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헬로우, 곤니치와, 안녕-12화 (12/29)

[12]

거울 앞에 서서 턱을 치켜들었다. 주제 파악을 못하는 오만한 드라큘라 백작이 보였다. 나는 입을 벌린 채 윗입술을 치켜 올려 나의 몽땅한 송곳니를 드러냈다. 불쌍하게도, 전혀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몽땅한 송곳니를 가지고 있는 강민하 드라큘라 백작은 누군가의 목을 물려고 시도했다가 외려 당했다. 목에는 아주 선명하게 피멍이 들어있었다. 역시, 주제를 모르고 까불면 안 된다.

분명 엘씨오는 혀와 입술의 흡입력을 이용했을 뿐이었는데 어째서 이렇게까지 끔찍한 색깔이 나올 수가 있을까. 팥죽색 립스틱을 아무렇게나 문질러놓은 것 같았다. 나는 혹시나 싶어 그 위를 문질러보았다. 조금 따가웠다. 아무래도, 이빨도 사용한 모양이었다. 그 의중은 모르겠지만, 설마 이걸 키스마크라고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로맨틱하지 못한 키스마크를 본 적은 없다.

엘씨오는 그렇게 침대 한쪽에 웅크린 채 죽은 듯이 잠만 잤다. 한참동안이나 그런 자세로 있기에 나는 그가 쇼크로 잘못된 줄만 알았다. 그래서 그의 코 아래에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대어 보기도 했다. 다행히 숨은 쉬고 있었다. 잠든 사람들 특유의 조금은 거친 숨소리였다. 이런 것을 의학적 용어로 뭐라고 부르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쇼크 상태나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일시적으로 유아퇴행을 일으키는 것 같았다.

나는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편안하게 잠을 잔다는 것도 웃기는 일이었다. 혹시라도 엘씨오가 잘못 될까봐 안절부절 하지 못하다가, 그가 이탈리아어로 잠꼬대를 했을 때에야 그나마 소파에라도 앉을 수 있었다. 시침이 3을 가리키는 것을 보고  샤워실로 들어가 미지근한 물로 몸을 씻었다. 그리고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물줄기 아래에서 조금, 울었다.

엘씨오를 배신했다는 생각과 또다시 희망 없는 사랑에 빠져버린 스스로에 대한 원망이 뒤섞였다. 그리고 한 고비를 넘겼다는 안도감과 그러나 여전히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안타까움이 또한 뒤섞였다. ‘이상하다, 원래 이렇게 눈물이 많은 성격은 아닌데-’ 생각하다보니 자연스레 눈물이 멈췄다.

정말 이상하다. D에게 마음을 전하지 못해 안절부절 했던 시절에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었는데. 왜 나이 먹어서 감성은 더 말랑말랑해지는 것일까. 별로 반갑지 않은 일이다. 믿었던 사촌 형에 의해 가족들에게 아웃팅 당한 이후로 내 삶의 모토는 ‘무덤덤한 인간이 되자’였다.

샤워를 끝낸 후 여전히 같은 자세로 잠들어 있는 엘씨오를 확인한 후 소파에 다리를 올려 세워 몸을 웅크린 채 나도 잠이 들었다. 그저 잠시 눈을 감고 있었을 뿐이었는데, 미지근한 물로 샤워한 것이 근육의 긴장을 풀어주었는지, 잠깐이었지만 아주 달디 단 수면이었다. 잠을 깬 것은 몸을 덮는 어떤 것의 촉감 때문이었다. 얼굴을 찌푸리며 눈을 뜨자 앞에는 엘씨오가 등을 보인 채 샤워실로 걸어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몸을 덮은 것은 그의 체온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이불이었다.

나는 이불을 다시 침대에 가져다 놓고 시간을 확인했다. 아침 일곱 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다시 잠은 오지 않았다. 잠시 침대 위에서 멍하니 앉아있었는데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은 엘씨오가 젖은 머리로 나왔다.

