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집 근처에 도착해서야 내가 간이 부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티칸에서 만난 한국인 관광객들에게 로마의 밤거리에서 여행객들이 겪었던 괴담에 대해 들었던 것을 상기하자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세계 어느 도시든 그 지역을 잘 모르는 사람이 밤에 혼자 다니는 것은 충분히 위험한 일이다. 그리고 여행객들이 현지인보다 많은 로마에서는, 특히 현금을 소지한 채 기분이 헤이해진 상태로 돌아다니는 이 도시에서 여행객들은 걸어 다니는 밥으로 인식되었다.
내가 부유해 보이는 인상이 아닌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벨을 누르려다 문득 현관문이 열려있는 것을 발견했다. 쯧쯧, 조심성 없이. 나는 혀를 차며 안으로 들어가 문을 꼭꼭 닫았다. 조금 걸어갔다가 혹시나 싶어 다시 돌아가 잘 잠겼나 다시 한 번 확인까지 했다.
안드레아 가족의 집을 먼저 통과하는데, 조용했다. 복도를 지나가는데도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불은 모두 켜져 있었다. 명색이 손님인데 사람이 들어와도 나와 보지도 않다니. 나는 영감처럼 에헴, 소리를 내며 엘씨오의 집 현관문을 열었다. 역시 불은 켜져 있었다. 이상하다싶어 거실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11시 10분. 시간을 확인하고 나는 다시 한 번 식은땀을 흘렸다. 간이 커지다 못해 터져버린 건 아닐까.
이 시각이면 잠자고 있을 것이었다. 나는 발소리를 내지 않고 조심스럽게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 맞은편에 보이는 엘씨오의 방문 틈 사이로 희미하게 주홍 불빛이 흘러나왔지만, 환한 것 아닌 것으로 보아 벌써 잠들어 있는 게 맞는 것 같았다. 뒤꿈치를 들고 내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그의 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흐으… 읏…아, 아, 으읏!>
신음소리였다. 방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멈추어 섰다. 엘씨오? 전날은 친구들과 오랜만에 만나 회포를 푼다고 늦었으니 피곤했다 치더라도, 오늘 아침 늦잠을 자는 것을 보고 나왔고 내가 없는 동안 푹 쉬었을 텐데, 무슨 일인 걸까. 트라우마에 의한 몽유병에 시달리는 것은 신체적으로 지나치게 피로하거나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을 때라고 했다. 역시, 하루 종일 안드레아에게 시달린 것일까? 불쌍한 엘씨오.
나는 다시 발길을 돌려 그의 방문 앞으로 다가갔다. 어쩔까, 잠시 생각한 후 문고리를 붙잡았다. 도와줄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붙잡혀서 엉덩이를 대 줄 수는 더더욱 없겠지만,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 지는 봐야했다. 만약 너무 심하면…… 정 안되면, 안드레아나 아힘의 방식대로 아예 기절하도록 도와주는 수밖에. 주먹은 안 되겠지만, 발길질은 나도 자신 있으니까. 그리고 문을 열었다.
<엘씨오, 괜찮…>
<읏…하아- 응, 아…아앗!>
<후…후우…흐으……>
한 사람의 신음소리가 아니었다. 그리고 내 눈 앞에는 두 사람이 있었다. 마치 한 몸인 듯, 아니 한 몸으로 이어져 있었다. 희미한 주홍 불빛에도 한 순간에 나는 내가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 엘씨오의 침대 위에서, 침대의 주인 엘씨오가 누워있고, 그리고 그 위에 안드레아가 허리를 흔들고 있었다. 둘은, 모두 알몸이었다.
<미나!>
방문 앞에서 얼어붙은 나를 엘씨오가 발견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는 몽유 상태가 아니었다. 그리고 안드레아는 움직임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둘 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 가득 송글송글 땀이 맺혀 있었다. 신음처럼 숨소리가 거세게 튀어나왔지만, 그것이 나의 숨소리인지 아니면 그 둘의 숨소리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이게… 도대체 이게 무슨……. 아, 아니. 미안해요.>
당혹감을 감추며, 그러나 감추지 못하며 나는 미처 방문을 닫지도 못한 채 내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제야 하루의 피로가 물밀듯 밀려왔다. 다리가 퉁퉁 부어 피가 응고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어깨가 뻐근하고 눈알이 빠질 듯 시큰거려왔다. 눈앞에 있는 푹신한 침대를 보자 얼른 눕고 싶다는 욕구가 치밀었다. 몸을 대자로 뻗은 채 잠시만 누워있으면, 우선 그렇게 하면 모든 게 괜찮아질 것 같았다. 그러나 여기에 누워도 되나. 옆방에는…….
