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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도화-52화 (53/146)

52화

설마 했는데 정말 하늘개가 방화범이라니.

도화는 만나 보지 못한 하늘개의 무모함에 혀를 내둘렀다. 뉴스 화면으로만 봐도 피해가 어마어마했다. 저 정도 규모라면 영수직 박탈뿐 아니라 귀물로 전락해도 할 말이 없다.

묵범도 도화와 생각이 같았는지 눈살을 찌푸리며 한탄하듯 말했다.

“말이 영수이지, 하늘개에게 홍선紅扇이 없으면 그저 귀여운 삽살개일 뿐입니다.”

“삽살개?”

“네. 북실북실한 털이 귀엽긴 한데… 성정이 매우 불같아서 툭하면 홍선으로 불을 내곤 했습니다.”

“홍선이 뭔데.”

“불을 뿜는 부채입니다. 천지왕께서 이렇다 할 능력이 없는 삽살개를 불쌍히 여기시어 하사한 신물인데, 추운 겨울에 마시멜로를 구워 먹으면 세상 그렇게 말캉하고 달콤할 수가—.”

“잠깐만.”

도화가 옆으로 새는 묵범의 설명을 뚝 끊었다. 그리고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묵범을 불렀다.

“너…….”

“왜 그럽니까?”

모니터에 그어진 붉은 선을 문지르는 도화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매직으로 그어 댔으니 당연히 지워질 린 없었다. 아무것도 묻어나지 않는 깨끗한 손끝을 확인한 도화는 그대로 묵범의 멱살을 쥐고 끌어올렸다.

“남의 모니터에 매직으로 낙서를 한 미친놈은 머리를 날려 버려도 되겠지. 안 그래?”

“아… 저게 매직이었군요. 흠. 하나 새로 사 드리지요.”

“새로 사 준다고?”

당장 묵범의 목을 어찌해 버릴 것처럼 날이 서 있던 도화는 새로 사 준다는 말에 기세가 반으로 꺾였다.

“서재도 큰데 모니터도 좀 더 큰 게 어떻겠습니까?”

“흠. 모니터 새로 골라서 알려 줄 테니까 결제는 네가 해.”

묵범은 도화가 이런 반응을 보일 때마다 참 다루기 쉽다고 생각했다. 보통은 남의 물건을 함부로 쓰고 망가트렸다는 것에 화를 내기 마련인데 도화는 새 모니터를, 그것도 더 좋은 것으로 사 준다 하니 언제 화를 냈냐는 듯이 얌전해졌다.

그리고 금세 하던 이야기로 돌아갔다.

“그런데 진짜 하늘개가 한 짓일까?”

“그건… 그렇다고 확답을 낼 순 없군요. 홍선은 본래 주인이 따로 있던 부채였으니까요.”

“본래 주인? 누군데?”

“음… 누구였더라. 너무 오래전에 들은 이야기라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도화는 누군가 홍선을 훔치든가 빼앗아서 저 난장을 부리고 있는 쪽으로 가능성을 열어 두었다. 영수가 선적에서 제외될 각오까지 하고 저러진 않을 것 같았다.

“아마 1박은 할 것 같으니 갈아입을 옷만 챙겨 두세요.”

“알았어.”

대충 내일 갈 임무에 대한 이야기는 끝이 난 것 같다. 도화는 어서 제집에서 나가라는 듯이 서재 문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 친절하게 현관문까지 열어 놨다. 도화의 의도대로 현관까지 나온 묵범은 신발을 신으며 도화에게 속삭였다.

“절 위해 이렇게 신경 써 주다니. 자꾸 이러면 저 오해합니다?”

오해? 뭔 오해?

이해 못 한 도화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묵범을 쳐다봤다. 까만 눈동자가 현관 조명 아래에서 흑요석처럼 반짝거렸다. 둘의 키는 엇비슷했지만, 묵범의 키가 반 뼘 정도 더 커서 도화의 시선은 묘하게 올려다보는 모양새가 되었다.

“제가 도끼병이 있어서요. 그러니 조심해요. 홍도화 씨.”

“……?”

도끼병은 뭐고 왜 조심을 하라는 건지. 설마 근처에 도끼를 든 도깨비가 있나?

