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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멸의 늪-23화 (23/40)

chapter 23

#23

서범익의 단단한 페니스가 비부를 뚫고 들어왔다.

“으읏… 아, 아파…….”

페니스가 삽입되는 통증에 효원은 침대 시트를 힘겹게 쥐었다. 그러나 통증이 쾌감이 바뀌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미끄러지듯 허리를 잡은 강한 손이 효원의 엉덩이를 위로 향하게 했다. 주름진 항문이 찢어질 듯 팽팽하게 벌어졌다.

“아윽! 하하악-!”

“좋아… 효원아. 으읏.”

등 뒤에서 서범익이 힘껏 허리를 튕겼다. 좁은 구멍이 서범익의 페니스 두께만큼 벌어지자 그는 그걸 놓치지 않고 거칠게 파고들었다.

효원은 다시 손등이 하얗게 질릴 만큼 시트를 휘어잡았다. 뒤에서 박아 대는 힘에 침대 헤드에 머리를 박을 듯해 두 손으로 헤드를 잡아 흔들리는 몸을 지탱했다. 퍽, 퍽, 퍽, 엉덩이에 까슬한 음모가 비벼졌다.

강하게 박아 넣을 때마다 효원의 페니스 또한 정신없이 흔들렸다. 엉덩이가 아플 정도로 거세게 박아 넣는 행위에 효원의 입에서는 연신 교성이 터졌다.

“아윽, 아, 아읏. 으읏. 읏-!”

손이 미끄러지고 상체가 침대로 떨어지면서 엉덩이가 하늘로 솟자 서범익의 페니스가 더욱 커졌다. 콘돔을 끼우고 있기에 그의 쿠퍼액은 나오지 않았지만 질척이는 소음은 평소보다 더 컸다. 스스로 젖어 가는 구멍 내부 때문이었다.

그런 자신의 몸을 느끼며 효원은 눈을 꽉 감아 버렸다. 알파 없이 못 사는 오메가가 된 것 같아 두려웠다. 달콤한 알파의 페로몬과 육체에 익숙해져 제 삶이 송두리째 흔들릴까 봐 겁이 났다.

“효원아. 아아, 조여… 크읏. 헉, 헉, 헉…….”

뿌리까지 박힌 거대한 살덩이가 끝도 없이 앞뒤로 움직였다. 효원의 포인트를 그의 페니스가 찌르자 전기에 감전된 듯 파르르 떨었다.

범익의 손이 팽팽하게 솟은 효원의 페니스를 아프게 잡고 흔들었다. 예민한 귀두를 손톱을 꾹꾹 누르며 거칠게 피스톤질을 하자 눈앞에 섬광이 터졌다.

서범익의 거친 몸짓에 따라 귀두에서 애액이 뚝뚝 흘렀다. 얕고 빠르게 찔러 대던 서범익이 포인트 주변을 찔러 댔다. 그러자 애널이 자연스럽게 수축되며 뜨거운 페니스를 꽉꽉 조였다. 깊숙이 박혀 있는 페니스에 미칠 것 같은 쾌감이 닥쳤다.

“아읏-, 아앗-!”

참을 수 없는 사정감에 효원이 엉덩이에 힘을 꽉 주었다. 그와 동시에 그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고 움직임도 멈췄다.

강하게 박아 넣은 자세에서 그가 사정감의 여운을 즐기듯 뜨거운 호흡을 뱉었다. 등 뒤로 커다란 덩치가 쓰러졌다.

* * *

다리에 힘은 잘 들어가지 않았고, 엉덩이가 아파 절뚝이며 걸었다. 항문에 열상을 입었는지 온통 후끈후끈한 감각이 떠나지 않았다.

“후… 오늘은 꼼짝없이 침대에 누워 있어야겠어.”

호텔에서 나와 범익은 효원을 뒷문에 내려놓고 회사로 쌩하니 달려갔다. 효원은 집으로 가기 전, 몇 가지 물건을 챙겨서 갈 생각이었다.

허리 통증에 인상을 쓰며 문을 열고 들어섰다. 별채 건물 거의 대부분을 효원이 혼자 썼다. 사용인들은 대체적으로 이른 아침이나 저녁에만 있어서 편하게 드나들어도 되었다.

