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4
#24
다시 일어난 효원은 범익이 돌아오기 전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오후에 범익의 전화를 받았다. 그가 집 근처로 왔다는 말에 깜짝 놀라 나갔더니 커다란 짐 가방을 든 범익을 보게 되었다.
“…어, 어떻게 된 거예요?”
“집 나왔어.”
“네? 집을요?”
“나, 이사했어.”
그가 효원의 집 맞은편 현관문을 까딱였다.
“어어. 여긴 빈집이에요.”
“내 집이야. 두 집을 모두 샀거든. 혹시라도 내가 집을 나오게 된다면 네 앞집에 살려고 했으니까.”
“네에?!”
효원의 눈이 왕방울처럼 커졌다. 효원은 주위를 휙휙 둘러봤다. 한 층에 집은 단 두 채뿐이라 다른 사람들은 없었다.
서범익이 비밀번호를 누르며 효원에게 미소를 지었다.
“비밀번호 네 생일이니까 잊어버릴 일 없겠지?”
“버, 범익 씨, 도대체 이게… 어어.”
범익이 효원의 손목을 잡고 집 안으로 끌어들였다. 안으로 들어가자 효원의 집과 비슷한 가구들이 있었다. 처음부터 작정하고 준비한 모양이었다.
“진작에 독립했어야 했는데, 늦었지 뭐. 이제 누구 눈치도 보지 않고 편하게 사귈 수도 있고.”
“그,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회장님과 무슨 일 있었어요?”
“아버지에게 말했어. 파혼하겠다고.”
“……!”
효원의 심장이 벌렁거렸다.
‘파혼, 파혼이라고? 범익 씨가 파혼을 하겠다니…….’
효원은 호흡이 가빠졌다. 그는 회장과 싸우고 집을 나와 독립했다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이 집의 곳곳은 이미 효원의 흔적들로 가득했다.
언제 옮겼는지. 별채에 있던 효원의 그림 도구와 몇 가지 짐을 모두 이곳에 옮겨 놓았다. 눈가로 열이 몰렸다. 너무도 놀라고 기쁜 마음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파, 파혼이라뇨!”
“말 그대로야. 파혼하고 결혼은 너와 할 생각이니까. 설마, 나 가난뱅이 되었다고 차 버리는 건 아니겠지? 아버지 돈이 없어도 너 하나 먹여 살릴 능력은 충분하지만… 어?!”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효원은 그의 품에 와락 안겼다. 곧이어 어깨가 들썩거렸다. 효원의 울음이 터졌다. 대성통곡을 하듯 엉엉 울자 그가 당황하기 시작했다.
효원은 그의 어깨에 매달렸다. 그러자 그가 효원의 어깨를 으스러지게 안았다. 단단하고 따뜻한 품이 믿음직스러웠다. 그리고 효원의 차디찬 가슴을 따뜻하게 만들어 주었다.
이루지 못할 것 같았던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 같았다.
마치 마법처럼… 두 사람의 사랑이 맺어졌다.
* * *
그로부터 사흘이 지났다. 효원은 자신의 앞집에 서범익이 산다는 것을 이설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스폰서가 있다고 아는 이설에게 그 스폰서가 서범익이라는 말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분간 앞집에 누군가 사는 것은 비밀에 붙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효원의 하루는 예전과 달라졌다. 이제 범익의 집에 작업실이 마련되어 하루의 대부분을 그의 아파트에서 보냈다. 집에서 잠을 자는 척하다가 몰래 그의 집으로 건너갔고 새벽이면 다시 집으로 들어왔다.
그때,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아버지를 모시고 재활 병원에 간 간병인의 전화였다.
“왜요? 또 어디론가 가셨어요?”
- 어찌나 빠르시던지, 그래도 멀리 가시지는 않았습니다만, 자꾸 그곳으로 가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아… 번거롭게 해 드려 죄송하지만 아버지 잘 좀 부탁드려요.”
- 아닙니다. 제가 죄송하죠. 면목 없습니다.