<한국에서는 목욕이란 걸 해요. 피부의 각질을 뜨거운 물로 불린 뒤 표면이 까칠한 수건으로 몸을 문지르는 방법이죠. 매일 하는 건 아니고 보통 주말마다 해요. 주중에는 당신처럼 간단하게 샤워를 하구요. 그런데 웃긴 건, 그 까칠한 수건을 이태리 타월이라고 불러요. 정작 이태리에는 그런 수건이 없죠. 때를 밀지도 않구요. 웃기죠?>

<…… 울었어요?>

침대 쪽으로 다가온 엘씨오는 내 눈가를 어루만지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거울을 보지는 않았지만, 퉁퉁 부어있는 눈두덩이가 확연하게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안 봐도 뻔했다. 야비한 붕어처럼 보일 것이다. 이렇게 절절하고 진지한 상황에서 내 얼굴만은 코미디인 것 같아 조금 씁쓸했다.

<그걸 만들고 그렇게 이름을 붙인 사람의 말에 의하면, 그저 좀 세련되게 보이려고 ‘이태리’를 붙였대요. 당신 나라는 그만큼 우리나라에서 품위 있고 패셔너블하고 세련된 이미지로 통해요.>

<그렇게 품위 있고 패셔너블하고 세련된 이미지를 가진 나라의 국민이면서 그렇게 품위 없고 몰상식적으로 행동했다고 비난하는 건가요?>

<설마요. 행여 당신이 그런 행동을 했다 하더라도, 난 당신을 비난할 권리 없잖아요.>

가늘게 뜬 눈으로 나는 엘씨오를 향해 웃어보였다. 얼굴이 이래서, 비웃는 것으로 보이면 어쩌나 걱정하면서. 엘씨오는 그런 내 얼굴을 보기 괴로운 듯 머리를 감싸며 내 옆에 풀썩 앉았다. 그렇게 보기 괴로운가. 나는 얼굴을 만지며 거울을 보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내 손목을 붙잡은 그에 의해 다시 앉아야 했다.

<그냥 안 믿겨서요. 그런 나라에 지금 내가 와 있다는 사실이. 외국에서 이렇게 자유롭게, 맛있는 걸 먹고 좋은 걸 보고 듣는 건 돈 많은 재벌의 자제들만 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었거든요. 촌스럽죠? 실은 눈 딱 감고 휴가를 내서라도 충분히 올 수 있었는데. 그렇게 눈 한번 딱 감는 게, 그게 정말 어렵더라구요. 내가 이제껏 행복하지 않다고 느꼈던 건, 바로 그 이유 때문이었어요. 그냥 눈 한번 딱 감지 못한 거.>

<미나. 당신이 날 비난할 권리… 충분히 있어요.>

<엘씨오, 그건 그만 얘기해요. 모두 다 내 책임이에요. 당신은 내가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사랑을 줬고, 트라우마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았어요.>

<내가 당신을 이용했다면요?>

<무슨… 난 당신한테 돈을 빼앗긴 적도 없고 억지로 겁탈당한 적도 없는데요?>

<내 트라우마는… 당신에게 얘기했던 그게 전부가 아니에요.>

나는 입을 꼭 다문 채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엘씨오는 추운 곳에 와 있는 사람처럼 어깨를 움츠리며 한숨을 여러 번 내쉰 뒤, 고해성사를 하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안드레아 비앙키.  엘씨오의 첫사랑이었던 남자의 이름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가 바로 엘씨오의 이상한 잠버릇 때문에 흉흉한 밤을 보냈던 룸메이트였다. 그러니까 학교에 그 사건을 고발해서 기숙사에서 퇴사시킨 것도 그였다. 모두의 첫사랑이 그러하듯, 엘씨오의 첫사랑도 그렇게 무참히 깨졌다.

정신감정 소견서로 인해 퇴학은 면했지만, 엘씨오는 그로 인해 또 다른 트라우마가 생기게 되었다. 좋아하는 상대 앞에서는 온 몸이 얼어버리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스물넷의 건장한, 거기다 매력적이기까지 한 청년이 연애 한번 못해보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잠깐. 그럼 나는? 그가 내게 퍼부었던 사랑의 키스가 모두 거짓이었던가?

