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늦여름의 더위가 가시고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는 건 느끼고 있었지만, 이렇게 하늘을 올려다보니 가을이 완연했다. 아직 초록빛이 더 많은 산이었으나 고개를 돌리는 곳마다 울긋불긋한 색이 시야에 들어오는 것을 보면 확연한 가을이었다.
그러나 높고 푸른 가을 하늘을 어지럽히는 검은 연기가 이 산이 불타고 있음을 알렸다. 공기도 연기 때문에 탁하고 눈도 따끔거렸다.
“…….”
도화는 태어나 처음으로 멀미를 한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체험하고 있었다.
네발짐승의 빠르기란 사람의 달리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빠르다는 걸 알고는 있었으나, 이렇게까지 차이가 날 줄은 몰랐다. 근처에서 지켜보는 게 아니라 직접 타고 있어서 속도가 더욱 체감되는 것일 수도 있었다.
“토하고 싶으면 말하세요.”
그래도 잘 참았다고 생각했는데 짐승의 감각을 피할 순 없었나 보다. 크게 한 번 숨을 내쉰 것뿐인데 묵범이 귀신같이 도화의 상태를 알아차리고 말했다.
“그 정도까진 아니야.”
속이 울렁거리긴 해도 참을 수 있다. 도화는 배에 힘을 주고 묵범의 등에 매달렸다. 정확하게는 호랑이로 변한 묵범이 등에 매단 짐 가방을 붙잡았다.
‘나보다 짐이 더 많으면서… 뭐? 어디 가출이라도 하냐고?’
아침에 만나자마자 저를 보고 한 말을 떠오르며 또다시 기가 찼다. 차에 실어 두었다던 묵범의 짐은 도화의 짐보다 세 배는 더 많았다. 가출은 도화가 아니라 묵범이 한 게 더 신빙성이 있을 정도였다.
호랑이로 변한 묵범의 크기는 말 그대로 집채만 했다. 심지어 이름처럼 온몸이 묵색이었다. 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순수한 묵색. 그저 ‘검다’라는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오묘한 색이었다. 이름을 누가 지었는진 몰라도 참 찰떡같이 지었구나 싶었다.
인간일 때도 덩치가 엄청났지만, 범이 되니 크기만으로 기운이 눌린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인간일 때나 호랑이일 때나 크고 검은 눈동자에 맺힌 장난기는 여전해서 어색하진 않았다. 오히려 호랑이 모습이 더 편했다.
“정상으, 윽…로 가면 뭐윽, 가 있—.”
묵범에게 묻는 도화의 목소리가 커졌다 작아졌다, 끊어졌다를 반복했다. 묵범이 가파른 산을 날다시피 빠르게 오르는 반동으로 도화의 몸이 통통 튀는 통에 말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윽…!”
결국, 도화는 질문을 끝맺지 못하고 거하게 혀를 깨물고 말았다. 저릿한 통증이 입 안 가득 채워져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강한 자극에 잔뜩 고인 침에서는 피 냄새가 강하게 났다. 아무래도 상처가 꽤 크게 난 듯했다.
도화의 짧은 신음에 묵범이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근처 나뭇가지가 흔들릴 정도로 킁킁, 냄새를 맡았다.
“피 냄새가 나는데…. 홍도화 씨. 혀라도 깨문 겁니까?”
입을 벌리지도 않았는데 피 냄새를 맡은 묵범의 후각에 도화는 간신히 침을 삼키고 말했다.
“개코냐.”
“호랑이는 갯과가 아니라 고양잇과입니다.”
“젠장. 개나 고양이나. 그게 그거지.”
통증에 혀가 마비가 된 것처럼 발음이 제대로 되지 않는 걸 억지로 힘주어 말했다. 도화는 잠깐 멈춘 김에 어디까지 올라왔는지 확인하기 위해 묵범의 등에서 내렸다. 거대한 흑호는 도화의 뒤를 어슬렁거리며 따라갔다. 사람 얼굴만 한 발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움직였다. 흑호의 머리에 비스듬히 씌워진 흑립의 능력이었다.
시원하게 불어온 바람이 도화의 도포 자락을 부드럽게 흔들었다. 흑립의 기능은 워낙 유명해서 막상 사용해도 놀라진 않았는데, 되려 도포 때문에 놀랐던 도화였다. 아무리 춥고 더워도 차사들은 옷을 두껍게 입지 않았다. 대신 항상 도포를 입고 다녔는데, 그 이유를 최근에 알게 되었다.
‘춥지도 덥지도 않아.’