<들어갈게요.>
노크소리와 함께 들어오라는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엘씨오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상기된 얼굴의 그는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서로의 어깨 너머를 바라보았다.
<미안해요.>
그의 목소리는 잔뜩 갈라져 튀어 나왔다. 그 목소리에 아까 보았던 두 사람의 모습이 연상되어 얼굴이 화끈거렸다. 고개를 돌리자 화난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엘씨오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자신의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그런 일로 당신이 나한테 미안해 할 필요 없잖아요. 우린 이제 그런… 이젠 그저 좋은 친구가 되기로 했으니까. 나야 말로 미안해요, 노크도 없이 들어가서. 난 당신이 또 앓고 있는 것 같아서.>
<그래도 미안해요. 난 당신이 바티칸 가이드 투어를 갔다고 하기에… 오늘은 오랜만에 한국인들이 모인 숙소에서 머무는 줄 알았어요.>
그렇다면 내가 집을 비우는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단 말인가. 나는 불쾌함으로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내가 그의 집에서 머무는 것을 제안했을 때 그가 머뭇거린 것과 그동안 계속 안절부절 하지 못하는 느낌을 받았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니, 사과하지 말아요. 나는 지금… 지금 좀 나가고 싶은데요. 혹시 가까운 호텔에 데려다줄 수- 아니, 그냥 말해주면 내가 찾아갈게요.>
<뭐라구요? 미나, 내가 잘못했어요. 하지만 지금 나가게 할 순 없어요. 너무 늦었고, 위험해요. 이건 내가 설명할게요.>
옷장 옆에 세워둔 배낭을 끌어 침대 위에 내려놓으며 말하자 엘씨오는 배낭을 빼앗아 자신의 뒤에 세워두었다. 그 모습이 꼭 자신의 물건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그런 그의 모습과 좀 전의 모습은 도저히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한 순간이었지만, 마치 욕망 그 자체, 그 알맹이를 본 것 같았다. 나와도 그랬던가. 아니, 아니다. 조금 집요하긴 했지만, 내게는 그런 욕망의 밑바닥을 보여주지 않았다. 어떤 행동이나 신음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 분위기, 그런 분위기란 정말…….
<설명하지 않아도 돼요. 그럴 필요 없다니까요. ……. 좋아요, 그럼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까 여기서 잘게요. 그리고 내일 숙소를 옮길게요. 당신한테 화난 건 아니에요. 단지… 너무 놀라기도 했고, 조금 불편해서 그래요.>
<미안해요…….>
<사과하지 말라구요, 엘씨오. 당신이 자꾸 그러면 난 뭐가 되죠? 아힘 때문에 당신을 떼어낸 나는요. 이제 우린 서로 미안해하면 안돼요.>
그가 방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엘씨오는 뭔가 말하려는 듯 입을 달싹였지만 곧 굳게 입을 다물어버렸다. 내가 침대보를 정리하는 시늉을 해 보이자 엘씨오는 고개를 끄덕인 뒤 조용히 뒤돌아섰다. 그러나 그의 등을 바라보자 문득 의문점이 생겼다.
<잠깐만요. 예전부터, 그러니까 로마에 가까워오면서부터 당신이 자꾸 미안하다고 말했던 것, 이 일과 관련이 있나요? 단지 당신 트라우마를 잊기 위해 나와 함께 다닌 게 미안한 일의 전부가 아니었던 거죠?>
엘씨오는 나를 바라보며 두어 번 눈을 깜박이고는 우울한 표정으로 ‘네’하고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또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 거였군. 원래 그런 사이였다. 그러고 보니, 엘씨오는 안드레아가 첫사랑이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제야 안드레아가 계속 내게 적대적으로 대했던 것이 이해가 되었다. 그래도 그 정도에서 그친 걸로 보아, 안드레아가 그리 성격 나쁜 인간은 아닌가 모양이었다. 그런 행동에서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고는 어렴풋하게 느끼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확인사살까지 해주다니.