간병인은 미안한다고 몇 번이고 사과를 했다. 요즘 아버지 증세가 더 심해졌다. 기억을 거의 다 잃었다고 생각했는데 예전에 살던 집은 어떻게 찾아가는 건지…….
아버지는 툭하면 예전에 살던 아파트로 갔다. 오래된 아파트는 최근 재건축을 시작했다. 예전에도 한 집 건너 한 집은 이사를 갔는데, 최근에는 다 이사를 간 듯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자꾸만 그 아파트로 가니 걱정스러웠다.
오래전 멈춘 기억에도 그 집에 대한 추억이 있으신 걸까 참으로 이상했다.
효원은 범익의 집에서 나와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올 때까지 텔레비전을 시청하기로 했다.
오후 3시 20분,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할 시간대가 아니라서 그런지 이곳저곳 채널을 돌렸다. 그리고 속보로 뜬 뉴스를 보았다. 재건축을 준비 중이던 아파트가 붕괴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뜬 아파트 이름은 놀랍게도 전에 살던 아파트 이름이었다.
왠지 기분이 싸했다. 지금쯤이면 간병인의 차를 타고 이곳에 오고 있을 아버지이지만, 계속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카메라가 익숙한 아파트를 스치자 잔털이 쭈뼛 솟았다. 아버지가 저곳에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효원의 눈동자는 불안하게 떨렸다. 그래도 혹시 몰라 계속 뉴스를 지켜봤다. 그때, 부상자 명단이 떴다.
[여기는 서울 ** 재개발 아파트 붕괴 현장입니다. 아파트 축지 대로 세워 둔 철근이 무너지며 근처에 작업하던 사람이 다쳤습니다. 사고의 원인은 소장의 과실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현재 사상자 명단이 나왔습니다. 최**(55세) 씨, 박**(47세) 씨가 현재 경미한 부상을 당해 병원으로 이송되었습니다. 그리고 공사 현장 근처를 지나가던 행인이 그 자리에서 사망해, 고려 병원으로 이송되었습니다.]
효원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섰다. 경악에 찬 눈동자로 벌벌 떨며 사망자의 이름을 확인했다.
이건욱(49세).
효원의 휴대전화가 시끄럽게 울부짖었다.
* * *
왜? 불길한 예감은 떠나지 않을까?
사고로 아버지를 잃은 효원은 망연자실했다. 결국 제 이름 한 번 불러 주지 않고 눈을 감은 아버지가 원망스럽고 미안했다.
장례식은 조용하다 못해 처량했다. 친척이 거의 없기에 부고를 보낼 곳은 몇 곳 되지 않았다. 과 동기들과 몇 안 되는 친척에게만 부고장을 보냈다. 효원은 거의 넋이 빠진 표정으로 멍하니 상주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현장에서 즉사한 아버지… 어떻게 이리 허무하게 죽을 수 있을까?
끝끝내 자신이 성공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어 버리다니…….
“아버지…….”
아버지에게 너무도 미안하고 죄송했다. 다른 사람 손에 아버지를 맡긴 저에게 화가 났다. 효원은 괴로움에 스스로 벽을 향해 머리를 박았다.
쿵쿵.
효원이 벽에 머리를 박는 행동을 하자 곧바로 서범익이 달려왔다. 재빨리 효원의 행동을 나무라며 위로했다.
“이러지 마. 사고였잖아? 아버님도 네가 이러는 모습을 보면 괴로워하실 거야.”
“…난, 난… 흐흑.”
“괜찮아. 다 괜찮아질 거야.”
범익은 효원의 몸을 부드럽게 안고 다독거렸다.
“뭐 좀 먹자. 이렇게 안 먹으면 병 나.”
“먹고 싶지 않아요.”
효원은 휴대폰을 쳐다봤다.
“네 누나는 연락 안 되는 거야?”
“어디서 뭘 하는지… 모르겠어요. 아버지 소식을 못 들은 건지.”
