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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화 (91/161)

폭주 에스퍼 82화

“웃지 마. 넌 우는 게 훨씬 잘 어울려.”

“진짜 지랄도…….”

“그래. 차라리 화를 내. 난 주현이가 즐겁게 웃는 것만 보면 짜증이 막 나더라?”

“그럼 더 웃으면서 살아야겠네.”

“웃을 일도 없는 애가 허세는.”

정곡을 쿡 찌른 이안이 하하 웃었다. 상대를 깔보는 것도 조롱하는 것도 아닌, 그저 즐거워 보이는 미소였다. 그동안 멀쩡한 모습으로 수많은 사람을 속여 온 이안이지만, 주현에겐 통하지 않았다.

웃을 일 있거든. 주현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소중하게 모아 쥐고 갈비뼈 안쪽에 밀어 넣어 둔 것이 작게 박동했다.

인원이 많다 보니 탐사 팀은 느린 속도로 나아갔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듯한 미로는 사방이 막힌 탓에 걸어도 걸어도 같은 풍경만 나올 뿐, 어떠한 변화도 없었다.

같은 자리를 맴도는지 아니면 확실한 진전이 있긴 한지. 레이더가 있지만 육안으로 보이는 모든 것이 그들을 지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결국 게이트 통과 후 두 시간이 지난 무렵, 은율은 잠시 휴식을 취하자고 했다. 에스퍼는 몰라도 일반인과 다를 바 없는 가이드 쪽에서 기쁜 탄식이 터져 나왔다.

다른 이들과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 앉아 가져온 물로 목을 축이던 주현은 옆자리에 풀썩 주저앉는 남자를 보며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지루하네요. 안 그래요? 주현 씨.”

빛나가 등에 멘 배낭 어깨끈에 달린 전등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능력을 사용하기 위해 가장 앞쪽에서 걸어야 했던 빛나는 전등이 뜨거운지 입김을 후후 불었다.

“협회에서는 최장 사흘 정도로 보고 있으니까 고작 두 시간 만에 뭐가 나오진 않을 겁니다.”

“어휴, 이 길을 사흘이나 더……. 그래도 이안 씨가 있어서 짧게 줄여 준 거겠죠?”

주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은 지친 에스퍼의 손을 잡아 주며 여기저기서 가이딩하고 있었다. 자신이 성자라도 된다는 듯 히죽거리는 얼굴을 이를 갈며 노려보던 주현은 이내 힘없이 무릎 사이로 고개를 떨궜다.

“많이 힘드세요? 하긴, 이곳은 몸이 지치기 전에 정신이 지치는 곳이죠. 저도 지금 머리가 어질어질해요. 주현 씨는-”

“그렇게 부르는 거 그만두면 안 됩니까?”

주현은 결코 인정하지 않을 테지만, 항의의 목소리는 약간의 수줍음과 함께 흘러나왔다.

놀란 듯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으나 주현은 고집스레 바닥을 응시했다. 그 호칭에서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고는 입이 찢어져도 말할 수 없었다.

“그럼 뭐라고 부를까요?”

“그냥 뭐, 신주현?”

“에이, 제가 더 어리니까 주현이 형이라고 부를게요. 괜찮죠? 형?”

“……마음대로 하세요.”

“편하게 말하세요. 동생인데.”

호칭 정리는 빛나의 환한 미소와 함께 순식간에 끝났다. 그다지 존중받으며 살아오지 못한 만큼 반말이 더 편했던 주현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재밌는 이야기 하는 중이야?”

“앗, 이안 씨!”

혀를 찬 주현과는 달리 살갑게 맞이한 빛나는 협회의 보물이라는 남자와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아무튼 그래서 정말 죽다 살아났다니까요? 현장에 가이드가 없었다면 아마 여기 있지도 못했을 거예요.”

“애초에 가이드 없이 임무를 갈 수 있나?”

