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주 에스퍼 83화
“더는 못 가.”
“뭐?”
“나는 에스퍼가 아니라서 몇 시간이고 끝없이 못 걸어. 심지어 너흰 내 가이딩으로 지치지도 않잖아.”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맞는 말이었다. 가이드와 함께 임무에 나가는 경우는 거의 없고, 가끔 있다 해도 따로 행동하는 일이 많은지라 배려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빛나는 내내 능력에 집중하느라 완전히 잊고 있었는지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럼 좀 쉴까?”
“그럴 필요 없어. 시간 아깝게.”
“그럼 어쩌게. 버리고 가?”
눈동자가 완전히 사라질 정도로 밝은 미소를 지은 이안이 고생이라곤 모르는 듯한 고운 손가락으로 주현을 가리켰다. 당장 그 손가락을 꺾고 싶은 걸 참고 있자니 지극히 익숙한 명령조가 들려왔다.
“업어.”
주현보다 먼저 놀란 사람은 빛나였다. 그는 걱정스럽게 주현과 이안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꽤 오랜 시간 이어진 인연인 만큼 주현은 어렸을 때 이안에게 제법 많은 가이딩을 받았다. 그러나 그때는 언제나 주변에 주현을 제압할 누군가가 있었다. 이안이 짧은 비명이라도 지를 시 곧장 들이닥친 직원에 의해 사살당할 정도로 강한 제약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 있는 건 당장 싸워도 주현을 이기지 못할 빛나뿐이다.
분노로 일그러진 시선이 SS급 가이드에게 내리꽂혔다.
“내가 폭주 에스퍼라는 걸 알고는 있는 거야?”
“물론 알고 있지. 불쌍해서 귀여운 주현아, 나는 네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걸 알고 있단다.”
늘 의미심장한 말만 뱉는 입이라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주현은 이안이 스카프 아래 숨어 있는 폭탄에 대해서도 안다고 확신했다. 휘말릴 걱정은 하지 말란 건지, 아니면 다른 뜻이 있는 건지.
말싸움해 봤자 압도적인 갑에게 주현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결국 대놓고 질린다는 표정을 지은 주현이 이안에게 등을 내보이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형, 그냥 제가 업을게요. 저도 나름 에스퍼라 이 정돈 버텨요.”
“넌 게이트 찾는 일에만 집중해. 자기가 죽겠다는데 왜 말려?”
“하하, 난 죽을 생각 없는데.”
이안은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았다. 그냥 성인 남성 평균 몸무게쯤 되지 않을까 싶었다.
문제는 폭력적일 만큼 압도적으로 쏟아지는 가이딩이었다. 폭포 아래에 둔 작은 컵이 된 기분. 쏟아지는 물줄기에 자꾸만 휘청이게 된다.
차인호는 이렇지 않은데. 그의 가이딩은 다정하고, 따스하고, 아주 적당한 양이 맴돌아서…… 그야말로 완벽한 가이딩을 해 주는데.
작게 헛구역질한 주현은 조금도 반갑지 않은 가이딩을 견디며 빛나의 뒤를 따라 걸었다. 고동색 줄기 위로 드리워진 그림자가 조롱하듯 일렁였다. 아침부터 생각했지만 참 엿 같은 하루였다.
* * *
“이 가방 보기보다 무겁네요.”
주현 대신 그의 가방을 등에 멘 빛나가 말했다.
“평범한 것 같은데.”
“전혀 아닌데요. 방독면, 망치, 어? 휘발유는 왜 들어 있어요……?”
“불을 피워야 할지도 모르니까. 그보다 남의 가방에 능력 쓰지 마.”
그나마 동행이 많아서 다른 임무에 비해 짐이 적은 편이었다. 이안을 고쳐 업은 주현이 어둑한 미로를 무심히 응시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 상황, 저에겐 꽤 영광인 거 아닌가요?”
두 사람의 시선을 느꼈는지 빛나가 빙글 뒤로 돌아섰다. 보지 않고 걸어도 넘어지지 않을 만큼 미로 바닥은 장애물 하나 없이 매끈했다.
“영광이라니?”
“평생 얼굴 한 번 보기도 힘들다는 SS급 가이드를 고작 둘이서 나눠 쓰는데, 무려 파트너가 주현이 형이잖아요.”
SS급 가이드야 그렇다 쳐도 주현이 파트너인 게 왜 영광인지 모를 일이었다. 이안에 대해서만 말하기 뭐해서 괜히 끼워 넣었을 거라 확신한 주현이 코웃음을 쳤다.
“그것도 그렇네. 협회에선 나한테 현장 임무를 잘 안 줘서 말이야.”
“아무래도 언제 이런 상황이 생길지 모르니까요. 그래도 주현이 형이 있어서 다행이에요.”
“내가 있는 건 다행이 아니라 재앙이지.”
일이 이렇게 된 건 애초에 귀하신 몸값을 가지고 이런 곳에 온 이안 때문이다. 주현은 언제나 불운이 따라다니는 남자니 대충 넘긴다 해도, 빛나만큼은 오롯한 피해자였다.
근처에 있었다는 이유로 휘말린 것도 억울할 텐데 하필이면 유일하게 힘을 합칠 수 있는 동료가 폭주 에스퍼라니. 주현이라면 대놓고 한숨을 푹푹 내쉬었을 상황이었다.
“아주 착하네.”
이안 또한 그리 생각하는지 주현의 귓가에 들으라는 듯이 속삭였다. 당장 내던지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현실에 주현은 뚱한 표정을 지었다.