이설이 잠적했다. 도대체 어디서 뭘 하는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외박을 해도 하루가 지나면 꼭 집으로 들어왔는데, 이번에는 하루 내내 연락이 안 되었다.
할 수 없이 효원은 그녀의 소속사까지 전화를 했다. 효원은 계속 문을 쳐다보며 애타는 마음으로 그녀를 기다렸다.
범익은 효원을 억지로 식탁에 앉게 한 후, 밥에 국을 말아 주고 일어섰다. 마침 주문한 영정 사진이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이 마치 상주인 양 행동했다. 빈소와 영정 사진을 비롯해 장례 일정을 처리했다. 빈소에 꽃을 화려하게 꾸며 두었다. 조문객이 적어서 그렇지, 화려함은 재벌가와 다르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는 상주복을 입었다. 그는 이 자리가 자신의 자리가 맞다고 주장했다. 실컷 울었는데, 또다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효원아!”
그때, 누나의 목소리가 정수리에서 울렸다.
“누나……!”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대표님께 전화를 받았어!”
“그게… 아버지가 또 그 아파트로 가서.”
“뭐? 도대체 아무리 치매에 걸려도 어쩜 위험한 자리도 몰라?”
이설은 영정 사진을 보더니 털썩 주저앉았다. 이설은 입술을 아득 물고 사진을 쳐다봤다.
“이렇게 갈 거면서, 왜 그렇게 가족들을 힘들게 해?”
“누나.”
“…….”
이설은 깊게 한숨을 쉬며 영정 사진을 쳐다봤다. 한참을 자리에 앉아 있던 이설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다 굳었다.
효원은 낭패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놀란 눈으로 상복을 입은 서범익을 봤기 때문이었다.
“누, 누나.”
“저, 저 남자가. 왜 상주 노릇을 하고 있는 거야?”
“그게…….”
범익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매끈한 그의 인상이 찌푸려져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곧 평소와 같은 페이스를 표정으로 이설에게 다가왔다.
“효원의 애인입니다.”
* * *
이설을 본 서범익은 눈을 의심했다. 6개월 전, 아버지가 산 여자 오메가였다.
‘그 오메가가 왜 여기에!!’
범익의 눈가가 가늘게 떨렸다.
‘이설, 그 오메가의 이름이 이설었던가?’
서범익은 빈소 앞에 앉은 여자를 보며 입술을 비틀었다.
‘하필, 이런 우연이 있다니… 왜 그 오메가가 효원의 누나야?!’
범익은 속으로 짜증스러움을 토했다. 그리고 바로 이설을 주시했다. 뻔히 제가 누구인지 알면서 효원 앞에서 입을 다물었다. 돈을 주고 몸을 팔았던 것을 말하지 않았다.
‘젠장. 그래, 지금 네 동생이 사귀는 사람이 네가 몸을 팔았던 알파라고 말할 수 없겠지… 아무리 뻔뻔해도 말이야.’
그것을 까발려 봤자 그녀에게도 좋을 게 없었다. 아니, 만약에 말해도 자신은 효원에게 떳떳했다.
서범익은 이설에게 손가락 하나 건들지 않았다. 상관없었다.
상복을 갈아입은 이설이 복도로 나오자 그녀를 힐끔거렸다. 붉은 립스틱이 굉장히 거슬렸다. 아버지 장례식에 붉은 립스틱이라니 어울리지 않았다. 빠득 이가 갈렸다.
“서로 입을 다무는 것이 좋겠지?”
“아직까지는요.”
이설이 피식 웃었다.
“행동은 자유지만, 혹여 효원 앞에서 입을 함부로 놀리지 마.”
저도 모르게 음산한 음성이 튀어나왔다. 그러자 이설의 몸을 움찔했다. 범익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일종의 경고였다. 자신이 이설을 샀다는 것을 함구하라는.
일순 날카로운 시선이 이설에게 콕 박혔다. 우성 알파의 기운이 강하게 뿜어지자 그녀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그러나 그녀는 생각보다 독종이었다. 떨리는 다리에 힘을 주며 느긋하게 서범익의 시선을 맞받아쳤다.