빛나의 시선이 찰나 주현에게 닿았다 떨어졌다. 괜한 동정 따윈 줘도 안 받을 주현이 턱을 괸 채로 눈가를 씰룩였다. 다만, 대화에 참여하고픈 마음은 없기에 은율이 언제 다시 임무를 재개할지 앞쪽을 살핀 순간이었다.

“그러고 보니 주현이는 폭주 에스퍼니까 혼자 다니겠네? 하하, 매칭 가이드까지 있는데. 불쌍해라.”

산뜻하게 웃는 이안과 그 옆에서 표정과 말투의 괴리에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우고 있는 빛나. 귀찮기 짝이 없는 상황이다.

“없어도 지금껏 충분히 살아남았어. 오히려 가이드가 짐이-”

가장 먼저 변화를 알아차린 건 주현이었다. 그동안 수도 없이 목숨을 구해 주었던 본능이 위기를 알렸다. 폭주 에스퍼가 벌떡 일어나고 1초도 채 지나지 않아 미로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으악! 이게 무슨……!”

“가이드부터 지켜!”

온전히 서 있기도 힘들 정도로 강한 진동 속에서 주현은 가까이 있던 두 사람을 능력으로 감쌌다.

이안은 아무리 개인적으로 싫은 사람이라 해도 SS급 가이드다. 그가 살아 있음으로써 얼마나 많은 에스퍼가 목숨을 구원받을지 셀 수도 없다. 그리고 빛나는 에스퍼지만 전투에 쓸 만한 능력이 아니라 긴급한 상황에서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을 거라 장담하지 못한다.

그게 패착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주현이 조금 거칠더라도 두 사람을 자신에게서 멀리 떨어진 곳, 가령 사람들이 모여 있던 곳으로 내던졌다면 좋았을 텐데.

와그르르, 바닥이 무너져 내렸다. 거대한 괴물이 울대를 움직이며 꿀꺽 삼키는 것처럼 부드러운 움직임이었다.

깊고 깊은 어둠 속으로 빠져들기 전, 주현이 마지막으로 본 것은 다급한 표정으로 손을 뻗는 은율의 얼굴이었다.

어디서 밝히면 다들 편리한 능력이라고 말하는 만큼, 주현은 능력으로 몸을 감싸 상처 하나 없이 일어설 수 있었다. 물론 이안과 빛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비틀거리며 일어선 두 사람은 어두운 벽을 두드리고 있는 주현에게로 곧장 다가왔다.

“이게 무슨 일이야? GN-29에 싱크홀 같은 게 생긴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는데.”

“그런 게 아닌가 보지.”

억지로 잡아 뜯긴 듯 너저분하게 널린 줄기를 가볍게 걷어찬 주현이 날 선 눈으로 주변을 훑었다. 위에서도 그랬지만 이곳도 빛이라곤 하나도 없이 그저 어두웠다. 주현은 가장 낮은 밝기로 손전등을 켰다.

협회의 ‘예언’에 따르면 이곳은 반란군의 아지트 중 한 곳이라고 했다. 그 말인즉슨 갑자기 바닥이 무너진 것 또한 그들의 힘일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그리고 만약 정말로 반란군의 음모라면 세 사람 중 노릴 만한 사람은 당연히…….

“두 사람 다 왜 그렇게 봐?”

주현이 커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쓸모없는 짐 덩이가 방긋방긋 웃으며 주현의 정강이를 향해 발을 날렸다. 가뿐히 피한 주현이 이안을 날카롭게 응시했다.

“……빛나야.”

“엇, 네?”

“이 인간 잃어버리면 우리는 사형일까?”

입술을 다문 빛나는 고민하는 듯 미간을 찡그리더니 이내 진지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곱게 죽으면 다행일걸요.”