삐걱, 삐걱.

오늘따라 나무 계단의 소리가 크게 들렸다.

‘파스가 남아 있던가?’

아무래도 파스와 진통제가 필요할 듯했다. 밤새도록 교성을 질렀더니 목도 따갑고 아팠다.

딸깍-

방문을 열자마자 오후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는 빛 때문에 눈이 부셨다. 환한 빛에 눈을 잠시 감았다 떴을 때 어떤 남자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

그는 서 회장이었다. 그리고 그가 쳐다보고 있던 것은 범익의 누드화였다.

* * *

부드러운 융단에 더 부드러운 깃털로 만들어진 슬리퍼가 날카로운 가시처럼 변했다. 엉덩이에 깔려 있는 토끼털로 짜인 방석도 아프긴 마찬가지였다.

상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위압감을 풍기지도 않았다. 하지만 효원은 그 눈빛 하나에 몸이 묶인 것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그의 시선은 올무라도 된 듯 효원을 죄고 있었다. 효원은 계급 사회에서 가장 힘없고 약한 부류, 중산층은커녕 서민층에도 낄 수 없는 가난한 화가 지망생이었다.

빛이 절실했다. 그러나 그는 서재로 효원을 데려간 후에도 불을 켜지 않았다. 가장 상석에 앉아 근엄하고 무서운 표정으로 효원을 쳐다볼 뿐이다. 떨리는 손등으로 담배 연기가 훅, 끼쳐왔다. 어둠 속에 남아 있는 검은 빛깔이 효원을 향해 물었다.

“내 눈으로 본 게 뭐냐?”

그 물음에 답을 할 수 없었다. 그의 아들을 그린 누드화를 들켜 버린 마당에 변명을 한들 부질없었다.

마음이 왜 자꾸만 기울어지는 걸까? 자신도 확실하게 말할 수 없는 마음이라 뭐라 말할 수가 없었다.

효원의 마음이 갈림길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힘이 빠졌다. 얼굴이 방열판 위에 올려놓은 것처럼 뜨거웠지만 참고 앉아 있었다.

“한 가지만 묻겠네.”

“…네, 어르신.”

“내 아들을 사랑하나?”

그가 낮은 톤으로 묻자 효원의 몸이 움찔 떨렸다. 누드화를 그린 것뿐인데, 그것만으로 사랑한다는 감정이 드러났을까?

“무슨 오해를 하시는 것인지 모르겠어요.”

“누드화 속에 담긴 범익이 표정, 그리고 그 그림의 색감. 나도 그림 보는 눈이 있지. 화가의 감정, 충분히 느꼈네.”

“……!”

쿵, 심장이 떨어졌다.

‘내 감정이… 그림에 묻어났나?’

그의 모습을 그릴 때 행복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화폭에 담는데 어찌 마음이 스며들지 않을 수 있을까.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으나, 회장은 어림없다는 듯 효원을 쏘아봤다.

효원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어떤 말을 해도 그는 봐주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다음 달로 6개월이 되는군. 치료 기간을 최대 2년으로 잡았지만, 범익이도 많이 안정된 것 같으니 떠나게.”

“네?”

“6개월. 계약을 단 6개월로만 정리하자는 뜻이지. 왜, 시간이 더 필요한가?”

“아직 병이 나았다고 볼 수 없잖아요?”

“내 아들의 병은 내가 더 잘 알아. 자네가 걱정할 것이 아니란 말이네!”

“…….”

속이 타들어갔다. 그가 하는 말이 칼끝이 되어 효원의 가슴을 후벼 팠다. 언젠가 이런 말이 나올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효원은 눈꺼풀을 깜빡일 수조차 없을 만큼 충격을 받았다.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잔금 5억을 넣어 주지. 그거 받고 떠나게. 녀석이 찾지 못하는 곳으로.”

“…아.”

효원은 손을 움켜쥐었다. 황망한 표정으로 회장을 바라봤으나 그는 마치 더러운 창부를 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이제 효원이 필요 없다는 듯 턱을 세웠다.

