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묵야와는 삼사일에 한 번씩 만남을 지속했다. 섹스는 필수불가결한 것이었지만 내 쪽에 맞춰주는 행위 덕에 체력이 바닥나는 일은 없었다. 그럴 때마다 입매를 일자로 쭉 다물고 욕구불만이 가득 쌓여가는 묵야가 언뜻 느껴졌다. 하고 싶은 데로 놔둘까 생각하다가도 한 번 양보하면 그 뒤로는 계속 시달릴 것 같기에 꾹 참았다. 구슬이라도 빼면 크기가 줄어들려나? 사실 크기와 구슬은 그리 큰 연관이 없었다. 작은 성기에 구슬을 박는다고 해서 커지는 일은 없으니까.
현재 태형 형을 비롯해 서울지방경찰청의 상황은 전부 K3에 몰두해있었다. 엽기적인 토막사건과 미로 괴한 난입 살인사건이 맞물려 세간에서 큰 이슈가 된 덕이었다. 네티즌이나 기사들의 반응은 하나같이 살인자의 편을 들고 있었다. 목숨을 위협하는 위험한 마약을 팔았으니 당연히 응징을 받은 것이다. 혹시 살인범은 경찰 일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이 아니냐? 새로운 키라의 탄생인가? 라는 허무한 글들도 많았다. 사건 기사에 달려있던 리플들을 읽다가 웹 창을 닫았다. 이주율과 유진이 내 방에서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둘 다 거실로 나가지 않을래?”
“싫어.”
이주율이 고개를 흔들었다. 유진만 들어오면 수집한 문자들이 외국인 공포증을 겪고 있었다.
“일 안 나가?”
“카지노 지금 문 닫았어. 감사다 뭐다 싹 털려서 한동안 사태 정리 될 때까지는 오픈 못해.”
“유진 너는?”
“난 프리랜서잖아.”
“성인 남자 세 명이 모여 있으니 숨 막혀.”
컴퓨터의 전원을 끄고 거실로 나갔다. 두 녀석이 쪼르르 따라 나왔다. 이틀 전, 이주율이 근 3주의 가출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 녀석에게 얼큰한 해물탕을 대접했더니 개코를 들이밀며 유진도 찾아온 것이다. 서로를 보면 물고 뜯고 싸울 것 같던 그들은 정작 주먹다툼을 벌이지는 않았다. 유진이 시비를 걸면 이주율이 무시하거나 독설을 내뱉기만 했다. ‘fun’ 유진이 생각하는 이주율에 대한 단어가 튀어나왔다. 이주율은 그 문자가 보이지 않는지 내 옆에 앉아서 베지밀을 마셨다.
“그럼 언제부터 일 나가는 데?”
“글쎄. 상부에서 연락 올 때까진 집구석에 찌그러져 있으래.”
설마 그렇게 말했겠냐 싶었지만.
“이 참에 그만둬.”
“뭐 먹고 살라고?”
“돈이라면 형이 알아서 할 테니까.”
“이주인, 나 벌어 먹여 살리려면 회사원 월급 가지곤 어림도 없어. 이래봬도 카지노에선 전무님이야.”
회사원 월급에 반도 못 미치는 카페 수입가지곤 택도 없겠다. 이주율은 주먹을 휘두르고 나서 심히 반성을 했는지 까칠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뇌진탕이 걸리도록 나를 두드려 패고 나서 그로부터 이년이나 보이지 않았으니 그것도 어쩌면 녀석 나름대로 반성한 것은 아닐까란 짐작을 해보았다.
“카지노 사람들은 혹시 네 능력 알고 있어?”
2년 만에 카지노 전무 자리를 차지하려면 공적을 수백은 쌓아야 하지 않을까? 아무리 공적을 많이 쌓았다 하더라도 그리 파격적인 인사이동이 있을 턱이 없었다.
“미쳤냐, 그걸 말하게? 처음부터 사파에 있던 건 아니야. 사파보다 밑에 급인 물방울파 불법 도박장이나 관리했었지.”
물방울파…. 그 파의 우두머리는 동심이 깊어 보였다.
“이 몸의 능력이 좋으니 스카웃도 되고 그런 거지 뭐. 다른 건 몰라도 사파 큰이사가 사람 보는 눈은 좋거든. 둘째 이사 새끼가 만날 문제지.”
자신을 스카우트해왔으니 당연지사 사람은 사람 보는 눈이 좋다며 칭찬하는 이주율에겐 자신감이 넘쳤다. 둘째 이사라 불린 남자는 이주율과 사이가 썩 좋아보이진 않았다.
“이사가 뭐가 그리 많아.”
“나를 포함해서 전무도 스무 명이 넘어, 대표이사는 세 놈뿐이지만.”
사파가 카지노만 운영하는 것도 아니고 호텔부터 시작해 부동산업까지 손을 대니 대표들이 많을 거라는 이해는 갔다.
“귀 파줘.”
이주율이 내 무릎에 드러누웠다. 길게 빠진 다리가 소파를 벗어났다. 머리카락을 휘적거리며 면봉 하나를 들어 녀석의 귀를 팠다. 유진이 입을 쩍 벌리고 우리 앞까지 다가왔다.
“나도, 나도 해줘.”
“귀찮아.”