차라리 죽었으면 죽었지, 이안을 반란군 손에 넘어가게 두고 사지 멀쩡히 살아 돌아간다면 협회는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주현은 몰라도 빛나는 가족이나 친구까지 위협받을 수 있다. 즉, 아무리 위험한 상황이 온다 해도 이안만큼은 무조건 지켜야 한다.

“너무 뛰어나도 힘들다니까.”

속 편한 소리나 늘어놓고 있는 사이코패스를 목숨보다 소중하게 지켜야 한다는 현실에 머리가 아팠다.

“주현이 형, 위로 올라갈 수 없어요?”

“여기 떨어지자마자 해 봤어. 위는 다시 막혔고, 재질이 바뀌었는지 상처 하나 안 나.”

일반적인 염동력보다 물리적이기 때문에 상당히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주현이지만, 그의 능력으로도 천장에는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힘의 반동이나 희미하게 들리는 소리를 보면 강철로 이루어진 것 같았다.

식물 줄기로 만들어진 미로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강철. 누가 봐도 수상하기 짝이 없다.

“누구 통신기 가진 사람 없어?”

“가방에 있는데 두고 왔어.”

“저도 없어요. 배터리가 떨어져서 동료한테 충전해 달라고 했거든요.”

등을 맡길 동료 없이 홀로 임무하는 게 익숙한 주현은 가방을 메고 있었으나 폭주 에스퍼에겐 통신기를 주지 않았다.

일단 정체 모를 진동은 완전히 멎었다. 미로는 두 시간을 쉬지 않고 나아갔음에도 끝나지 않을 만큼 거대했다. 이런 큰 변화는 아무리 강한 에스퍼라 해도 제법 기력을 소모했을 게 분명했다. 물론 반란군에도 가이드가 있을 테니 오래가지는 않겠지만.

“다들 표정 좀 풀어. 내가 이런 일에 한두 번 휘말린 게 아니거든. 살아날 길은 언제나 있었다고.”

“맞아요. 게다가 게이트에 있는 건 저희만이 아니잖아요. 위에 있는 다른 동료들이 구하러 올 거예요!”

이안이야 늘 그렇듯 제멋대로 떠들었고, 빛나는 애써 분위기를 띄우려 밝은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면서 주현의 눈치를 살폈는데, 딱히 그에게 잘 보일 일을 한 것도 아니고 호감 받을 행동을 한 것도 아니라 왜 저러나 의아했으나 주현은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아 그냥 넘겼다.

아무튼 주현은 겉보기만큼 화가 났다거나 기분 상한 상태는 아니었다. 임무에서 돌발 상황이 발생하는 건 늘 있는 일이다. 애초에 언제나 요단강에 한 발을 넣고 사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제 와 목숨의 위협에 겁먹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는 내심 균형이 좋다는 생각마저 하고 있었다. 지치지 않게 해 줄 배터리 담당, 가장 중요한 탐지 담당, 온갖 잡일을 다 떠맡을 하인 담당까지.

하인이 되는 것에 익숙한 남자가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우리의 임무는 SS급 가이드 이안의 안전 및 무사 귀환이다. 다른 사람을 찾는 것보단 입구로 돌아가는 데 집중하자.”

“맡겨만 주세요. 제가 신속하게 게이트를 찾겠습니다.”

가슴을 활짝 펴며 기세등등하게 웃는 빛나에 주현은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희미하게 떠올랐다 사라진 미소에 두 사람의 표정이 달라졌다. 빛나는 이름처럼 반짝반짝 빛이 났고, 이안은 재미없다는 듯 퉁명스러운 낯짝을 했다.

이안의 기분 따위 어떻게 되든 알 바 아닌 주현이 희미한 빛으로 길을 비추며 앞서 걷기 시작했다. 그 뒤를 빛나가 따랐고, 이안은 피곤한 듯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걸음을 옮겼다. 금방 나갈 수 있을 거란 희망이 어두운 미로를 둥둥 떠다녔다.

그러나 훈훈한 분위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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