순간, 효원은 깨달았다. 효원의 삶은 좌지우지할 사람은 서범익이 아닌 바로 눈앞에 남자였다. 서 회장은 서범익의 누드화를 탁자 위에 올렸다. 그러더니 작은 칼로 누드화를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두 사람의 마음이 담긴 그림을 효원의 눈앞에서 훼손했다.

그림이야 얼마든지 다시 그릴 수 있다. 그러나… 효원의 찢어진 자존심은 그 어떤 무엇으로도 회복할 수 없었다.

“우욱…….”

밖으로 나오자마자 효원은 건물 모퉁이에 주저앉아 구역질을 했다.

“우욱, 우욱!”

그렇지 않아도 몸이 아픈데, 정신적으로 혹사를 당하자 처참하게 무너졌다.

효원은 이를 악물고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효원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불이 꺼진 별채로 처벅, 처벅, 향했다. 유일하게 쉴 수 있는 방… 그 방으로 빨리 가고 싶었다.

세상에서 불필요한 존재가 된 듯한 느낌이 삽시간에 밀려왔다.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렀다. 미친놈처럼 웃고 울기를 반복했다.

시야가 흐릿해지더니 갑자기 시야가 점멸했다.

어쩌면 이렇듯 정신마저도 미약한 것일까? 추웠다. 턱이 달그락달그락 떨렸다. 봄이 되려면 아직 멀었던 것 같았다. 효원의 몸은 한겨울 눈보라를 맞은 듯 굳어 갔다.

* * *

“으으… 으…….”

범익은 경호원의 전화에 만사를 제쳐 놓고 달려왔다. 별채 문을 열자 효원의 팔에 두 개의 링거 팩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게 보였다. 극심한 스트레스와 피로가 겹쳐 결국 탈이 난 모양이었다.

효원의 온몸이 불덩어리였다. 끙끙 앓고 있는 몸이 간헐적으로 떨린다. 서범익은 효원의 이마에 손을 짚었다.

“이렇게 아픈데… 섹스에 미친놈도 아니고…….”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았다. 술을 마신 효원을 상대로 너무도 제 욕심을 채웠던 게 미안했다. 매일매일 섹스에 미친놈처럼 덤볐으니 탈이 안 나는 것이 이상한 일이었다.

“젠장… 아픈 건 못 보겠어.”

경호원이 뒤뜰에 쓰러진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큰일이 날 뻔했다. 추운 날씨는 아니었지만, 비가 내려 효원의 몸이 흠뻑 젖은 채 벌벌 떨고 있었다고 한다.

서범익은 난방을 좀 더 세게 틀었다. 후끈후끈한 열기가 맴돌았지만 그래도 효원은 추은 듯 간헐적으로 떨었다. 눈가는 벌겋게 익었다.

범익은 망설이지 않고 옷을 벗었다. 그리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시트 속에 들어갔다. 팔을 둘러 편하게 머리를 감싸고 한 손으로는 효원의 허리를 단단히 감았다.

쌕, 쌕, 쌕, 뜨거운 호흡소리가 들렸다.

서로의 몸이 닿자마자 거짓말처럼, 떨리던 효원의 몸이 진정되었다. 효원은 저를 안고 있는 존재감을 느꼈던 듯 꾹 닫고 있던 눈꺼풀을 들어 올려 범익을 쳐다봤다.

“범익 씨…….”

“그래, 나 여기 있어.”

“…네.”

부러질 것처럼 얇은 팔이 뻗어 와 범익의 목덜미를 감쌌다. 제 품에서 다시 까무러치듯 수마에 빠져 버리는 효원을 보며 범익은 그의 머리칼을 수없이 쓰다듬었다.

“괜찮아, 괜찮아… 내가 있으니 안심해.”

서범익은 효원의 몸을 좀 더 끌어당겨 안았다. 놓치기 싫다는 듯 강하게 안자 효원 또한 서범익의 품을 파고들었다. 따뜻한 품이 그리웠다는 듯 그렇게 두 사람의 서로의 품에 안겼다.