아직 여름 더위를 완전히 물리치지 못한 가을 날씨는 낮이면 여름 못지않게 덥다. 그런데 지금 도화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뽀송한 피부를 유지하고 있었다. 묵범의 등에 타고 내달리며 내내 강한 맞바람에 시달렸으면 몸이 으슬거릴 만도 한데 일말의 한기도 느끼지 못했다. 저승차사의 도포는 걸친 사람의 몸 상태를 덥지도 춥지도 않은 가장 최상의 상태로 유지시키는 기능성 의류였다.
방호 기능도 있다 하니 원귀와 악귀를 상대하는 추혼 차사들에겐 흑립 못지않은 귀한 옷이라 할 수 있었다.
“탄 나무가 많이 보이는 걸 보면 중턱은 넘은 것 같군요.”
튀어나온 커다란 바위 위에 올라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묵범이 말했다. 장난기가 빠진 진지한 눈빛으로 산을 굽어보는 모습은 누가 봐도 산신 같아 보였다. 평소에도 저러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도화는 묵범의 등에 매어 둔 짐가방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기에 저 진지한 모습에 속아 넘어가지 않았다.
‘야영이라니.’
묵범의 짐이 저리 많은 이유는 야영할 장비 때문이었다. 호랑이로 변한 묵범 덕분에 계방산 입구에서 중턱까지 30분도 걸리지 않았다. 이 속도라면 하루 만에 설악산을 찍고 덕유산과 지리신 정산까지 다녀오고도 남을 텐데. 어째서 1박 준비를 하라고 한 것인지, 따지듯 물은 도화에게 돌아온 묵범의 대답은 매우 간결했다.
[야영이 하고 싶어서요.]
‘미친놈.’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이 상황에서 야영을 할 생각을 할 리 없다.
[주불은 거의 진화되었다고 하더니. 다시 살아났나 보군. 쯧.]
현천이 걱정스러운 듯이 혀를 차며 말했다. 현천의 말대로 지금 이 산은 하늘개의 짓으로 추정되는 방화로 인해 피해가 심한 곳이었다.
계방산 입구부터 중턱에 다다를 때까지는 멀쩡한 나무가 빼곡했지만, 공기는 탄내가 섞여 매캐했다. 그리고 잠시 쉬어 가는 이곳부터는 목이 따가울 정도가 되었다. 아까부터 묵범이 코를 킁킁거리는 것도 탄내 때문인 듯했다.
도화는 가방에서 마스크를 꺼내 썼다. 숨을 못 쉴 만큼은 아니었지만, 마스크를 쓰니 확실히 숨쉬기가 편해졌다. 그런 도화를 본 묵범이 앞발로 자신의 입을 툭툭 치며 말했다.
“제 것은 없습니까?”
“이게 네 주둥이에 맞을 것 같아?”
“흠…….”
도화가 쓴 마스크를 빤히 보던 묵범은 실망한 기색을 역력히 보이며 몸을 돌렸다. 마스크는 호랑이로 변한 묵범이 쓰기엔 너무 작았다.
“지금부터는 불을 피해 달려야 하니 쉬는 지점 없이 바로 정상으로 갈 겁니다.”
그는 도화가 올라타기 쉽게 몸을 숙이며 말했다. 묵범의 등에 올라타던 도화의 눈에 까만 것이 묻어난 자신의 손이 들어왔다. 무엇인지 찾아볼 필요는 없었다. 불에 탄 나무에서 떨어져 나온 재였으니까. 바람을 타고 함께 검은 재가 날아다니다 묵범의 털에 붙은 것이다.
묵범의 등을 손으로 스윽 문질러 보니 손바닥 전체가 시커멓게 변했다. 이거 다 재인가?? 손바닥과 묵범의 털을 내려다보는 도화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잠시 생각에 잠긴 도화는 묵범의 등을 탁탁 쳤다.
“왜 그럽니까?”
“잠깐만 멈춰 봐.”
묵범은 도화의 요구대로 멈췄다. 그리고 도화가 내리려고 하자 알아서 먼저 몸을 낮춰 주었다.
“화장실이 급한 거라면 저쪽, 바위 뒤에서—.”
“잡소리 하지 말고 머리나 숙여.”
“?”
묵범이 커다란 머리를 갸웃하더니 순순히 머리를 숙였다. 도화는 호랑이 머리에 비스듬히 씌워진 흑립을 살짝 들어 그 속에 뜯지 않은 새 마스크 하나를 집어넣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짐승의 커다란 눈이 물음표를 품고 깜빡였다.
