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산 정상에 가까워지자 멀쩡한 나무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온통 검게 타고 재가 되어 부러진 나무만 가득했다.
강풍에 진화가 힘들고 죽었던 불씨가 자꾸 되살아난다고 하더니, 정말로 그러했다. 묵범의 커다란 발이 검게 타고 그을린 흙을 한 번 밟고 지나가면 들썩인 흙 밑에 죽지 않은 다홍빛 불씨가 혀를 날름거리는 게 보였다.
“확실히 보통 불은 아닌 것 같네.”
묵범의 등에서 내린 도화는 흙 속에 살아 있는 불씨를 살펴보았다. 발로 밟고 수차례 비벼도 꺼지질 않는다. 이러니 물을 뿌려도 진화에 진척이 없지.
“홍선으로 일으킨 불은 맞는 듯합니다.”
사람으로 돌아온 묵범은 흑립 안에서 마스크를 꺼내 쓰며 말했다. 그는 나무에 붙어 있는 불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더니 이상한 일이라며 눈살을 찌푸렸다.
“하늘개의 성정이 불같긴 해도 이런 식으로 하계에 피해를 입힌 적은 없었는데…….”
“뭔가 이유가 있어서 이랬다는 건가?”
도화는 묵범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퉁명스럽게 물었다. 무슨 이유이든 간에 이런 식의 행패는 범죄다.
[하늘개가 한 짓이 아닐 확률도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현천도 한 가지 가능성을 내놓았다.
[홍선이란 부채. 하늘개만 쓸 수 있는 건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만… 하늘개한테서 홍선을 뺏을 수 있는 자가 과연 몇이나 될지 모르겠습니다. 개라서 그런가, 자기 물건 지키는 것은 끝내 주게 잘하거든요.”
묵범은 발로 일렁이는 불을 꾹꾹 밟으며 말했다. 하늘개가 특별한 능력은 없는 영수여도 만만치 않은 상대인 듯했다.
“그런데 이 불은 어떻게 꺼야 해? 물을 퍼부어도 안 꺼지는데.”
“하늘이 알아서 끌 겁니다. 우리는 불 끄러 온 게 아니라 불을 지른 놈의 흔적을 찾으러 온 거니 잘 살펴보세요.”
묵범은 마스크를 벗어 다시 흑립에 넣더니, 호랑이로 변했다. 그리고 커다란 앞발로 흙을 들추고 냄새를 맡으며 흔적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그의 콧김에 활활 타오르던 불이 주춤했다. 그걸 발로 밟아 꾹꾹 눌러 비비니 작은 불씨가 되어 더는 주변으로 번지지 않았다.
그래도 불씨가 완전히 꺼지진 않는 걸 보니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 끌 수 없겠구나 싶었다.
도화는 묵범의 뒤를 따라 위로 올라갔다. 사방이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활활 타오르는 불구덩이였지만, 묵범이 불을 밟아 준 덕에 안전할 수 있었다.
[안 뜨겁냐?]
그래도 날름거리는 불이 위험해 보였는지 현천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어. 괜찮아. 불은 묵범이 꺼 주고 있고 도포가 화기를 막아 주고 있거든.]
[탐나는 옷이구먼.]
쾌적한 온도 유지와 방호 기능이 불 속에서도 발휘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한 도화였다. 그렇게 정상까지 좀 더 가까워졌을 때, 하늘에서 후두둑 물방울이 떨어졌다. 요란스러운 비행 소리에 올려다보니 소방 헬리콥터가 진화를 위해 물을 뿌리고 있었다.
“천계 공무원들도 철밥통인가? 불을 끌 거면 빨리 끄든가. 피해가 커지는데 왜 일을 안 해?”
“철밥통이긴 하지요. 제가 저승에서 일을 해 보니 천계는 글러 먹은 것 같습니다. 일의 강도가 저승차사의 절반도 안 되는데 힘들다고 드러눕는 일이 다반사예요.”
“…그 정도야?”
“신선놀음이란 말이 왜 나왔겠습니까. 다 경험에서 나온 말입니다.”
아, 신선놀음이 그런 의미에서 나온 말이었어?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온다. 묵범의 말만 살짝 들었는데도 천계의 신선이 얼마나 느슨하게 일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에 비해 저승차사는 밤낮, 주말, 공휴일 할 것 없이 갈려 나가는 이미지다.
“저승차사가 된 걸 후회하는 것은 아니지요?”
“후회할 게 뭐 있어.”