서범익은 경호원에게서 오늘 효원이 아버지에게 불려 갔다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효원의 앞에서 누드화를 갈기갈기 찢었다는 것도. 범익의 눈에서 화르륵 불꽃이 솟았다.

아버지를 향한 원망의 감정이 범익의 마음속에 타올랐다. 그를 빼앗길 수 없다. 절대 효원을 자신에게서 떼어 낼 수 없을 것이다. 모든 걸 포기해도 단 하나 효원만은 포기할 수 없었다.

서범익은 효원의 몸을 다시 꽉 안았다. 꽉 쥔 손아귀에는 아버지를 향한 원망이 깃들어 있었다.

“그렇게는 안 됩니다. 아버지…….”

* * *

눈을 뜨니 아침이었다. 효원이 따뜻한 온기에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범익이 잠을 자고 있었다. 고른 호흡이 효원의 가슴을 뜨겁게 했다.

살며시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만지려다가 그만두었다. 그동안 그와 사랑에 빠져 미처 주변을 돌보지 못했다. 이 사랑이 서범익의 일방통행이 아닌 양방통행이라는 것을 들켰으니, 앞으로 순탄치 않을 게 분명했다.

효원의 머릿속은 종잡을 수 없는 생각들이 밀려왔다. 그의 정부가 될 경우 잃을 것과 얻을 것을 계산하는 자신이 미치도록 증오스러웠지만, 현실에 장벽에 부딪친 효원은 미래를 생각해야 했다.

‘화가로서 생명도 끝날 거야. 피워 보지도 못한 꽃이 되어 시들어 갈지도 몰라.’

회장이 한 수 물러서 숨겨진 정부로 받아들인다고 해도 자신이 꿈꾸던 화가의 길을 걸을 수 없을 것이다. 효원은 변함없이 저를 사랑하는 범익에게 미안했다.

그는 과연 상상이나 할까? 언제든 제 사정이 어려워진다면 효원이 먼저 그의 손을 놔 버릴 수 있다는 것을…….

효원은 어느새 촉촉이 젖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를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파 견디지 못할 정도였다. 목구멍이 따갑고 갈비뼈 안쪽이 쑤셔 왔다.

이렇게 아픈데. 상상만 해도 견딜 수 없을 것 같은데…….

그런데도 난, 나는… 이 사람의 정부가 되기 싫어.

범익이 결혼을 하고 아름다운 아내와 같은 방을 쓰는 것도 싫고, 아이를 낳는 것도 싫었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이라. 추악한 욕심이 있는 법이에요.”

어느덧 붉게 물든 눈가를 손으로 쓱쓱 닦았다. 그리고 다시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 넓은 품에 쏙 안겼어도 쓸쓸한 기분이 떠나지 않았다. 그의 품에 고개를 묻었다. 좋은 향기… 이 향기는 너무도 좋아서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검사만 통과된다면 바로 떠나. 그길로 계약은 끝이네.’

회장은 떠날 날짜까지 못박았다. 이제 그의 병이 완치되었는지 확인할 검사만 남겨 두고 있었다.

그가 안정되었다는 것이 확인되면 이제 자신은 필요가 없다. 효원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효원은 다시 눈을 감았다. 눈알이 빠질 것처럼 뻑뻑해서 도저히 눈을 뜰 수 없었다. 잠시 후, 거짓말처럼 효원은 다시 잠에 빠졌다.

그때 범익이 눈을 떴다. 그리고 쌕쌕 고르게 숨을 내쉬는 효원의 뺨을 어루만졌다.

“안 놔준다고 했잖아? 이효원… 우리 앞에 어떤 장애가 있어도 너를 버리는 일은 없어.”

문득 효원의 눈가에 이슬이 맺힌 것을 발견했다. 범익은 혀로 그 눈물을 훔치고 입술에 가볍게 입 맞췄다. 그는 한동안 효원을 품에 안고 다독거렸다. 그러다 깊게 잠이 든 것을 확인한 뒤, 몸을 일으켰다.

이른 아침, 저택은 한참 아침 식사를 준비 중이었다. 저택 가득히 풍기는 청국장 냄새가 코에 진동했다. 범익은 굳은 표정으로 서재로 향했다.