“인간으로 돌아오면 써.”
자신의 흑립 속에 넣어 준 게 마스크란 것을 알아챈 묵범의 눈이 더욱 커졌다. 그리고 두 눈을 반짝이며 도화의 얼굴에 머리를 불쑥 들이밀었다. 킁, 하고 숨을 내쉬자 뜨끈한 콧바람이 마스크를 쓴 도화의 얼굴을 간지럽혔다.
“뭐, 뭐 하는 거야. 저리 안 비켜?”
하지 말라고 손으로 얼굴을 밀자 손바닥이 축축해졌다. 밀어낸 곳이 하필이면 호랑이의 크고 축축한 코였다.
“…….”
콧물인가? 그건 아닌 거 같은데…. 하지만, 코에서 나온 거니까 콧물 아닐까?
도화가 심각하게 고민하는 사이 묵범은 고맙다며 혀로 도화의 얼굴을 날름 핥았다. 크고 뜨겁고 거친 혓바닥이 도화의 뺨과 마스크를 축축하게 적셨다.
“…….”
이건 침이다. 코에 저거는 콧물인지 아닌지 확실하진 않지만, 이게 침인 것은 확실하다. 질끈 눈을 감은 도화의 양미간이 깊게 패이고 일그러졌다.
“자, 정상까지 단번에 갑시다.”
도화가 화를 낼 틈도 주지 않고 묵범이 네 발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길고 두꺼운 꼬리로 도화를 감아 등 위로 올렸다. 졸지에 장난감처럼 덜렁 들려 이동된 도화는 말없이 새로운 마스크로 바꿨다. 마스크를 넉넉히 가져왔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묵범의 침으로 축축해진 것을 계속 쓰고 다닐 뻔했다.
묵범이 위로 달릴수록 얼굴에 부딪히는 바람이 화기를 품어 뜨겁다. 어제 뉴스를 봤을 때부터 오늘 계방산 입구에 도착할 때까지 도화의 신경은 온통 화마에 피해를 입었을 산짐승들에게 쏠려 있었는데. 지금은 머릿속이 온통 묵범으로 가득 찼다.
그리고 묵범의 등을 타고 산을 달릴 때부터 기분이 이상하긴 했다.
‘질척대는 건 인간 모습이나 짐승 모습이나 여전하긴 한데…. 그래도 호랑이 쪽이 좀 고분고분한 느낌이란 말이야.’
그래. 그래서 기분이 이상했던 거야.
도화는 아까부터 계속 신경 쓰였던 묘한 기분이 처음 보는 묵범의 본 모습과 평소와 달리 고분고분한 행동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거대하고 위협적인 육식동물이 제 말을 순순히 듣는 건 예상치 못한 뿌듯함을 느끼게 했다.
[이봐, 도화. 묵범은 말 못 하는 짐승이 아니라 사람이야.]
도화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단번에 파악한 현천이 정신 차리라며 조언했다. 그러나 함부로 범접 못 할 맹수를 컨트롤한 성취감에 빠진 도화의 귀에 들릴 리 만무했다.
[얘가 원래 이런 놈이 아니었는데…. 이상한 놈과 붙어 다니다 보니 똑같이 이상해진 건가.]
현천이 한탄해도 도화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현천은 묵범이 도화에게 얼굴을 들이밀어도 제대로 화를 내지 않을 때부터 도화가 수상했다. 그래도 그건 얼굴을 밀어내기라도 했지. 얼굴을 온통 침질을 해 놨는데 아무 말도 없다는 건 정말 심각했다.
‘설마 저자의 꼬임에 넘어간 건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현천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도화는 묵범과 눈만 마주쳐도 질색했었다. 게다가 현천은 묵범과의 첫 만남이 어땠는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걸 당사자인 도화가 잊었을 리는 없고.
그렇다는 것은…….
[도화. 설마 자네 취향이 사람이 아니라 짐승인 것은— 억!!!]
도화의 주먹이 매섭게 현천이 들어 있는 바지 주머니에 내리꽂혔다.
[뭐라는 거야. 고철 덩어리가. 정신 못 차릴래?]
[하지만, 그렇잖나! 왜 범으로 변한 묵범에겐 얌전한 건데?]
[덕분에 산 정상까지 쉽게 올라가니까 답례로 준 마스크일 뿐이야. 화도 두어 번은 참아 주는 것이고.]
[그, 그렇군.]
현철은 도화가 다시 굳게 말아 쥔 주먹을 흔들자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럼 그렇지. 홍도화가 묵범과 쉽사리 친해질 리 없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