“좋아요. 저도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으니까요.”
이설이 피식 웃으며 몸을 돌렸다. 대리석 바닥에 이설의 구두가 부딪쳐 또각, 또각, 울렸다.
범익은 상복 안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찾았다. 담배를 빼 물었으나 불을 붙이지 않고 손에 짓이겼다. 붉은 입술 위로 이설의 욕망을 봤기 때문이었다.
“보통이 아니야. 저 여자…….”
처음부터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오메가들은 당연했고 알파들도 서범익 앞에 서면 눈치를 보며 말을 더듬거렸다. 그가 지닌 압도적인 분위기에 주위 사람들 모두가 그렇게 행동했다.
그게 그리 기쁘지는 않았다. 적당한 거리에서 타인을 관찰하고 그들이 무슨 욕심으로 자신에게 접근하는 것을 빨리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효원의 옆에서 그를 걱정하면서도 그녀의 눈빛은 서범익을 힐끔거렸다. 뭔가 약점을 쥐고 있다고 생각하니 순수한 의도로 보이지 않았다. 범익은 그녀의 눈빛에서 탐욕을 본 이상 거리를 두어야 했다.
‘그래도 저 녀석… 등이 쓸쓸해 보여.’
마침 소식을 들은 우혁이 도착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축 늘어진 효원의 뒷모습을 보니 마음이 흔들렸다. 이설을 경계하다가도 그의 혈육이라는 사실에 다시 마음이 약해진다.
효원과 결혼하면 처형이 될 사람이었다. 과거 저와 어떤 관계였던, 결혼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니, 효원을 위해서라도 그녀와 잘 지내야 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부모를 모두 잃은 효원에게 남은 가족이라고는 단 한 사람뿐이었다. 그 혈육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한 발 뒤로 물러나야했다. 많은 사람 중에 이렇게 더럽게 엮이기도 힘들 것 같았지만, 범익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순간, 서범익의 시선은 우혁에게로 향했다. 세상을 다 잃은 듯 늘어진 효원의 어깨를 우혁이 토닥거렸다. 물론 그가 효원에게 다른 감정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속에서 울화가 치밀었다.
아무리 보기 싫어도 아버님의 장례식이니 꾹꾹 참았다. 우혁은 저쪽에 선 서범익의 눈치를 보다 효원에게 숟가락을 내밀었다. 그러다 한 번씩 눈이 마주치면 파르르 떨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범익이 효원의 앞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효원은 여전히 입을 열지 않았다. 하루 종일 먹지도 않고 울었던 효원의 눈동자는 핏발이 잔뜩 솟았고, 상당히 지쳐 있었다. 현재 효원의 체력은 약해질 대로 약해진 상태라 그 몸으로 밤을 샌다는 건 무리였다. 식사라도 잘 챙겨 먹어야 하는데 효원은 거부만 하고 있었다.
“특별히 맛집에서 사 온 죽이야.”
“고마워요… 나중에 먹을게요.”
범익도 효원을 먹이려고 노력해 봤으나, 모두 헛수고였다. 어제는 억지로 먹였다가 구토까지 했기에 잠자코 기다렸다. 다행히 물을 마셔 탈수 증상은 없었으나, 피곤에 지친 효원의 몸에는 밥보다 잠이 보약일 듯했다.
“먹는 것보다 한숨 자는 것이 더 좋지. 여긴 내게 맡기고 자.”
“아니요…….”
잠도 안 자고 먹지도 않으니 범익의 속은 시커멓게 탔다. 그렇게 두 남자를 애를 태우고 있는 통에 이설이 자리에 앉았다. 이설을 보는 즉시 효원의 표정이 환하게 풀렸다. 곧이어 이설이 조금이라도 먹으라고 죽을 떠 입가에 대자 놀랍게도 입술이 열렸다.
“그렇게도 고집부리더니, 누나가 주는 건 먹는 거야?”