그동안은 이주율 제 스스로 귀를 팠는지 귓밥이 얼마 없었다. 이주율의 뺨을 툭 쳐서 반대쪽 귀를 보이게 만들었다. 처음부터 왕건이 하나가 딱 걸렸다. 살살 긁어서 올려내자 이주율이 뺨을 찡그렸다. 그것 외에는 귀 안쪽이 휑했다.
“됐다.”
이주율을 밀쳐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도 해줘!”
유진이 내 팔을 잡아끌었다. 이주율만 해주는 것도 형평성에 맞지 않기에 다시 소파에 앉았다. 유진에게 여기 얼굴을 대라며 허벅다리를 쳤다. 유진이 내 허벅지로 고개를 숙이는 때 이주율이 유진의 멱살을 잡았다.
“해주지 마.”
이주율이 숨겼던 이빨을 드러냈다. 유진의 터틀넥 셔츠가 늘어나며 슬쩍 목 언저리가 드러났다. 유진이 이주율의 손을 거칠게 쳐냈다.
나는 늘어난 터틀넥을 정리하는 유진을 유심히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유진은 목을 노출하는 상의를 입은 적이 없었다. 아직 겨울의 기운이 남아있어 터틀넥을 즐겨 입는다고만 생각했었다. 터틀넥이 늘어나자마자 과민반응을 보이는 유진이 미심쩍었다. 유진과 눈이 마주쳤다. 녀석이 슬쩍 고개를 저으며 그 점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지 말라는 듯한 행동을 취했다. 이주율은 자신의 손을 거칠게 쳐낸 유진에게 분기탱천해서 송곳니를 드러내며 입술을 씰룩댔다.
“저 양키새끼 귀 후벼줄 생각이면 백년은 일러.”
“그럼 네가 해주던가.”
면봉을 이주율에게 휙 던졌다. 금세 밝아진 유진은 누가 귀를 파주든 상관없는지 면봉을 받아든 이주율의 눈치를 살폈다.
“오른쪽 귀로 들어갔다가 왼쪽 귀로 나올 거야. 그래도 상관없으면 쑤셔줄까?”
이주율의 협박에 유진이 자신의 양쪽 귀를 손으로 막았다. 이주율이 그걸 보며 낄낄댔다. 중학생들의 유치한 싸움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유진이 집안에 있으면 미쳐서 날 뛸 줄 알았는데 이주율이 그러지 않는다는 게 신기했다. 나로선 이주율과 단 둘이 있는 것보단 심부름도 곧 잘 하는 유진이 함께 있으면 이래저래 편한 점도 많았다. 이주율은 한가한데 묵야는 여전히 바빠 보였다. 요사이 묵야는 업어 가면 모를 정도로 숙면을 취했다. 무방비하게 자고 있는 얼굴을 구경하는 맛도 제법이었다. 오늘이 수요일이니 묵야와 만나기로 약속한 주말까지는, 아직도 일주일의 절반이나 남아있었다. 유진이 이주율에게 달라붙어 귀를 후벼 달라 귀찮게 굴었다. 이주율은 유진을 무시한 채 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텔레비전을 노려봤다. 저녁은 이미 먹어 배가 고프진 않지만 출출한 감이 있었다.
“치킨 먹을 사람.”
“나.”
“me too.”
이주율과 유진이 순서대로 답했다.
“용조 치킨 배달 안 되니까, 진 사람이 다녀오기로 하자.”
세탁소 뒷골목에 있는 치킨 집을 말했다. 용조 치킨은 프랜차이즈 점이 아닌 그 유명한 시골치킨이었다. 내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이미 30년 전통 간판을 내걸고 있었다. 그럼 전통이 50년은 넘는 셈인가?
“배달되는 데서 시켜.”
용조 치킨에 사족을 못 쓰는 이주율이 가기 싫다고 뻗댔다.
“그럼 내가 사올 테니 넌 먹지 마.”
다소 유치하긴 해도 이 방법이 제일이었다. 이주율이 투덜대며 주먹을 내밀었다. 나를 협박하려는 게 아니라 가위 바위 보를 하기 위함이었다.
“유진, 너도 참가해.”
“난 어딘지 모르는데?”
“세탁소 알지? 거기 바로 뒤쪽 골목 첫 번째 집이야.”
빼도 박도 못한 유진도 주먹을 내밀었다.
“가위, 바위, 보!”
나는 가위, 이주율도 가위, 유진이 제일 늦게 보자기를 냈다.
“다시 해! 내가 늦게 냈어!”
유진이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무효를 외쳤다.
“그런 게 어디 있어. 다녀와. 양키 고치킨.”
양키 고홈을 응용한 이주율이 유진을 발로 벋어 찼다. 현관으로 향하는 유진이 깽깽이 발을 하며 엄살을 떨었다. 마지못해 신을 신는 유진이 어기적거렸다.
“튀기는데 15분은 걸릴 거야.”
정통 미국인이 치킨 집에서 얌전히 기다리는 모습을 상상했다. 주인아저씨가 얼마나 황당해할지도 눈에 선했다. 물론 한국말을 잘 하는 유진이니 걱정은 없었다.
“양념 반, 후라이드 반으로 사와.”
이주율이 유진을 불러 세웠다.
“그런 말 몰라.”
