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1화 (90/161)

폭주 에스퍼 81화

동전 하나. 약 십여 명의 사람들은 오직 동전 하나 때문에 모였다.

“게이트 GN-29는 위험도가 낮아 임무가 잘 주어지지 않는다. 마지막 출입은 8개월 전이었지. 하지만 11일 전, 간단한 탐사 임무에서 돌아온 에스퍼가 이걸 가져왔다.”

이번 임무의 리더라고 할 수 있는 여자는 여기저기 미세한 흠집이 가득한 동전을 들어 올렸다. 흔히 쓰이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동전이었다. 문제는 그것이 있으면 안 되는 장소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8개월 전에 떨어졌다기엔 상태가 지나치게 괜찮지 않나? 우리의 임무는 게이트 너머에서 ‘인간’의 흔적을 더 찾아 확실한 정보를 가지고 귀환하는 것이다.”

“단순히 민간인의 불법 침입 아닙니까? 그렇다면 흔적이고 뭐고 없을 텐데요.”

가벼운 거수와 함께 들려온 말에 의자에 앉아 있던 다른 에스퍼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정은율이라고 소개했던 리더는 가벼운 동작으로 임시 천막의 가장 뒤, 입구 쪽을 가리켰다.

“다들 뒤를 봐라.”

휙 돌아서는 동그란 머리통들에 주현은 짜증스레 시선을 돌렸다. 반면, 주현의 옆에 있던 이안은 웃으며 살래살래 손을 흔들었다.

“고작해야 민간인의 불법 침입 따위로 SS급 가이드와 폭주 에스퍼가 이곳까지 행차했겠나?”

이안은 그렇다 쳐도 자신까지 언급하는 은율에 주현은 절로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폭주 에스퍼가 있는 임무는 위험도가 상당하다는 걸 모르는 에스퍼는 거의 없다.

“협회에서는 GN-29를 쌍둥이 게이트로 보고 있다.”

담담한 은율의 말에 에스퍼들의 눈빛이 달라지고, 한곳에 모인 가이드들은 길어질 것 같은 임무에 벌써부터 피곤한 표정을 지었다.

“쌍둥이 게이트라면 근처에 다른 입구가 있을 텐데 그걸 먼저 찾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물론 진작에 반경 2㎞를 샅샅이 뒤졌다. 게이트 내부에서 다른 게이트와의 거리가 멀면 현실에서도 영향을 받지.”

“전부 다 추정일 뿐이잖습니까. 좀 더 확실한 목표가 있어야-”

“협회는 GN-29가 반란군의 아지트 중 하나라고 확신하고 있다.”

소란이 일시에 멎었다.

주현에겐 반란군 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타오르는 사막에서 죽은 남자의 시체는 협회가 회수했을 것이다. 온전하게 땅에 묻히지도 못했겠지. 잃어버린 USB를 잠시 생각하던 주현은 사고를 돌리며 브리핑에 집중했다.

반란군의 아지트라는 선언 이후 은율의 말에 반박하며 따지는 사람은 없었다. 그 후 작전에 대한 설명을 끝으로 브리핑이 종료됐다.

“10분 후 이 자리에 다시 모인다. 한두 명 때문에 게이트 밖으로 나올 순 없으니 정비를 꼼꼼히 하도록.”

하나둘씩 흩어지는 이들 틈에서 주현은 홀로 구석에 앉아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무기와 개인적으로 필요한 물건은 전부 옷과 가방에 들어 있다. 임무에 대해 상의할 동료도 가이드도 없으니 10분간 하릴없이 앉아 있기로 했다. 괜히 시야에서 사라지면 불안해할 사람도 많고.

“굳이 폭주 에스퍼가 필요할까?”

사람의 청각은 신기하다. 외부 소리를 인식조차 하지 않고 흘려보내다가도 자신에 관한 소리는 기가 막히게 알아듣는다.

“아무래도 얻는 것에 비해 리스크가 너무 크지. 폭주하기라도 하면 이쪽은 어떤 피해를 당할지 모르는데.”

나도 여기 오고 싶어서 온 거 아니거든. 그런 말을 하는 것조차 지쳐 주현은 못 들은 척 눈을 감았다.

“지금은 함께 임무할 동료입니다. 말 좀 가려서 하세요.”

빛나의 목소리는 크고 또렷했다. 은근히 모인 시선에 떠들어 대던 두 사람이 볼을 붉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주춤거리던 에스퍼는 주현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곧장 화가 난 표정으로 삿대질하며 큰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내가 뭐 틀린 말 했어? 다들 불안한 건 마찬가지잖아!”

“그럼 직접 협회에 요청하면 되겠네. 무서우니까 폭주 에스퍼는 나와 같은 임무에 배정하지 말라고.”

“뭐? 이 자식이……!”

“미안한데 나한테 따져도 해 줄 말 없어. 이쪽도 시키는 거 따르는 입장이라.”

느리게 흘러나온 낮은 목소리에 주변에 있는 에스퍼와 가이드가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주현은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나며 씨익 웃었다. 기묘한 색의 눈동자가 반으로 갈라지고, 유독 뾰족한 송곳니가 만천하에 드러났다.

“걱정 마. 만약 폭주해도 너만은 안 아프게 보내 줄 테니까. 넌 네가 죽는지도 모를걸.”

어차피 미움받을 거라면 대놓고 적개심을 받는 편이 낫다. 이리저리 눈치 살피는 것보단 모든 사람을 경계하는 게 훨씬 기력 소모가 덜하기 때문이다.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어쩐지 안절부절못하던 빛나가 불쑥 끼어들며 주현의 팔을 잡았다.