<엘씨오. 좋아하는 상대 앞에서 굳어버린다니. 그럼 나한테 했던 건 뭐였죠? …… 그것 때문에, 그래서 나한테 미안하다는 거였어요?>

나는 주제도 모르고 엘씨오에게 서운한 마음을 담아 말했다. 이제 와서, 거기다 이런 상황까지 몰고 온 내가 그의 진심의 여부에 대해 서운함을 느낀다니, 정말 뻔뻔하다고 생각했지만 어쩌겠는가. 사람은 원래 이기적인 동물이다.

<그건 아니에요. 미나, 생각 안 나요? 처음 당신을 봤을 때 난 열두 시간 내내 당신을 바라보기만 하고 꼼짝도 하지 못했잖아요. 내가 당신한테 반한 건 사실이었어요. 진심이었던 것도요. 처음 당신에게 말을 걸었을 땐, 솔직히 술기운을 좀 빌려서 였죠. 다행히 그 후부터는 별로 떨지 않았죠. 그래서, 안심했어요.>

엘씨오는 나로 인해,  나와의 관계로 인해 그의 두 번째 트라우마에서 벗어난 줄 알았다고 한다. 하지만 로마에 점점 가까워질수록 그것이 단지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처음 술기운을 빌려 내게 다가왔던 것처럼, 나와의 관계가 주는 착각을 빌려 로마에 점점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술이 깨는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깨어지고 있다. 그러니까, 내가 아힘을 생각하는 것과는 별도로 엘씨오는 그 스스로 '안 된다'라는 것을 먼저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엘씨오가 가장 염려했던 일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계속 당신한테 기댔어요. 안 된다라는 것, 그 느낌이 잘못되었다고 믿고 싶었어요. 당신을 계속 붙잡아 두고 있으면 뭔가 해결책이 생기리라 생각했어요.>

나는 나도 모르게 그에게서 시선을 돌려버렸다. 화가 나는 것은 아니었다. 섭섭해 할 입장도 아니었다. 그런데, 어딘가 모르게 마음이 답답했다. 어디서부터 틀어져버린 것일까. 그도, 나도 처음에는 분명히 ‘이번에는 반드시’하고 마음먹었었다. 왜, 마음대로 따라주지 않을까. 사랑에 목적이 있으면 뭐 어떠한가. 사랑은 모든 걸 용서해주지 않던가. 그런데 왜 그와 나는 필요로 하는 상대에게서 사랑은커녕 그 필요조건조차 충족시키지 못한 것일까.

나는 그에게 언제부터 그런 것을 느끼게 되었느냐고 물으려다가 말았다. 내가 언제부터 아힘을 의식하고 있었는지 스스로 알 수 없듯, 그 또한 언제부터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는 없을 것이다. 그저, 시간이 지나면 뒤늦게 서야 은밀하게 깨닫곤 하는 것이다. 다른 모든 것들이 그러하듯 말이다.

<그는… 안드레아는 내 사촌이에요. 그리고 우리는 대대로 내려오는 가업을 잇기 위해 친척 모두 한 건물에 살아요. 로마에 가면, 난 매일 안드레아를 봐야 해요. 아직 이런 상태로 말이죠. 그의 얼굴을 볼 때마다 화가 치밀어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모든 게 그의 탓인 것만 같아요. 결국 그와 사사건건 부딪칠 때마다 두 가지 트라우마가 동시에 나를 찾아와요. 끔찍해. 가족들 모두 내가 안드레아 때문에 또 하나의 트라우마에 빠졌다는 걸 알지 못해요. 알리고 싶지도 않구요. 다 끝난 줄 알았는데…….>