콜라도 사오라는 말을 하려는 찰나에 유진이 휙 나가버렸다. 오랜만에 이주율과 둘이 남아 한가로운 주말을 즐기는 가족들처럼 한물 지난 영화를 시청했다. 케이블의 단점인 잦은 광고가 쏟아졌다. 생각 없이 보던 이주율이 화면을 응시한 채로 입을 열었다.
“내가 또 그러면… 봐주지 마.”
이주율은 경찰청에서 봤던 중학생 녀석과는 다르게, 내가 아무런 힘이 없어 자신에게 맞았다는 착각은 하지 않았다.
“동생한테 주먹질 하는 형이 어디 있어.”
이주율은 여전히 나를 보지 않은 채로 동생과 형을 강조하는 내게 힘없이 물었다.
“그렇게 형으로 있고 싶어? 아무리 해도 안 돼?”
녀석은 답을 알면서도 물었다.
“알아. 아는데 인정할 수가 없어. 그래서 포기가 안 돼. 마음 같아선 저 미친 외국인 새끼 내쫓고 싶은데, 내가 또 언제 미칠지 모르니까 무서워서 못 그러겠어.”
이주율이 갖은 짜증을 부리면서도 유진을 집안에 들이는 이유는 순전히 나 때문이었다. 다시금 저번과 같은 상황이 벌어져도 유진이 제지해줄 수 있을 테니까. 이주율이 자신의 휴대폰 액정에 화면을 밝혔다. 깜짝 놀랐다. 팅팅 불어터진 뺨으로 화면을 노려보고 있는 내 사진이 떡하니 배경화면에 떠있었다. 내가 녀석 구타당한 다음날 보냈던 사진메일이었다.
“뭐야 그건! 지워.”
“안 돼. 이게 날 제어해주는 부적이야.”
거참, 이주율 녀석. 이렇게 보니 마냥 어릴 때 같진 않았다. 악에 받쳐 보란 듯이 나를 괴롭히기 위해 정신병원에 들어갔던 때와는 또 사뭇 달랐다.
“못생겼어.”
이주율이 화면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진짜 이렇게 생겼으면 좋았을 텐데. 그럼 아무도 널 사랑하지 못할 테니까.”
“옥동자도 미인이랑 결혼했어.”
“이 사진만 보면 옥동자보다도 더 못생겼어.”
“그래, 너 잘생겨서 좋겠다.”
“응, 좋아.”
나는 알고 있다. 이주율이 내게 향하는 감정의 대부분은 집착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걸. 어렸을 때부터 견고하게 다져진 나에 대한 집착을 이주율은 연인에 대한 사랑으로 착각하는 중이었다. 당시엔 이주율이 안심할 수 있는 상대는 온전히 나뿐이었다.
“주율아, 내게 집착하지 마. 어릴 때와는 이미 많은 것들이 달라졌어. 네 세계는 이제 나만 존재하지 않잖아.”
“집착도 사랑이야.”
“그래, 가족애도 사랑이고.”
사랑의 형태는 여러 가지다. 이주율이 말하는 집착, 그리고 내가 말하는 가족애. 우리는 그러한 모든 사랑이 상대방에게 전부 보답 받을 수 없을 거란 사실을 이제 인정해야했다. 침체된 분위기를 쇄신시키듯 유진이 초인종을 울렸다. 치킨을 들고 돌아오는 유진을 반겼다.
“냄새 좋다.”
티슈 상자만 달랑 놓여있던 한적한 테이블 위에 사온 치킨을 펼쳤다. 바삭거리는 과자같이 잘 익은 후라이드와 후각을 자극하는 매콤한 양념 냄새에 군침이 돌았다. 도라에몽 유진이 재킷 주머니에서 페트병 콜라를 꺼냈다.
“주인이 서비스로 줬어.”
내 이름이 아니라 치킨 집 사장을 뜻했다.
“삼십년 동안 장사하면서 치킨 사러온 외국인은 처음이래.”
“앞으로 네가 가면 되겠네.”
내 말에 유진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속을 알 수 없는 웃음이었다. 평생 해오던 버릇 때문에 생겨날 문자를 기다렸지만 올라오는 것은 없었다.
“먹자.”
잘 튀겨진 가슴살을 반으로 갈랐다. 하얀 살결에서 모락모락 김이 솟았다. 소금에 찍어 입에 넣자 뻑뻑하면서도 달짝지근한 맛이 퍼졌다. 유진과 이주율이 양념 치킨을 젓가락으로 찔러먹었다.
“안 매워?”
미국인은 김치도 매워한다는데 유진은 매운 치킨 양념을 쪽쪽 잘도 빨아먹었다.
“난 매운 거 좋아해. 음식도 사람도.”
“그래, 많이 처먹어라.”
이주율이 젓가락을 거칠게 놀렸다. 치킨의 양이 부족한 듯 유진이 목살을 씹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한 마리 반을 시킬 걸 그랬다. 두 녀석이 한 조각이라도 더 먹을 수 있도록 나무젓가락을 내려놨다. 손을 씻으러 가는 찰나에 휴대폰이 울렸다. 손이 온통 기름투성이라 받을 수가 없었다. 고개만 뻗어서 발신자를 확인했다. 태형 형이었다. 욕실보다 가까운 주방으로 가서 세제로 손을 닦았다. 기름기 제거는 비누보다 세제의 효과가 더 탁월했다. 소파로 돌아오자 부재중 전화로 바뀌어있었다. 버튼을 눌러 태형 형에게 연결했다. 좋은 소식은 아닐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다만 시체가 관련된 사건이 아니기를 바랄뿐이었다.