빛나는 쑥스럽다는 듯 목덜미를 문질렀다. 늘 발랄하게 떠드는 녀석이라 그런 모습은 처음 봤다. 물론 이런 말을 할 정도로 오래, 많이 본 사이는 아니긴 하지만.
“저 <게이트 데이트> 봤어요. 형이 괴물을 죽이지 않고 집으로 돌려보낸 거 봤는데, 사실 그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협회에 깨지기도 할 거고 심지어 카메라로 찍고 있었으니까. 임무 소홀로 욕먹을 거 알면서도 그랬다는 게 저한텐 멋있어 보였거든요.”
검붉은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당시 주현도 처벌받을 각오 끝에 한 행동이었다. 차마 배고파하는 두 마리의 짐승을 무참히 죽일 수가 없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뒤이어 만난 투명화 괴물 때문에 도롱뇽 괴물에 관해서는 어영부영 넘어갈 수 있었다. 주현도 까맣게 잊고 있던 일이었다.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달싹이던 그때, 빛나가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튼 그래서 친하게 지내고 싶었어요.”
살면서 들어 본 적 없는 말이었다. 원해 본 적도 없고, 기대해 본 적도 없다.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그래. ……고맙다.”
“어? 주현이 부끄러워한다.”
“닥쳐.”
이안은 망설임 없이 주현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자신을 떨어뜨리지 않을 거란 확신이 담긴 행동에 화가 났으나 사실이었기에 속으로 삭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둘의 모습에 빛나는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머뭇거렸으나 결국 입을 다물곤 다시금 앞으로 나아갔다. 주현 또한 그 뒤를 따랐는데, 두 에스퍼의 발걸음은 얼마 안 가 멈추고 말았다.
“이안 씨, 저희가 출발하고 얼마나 지났어요?”
“한 시간 정도 됐네. 왜 그래?”
“……구조가 계속 바뀌고 있어요.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때, 벽 너머 구조물을 탐지해서 길을 찾았거든요.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는데 조금 전까지 있던 길이 막다른 길이 되었어요.”
주현은 아까부터 다시금 느껴지던 희미한 진동을 떠올리곤 강하게 혀를 찼다. 반란군이 미로 전체를 조종하고 있다는 가설은 사실인 모양이었다.
“어떡하죠?”
“가만히 있는다고 해결되는 건 없어. 동료가 우리를 찾기 전에 적이 먼저 찾는 것보다 도망이라도 치는 게 낫지.”
“내 생각도 그래. 나는 죽기 전에 반란군이든 협회든 데려가겠지만 너희는 아니니까.”
참으로 발랄한 목소리였다. 이안은 얼핏 두 사람을 걱정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어떻게 되든 아무 상관 없을 것이다. 내심 확신하며 주현은 이안을 거칠게 고쳐 업었다.
쏟아지는 가이딩에 어느 때보다도 몸이 가벼웠지만, 썩 달갑지 않았다. 몸 상태가 나빠야 차인호에게 더욱 짙은 가이딩을 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현은 자신이 언제부터 이렇게 비열하고 더러운 사람이었나 고민했으나 생각해 보니 인생의 첫 기억부터 사람들은 그를 싫어했다. 그냥 이렇게 태어난 걸지도 모른다.
미로는 점점 더 어려워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새로운 벽이 생기는 속도가 빨라졌다. 적이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싶지 않아 가끔은 일부러 벽을 뚫기도 했으나 효과가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모두 점점 말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이안의 가이딩으로 주현과 빛나에게 피로는 없지만, 정신적으로 지치는 기분이었다.
그러다 수분 보충을 위해 잠시 앉아서 쉬는 시간을 가질 때였다. 빛나가 말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까 주현이 형, 저번에 괜한 말한 거 사과할게요.”
“괜한 말?”
“그 왜, 인호 씨 말이에요.”
불쑥 튀어나온 이름에 주현이 움찔거렸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옆에 바짝 붙어 앉은 이안이 불편했는지 팔뚝을 꼬집었다. 느껴지지도 않았지만.
“어차피 금방 헤어질 거였는데 제가 괜히 신경 쓰이게 한 것 같아서요. ……혹시 저 때문에 인호 씨와 다솔 씨가 헤어진 건 아니겠죠? 저도 자의식 과잉이라는 건 아는데 타이밍이 너무 맞아떨어져서요.”
빛나가 주현과 매칭 가이드의 연애에 관해 이야기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차인호가 결별했다. 차인호의 매칭 에스퍼인 주현이 빛나의 말을 계기로 불만이라도 토해 낸 거 아닌가, 하는 게 빛나의 추측인 것 같았다.
주현은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긍정하기엔 차인호는 그다지 좋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었다. 오히려 화가 나거나 반대로 슬퍼 보이기도 했다.
‘조금이라도 저를 좀 믿어 주면 안 돼요?’
불쑥 떠오른 얼굴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막 연애를 시작한 사람이라기에는 피곤하고 어딘가 초조함마저 느껴지던 차인호는 비는 것처럼 그리 말했었다.
‘그냥, 좀…… 네?’
주현은 아직도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한다.
문득 차인호를 좋아하는 것치고 그에 대해 아는 게 무척 없다는 걸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주현이 그에 대해 아는 정보라고 해 봐야 누구나 검색 한 번이면 알 수 있는 프로필, 이름, 나이, 얼굴. 그 정도가 다다. 그러고 보니 주현은 그의 매칭 가이드가 뭘 좋아하는지조차 모른다.
‘그렇다면…… 난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무엇을 보고 좋아하는 거지?’
누군가 뒤통수를 때린 듯한 기분이었다. 그도 아니면 얼음물을 뒤집어썼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