도화는 자신을 죽이러 온 도깨비가 있다고 제게 경고를 준 건가 싶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도깨비의 기척이 느껴질 리 없었다. 도화가 차사국 소속이 된 이상, 도깨비들은 함부로 도화를 건들지 못하게 되었으니 당연했다.

“너, 이 자식. 아무것도 없는데 날 골탕 먹…….”

날 골탕 먹이는 게 그렇게 재미있냐고 화를 내려던 도화는 텅 빈 현관을 보고 말끝을 흐렸다.

‘가는 기척도 못 느꼈는데.’

심지어 도깨비가 나타났나 싶어서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는데 못 느꼈다. 도화는 차사의 흑립도 쓰지 않았는데 기척 한번 끝내 주게 잘 지우는 묵범이 신기했다. 본체가 호랑이라 그런가.

“내일은 하루 종일 산만 타야겠네.”

주방으로 간 도화는 저녁 먹은 그릇을 닦으며 내일 무얼 챙겨 가야 할지 생각했다. 우선 등산하기에 편한 운동복과 운동화. 갈아입을 옷, 어디서 잘지 모르니 세면도구도 챙기고. 흑립은 손가락만 튕기면 알아서 튀어나오니 도포만 챙기면 되겠지. 휴대용 보조배터리, 약간의 현금, 목이 마르면 마실 물…. 이 정도면 되려나.

방에 들어온 도화는 배낭을 꺼내 설거지를 하며 생각한 것들을 차곡차곡 넣기 시작했다. 그런데 예상보다 배낭 부피가 너무 커져서 모두 빼내고 다시 짐 정리를 하길 수차례.

아무리 짐을 정리해도 부피가 그대로거나, 더 늘거나를 반복했다.

“씻고 닦을 수건도 있어야 하고, 머리도 감아야 하니까 샴푸도 챙기고. 밤에 이동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 손전등이랑… 손전등에 넣을 건전지. 비가 올지 모르니까 우산과 우의. 그리고…….”

침대 위에 챙긴 것을 주욱 늘어놓고 이건 이렇고 저건 저래서 가져가야 할 이유를 대고 있을 때 밖에서 노크 소리가 났다. 이 집에서 노크를 할 사람은 담마밖에 없었다.

“삼촌.”

“어. 들어와.”

“이게 다 뭐예요?

방에 들어온 담마가 침대 위 상황을 보고 눈을 반짝였다. 도화가 대답 대신 한숨을 푹 내쉬자 담마는 침대 모서리에 앉았다.

“출장 가세요?”

“1박은 할 것 같으니 출장이라고 하는 게 맞겠지.”

“아~ 출장 갈 준비 중이셨구나. 그런데 뭘 이렇게 많이 챙겨 가요? 범 아저씨랑 같이 가는 거잖아요.”

싫어도 그 새끼랑 같이 가야 한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왔으나 담마 앞에서 험한 말은 쓰기 싫어 다시 삼켰다. 담마는 그런 줄도 모르고 침대 위에 늘어놓은 물건들을 손가락으로 하나씩 가리키며 정리하기 시작했다.

“설마 범 아저씨가 세면도구도 없는 숙소에서 자겠어요? 수건도 빼고 칫솔도 빼고…….”

“산으로 갈 거야.”

“산이요? 어디 산?”

산이란 말에 수건과 세면도구를 옆으로 빼내던 담마가 멈칫했다.

“강원도로 가서 설악산, 계방산을 찍고 전북으로 이동해서 덕유산, 지리산까지 돈다더군.”

“어… 그러면 이거 그냥 가져가시는 게 나을지도…….”

담마는 들었던 물건들을 얌전히 있던 자리에 되돌려 놓았다. 등산객이 많은 산이라면 대피소나 산장이 있기 마련이지만, 말 그대로 비바람이나 추위, 잠시 쉴 곳을 제공하는 정도라고 알고 있었다.

“혹시 밤에 추울지도 모르니까 모포라도 하나 챙겨 가세요.”

“…모포까지?”

도화의 질문에 담마는 휴대폰으로 대피소와 산장을 검색해서 보여 주었다. 그걸 본 도화는 잠시 고민하더니 갑자기 외출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어디 가게요?”

“모포 사러.”

* * *

다음 날, 아침.

“이게 다 뭡니까? 어디 가출이라도 합니까?”

묵범은 커다란 배낭을 멘 도화를 보고 물었다. 고작 1박인데 짐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보면 몰라? 산에서 1박 한다며.”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이건 좀 과하지 않습니까?”