그런데, 그렇다면 내가 아힘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을 때, 더 이상 우리 관계를 이어갈 수 없다고 말했을 때, 그는 왜 그렇게 화를 냈던 것일까. 오히려 안심하고 먼저 터트려줘서 고맙다고 말해야하지 않았을까. 하긴, 그래서 계속 미안하다고 말해왔던 것일 테지만. 이거 하마터면 정말 내연남이 될 뻔 했다.
<알았어요. 잘 알았어요. 이제 나가줘요. 피곤해요.>
<……. 난 밑에 내려가서 잘 테니까, 불편해하지 말고 푹 쉬어요. 잘 자요.>
그리고 엘씨오는 구부정한 등으로 방을 나갔다. 달칵,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와 동시에 나는 침대 위로 쓰러지다시피 누웠다. 머리가 어찔했다. 벽에 걸린 시계는 11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20분. 겨우 20분 만에 엄청난 일을 겪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아니지. 내가 엄청난 일을 겪은 것은 없었다. 그저, 엄청난 일을 보았고 엄청난 사실을 알았을 뿐이었다. 20년만큼 피곤한 일이었다. 더 이상 생각하고 고민하기 싫어 나는 씻지도 않고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잘 잤어요? …잘 못 잔 것 같네요….>
배낭을 들고 나오자 오래 전부터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방문 앞에 서 있던 엘씨오는 배낭을 대신 들며 내 안색을 살폈다.
잘 자지 못했다. 몸은 천근만근 무거운데 의식은 희미하게 꿈과 수면의 바깥을 오르락내리락 거렸다. 발이 푹푹 빠지는 꿈을 몇 번이나 꿨다가 또 깨어나는 것을 반복했다. 나중에는 꿈속에서도 계속 이제 그만 잠을 자야하는데, 하며 걱정을 했다. 그리고 시계의 알람을 끄기 위해 몸을 일으켰을 때에는 나도 모르게 욕설이 튀어나오기도 했다.
<괜찮아요. 그나저나, 안 들어줘도 돼요. 그냥 가까운 호텔 위치를 알려주기만 하면 내가 찾아갈게요.>
<미나. 이러지 말아요.>
잠이 깨지 않아 얼굴을 찌푸린 채 그가 든 배낭을 다시 쥐려하자, 엘씨오는 한숨을 쉬며 조용히 말했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했고, 속상한 것 같기도 했다.
그가 어떤 목적으로 나를 만났건 간에, 그가 스스로 진심이라고 말하지 않았어도 나는 그가 나를 대할 때만큼은 진심이었다는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차마 말하지 못한 것을 안고 있었던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굳이 뒤에 나타난 아힘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나야 말로 D를 좀 더 쉽게 잊기 위한 목적으로 그를 받아들인 것이 아니었던가.
그러니까… 그도 그렇게 나쁜 의도는 없었을 것이다. 나도 그랬듯이 그 역시 어쩌다보니, 상황이 그렇게 되어 거기에 따랐을 뿐이었을 것이다. 어쩌다보니, 상황이 그렇게 되어서. 이것은 살면서 얼마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가. 아니, 인생의 대부분이 그런 식으로 흘러가는 것 아닌가.
이제 우리는 서로에게 미안해하면 안 된다고 말했지만, 우리는 처음부터 서로에게 미안할 수밖에 없는 상태였고 그래서 이제 서로 이해하고 용서할 수밖에 없는 관계인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을 알고는 있지만, 받아들일 수는 없는 건 단지 내가 옹졸하고 이기적인 인간이기 때문인 걸까. 그러나 어쨌든 이해는 어쩔 수 없을지언정 용서는, 나를 위해서라도 해야만 했다. 이해가 없는 용서. 이것만큼 이기적인 일이 또 있을까.
<알았어요. 그럼 데려다 줘요.>
나는 다시 그에게 배낭을 맡겼다. 그리고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택시에 타서 그가 안내하는 호텔로 향했다.
호텔은 떼르미니역 근처에 위치해 있었다. 깨끗하고 아담해서 혼자 묵기에 불편함이 없을 듯 보였다. 싱글룸의 가격도 싼 편이었다. 주변으로 밝은 분위기의 상가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경찰서가 있어서 저녁에 혼자 오가는 데에 위험도 덜할 것 같았다. 교통편과 함께 여러 가지를 고려해준 마음씀씀이가 느껴졌다.