“주현 씨 폭주 안 할 거잖아요. 11년 동안이나 안 했는데 이제 와 폭주를 왜 해요?”

“90 먹은 노인은 90년 동안 안 죽었으니까 앞으로도 안 죽습니까?”

“그건 아니지만…….”

변호해 주려는 빛나에겐 미안하지만, 그는 누구의 변호나 감쌈이 필요 없다. 온몸에 덕지덕지 붉은 표식을 달고 있는 이상 적의의 표적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므로.

솔직히 호의보다 훨씬 마음 편했다. 마음껏 경멸하고, 두려워하고, 미워해라. 간지럽지도 않으니까.

상황은 10분이 지났다며 은율이 오고서야 끝났다.

“무슨 일이지?”

무거운 분위기에 그녀가 물었으나 사실대로 대답한 사람은 없었다. 빛나는 무언가 말하려는 듯 우물쭈물했으나 주현까지 처벌에 휘말릴까 싶어 망설이는 게 분명했다.

* * *

게이트 GN-29는 다른 게이트보단 상당히 특이한 모습이다. 안 특이한 게이트가 있냐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GN-29는 유독 모습이 달랐다.

비교적 작은 원형 입구를 통과하면, 사방에 튼튼한 고동색 식물이 각자 얽혀 벽을 만들고 있다. 천장까지 덮어 사방이 꽉 막힌 이곳은 나타나는 괴물은 없지만, 한 번 길을 잃으면 나오기 힘든 드넓은 미로다.

벽과 천장을 만든 식물은 무척 단단하며 부숴도 빠르게 복구되기 때문에 벽을 뚫어서 길을 만드는 건 지극히 비효율적이다.

줄의 가장 마지막에 따라붙은 주현에게 이안이 불쑥 다가왔다. 그것만으로 방사 가이딩이 약간의 피로를 없애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차인호 곁에 있을 때만큼 마음이 진정된다거나 포근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혀를 찬 주현이 그에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

“역시 아무한테나 이를 드러내는 게 너의 매력이지.”

“닥쳐.”

씨익 웃은 이안이 후드 밑으로 손을 넣어 주현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뜨끔한 통증과 함께 까만 머리카락 두세 가닥이 이안의 손가락 사이에 걸렸다.

11년 전 처음 만난 이후로 그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11년째 잔인하고 본인밖에 모르는 사이코패스 쾌락주의자다.

협회에 떠받들어지며 동시에 수많은 사람 틈에서 착한 척 웃어야 했던 이안은 철저한 약자인 어린 주현에게 자신의 본성을 거침없이 풀어냈다. 주현에겐 끔찍할 뿐인 기억인데, 이안은 나름대로 친밀감을 가진 듯했다.

물론 주현은 조금도 고맙지 않고 오히려 사양하고 싶다. 하나 따져 봤자 변하는 건 없다. 체념한 주현이 저 멀리서 앞서가고 있는 무리의 뒤꽁무니를 응시한 순간이었다.

“그거 알아? 이번 임무, 리아가 본 거래.”

미련 없이 머리카락을 바닥에 버린 이안이 마치 비밀 이야기라도 하듯 속삭였다. 웃기지도 않은 짓거리였지만 무시하면 어떤 짓을 할지 몰랐다.

‘아무 관심도 없고 무슨 말인지 이해도 안 되지만 일단 들어나 보자’라는 마음이 그대로 묻어나는 주현의 얼굴에 이안이 슬쩍 웃었다.

“아, 모르는구나? 리아는 협회에서 소중하게 꼭꼭 숨겨 둔 히든카드야.”

“그래, 그렇군.”

“아주 특별한 능력을 가진 에스퍼지.”

“그래, 그렇군.”

“C급 에스퍼치곤 대단하지?”

“그래, 그렇…….”

C급? 주현은 시선을 돌려 싱글벙글 웃고 있는 이안을 훑었다. 사이코패스이긴 해도 거짓말쟁이는 아니었는데. 눈을 가늘게 뜬 주현이 물었다.

“능력이 뭐길래?”

“예언.”

“…….”

“등급이 낮아서 주기는 들쑥날쑥하지만, 정확도는 백 퍼센트야.”

“이걸 나한테 말하는 이유는?”

그의 말이 사실이라는 가정하에 아무리 생각해도 웬만큼 높은 등급의 에스퍼도 모르는 정보일 게 분명했다. 100% 정확도를 가진 예언. 누구나 침 흘리며 달려들 것이 뻔한 능력이다. 한낱 쓰다 버릴 폭주 에스퍼가 들을 만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야 넌 협회의 충직하고 귀여운 사냥개니까. 너완 다른 곳에서 주인에게 예쁨 받는 애완견도 있다는 걸 안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어차피 평생 목줄 차고 있을 건데.”

이안은 여전히 웃는 낯으로 주현의 스카프와 함께 초커를 잡고 좌우로 흔들었다. 크게 비틀거린 주현이 거칠게 이안의 손을 떼어냈다.

“진짜 죽인다.”

“하하하, 못 한다는 거 알면서 항상 그런 말 하는 이유가 뭐야? 우리 주현이가 바보라서 그런가?”

이안의 옆에 있으면 신체적으론 건강해지지만, 정신적으로 지친다. 누군가 이안을 열 트럭 가져다준다고 해도 주현은 무조건 한 명의 차인호를 고를 것이다.

선택지를 준 사람도 없는데 혼자 상상하던 주현은 트럭 짐칸에 가득 채워진 차인호를 떠올려 보았다. 그렇게나 많다면 하나 정돈 받아도 티 나지 않겠지. 부질없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은 순간, 주현은 옆얼굴에서 느껴지는 뚱한 시선에 미간을 찡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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