엘씨오는 두 손으로 얼굴을 신경질적으로 문질렀다. 벌게진 그의 얼굴은 화가 났다기 보단, 곧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보였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사정이 안타깝기도 했지만, 또 다른 의미로 나는 숨이 막혔다. ‘다 끝난 줄 알았는데’하고 말하는 엘씨오의 얼굴이 순간 내 얼굴로 겹쳐 보이는 것이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미나, 때린 것 미안해요…. 이번엔 또 당신 탓으로 돌리고 싶었어요. 왜 사람은 자신이 상처 입지 않으려고 다른 사람들을 상처 입히는지 모르겠어요. ……. 당신 마음이 돌아선 건, 내가 먼저 흔들렸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어요.>

잔뜩 움츠러든 목을 쓸어내리는 부드러운 손길에 눈을 떴다. 엘씨오는 내 목의 흉터와도 같은 키스마크를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가 생각하고 있는 모든 것을 부정하고 싶었다.

<때린 건 아니죠. 머리카락이 좀 빠졌을 뿐이에요. 그리고 이건… 언젠가, 가만히 놔둬도 사라질 거니까요.>

따끔거리는 흉터 위를 매만지며 나는 장난스레 대답했다. 그리고 농담과 진담을 섞어 언젠가 지워질 내 흉터에 대해 말했다. 그것은 그의 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해서였다기 보다는 스스로의 각오에 가까웠다. 그러나 엘씨오는 죄책감을 덜기는커녕 아쉬운 표정으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그런가요? 언젠가 지워질 거군요.>

<네, 보통은 그렇죠.>

나는 단호하고 조금은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 이미 가진 기억만으로도 충분히 괴로워하는 심약한 그에게 더 이상 독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나를 잘라내야 했다. 그리고…… 그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제 우린 어떻게 되는 걸까요?>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산다. 그리고 행여나 그 행복의 곁에 불행의 그림자가 끼칠까, 언제나 초조해 한다. 금세 또 둥글게 몸을 말아 깊은 잠에 빠진 엘씨오의 머리카락을 쓸어주며, 나는 나의 비겁함과 이기적인 행복 추구에 대해 생각하며 쓴 울음을 삼켰다.

그렇게, 엘씨오는 다음날 저녁까지 일어나지 않았고, 나는 조급한 마음으로 그를 깨울까 생각도 했지만 그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의 의미로 죽은 듯 잠자는 그의 곁을 지켰다. 이제는 더 이상 연인의 이름으로 남을 수 없게 되었는데, 이상하게도 계속 그렇게 그를 지켜주고 싶었다.

엘씨오 안에는 또 다른 내가 있었다. 어쩌면 스물넷의 강민하가 바로 지금 엘씨오의 모습이었을 지도 모른다. 나는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 모든 것에 실패하고 혼란스럽고 슬프고 우울하고 외로운 그 때의 나를 위로하듯, 엘씨오의 거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그가 잠에서 깨어나려 했을 때 베이비키스로 완전한 수면 위로 끌어당겨 주었다. 우리에게는 오래 슬퍼할 시간이 없었다. 영악한 슬픔은 연약한 인간에게 더 깊이 잠식해 들어가곤 한다는 것을 그와 나, 둘 모두 이제까지의 경험으로 충분히 알고 있었다.

이제 우린 어떻게 되는 것인가에 대한 대답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짐작은커녕 상상도 불가능했다. 이제 우리 둘 사이에는 의도나 목적은 철저하게 배제되었다. 어떻게 하자,고 제의할 만한 것도 없었다. 우리가 헤어졌나? 아니, 도대체 우리 사이는 무엇이었던 걸까. 서로의 상처를 덮기 위해 서로를 필요로 했지만 그것이 충족되지 않은 우리는 그러나 또 그렇게 삭막한 사이만은 아니었다. 속여 왔다는 생각에, 배신했다는 생각에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들끼리는 서로를 어떻게 부를까? 친구, 동지, 연인, 파트너?