<고마워요. 좋은 곳이네요.>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택시 안에서도 한마디도 하지 않다가, 호텔에 방을 잡고 배낭을 내려놓으면서야 말을 걸었다. 엘씨오는 어쩐지 힘없이 웃었다. 그리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는데, 그 역시 계속 내 눈치를 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
<저… 그런데 미나, 앞으로는 어떻게 할 거죠?>
그는 기둥처럼 서서 주저하듯 말을 꺼냈다. 앞으로 우리 관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로마에 있을 동안 내 일정에 대해 말하는 것일까. 정확하게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지만 그것을 되묻기가 힘들었다. 어쩌면 그 또한 그것을 바라고 그렇게 둥글게 애둘러 말했는지도 모른다. 걱정도 되고 막막하기도 하겠지. 하지만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가 한국에 온다면 같이 밥을 먹을 수 있는 편한 친구가 되고 싶다고 말했었지만, 정말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나는 그냥 로마에서의 일정을 대답하는 것을 선택했다.
<글쎄요. 로마에서만 너무 오래 머무는 것 같긴 하지만 찾아야 할 게 있어서요. 당신한테 말도 없이 갑자기 로마를 떠나지는 않을 테니까 안심해요. 우선 이틀 정도는 로마 시내를 중심으로 돌아다닐 것 같아요. 그는 벌써 유명한 관광지는 모두 둘러봤을 테니까요. >
<그라니… 혹시 아힘 슈미츠를 말하는 건가요? 그와 로마에서 만나기로 약속했어요?>
<아니요. 여기에서 만나자고 서로 약속은 하지 않았지만… 여기에서 내가 그를 찾겠다는 경고는 했어요.>
웃으며 가볍게 대답하자 엘씨오는 황당하다는 듯 입을 헤 벌린 채 나를 내려다보다가 가볍게 인상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빤히 들여다보였다. 무모한 짓이라고 생각하겠지.
<미나. 그건 너무, 너무 무모하잖아요.>
진지한 그의 걱정에 내가 웃어버리자 엘씨오는 근엄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어쩔 수 없었어요. 그는 날 받아주지 않았어요. 그냥 생각해보겠다고만 했죠. 만나서 어떻게 될지도 몰라요. 그래도 우선은 만나는 게 먼저죠.>
<…당신을 받아주지 않았다고요? 그럼, 그는 당신을 좋아하지 않아요? 당신 혼자……. 세상에, 미나! 둘이 그런 사이도 아니었으면서 다짜고짜 나한테 그런 폭탄선언을 한 거였어요? 아니, 도대체 왜 조금더 두고보지 않았죠? 왜 먼저 앞질러 간 거에요? 나를 조금 더 옆에 둘 수도 있었잖아요. 혹시… 혹시 그와 잘 되지 않더라도 내가 있을 수도 있었잖아요! 아니면 내가 그렇게 싫었어요?>
엘씨오는 약간 흥분한 듯 보였다. 아니, 화난 듯 보이기도 했고 조금 슬픈 것 같기도 했다. 어쨌든 나를 책망하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당신이 나한테 준 건 잊지 못할 거예요. 당신이 싫어서 그런 말을 먼저 꺼낸 건 아니었어요. 만약 더 이상 시간을 끌었다간 내가 스스로 용서하지 못했을 거예요.>
<왜 그렇게 자신을 소중하게 대하지 않죠? 왜 그렇게 미련해요? 조금만, 조금만 날 더 이용했어도 됐잖아요.>
<엘씨오. 지금 난 이때까지 살아왔던 날들 중에서 가장 내 멋대로 행동하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당신이 그렇게 말해도…… 당신이 말한 것처럼 내가 좀 더 시간을 끌었으면 오히려 당신한테는 안 좋은 방향으로 가지 않았을까요? 마음 써주는 건 고맙지만, 애써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당신한테는 안드레아가 있었잖아요. 마지막 말은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엘씨오도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는 금방 풀이 죽은 얼굴로 벽에 등을 기대었다. 좀 앉으라고 권하고 싶었지만, 그를 정면으로 대하는 것은 조금 어색했다. 하룻밤 사이, 그가 너무 멀어져버렸다. 내가 아힘의 이야기를 꺼냈을 때, 그가 갑자기 쓰러지듯 잠들었을 때, 그는 꿈속에서 이렇게 외로웠을까.