“형, 전화하셨네요.”
“너 유진이랑 같이 있지?”
“네.”
“그럼 둘이 지금 서로 와라.”
“지금 당장이요?”
“그래. 바쁜 건 아니지?”
“네, 야식 먹느라 전화 못 받았어요. 유진에게 물어보고 갈게요.”
전화를 끊고 나니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았던 것이 생각났다. 경찰청에 도착하면 알 수 있겠지. 유진은 은박지 바닥에 질펀하게 깔려있는 양념을 젓가락으로 긁어모았다. 자신의 이름이 내 입에서 오르내릴 때부터 쳐다보고 있었다.
“태형 형?”
“지금 서로 바로 오라는데.”
“아, 귀찮은데…….”
유진이 양념이 찐득하게 묻은 젓가락을 입에 넣고 빨았다. 다시 은박지에 남은 양념장을 휙휙 젓자 이주율이 탕-소리 나게 젓가락을 내려놨다.
“더러워서 못 먹겠다. 너 혼자 다 처먹어!”
유진은 이주율이 왜 화를 내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이주율은 미국에서 살다온 경험이 전무후무함에도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도드라졌다. 특히 다 같이 먹는 음식인 찌개나 탕의 경우, 여러 사람이 숟가락을 넣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실은 미국인인 유진이 싫어해야할 상황인데. 유진과 이주율이 뒤바뀐 것 같았다.
“먹을 것도 없는데 뭘 먹으래.”
유진이 이주율을 약 올리듯 검지로 양념을 끌어올려 입 안에 쏙 넣었다. 이주율의 젓가락이 유진의 눈알에 꽂히지 않은 게 천만 다행이었다.
유진이 손을 씻으러 욕실로 가고 이주율도 주방으로 향했다. 거실에 홀로 남아 초토화가 된 테이블을 정리했다. 손에 기름이 묻지 않도록 티슈를 이용해 튀김 부스러기들을 쓸어 모았다. 치킨이 담겼던 비닐봉지 안에 쓰레기를 집어넣고, 남은 치킨의 뼈는 따로 모아 음식물 쓰레기통에 버렸다. 뻣뻣하게 메마른 손이 움직일 때마다 사락거렸다. 세제로 씻은 결과였다.
“갈 거야?”
행주로 손을 닦는 이주율이 내게 충고를 유발했다.
“행주로 손 닦지 마.”
“빨면 되지.”
그러면서 세탁바구니에 휙 던져 넣었다. 유진은 소파에 걸쳐두었던 짙은 다크그레이 색상의 후드 가디건을 챙겨 입었다. 터틀넥과 대조되는 여밈이 없는 오픈형의 가디건은 전체적으로 루즈해보였다.
“추울 텐데.”
나는 유진의 옷차림을 보고 중얼거렸다.
“밖에 별로 안 춥던데.”
“바이크 타고 갈 거야.”
“엑? 싫어, 택시 타고 가자.”
“저 새끼 바이크 뒤에 태울 생각이야?”
유진과 이주율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설마 이주율 너도 따라올 생각은 아니겠지? 바이크 정원은 두 명도 벅찼다.
“그럼 너만 택시타고 와.”
바이크는 혼자 타는 게 다른 사람을 태우는 것보다 안전하고 편했다. 유진이 택시를 타고 온다면 바라던 바다. 유진이 마음을 고쳐먹기 전에 밖으로 나왔다.
겨울도 거의 끝나가는 마당에 새로운 재킷을 구매하는 건 낭비였다. 시보리가 다 닳은 소매부분을 내려다보고 하이넥 집업의 쟈크를 끌어올렸다. 코밑까지 올라오는 원단은 마스크 대신으로 사용하기에도 좋았다. 유진이 신발을 신는 둥 마는 둥 급히 뒤따라 나왔다.
“태워줘.”
“택시 탄다며.”
“같이 타자는 소리였지.”
유진에게로 헬멧을 던졌다. 무게감 있는 헬멧을 가볍게 든 유진이 손에 든 것을 쳐다보기만 했다.
“안 쓰고 뭐해.”
“형은?”
“난 주율이거 쓰면 돼.”
다시 현관으로 돌아가서 이주율을 불렀다. 헬멧을 가지고 나오라는 내 말에 녀석이 대답을 들은 체 만 체했다.
“이주율, 빨리.”
녀석의 방을 들어가기가 꺼려지는 나라 끝끝내 이주율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이주율이 투덜대며 자신의 방에서 헬멧을 꺼내왔다. 고등학교 때 구입했던 kbc제품으로 당시에 꽤나 높은 가격을 주고 샀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주율도 오랜만에 보는 헬멧이 반가운지 이리저리 상태를 확인했다. 헬멧을 쓴 자의 얼굴 일부분도 확인 할 수 없도록 스모크 실드가 새까맸다. 저렇게 까매서 앞이나 제대로 보일지 모르겠다. 이주율이 현관에 서 있는 내 머리위로 헬멧을 씌워줬다. 예상과 다르게 스모크 실드를 통해 보이는 세상은 밝고 선명한 편이었다.
“조심히 다녀와.”