호텔을 나오면서 우리는 허둥거리며 갈피를 잡지 못했다. 이제 서로 길을 달리 할 수도 없었다. 어쨌든 로마까지는 그와 나의 루트는 같았고, 계획을 깨뜨릴 만큼 서로 으르렁거리며 원수졌다는 느낌도 아니었다. 굳이 설명하자면, 서로 미안해 어쩔 줄 몰라 하며 눈이 마주치면 오늘 처음 보는 사람들처럼 어색하게 웃었다. 그 어색한 웃음이 조금 슬퍼서, 우리는 각자 바닥을 보며 씁쓸하게 혼자 웃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사이. 그건 확실한 끝도 맺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어쩐지, 서로 주먹질을 하고 헤어지는 것이 덜 슬프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나였다. 그가 어떤 의도로 나를 만났건, 그 관계에 결정적으로 타격을 준 것은 내 쪽이라는 생각 때문에 나는 최대한 그의 편의에 맞춰주고 싶었다.

<저기, 엘씨오. 어떻게 하는 게 좋겠어요? 로마에서는……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할게요.>

어렵게 말을 꺼냈는데, 엘씨오는 내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는 로마행 기차표를 손에 든 순간부터 진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멍하니 손바닥 위의 기차표를 바라보고 있는 그의 팔을 톡톡 두들기자, 내 질문에는 답하지도 않고 온갖 화젯거리를-이탈리아의 정치 문제에서 헐리웃 배우들의 스캔들까지- 쉼 없이 늘어놓았다. 불안해하고 있었다. 자꾸만 바지에 손바닥을 문지르는 것을 보며, 축축히 젖어있을 그의 손을 꼭 잡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미나. 내가 멍청한 짓을 저지를까봐 걱정돼요……. 당신이, 당신이 조금만 더 곁에 있어주면 안 될까요? 안…되겠죠?>

그리고 문득 그가 먼저 내 손을 부여잡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과거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인간은 얼마나 연약한가. 바로, 나부터 말이다. 차마 그를 외면할 수 없었다. 엘씨오는 과거의 나였다. 나는 말없이 그의 손을 풀고 내 티켓을 들고 매표구로 향했다.

<1등석 표는 자리만 있다면 쉽게 2등석 표로 바꿀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나는 티켓을 교환한 후 그것을 엘씨오 앞에 내밀었다. 그는 안심한 듯 깊이 한숨을 내쉰 뒤 나를 껴안으려다, 그저 어깨를 두들기고 말았다. 그리고 우리는 조금 멍청하게, 슬프게, 웃었다.

로마의 중앙역, 떼르미니에 도착했을 때에는 엘씨오는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줄지어 기차에서 내려가고 있는 와중에도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의자에 딱 달라붙어 있었다. 괜찮냐고 물어보면 한사코 괜찮다고 잘도 대답했다. 그리고 또 주저리주저리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았다.

<나 때문에 밀라노는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이틀을 꼬박 호텔 안에서만 머물러서 어쩌죠? 미나, 혹시 다음에 또 유럽 여행을 계획한다면 꼭 이탈리아에 와요. 그땐 내가 지방도시 하나하나 모두 가이드 해줄게요. 물론 나도 아직 이탈리아 전역을 모두 돌아다니진 못했지만 그 기회에 좀 더 공부하고->

<엘씨오, 로마에선 당신 집에서 머물러도 될까요? 당신이 괜찮다면, 그리고 당신 가족들이 허락한다면요.>

한숨을 훅 내쉬자 그는 겁먹은 듯 말을 뚝 자른 채 내 눈치를 살폈다. 나는 무덤덤하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니라면, 그 아무 것도 아닌 사이로 조금 더 두고 보고 싶었다. 그게 시간과 사람과 관계에 대한 예의인 것 같았다. 엘씨오는 내 말이 끝나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커다란 눈을 천천히 끔벅였다.