<이제 와서, 그런 모습까지 보인 주제에 이런 말을 한다면 지나친 참견이겠지만… 미나, 아힘 슈미츠는 별로 좋은 남자가 아니에요. 오해하지 말아요. 그가 좋은 사람인 것은 느낄 수 있어요. 하지만 당신한테는 그리 좋은 남자가 되지 못할 거라는 얘기에요.>
엘씨오는 어려운 문제를 앞에 둔 학생처럼 곤란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더듬더듬 말을 했다. 신중하게 단어를 고르고 행여 내가 오해하지 않을까 간간히 눈치를 보았다. 오해하지 말라고 말하지 않아도,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누가 그의 진심을 믿지 않을 수 있을까.
그는 내가 반한 남자에 대해 나쁜 남자라고 말하고 있는데, 나는 오히려 마음이 누그러들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어쩌면 저 말도 ‘그런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이제야 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의외로 다른 사람의 기분에 대해 조심성이 많은 성격이었다. 나는 웃으며 그제야 그에게 옆에 와 앉으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내 옆으로 와 앉았다.
<엘씨오. 베네치아의 곤돌라 위에서 당신이 나한테 했던 말 기억해요? 손에 잡히지 않는 걸 애써 잡으려고 하지 말라고, 그건 아주 위험하고 힘든 일이라고 했죠. 난 이제껏 그렇게 살아왔어요. 그게 내가 인생과 사랑을 대하는 태도였어요. 하지만 그런 식으로는 안돼요. 몸을 웅크리고만 있으면 안전하긴 하겠지만,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죠. 이래봬도 난 상처에 꽤 단련이 된 사람이에요. 괜찮아요. 걱정해주는 것 알아요, 고마워요.>
엘씨오는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내 말을 듣고만 있었다. 그리고 눈을 깜박이며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입가에 웃음기를 담으며 고개를 돌렸다.
<당신 예쁘다고만 생각했었는데, 멋있기까지 하네요. 또 한 번 반하겠어요. 이제 그러면 안 되겠지만.>
<난 원래 예쁘기보단 멋있는 쪽이에요. 그래도 또 괜히 반하지 말아요.>
나는 짐짓 심각한 척 말했다. 엘씨오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 웃음 어딘가 씁쓸함을 담고 있어 나는 모른 척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그리고 야경이 멋있겠다는 말을 하며 화제를 바꾸었다. 그리고는 더 이상 서로 말이 없었다. 무릎을 쳐다보고 방 주위를 둘러보고 또 창밖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엘씨오는 가봐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배웅하기 위해 나도 따라 일어났지만 그는 앉아 있으라며 팔을 저었다. 문을 여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그의 이름을 불렀다. 문을 조금 연 채로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한다면 지나친 참견이겠지만 말이에요. 안드레아는… 그리 좋은 사람이 아닌 것 같아요. 며칠밖에 보지 않고 사람을 판단한다는 건 위험한 일이지만, 느낌이 그래요. 아, 오해하지 말아요. 당신이 아힘을 그런 식으로 말했다고 내가 안드레아를 그렇게 평가하는 건 아니에요. 단지, 당신은 너무 좋은 사람이고…….>
이런 느낌이었을까. 나는 우물쭈물하며 말을 이었다. 엘씨오는 그 느낌 다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주었다.
<알아요. 안드레아는 그리 좋은 사람이 아니죠. 믿지 않겠지만, 그와 난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사이가 아니에요. 다만… 어쩔 수 없는 관계죠. 그냥 본능 같은 거예요. 반면 당신과 함께 있는 동안, 난 정말 당신이 내 구원이 되어 주리라 확신했었어요. 당신은 내 믿음이자 희망이었어요.>
본능. 나는 그의 방에서 본능의 알맹이를 보았다. 한 몸이 된 엘씨오와 안드레아를 통해서 말이다. 그런데 그게, 그 본능이 내가 생각하는 그런 사이가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그리고 본능이 끌리는 사람이 있는데도 굳이 내게서 믿음을 희망을 얻고자 했던 건 무엇 때문이었을까.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그에게 무언가 다른 대답을 듣기 위해 기다렸지만, 그는 그렇게 애매모호한 말을 남긴 채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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