역시나, 새벽잠이 없는 회장이 신문을 보고 있었다. 서범익은 입술을 깨물었다.

“오늘도 별채에서 자다니, 앞으로 집에서 못 자게 해.”

“잘 겁니다. 오늘만이 아니라 내일도, 모레도, 그 다음 날도, 계속 자게 할 겁니다.”

회장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너, 지금 그 말뜻이 뭘 뜻하는 것인지 알고 하는 말이냐?”

“네. 아버지가 억지로 성사시킨 약혼을 깨겠습니다. 그리고 효원이와 결혼할 겁니다.”

“뭐… 뭐야? 누, 누구와 결혼한다고?”

회장은 벌떡 일어나더니 서범익에게 신문을 집어던졌다.

“네.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과 합니다.”

“미쳤구나! 네가 진짜 미친 거야? 사랑? 그게 사랑이라고 봐? 착각이야! 네 페로몬이 반응하는 것일 뿐, 눈에서 멀어지면 그 감정도 모두 사라질 거다. 일시적인 감정에 지나지 않는다고!”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그의 목소리가 귀청을 찢는 것 같았다. 그가 이번에는 찻잔을 집어 들었다. 그것이 어디로 날아올 것을 알고 있었기에 범익은 고개를 더욱 뻣뻣하게 들었다.

서범익은 이 자리에서 이마가 깨지더라도 단판을 지으려고 마음먹었다. 더는 효원을 아프게 할 수 없었고,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효원의 마지막 말, 욕심… 그 욕심이 어떤 것을 뜻하는 건지 알고 있기에 물러설 수 없었다.

“단순한 감정이 아닙니다. 사랑합니다, 이효원을.”

“이, 이이… 네가 감히! 나를 거역해?”

“다 필요 없습니다. 만약 후계자의 자리와 효원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면 저는 효원을 선택합니다.”

“……!”

서 회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의 몸이 움찔 하더니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상당히 충격을 받은 듯 입도 뻥긋하지 못하고 얼어 버렸다.

이렇게 쉬운 것을… 그것을 놓기가 또 쉽지 않았던 것이 한심스러웠다.

“네가, 그렇게 원한다면 정부로 둬도 된다고 했잖아? 그냥 정부로 둬. 그럼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거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정부로 앉힐 수는 없습니다.”

“…서범익!!”

결국 화를 참지 못한 회장이 잔을 집어던졌다. 빠르게 날아온 잔은 서범익의 뺨을 스치고 벽에 부딪쳤다. 쨍그랑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더니 날카로운 조각이 튀어 기어이 범익의 뺨에 상처를 남겼다. 핏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렸으나 그것을 개의치 않았다.

“제가 할 말은 여기까지입니다. 아버지의 답은 듣지 않겠습니다. 빠른 시일 내에 약혼을 정리할 테니 그렇게 알고 계십시오.”

서범익은 차갑게 몸을 돌렸다. 등 뒤로 진노한 회장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가 저벅저벅 걸었다.

새벽이슬이 내린 정원은 비에 젖은 듯 축축했으나, 마음은 한결 가벼웠다. 서범익의 입술에 가지런한 미소가 걸렸다.

그는 어깨를 활짝 펴고 별채를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저 안에서 잠자고 있을 연인을 위해 선물을 준비할 생각이었다.

* * *

서 회장은 시름이 깊어졌다. 결국 우려했던 일이 현실이 되자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당장 약혼을 철회하겠다고 하진 않았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안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오늘 아침 몰아친 폭풍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입이 무겁고 뒤탈 없이 일을 해 줄 사람이 필요하니 사람을 찾게. 감히 오르지 못할 나무를 탐한 욕심을 부렸으니, 이제 행동으로 보여 줄 차례가 되었네.”

“네, 알겠습니다.”

서 회장은 눈을 부릅떴다.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놈의 모든 것을 빼앗고 파괴할 생각이었다. 땅을 치고 후회하게 할 것이라 마음먹었다.

권력을 쥔 자, 무엇을 하지 못할까?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서 회장의 입가에 무섭게 비틀렸다.

“…이효원. 자네 스스로 떠나게 될 거네… 조금만 기다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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