<미나… 정말 그래도 괜찮겠어요?>

<난 지금 당신한테 괜찮겠냐고 물어보는 거예요. 단 며칠만이에요. 이대로는… 나도 애 혼자 내버린 모진 엄마가 된 심정 같아서 그래요. 그리고 아무래도 이런 식은 아니에요. 한국에선 사람사이의 관계를 무 자르듯 하지 않는다구요. … 불편해요?>

<아니요! 당신이 며칠만이라도 같이 있어준다면 정말 힘이 될 거예요. 나도 이번엔 정말 노력해서 꼭 벗어나도록 할게요.>

<엘씨오- 그렇게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나도 의학적인 건 잘 모르지만 언젠가 트라우마에 관한 서적을 읽은 적 있어요. 그건 신체에 남은 상처처럼 쉽게 치유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시간이 아주 오래, 어쩌면 20년…… 아니, 2년이나 걸릴 수도 있어요. 우선 마음을 편안하게 가져요.>

그리고 우리는 드디어 지저분하고 위험한 소매치기로 유명한 로마에 첫발을 내딛었다. 나는 아힘을 곧 만나게 된다는 기대를 애써 감춰야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엘씨오의 가족과 친척의 허락은 필요하지 않았다. 모두 남부로 휴가를 다녀온다는 메시지가 현관 열쇠와 함께 우편보관함 안에 들어있었다. 나는 그 대범함에 놀랐고, 엘씨오는 당연한 듯이 쪽지를 읽고 찢어 버렸다. 그리고 조금은 안심한 듯한 표정으로 ‘겨울에 무슨 휴가야’하고 귀엽게 투덜거렸다. 나는 그렇다면 굳이 내가 함께 있을 필요 있을까, 생각했지만 엘씨오는 그런 내 생각을 읽은 듯 ‘무 자르듯 헤어지면 안된다’며 못을 박았다.

엘씨오의 집은 두 채의 집이 정원을 가르는 복도형 통로로 이어진, 말 그대로 ‘건물’이었다. 두 가족들이 집으로 사용하는 그 두 채의 건물 외에 정원 바깥쪽에 외따로 떨어진 허름한 건물이 또 하나 눈에 띄었다. 주위에는 꽤 커다란 돌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믿기진 않지만, 우리 조상들은 원래 전쟁에 쓰이는 칼과 방패를 만들었다고 해요. 그 후에는 석상을 만들어 왕실과 귀족들을 상대로 거래했다고 하구요. 그리고 언제부턴가는 그냥 작은 석공예품이나 만들었다가 할아버지 때부터는 보석공예로 줄어들었죠. 저기 있는 돌을은 그저 과거를 회상하기 위한 거예요. 장식용이죠.>

내가 복도에 서서 그것들을 바라보자 엘씨오는 하찮은 것을 대하듯 말했지만, 그 표정만은 자부심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대단하네요’ 하고 호응해 주며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의 손이 섬세한 느낌을 주었던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그가 화려한 보석공예를 다루는 것을 상상하며 나는 복도를 걸었다. 복도에 이어진 한 채의 건물 입구에 다다랐을 때, 뒤에서 누군가 엘씨오의 이름을 불렀다. 분명히 가족 모두 휴가를 갔다고 했는데. 나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E' da tanto tempo che non ci vediamo.”

안드레아 비앙키. 엘씨오에게 그의 생김새에 대해 듣지는 않았지만, 나는 단번에 그를 알아보았다. 무엇보다, 엘씨오는 그가 이탈리아어로 무슨 말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꼼짝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여전히 등을 돌린 채 서 있는 엘씨오를 못마땅한 듯 쳐다본 안드레아는 다리를 곧게 뻗으며 복도를 걸어왔다. 나는 그와 엘씨오를 번갈아보았다. 안드레아는 내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엘씨오는 입술을 물었다.

드디어 그가 엘씨오의 어깨를 두드렸을 때, 엘씨오는 어색하게 웃으며 몸을 돌려 ‘Ciao’하고 인사했다. 그리고 곧 무시무시한 이탈리아어가 쏟아졌다. 그 둘은 끝말잇기라도 하듯 대화를 나누었다. 익숙하지 않은 타국의 언어를 처음 접했을 때처럼 나는 그 둘이 심한 욕을 하며 싸우고 있는 것처럼 느꼈다. 내가 뒤로 한걸음 빠졌을 때, 안드레아가 처음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엘씨오에게 무슨 말인가를 했다. 그러자 엘씨오가 내 어깨를 끌어안으며 대답했다.