“쉬고 있어.”
현관문을 닫았다. 머리에 착 달라붙는 착용감이 비싼 값을 하는구나 싶었다. 바이크에 올라타고 헬멧을 쓴 유진이 내 허리를 감쌌다.
“내려.”
“왜?”
목소리가 답답하게 들려서 헬멧의 실드를 올리고 말았다.
“마당에서부터 타고 나갈 거야? 대문 밖으로 일단 꺼내야지.”
“아, 알았어.”
유진이 바이크가 나가는 길을 뒤따라왔다. 대문밖에 바이크의 몸체가 나오자마자 뒤에 올라탔다. 내가 버리고 갈 듯싶었나 보다.
“꽉 잡아.”
실드를 내려 불어오는 바람을 막았다. 유진도 안정적인 자세로 내 허리를 잡았다. 덕분에 속력을 줄이는 일 없이 경찰청까지 내달릴 수 있었다.
오늘따라 경찰청 주차장이 매우 붐볐다. 이 시각에 이렇듯 붐비는 건 매우 드문 일이었다. 차종들은 보아하니 값비싼 검은 세단이 주를 이뤘다. 그 중 익숙한 벤츠 한 대가 보였다. 번호판까지 내가 알고 있던 것과 같았다.
경찰청 앞에서 태형 형의 전화를 받은 유진이 헬멧을 벗었다.
“3층 취조실로 오래.”
발걸음이 무거웠다. 그가 보고 싶었지만 이런 곳에서 만나기를 원한 건 아니었다. 유진을 뒤따라 비상구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이 3층에 가까워질수록 착잡한 마음이 착잡했다. 취조실 바로 앞에서 태형 형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빨리 왔네.”
형의 얼굴이 상기된 채였다. 뭐가 형을 저렇게 기쁘게 만들었을까. 반대로 내 기분은 바닥을 쳤다.
“안에 묵야가 있어요?”
태형 형이 놀라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애 먹었지 뭐야, 그리 공을 들여도 서로 소환한 건 이번이 처음이야. 잘 해야 돼.”
“말씀드렸잖아요, 저 못 읽는다구요.”
“혹시 모르잖아.”
태형 형이 내 어깨를 두드렸다. 부담스러울 정도의 기대감이 내게 향했다. 유진의 푸른 눈이 태형 형을 곧게 쏘아보았다.
“안으로 들어가자.”
문을 열자 평소보다 어두운 분위기의 취조실 풍경이 펼쳐졌다. 갈색 책상을 비추는 백열전구 하나만이 어둠을 희미하게 밝히고 있었다. 매직미러 앞에 서서 덤덤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묵야를 쳐다봤다. 묵야 쪽에선 내가 보일 리 없었다. 그의 표정에는 다소 귀찮다는 감정이 스며있었다. 묵야는 수갑이 채워져 있지도 포박된 상태도 아닌 자유로운 몸이었다. 태형 형이 취조실 내부에서부터 들리는 스피커의 음량을 높였다. 묵야의 앞에 앉아 있는 경찰은 전에 묵야의 부하를 취조했던 남자였다. 묵야를 향해 몰아붙이지도 언성을 높이지도 못하는 걸 보니 부하를 취조할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유진이 흥미진진한 시선으로 매직미러 내부의 상황을 구경했다. 지금 이 상황이 흥미롭지 않은 건 나 혼자뿐인 듯 했다.
“21일, 오후 7시경 미로에서 살인상해 사건이 일어난 건 아십니까?”
묵야는 자신에게 말을 건넨 남자를 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뉴스에서 들었습니다.”
묵야의 말투는 나른했다.
“그 시각, 어디에 계셨습니까?”
그쯤이면 나와 삼겹살집에 있던 시각이었다. 묵야는 질문에 대해 생각하지도 않는 듯 다른 말을 건넸다.
“그게 왜 중요합니까?”
“근방에서 목격자의 제보가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소환되신 겁니다.”
“아, 그래요.”
묵야에게 시선을 고정한 태형 형이 땀이 찬 손을 바지에 닦아댔다.
“형, 목격자가 누구래요?”
“익명의 제보야.”
“저한테도 말씀 못해주세요?”
태형 형은 나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모래를 씹는 것처럼 입 안이 서걱거리며 메말라갔다.
“그 목격자는 그곳에서 내가 무얼 했다고 합니까?”
묵야가 희미하게 웃었다. 취조를 당해야 할 대상이 뒤바뀌었다. 취조실의 경찰이 서류를 뒤적였다. 그러다 A4용지 몇 장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묵야 쪽으로 떨어진 것을 그가 허리를 굽혀 주워주었다. 행동 하나하나가 여유로웠다.
“아, 감사합니다.”
묵야에게서 종이를 건네받은 경찰이 인사를 했다. 태형 형은, 저 새끼 답답하게 왜 저러는 거야. 라면서 볼펜을 잘근잘근 짓씹었다.
“미로 근처의 골목에서 미남자가 외국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장면을 봤다던데요.”
묵야가 갑자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아이처럼 웃던 저번의 그 모습은 아니었다. 눈앞의 사람을 물어뜯을 듯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저 남자가 내 앞에선 순진한 고양이라 그렇지, 실상은 위압감이 대단한 자였다.