“그러는 너는 산에서 그러고 자려고?”

어깨 너머로 불쑥 솟은 배낭을 멘 도화와 달리 묵범은 작은 사이즈의 보스턴 백 하나가 전부였다. 움직이기 편한 운동복과 운동화 차림을 보면 산에 가는 건 맞는 듯한데. 어제 본인이 말한 본격 등산을 해야 하는 산이 아닌 뒷동산으로 가볍게 산책하러 가는 차림새였다.

담마에게 다녀온다고 인사한 도화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묵범은 도화의 크다 못해 거대한 배낭을 보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제 짐은 미리 차에 실어 뒀습니다. 홍도화 씨 짐도 트렁크에 넣으세요.”

수건도 세면도구도 모두 한 명분만 챙겨서 같이 쓰자고 하면 거절할 생각이었던 도화는 저게 완전히 미친놈은 아니구나, 안도했다.

트렁크에 배낭을 실은 도화는 뒷좌석에 앉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조수석에 앉았다. 그런 도화를 묵범은 기특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계방산부터 먼저 갑니다. 운두령에서 출발해서 정상까지 최단코스로 찍고 설악산 대청봉까지 가면 오늘 하루 일정은 끝입니다.”

묵범은 오늘 할 일이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들은 도화의 표정은 그다지 좋진 않았다. 최단코스. 이 말이 마음에 걸렸다.

어제, 늦은 밤까지 계방산과 설악산 정상 등반 코스를 검색한 도화는 평범한 등산로를 이용해서는 절대 하루 만에 찍을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인간 기준 최단코스로는 말이다.

그런데 지금 묵범은 최단코스로 하루 만에 두 산의 정상을 찍는다고 했다. 과연 저 최단코스가 인간의 등산로 기준인 걸까.

[날아서 갈 셈인가.]

현천도 최단코스로 하루 만에 산을 두 개나 돌파한다는 말에 어이가 없는지 한 소리를 하며 끼어들었다. 그러자 묵범이 아쉽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쉽게도 제가 날개는 없어서요. 있다면 등에 태우고 날면 되는데. 대신 달릴 순 있습니다.”

“……?”

[?]

달려? 뭘?

도화와 현천이 동시에 물음표를 띄웠다. 묵범은 둘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제가 전에 말하지 않았습니까?”

“뭘?”

“전직 호랑이 산신이었다고요.”

“그게 지금 산 타는 거랑 무슨 상관이라고. 호랑이로 변해서 날 태우고 산을 달릴 것도 아니면서.”

“맞습니다.”

“?”

도화는 빈말로 던졌는데, 묵범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지금 날 등에 업고 산을 오르겠다… 이 말이야?”

묵범이 워낙 덩치가 크긴 하지만, 업어야 하는 상대는 묵범 못지않게 큰 도화다. 담마라면 모를까. 성인 남자 평균 신체보다 1.5배는 큰 도화를 업고 산책도 아닌 험준한 산을 하루 종일 오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무리 네가 진선이라지만, 날 업고 산을 오르는 건…….”

“호랑이라면 홍도화 씨 서넛 정도 태우는 건 거뜬하지요.”

“아, 호랑이…….”

호랑이라. 그건 가능하겠네. 호랑이니까. 호랑이.

“호랑이…?!”

“왜 그렇게 놀랍니까? 전직 호랑이 산신이었으니 당연히 호랑이로 변할 수 있지요. 아, 물론 산도 잘 탑니다.”

도화는 호랑이로 변한 묵범의 모습이 상상이 되지 않았다. 본 모습을 따로 가진 귀물은 많지만, 그들이 스스로 본 모습을 보여 주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도화도 얼마 전 담마의 까만 털 뭉치 모습을 본 게 처음이었으니까.

“인간들한테 들키면 어쩌려고.”

“그런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차사는 홍도화 씨가 유일할 겁니다.”

묵범이 손가락을 튕기자 머리에 흑립이 나타났다. 기척은 물론이고 모습까지 완벽하게 지워 주는 흑립이 있는데 무슨 걱정이냐는 말이었다.

도화는 호랑이가 흑립을 쓰고 산을 달리는 모습을 상상했다. 누가 들으면 상상력이 뛰어나니 소설이나 쓰라고 할 법한 장면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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