이거 분위기가… 아무래도 내 소개를 한 것 같은데, 그 소개가 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 같았다. 나는 애인 행세를 하려던 게 아니었다. 그저 엘씨오가 안정을 찾을 때까지만 이라도 곁에 있으려던 것이었다. 설혹 내가 떠나는 날까지 그가 안정을 찾지 못한다 할지라도, 더 이상 내가 어찌할 방법은 없겠지만, 조금이라도 죄책감을 덜고 싶었다. 그러니까, 하루라도 더 그의 연인으로 남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는데-.

아니, 그건 그렇고, 둘 사이가 좀 미묘해 보였다. 엘씨오는 첫사랑이었던 상대에게 의도치 않게 트라우마를 들키고 기숙사에서 쫓겨난 기억 때문에 나름 애증이 남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런 그를 대하는 안드레아의 태도는 마치 집 나갔다 돌아온 남편을 닦달하는 악처를 연상시켰다. 특히 삐딱하게 팔짱을 끼고 서서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쏘아보는 표정은 마치 나를 부정한 내연녀 보듯 하는 것이었다.

<당신, 영어할 줄 알아요?>

<어느 정도는요.>

그가 엘씨오와 무슨 일이 있었건, 처음 보는 내게 대하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팔짱을 꼬고 눈에 힘을 줘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가소롭다는 듯 픽 웃었다.

<까불지 마, 애송아.>

<안드레아!>

엘씨오가 내 앞을 막아서며 고함을 질렀다. 그가 내 앞을 막아서지만 않았으면, 내 빈약한 주먹이라도 한 대 날렸을 것이다. 나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했지만 태연한 그의 표정을 보자 오히려 약이 올랐다. 엘씨오와 안드레아는 또다시 거친 이탈리아어로 속사포처럼 빠르게 한 마디씩 나누었다. 그러면서도 안드레아는 엘씨오 등 뒤의 나를 향해 입술을 비죽거렸다. 그 표정을 보자 절로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힘 슈미츠가 정확하지 않은 것이 질색이라면, 강민하는 예의없는 것이 질색이다.

<이봐요, 당신이 엘씨오와 나이가 같다면 나랑은 꽤 차이가 나요. 거기다 처음 만난 사람한테 그런 말투라니. 당신 예절 교육은 어디서 받은 거죠?>

<나이 많은 게 뭐 대단한 건가? 못생긴 주제에 늙기까지?>

<안드레아!!>

엘씨오는 더 크게 고함치며 내 앞을 막았다. 나는 엘씨오의 등에 막혀 손톱을 세운 채 팔만 이리저리 휘둘렀다. 안드레아는  여전히 팔짱을 꼰 채 닿지 않는 내 손을 비웃었다. 나는 그가 알아듣건 말건 한국말로 ‘야, 야, 너 이리와!’를 외치며 두 팔을 허우적거렸다. 엘씨오가 안정을 찾을 때까지 그의 곁에 있겠다는 의무감은 이미 사라져버렸다. 그때 내 꼴은 이미 확실한 그의 내연녀였다. 못생긴 주제에 늙기까지 한 비참한 내연녀 말이다.

-요즘 얼굴이 폈다, 강민하?

-뭐, 잘 먹고 잘 자고 거기다 잘 싸고. 그리고… 뺄 것도 적당히 빼고.

-응? 이야~ 우리 민하, 형님 몰래 연애 하는구나?

-웃지 마.

-예뻐?

-웃지 말란 말이야.

내가 언제 가장 비참했냐하면, 네가 아니라도 흥분하고 사정을 할 때. 그리고 상대가 그런 내 모습에 아주 흡족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D. 그게 되더라. 상대가 네가 아니어도 그게 참 쉽게 되더라. 그리고 더 웃긴 건, 그걸 할 때는 상대밖에 안 보인다는 거야. 난 또, 그걸 하면 상대 얼굴 대신 네 얼굴이 겹쳐 보일 줄 알았지 뭐야. 그런데 아니야. 그거랑 이거랑은 또 다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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