“죄송해요.”
범익은 이설에게 질투심을 느꼈다. 그래도 내내 울던 효원은 이설이 오자 안심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혈육이라서 그런가?’
몹시 거슬렸지만, 이설이 죽을 억지로라도 먹였기에 가만히 두고 봤다. 그래도 양심은 있었는지…….
마치 아기에게 이유식을 먹이듯 먹여 주는 것을 범익은 멍하니 지켜봤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시간은 벌써 자정이 넘었다. 드문드문 앉아 술을 마시던 조문객의 발걸음도 끊기자, 이설은 상주 방으로 들어갔다.
“내일 발인이니 일찍 자야겠어. 단독 방 혼자 써도 되겠죠?”
“물론.”
“효원아 너도 좀 자, 아니면 누나랑 잘까?”
효원을 이끌고 상주 방으로 들어가려는 이설의 손을 서범익이 뿌리쳤다. 거의 반사 작용이었다. 범익은 그녀에게 신경이 곤두세웠다.
“남자들이야 아무 곳이나 누우면 방이지.”
“뭐, 그러던가요.”
이설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그대로 자리를 털고 일어나 상주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모습이 사라지자 대화가 끊겼다. 넓은 홀에 발인에 관을 들어 주기로 한 이들도 각자 자리를 잡고 누웠다. 내일 발인이니 일찍 잠을 자려는 것 같았다.
허기를 겨우 채운 효원도 피곤한지 눈이 가물가물했다. 앉아서 고개를 푹 숙인 그를 보다 못한 범익이 다리를 내밀었다. 효원은 그를 거절하지 않고 범익의 허벅지에 누워 잠이 들었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때,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우혁이었다.
“자신 있습니까?”
“물론. 그쪽이 걱정할 일은 아니야.”
서범익은 단언했다.
“뒤로 도는 소문이 좋지 않습니다. 아무리 숨긴다고 해도 언론을 막는 건 한계가 있습니다.”
“내내 궁금했는데, 왜 이렇게 효원에게 관심이 많지?”
“나를 보는 것 같았으니까요.”
“뭐?”
“효원을 보면 내 자신을 보는 것 같습니다. 오르지 못할 사랑을 하는 건 둘 다 마찬가지니까요.”
“나도 들었지. ** 기업 아들, 승주와 사귀게 되었다는 것.”
“빠르네요.”
“원래 사교계에 퍼지는 소문은 삽시간이지. 아마도 내가 효원을 사귄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을 거고.”
“그래서 약혼 파기를 못했습니까?”
“최소한의 예의를 차리는 것뿐이야. 그 여자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했으니까.”
범익은 약혼녀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파혼을 요구했다. 그녀는 생각보다 충격을 받지 않은 것 같았다. 어차피 정략결혼이었으니 연인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지켜 주십시오.”
“지킬 거야.”
“효원이 옆에서 고생한 거, 제가 다 봤습니다. 아프게 하지 말아주세요.”
“신경 꺼. 내 사랑은 내가 지킬 테니까.”
범익은 웅크린 자세로 자는 효원의 손을 꽉 쥐고 있었다. 서범익은 살며시 주먹을 풀어 제 손에 깍지를 끼웠다. 그리고 양복 재킷을 벗어 효원에게 덮어 준 뒤, 종이컵에 채워진 소주를 들이켰다. 서민들의 술이라 불리는 소주를 처음 먹었는데 생각보다 입맛에 맞았다.
둘은 각자 소주 한 병씩을 두고 잔을 채웠다 마시기를 반복했다. 어울리지 않은 술자리를 이어 갔다.
“나도 축하해 주지. 그쪽도 평탄치는 않을 거야.”
“그래요. 힘내야죠.”
승주도 집안에서 정해 놓은 상대가 따로 있다고 들었다. 그러나 아직 약혼을 강요하지는 않고 있었다. 그래도 JK 그룹만큼 꽤 시끄럽다고 했다.
피식, 서범익의 입술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그까짓 돈이 다 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