“엉망이군…. 반대로 내가 경찰을 상대로 고소할 수도 있다는 걱정은 하지 않았나봅니다.”
경찰이 다시금 서류를 떨어뜨렸다.
“꽤나 귀찮게 굴기에 한 번 쯤은 와주려 했습니다.”
묵야가 자신의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며 시간을 확인했다. 불편한 의자에 등을 기댄 묵야에게선 여전히 여유가 넘쳐흘렀다.
“21일 7시경 알리바이가 없으십니까?”
“없습니다.”
왜 나와 같이 있었다고 고백하지 않아. 나를 볼 리 없는 묵야를 쳐다봤다. 순간 묵야의 눈이 이쪽을 향했다. 내가 있는 줄은 모를 테니 단순히 매직미러만을 쳐다보는 상황이었다.
“주인아, 아무 것도 안 보여?”
“네, 저 형사 분에게서 나오는 것 밖에 없어요.”
묵야를 취조하는 형사에게서 나오는 문자는, 묵야에게 건방지게 입을 놀렸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임을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뿐이었다. 시골의 카페에서 태형 형이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흔히 볼 수 있는 조폭류가 아니라는…. 인정했다. 묵야를 보면 시비와 협박을 일삼는 단순한 조폭 같진 않았다. 사파 자체가 일반적인 조직폭력단이라고 하기에도 지나치게 규모가 컸다. 회사로 운영되는 사파는 이미 기업이나 다름없었다. 다만 그 밑을 주름잡는 이들이 폭력단일 뿐이었다.
“알리바이를 증명하지 않으시면 목격자의 증언에 신뢰가 실립니다.”
“애초부터 목격자의 증언에 신뢰란 게 있습니까?”
“이, 있습니다.”
경찰이 말을 더듬었다. 차라리 내가 취조하는 게 더 박력 있을 것 같았다. 태형 형이 참다못해 무전기를 들었다.
“야, 너 나와. 내가 들어갈 테니.”
경찰이 고개를 끄덕였다. 떨어진 서류까지 챙겨들고 나오며 문을 열었다. 나는 문 반대편에 서 있었기에 묵야가 나를 볼 수는 없었다.
“휴우, 긴장돼 죽겠어요. 새파랗게 어린 새끼가 박력이 장난 아니에요. 근데 김경위님, 정말 이래도 되는 겁니까?”
경찰이 식은땀을 쓸어내렸다.
“멍청한 새끼.”
태형 형이 그 경찰을 밀치고 취조실로 들어갔다. 의자를 거칠게 끌어내 그 위에 털썩 앉았다.
“이봐, 알리바이 없어? 없으면 집어 처넣어야지. 잘 됐네.”
“… 당신 날 알고 있습니까?”
“뭐?”
묵야는 느른한 태도로 불쾌함을 드러냈다.
“낮춤말. 그건 당신보다 낮은 사람한테나 하는 건방진 말투지. 지금 내가 너한테 하는 것처럼 말이야.”
“뭐 이 새끼야!!!”
태형 형이 책상을 밀치며 일어섰다. 저러다 태형 형에게 폭력 전과가 생기는 건 아닌지 걱정됐다.
“그러니 그 쪽도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시죠. 나도 지켜주겠으니.”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태형 형에게로 온갖 문자들이 솟아났다. ‘오만, 방자, 불손.’ 그 모든 문자들이 엉켜서 묵야에게로 향했다. 먼지 한 톨 없는 묵야의 정장에 그 문자들이 달라붙었다. 저렇게 배타적인 문자는, 그 문자가 향한 상대의 기분을 저조하게 만들기 마련이건만 묵야는 문자가 달라붙기 전과 후가 같았다. 초자연적인 현상을 전혀 믿지 않으니 가능한 일일까? 아니면 아예 타인의 생각 따위는 괘념치도 않는 것일까? 묵야에겐 둘 다 해당되는 사항 같았다.
“나는 조폭 새끼한테는 예의 같은 거 없어. 알아?”
“그럼 대화는 여기서 종결하지. 십오분이나 낭비했군.”
“앉아.”
“앞으로 소환하려면 확실한 증거와 영장을 제출해. 오늘 같은 행운은 없을 테니까.”
묵야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니 그가 영장에 의해 억지로 끌려온 것은 아니었다.
“죄도 없는 사람을 취조실에 가둔 건, 경찰의 권력남용에 잠시 겁먹었다는 것으로 해두지.”
묵야가 매직미러 반대 측의 문으로 사라졌다. 태형 형도 묵야를 붙잡을 증거가 더는 없어보였다. 태형 형이 발로 의자를 걷어찼다. 취조실의 문을 활짝 열고는 유진보고 들어오라며 거칠게 손짓했다.
“유진아, 뭐 보이는 거 있는지 확인해봐.”
“알잖아, 물건이 필요해. 저 남자가 앉아있던 자리를 읽는 건 우리가 방금까지 눈으로 본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야. 게다가 사파의 하급 조직원도 읽을 수 없었는데 저 남자라고 다르겠어?”
사념이 깃들어있는 물건, 즉 묵야가 지니고 다니는 물건이 있어야만 그의 과거 행적들을 유진이 읽어낼 수 있었다. 유진은 자기 영역 밖이라며 두 손을 올렸다.
“주인이 너는 정말 안보였어?”