기분이 좀 꽁기하긴 했지만,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선계의 철밥통 신선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후회해 봤자다. 하계에서 인간과 섞여 살아야 하는 도화에겐 오히려 차사국에 스카웃 된 게 천만다행이었다.
‘이제 슬슬 불래에 의뢰비를 입금할 때가 되기도 했고.’
동생을 찾는 데 쏟아붓는 돈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와 같다는 것을 알지만, 포기하지 않고 수백 년을 수소문했다. 거기다 스승을 죽인 남자에 대한 단서도 함께 찾다 보니 돈은 두 배로 도화의 통장을 옥죄였다.
스승을 죽인 것은 정체불명의 남자였지만, 어쩌면 살릴 수 있는 스승의 명줄을 완전히 끊어 버린 것은 저승차사다. 그래서 도화는 저승차사라면 치를 떨었다. 하지만, 묵범이 차사국 입사 제의를 했을 때 내심 환영했던 것은 사실이다.
저승차사가 싫은 것과는 별개로 돈은 싫지 않았으니까.
‘이번에는 아주 작은 단서라도 얻을 수 있었으면…….’
그렇게 묵범의 뒤를 쫓아 한참을 걸으며 주위를 탐색했다. 최초 발화 지점까지 도착했건만, 딱히 특별해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았다. 하늘개가 범인이라면 개털이라도 한 가닥 흘리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털은커녕 발자국도 찾지 못했다.
묵범은 도화에게 타라고 등을 내밀며 말했다.
“설악산으로 갑시다.”
“어.”
묵범을 타고 빠르게 하산하는 도화는 부디 하늘에서 이 불을 빨리 꺼 주길 바랐다. 안 보려고 애쓰긴 했으나 화마에 명을 달리한 산짐승들이 자꾸만 아른거렸다. 저런 작은 동물들은 죄를 짓지도 않았을 텐데. 부디 다음 생에는 이번 생보다 나은 삶을 살기를.
그렇게 한참을 달려 설악산에 도착한 도화 앞에 펼쳐진 광경은 계방산과 다를 게 없었다. 오히려 제일 먼저 불이 났던 곳이라 상황은 더 처참했다. 당연히 단서는 찾지 못했다. 있더라도 흔적마저 타 버렸을 테니까.
* * *
“진짜 여기서 야영할 거야?”
“당연하지요. 그러려고 이 무거운 짐을 매고 뛰어다닌 겁니다.”
“너는 이 상황에서 야영할 기분이 나냐?”
도화의 짜증 섞인 질문에 묵범은 뭐가 문제냐는 듯이 쳐다보았다. 그는 열심히 텐트를 세우고 있었다.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것 같군.]
현천마저 미쳤단 소리를 내뱉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사방은 다 타죽은 나무에 바닥도 온통 재투성이였기 때문이었다. 공기도 탄내가 작렬했다. 이런 최악의 환경에서 야영을 하겠다고 신나서 텐트를 치는 묵범은 누가 봐도 미친놈처럼 보였다.
거기다 한참 전부터 도화의 신경을 계속 긁고 있는 게 있었다.
“그 마스크. 좀 벗지?”
“홍도화 씨가 준 건데 왜 버립니까? 이거 쓰고 잘 겁니다.”
“허어?”
묵범은 도화가 마스크를 뺏어 갈까 봐 한 손으로 마스크를 붙잡고 텐트 설치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내일도 불난 산에 가야 하는데, 그때도 써야지요.”
“미쳤구나…….”
“그 정도로 당신이 준 걸 소중히 여긴다고 생각하세요.”
이건 또 무슨 헛소리지.
도화는 도통 말을 들어 먹지 않는 이해 못 할 묵범의 행동에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한껏 인상을 쓰고 손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자 묵범이 쯧, 혀를 차며 도화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커다란 손으로 도화의 머리와 목을 부드럽게 마사지해 주기 시작했다.
“무슨 수작질이야. 손 안 치워?”
“가만히 있어요. 이렇게 하면 두통이 사라질 겁니다.”
도화의 반항을 가볍게 제압한 그는 아예 도화를 끌어다 간이 의자에 앉히고 본격적으로 주물렀다.
“…….”
손 떼라고 해야 하는데, 분하게도 더럽게 시원했다. 그렇게 도화는 한참을 묵범의 손에 몸을 맡겼다.
조용히 도화의 주머니에서 나온 현천이 갸웃거리며 묵범을 관찰했다.
‘참, 신기한 놈이란 말이야.’
