방이었다. 벽에 귀를 붙이자 명확해졌다. 엘씨오. 나는 얼른 이불을 벗어던지고 스웨터를 껴입고 방문을 열었다. 그의 방문 앞에 서서 노크를 했지만, 대답할 리 없었다. ‘들어갈게요’ 말한 뒤 곧바로 문을 열었다.

<엘씨오…….>

<하…하읏…으으, 읏……>

그는 침대 위에서 몸을 둥글게 말고 괴로운 듯 신음하고 있었다. 땀에 흠뻑 젖은 얼굴이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나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어주기 위해 손을 내밀자 그와 눈이 마주쳤다. 엘씨오는 깨어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악몽을 꾸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서 외롭고 슬픈 자위행위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거친 손동작과 작게 떨리는 몸을 바라보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의 눈은 나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것이 나를 인식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한자리에 꼼짝 않고 서서 초조하게 그의 몽유병의 정체를 바라보았다. 언젠가, 프라하의 호스텔에서 잠을 자다가 이러한 상태의 그에게 붙잡혀 진땀을 뺀 적은 있지만 이렇게 정면으로 그가 어떤 식으로 병을 앓고 있는지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문득, 그의 상태에 대해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 미안해졌다.

그의 다리 사이에서 잔뜩 발기한 페니스가 모양을 드러냈다. 엘씨오는 짐승처럼 소리를 질렀지만, 그것이 오히려 슬프게 들렸다.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그의 젖은 얼굴을 닦아주기 위해 소매 끝을 쥔 채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흔들리는 그의 어깨에 손끝이 스치고 말았다. 보통, 몽유병 증상을 보일 때 그러한 행동을 말리는 경우 환자는 거칠게 반응한다. 그리고 나는, 잡혔다.

<아! 엘씨오!>

엘씨오는 강한 힘으로 쏜살같이 내 손을 낚아채고 몸을 끌어당겼다. 전혀 경계하지 않고 있었던 나는 힘없이 그의 침대 위로 쓰러졌다. 아니, 그의 품 안으로 쓰러졌다. 또 다시였다. 그는 언젠가처럼 이번에도 나를 뒤에서 안은 채 자신의 긴 두 다리로 내 몸통을 꽉 조여 왔다. 그리고 그의 발기한 페니스를 내 엉덩이와 등허리에 대고 마구 문지르기 시작했다. 반항하면 할수록 그가 더욱 힘을 강하게 준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몸은 마음대로 따라주지 않았다. 나는 그의 다리와 팔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쳤다.

<엘씨오! 나예요! 일어나요, 엘씨오!>

뒤에서 거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몽유병 환자를 말리던 사람이 환자로부터 살해당한 사건이 있었다. 나는 엘씨오가 무섭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의 몽유병은 무서웠다. 몸을 움츠리지도 못하고 나는 그저 눈만 질끈 감았다. 그런데 순간 위쪽에서 퍽, 하고 과격한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몸이 풀려났다.

<그만둬, 멍청아. 아직도 그거 못 고쳤냐?>

<아…아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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