씩씩대는 형에게로 다가갔다. 문자는 다른 자들이 흘리고 간 것이 전부였다.
“없어요. 형, 묵야는 제가 읽지 못한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리고 묵야… 21일 7시 알리바이 있어요.”
“뭐?”
태형 형이 같잖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나를 노려봤다.
“그 날은 저와… 만난 날이에요.”
데이트라는 말은 빼고 말했다. 태형 형은 말도 잇지 못하는 기가 막힘에 코웃음만 내비쳤다.
“네가 저 새낄 왜 만나?”
“형, 그 목격자라는 사람 거짓말이에요. 제가 알리바이 증명할 수 있어요.”
‘조작, 목격자, 은폐. 권모술수.’ 음산한 기운을 가진 문자가 태형 형에게서부터 찐득하게 기어 나왔다. 애초부터 나와 같이 있던 묵야를 미로의 건물부근에서 볼 수 있는 목격자가 있을 리 없었다. 나는 형을 공격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목격자 정말 있긴 해요?”
“무슨 소리야? 내가 짜기라도 했단 말이야?”
“형, 그러지 마세요.”
펄펄 날뛰는 형을 유진이 팔짱을 끼고 구경했다.
“그러는 너는 대체 무슨 생각이야? 왜 저 새끼하고 엮여?”
“제 얘기를 하자는 게 아니에요. 거짓 목격자를 만들어내고 묵야를 소환한 게 정상은 아니잖아요.”
묵야 뿐만 아니라 다른 이었어도 마찬가지로 잘못된 방법이었다.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권모술수. 형이 사용한 방법은 올바르지 못했다.
“편법이야. 어려우면 돌아가야지.”
“그건 편법이 아니라 불법이죠.”
“사회의 악인 새끼 잡겠다는 데 대체 뭐가 불만이야.”
정의감에 불타는 형이 이상한 방향으로 엇나가고 있었다. 아니, 정말 정의감이 맞을까?
“너도 앞으로 저 새끼 만날 거면 내 앞에도 나타나지 마라.”
‘이주인, 거짓, 묵야.’ 읽고 싶지 않아 눈을 감았다. 태형 형은 내가 묵야의 마음을 읽을 수 있으면서도 묵야의 편을 들기 위해 거짓말을 꾸며낸다 생각하고 있었다. 분노한 형의 화살은 내 심장에 와서 박혔다.
“형, 진심이에요?”
묵야를 만나는 일에 대해 태형 형이 못마땅해 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것이 나를 위한 걱정이었다면 나는 아마 이렇게 아프지 않았을 것이다. 형은 내가 묵야의 편을 들고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묵야의 생각을 읽을 수 없다는 사실을 거짓으로 치부했다.
“태형 형, 이기적이네. 주인 형이 만나는 사람을 태형 형 허락을 받고 만날 필욘 없잖아.”
유진이 태형 형에게 차갑게 쏘아붙였다.
“너…….”
태형 형이 유진에게 뭔가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부르르 떨었다. 꽉 쥐어진 주먹 안쪽에서 피가 새어나올 것만 같았다.
“형 바람은 못 들어 드려요. 저 그 사람 못 만나면 이제 제가 안 돼요. 앞으로 K3 사건은 손 뗄게요. 죄송해요.”
한자 한자 입을 떼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내가 전하고 싶은 말을 전부 형에게 건넸다. 형이 나가려는 내 손목을 잡았다.
“이것 밖에 안 돼?”
“…….”
“네 능력을 썩힐 거야?”
“굳이 K3가 아니라도 사건은 수없이 많잖아요, 형.”
“대체 왜 그 새끼를 만나야 하는 지 이유나 들어보자. 그래야 나도 이해할 거 아냐!”
나는 잠시 유진을 올려봤다. 유진은 귀를 후비며 인상을 찡그렸다. 강아지가 귀를 털고 있는 모습과 다를 바가 없었다.
“미안해요, 형. 저 그 사람하고 연애해요.”
“뭐?”
“그 사람 좋아하게 된 것 같아요.”
형이 거세게 손을 휘둘렀다. 짝- 뺨이 돌아갔다. 고막이 멍해지며 바닥을 기는 문자들을 내려 봤다. 물속에 잠긴 것처럼 둔했다.
“제 정신이야?”
“죄송해요.”
태형 형은 꼴도 보기 싫다는 듯 나를 두고 취조실을 나가버렸다.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듯 목소리를 꾸며냈다.
“유진아, 미안한데…. 올 때는 택시 타고 와.”
“알았어.”
유진은 내게 위로의 말을 건네지 않았다. 그래봐야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 같았다. 기운 없는 사람처럼 비상계단을 내려갔다. 수천 개의 가시가 목구멍에 달라붙어 따끔거렸다. 어서 바이크로 돌아가 헬멧을 쓰고 싶었다. 이 엉망인 표정을 남들에게 보여주기 싫었다.