도화가 겉으로는 과묵해 보이지만, 속은 굉장히 예민한 것을 아는 현천은 묵범의 손에 표정이 풀어진 도화가 신기했다. 그리고 도화의 반항을 아무 타격 없이 흘려 넘기며 저리 만든 묵범은 더 신기했다.
‘뭐… 괜찮아 보이니까 문제 될 건 없겠지.’
묵범은 도화를 주물럭거려서, 도화는 안마가 시원해서 서로 만족한 것 같으니 굳이 끼어들어 그만하라고 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 * *
늦은 밤.
간단하게 배를 채우고 양치까지 한 도화는 잠을 자기 위해 자리에 누웠다. 묵범, 이 미친놈의 짐이 무거웠던 가장 큰 이유는 생수 때문이었다. 마실 물만 챙겨도 무거울 판에 씻을 물까지 챙겼으니 무거울 수밖에.
그래도 그 무거운 걸 본인이 다 매고 다녔으니 도화는 군소리 없이 묵범이 가져온 물로 양치에 세수까지 했다. 그리고 내일의 산행을 위해 자려고 했는데.
까드득.
“…….”
오도독.
“…….”
뽀시락.
“야.”
“음? 왜요? 잠이 안 옵니까? 팔베개하고 자장가라도 불러 드릴까요?”
“미쳤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도화가 베고 있던 베개를 묵범에게 냅다 집어던지며 말했다.
“양치까지 한 새끼가 사탕을 왜 먹어? 그것도 자려고 누운 놈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그래, 뭐 양치는 했지만, 뭔가 다른 일을 하는 중이었다면 출출함을 달래거나 집중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해 볼 순 있다. 하지만, 묵범은 자려고 누워 눈까지 감고 사탕을 까먹고 있었다. 그것도 시끄럽게 입 안에서 굴리고 씹어 가며.
“제 치아를 걱정해 주는 것이라면 괜찮습니다. 진선의 이빨은 튼튼하니까요.”
“내가 지금 네 이빨 건강 때문에 이러는 줄 알아? 잠을 못 자겠다고!!!”
도화의 짜증에 일어난 묵범은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해명했다.
“흠. 전 코 안 곱니다. 미리 걱정할 필욘 없어요.”
“사탕… 사탕… 사탕 처먹는 소리 때문이라고!!”
“아, 이거요?”
그에 묵범이 아~ 하고 입을 벌려 먹고 있던 사탕을 도화에게 보여 주었다. 반쯤 깨진 사탕이 텐트 천장에 달아 둔 랜턴 불빛에 비쳐 노랗게 반짝거리는 게 보였다.
“이거 홍도화 씨 때문에 먹는 건데?”
“뭐?”
묵범은 전혀 미안한 기색 없이 오히려 도화를 탓하기 시작했다.
“제 계획은 텐트 안에서 오붓하게 이야기를 나누다 잠드는 것이었습니다.”
“미쳤냐? 내가 왜 너랑 오붓하게 이야기를 나눠?”
“그러니까요. 홍도화 씨가 입도 뻥긋 안 하고 바로 자려고 눈을 감았잖습니까? 기껏 준비해 온 이야깃거리를 하지 못하니, 입이 근질거려서 사탕이라도 먹은 겁니다.”
묵범의 해명은 ‘그러니까 다 홍도화 씨 탓입니다.’로 마무리가 되었다. 도화는 어이가 없어서 짜증도 내지 못하고 벙찐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현천도 비틀거리는 꼴이 묵범의 또라이력을 감당하지 못한 듯했다.
“홍도화 씨는 자세요. 전 밖에서 사탕 좀 까먹다 자겠습니다.”
다행히 묵범이 사탕이 든 통을 들고 텐트 밖으로 나갔다. 도화는 저 자식이 돌아오기 전에 빨리 잠들 생각으로 누웠다. 혹시 잠든 사이에 무슨 짓을 할지 몰라서 묵범의 자리와 제 자리 사이에 현천을 푹 꽂아 놨다. 넘어오면 뒤진다는 경고의 표시였다.
안도하고 눈을 감은 도화는 5분도 되지 않아서 다시 벌떡 일어섰다.
와그작.
까드득.
부시럭.
산이 워낙 조용해서 그런지 밖에서 묵범이 사탕 먹는 소리가 여과 없이 도화의 귀에 흘러들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귀마개도 준비해 오는 건데.
극심한 후회를 하며 도화는 텐트 밖을 향해 외쳤다.
“시발. 그냥 들어와! 이 자식아!!!”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