주차장의 세단들은 이미 자리를 비워 한산했다. 바이크에 올라타 헬멧을 썼다. 순간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참으려 해도 눈물이 멎지 않았다. 턱을 막는 보호대로 눈물이 축축하게 스며들었다. 묵야를 얻은 대신에 태형 형을 잃었다. 하나를 욕심내니 다른 하나가 떠났다. 취조실에 나를 두고 나가버린 형에게서 생겨난 문자는 형과 나의 인연이 끝났음을 알렸다. 형이 나를 이해해주기를 바라진 않았다. 그래도 나를 더러운 호모 새끼라고 생각할 줄은 몰랐다. 태형 형에게서 생겨나 내게 달라붙어있던 혐오스러운 문자들을 떼어냈다. ‘뒤틀림, 오물, 쓰레기, 호모.’ 그냥 우스웠다. 없애버려야 했지만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차라리 눈이 멀었으면 좋겠다. 그럼 형의 진심이 담긴 문자도 볼 수도 없을 테니까……. 일이 이렇게 되었지만 시골 카페에서 서울로 올라온 것을 후회하진 않았다. 나는 묵야와의 만남을 돌이키고 싶지도, 부정하고 싶지도 않았다. 성별이 같다고 해서 손가락질을 해도 좋았다. 태형 형이 형수님과 사랑을 하는 것처럼 나도 그와 사랑을 하고 싶을 뿐이었다.
바이크에 시동을 걸었다. 나를 괴롭히는 문자를 소멸시켰다. 다시는 올 수 없을 경찰청을 잠시 올려다본 후 속도를 올렸다. 밤거리를 달리는 내내 시야가 흐렸다. 덕분에 수많은 문자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물기를 흡수할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난 턱 보호대의 천을 타고 눈물이 흘려 내려왔다. 목덜미가 축축해졌다. 집 앞에 도착해서도 쉽사리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이주율에게 변명할 거리가 없었다. 녀석이 내 문자를 읽어낸다면 더 곤란할 상황만 생길 것이 뻔했다.
“주인 형!”
헬멧을 벗지 않은 채로 고개를 돌렸다. 택시를 타고 왔을 유진의 손에 편의점 봉투가 들려있었다. 유진이 그 안에서 맥주캔을 꺼내 흔들었다.
“마실까?”
나는 고개만 절레절레 저었다.
“그럼 나 먼저 들어갈게.”
주머니를 뒤져 열쇠를 유진에게 내밀었다. 시동을 끄지 않은 바이크를 몰고 집을 벗어났다. 특별히 갈 곳을 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이 답답한 마음을 털어낼 때까지 달리고만 싶었다.
결국 도착한 곳은 묵야와 첫 번째 데이트를 했던 한강 둔치였다. 농구코트가 보이는 길가에 바이크를 세워놓고 헬멧을 벗었다. 다행이 눈물은 그쳐있었다. 몸속의 모든 수분을 털어낼 때까지 울어본 것도 오랜만이었다. 시동을 끈 바이크에 앉아 수면이 잔잔한 한강을 지켜봤다. 휴대폰을 꺼내 묵야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지만 울음에 잠긴 목소리가 티가 날까 싶어 용기가 나지 않았다.
[뭐해요?]
휴대폰을 움켜쥐고 진동이 울릴 때까지 기다렸다.
[이주인, 생각.]
울다가 웃으면 어떻게 된다고 했는데… 깊이 생각하고 싶진 않았다. 휴대폰 액정에 입술을 댔다. 그의 문자가 입술에 닿자 차갑게 가라앉았던 마음이 불꽃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진동에 입술이 떨렸다. 묵야의 전화를 받을까 말까 잠시 고심했다.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네….”
“밥은 먹었어?”
“식사는 했어? 뭐해?… 이 두 가지가 가장 답하기 싫어하는 진부한 표현인 거 알고 있어요?”
“목소리가… 혹시 울었나?”
“아뇨, 감기 기운이 있어요.”
괜스레 코를 훌쩍였다.
“몸이 약해서 탈이군.”
묵야에게는 내가 비실비실한 녀석으로 비쳐지나 보다.
“뭐해요?”
“그게 가장 진부한 표현이라며.”
소리 내진 않았지만 분명 묵야가 웃고 있었다.
“그래도 궁금한데요.”
“볼일 보고 다시 회사로 돌아왔지.”
묵야는 취조실을 찾았던 사실을 내게 숨기고 있었다. 나한테 혹시라도 해가 될까 알리바이도 말하지 못하는 남자였었다.
“늦게까지 일하네요. 전 저녁 먹었으니 묵야씨도 챙겨 드세요. 뜨거운 거 먹다가 혓바닥 데이지 말구요.”
“그러지. 주말까지가 너무 멀다.”
“네. 머네요.”
“일 끝나면 연락할게, 혹시 안자면 집 앞으로 찾아가고.”
“괜찮아요. 곧 잘 거예요.”
이주율한테 들키면 어떤 사단이 날지 걱정됐다. 집에서도 일터에서도 눈치가 보였는데 이제 눈치 볼 데가 하나는 줄어서 좋았다.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꽉 막힌 속이 뚫리지 않을 것 같았다.
“잘 자고, 음… 내 꿈꾸라는 말을 하면 며칠은 연락이 되지 않을 것 같군.”
“하하, 족집게네요.”
“목소리 다시 듣기 좋아졌다. 이제 자라.”
“네. 묵야씨도 일 다 하고 푹 쉬세요.”
“그래.”
지나가던 사람들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묵야는 집이 아니라고는 의심하지 않는 듯 했다.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한참을 한강만 바라보다 시동을켰다. 더 보고 있다가는 저 검은 강물 때문에 우울함이 더 불어날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다행히 울지 않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