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트로피컬 아일랜드 (47)화 (47/49)
  • “더 지체하고 싶지 않아.”

    파비안은 단호했다. 별하 역시 그의 뜻에 동감할 수밖에 없었다. 위기를 겪을수록 더욱더 파비안과 함께하고 싶었다. 그만이 삶의 활력소였고, 살아가는 이유였다. 별하는 멋대로 붉어지는 낯을 숨기려 고개를 끄덕거리며 쭈뻣주뼛 돌아섰다. 한층 빗줄기가 잦아든 녹음을 내다보며 먼저 파초 아래서 걸어 나왔다.

    “그럼 일단 갈 수 있는 곳까지만이라도 가볼까……? 가는 길에 먹을 것도 좀 찾고.”

    부드러운 저음이 뒤쪽에서 날아왔다.

    “그러는 게 좋겠군.”

    “응.”

    별하는 뒤로 다가오는 그의 기척을 들으며 입술을 축였다. 평소였다면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의 대화일 뿐인데 해변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치를 어떤 의식을 떠올리자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별안간 심장이 세차게 박동하며 덩달아 체온도 부쩍 오르는 것 같았다. 괜스레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파비안. 혹시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저쪽에서 먹던 거 말고 이곳에서 나는 것 중에서.”

    “으음.”

    파비안은 대답을 쉬이 내놓지 않았다. 별하는 간밤에 내린 비로 검게 젖은 나무기둥과 나뭇가지를 올려다보며 작게 한숨을 지었다.

    “젖지 않은 나뭇가지라도 구할 수 있으면 좋겠다. 뭐라도 잡아서 맛있게 구워줄 수 있는데.”

    “무리하지 않아도 돼, 별하. 별하와 함께 먹는 거라면 뭐든지.”

    “……뭐든지?”

    별하는 더 말이 없는 이를 돌아보았다. 파비안 역시 뒤편의 밀림을 돌아보고 있었다. 가는 비가 내리는 아침 녘의 숲은 고요했다. 밤새 비를 맞은 수목들은 젖은 몸을 웅크린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소동물들은 아직 단잠에 빠져 있었다. 넓적한 이파리에 고인 빗물이 간혹 악기처럼 청량한 소리를 내며 이곳저곳으로 흘러내렸다.

    “파비안……?”

    일상적인 대화를 잠시 나눴다고는 해도 간밤의 충격을 완전히 떨쳐내기에는 아직 일렀다. 작은 낌새에도 불안감을 느낀 별하는 파비안에게로 다가갔다.

    “무슨, 일이야?”

    “…….”

    파비안은 움직임이 없었다. 비의 기척 외에 무척이나 고요한 밀림을 가만히 주시하다 이내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미안. 어디까지 이야기했었지?”

    별하는 밀림에서 눈을 떼고 그를 쳐다보았다.

    “뭘 먹을지 정하고 있었어. 나랑 함께 먹는 거라면 뭐든지…….”

    파비안은 생각난 듯 별하의 뺨을 쓸며 어렴풋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뭐든지 좋다고 말하려 했어. 별하와 함께 먹는 거라면.”

    별하는 고개를 돌려 그의 손가락에 제 입술을 가져다 댔다. 무른 점막을 따뜻한 체열이 번지는 피부에 살짝 문질렀다. 파비안은 별하의 젖은 입가와 젖은 눈가를 살살 문지르듯 닦아주었다.

    “…….”

    “…….”

    별하는 파비안의 깨끗한 눈동자를 올려다보다 그의 입술로 눈을 내렸다. 살짝 혈색이 감도는 입술에 점점 빠져드는 그 때, 발등으로 미지근한 물방울이 똑, 똑 떨어졌다.

    “……?”

    별하는 제 발등을 내려다보았다. 하얀 발등이 검붉은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막 위쪽에서 톡 떨어진 새빨간 물방울이 투명한 빗물과 뒤섞였다. 파비안의 셔츠 자락에서 떨어진 핏방울이었다.

    “아……. 파비안, 아무래도 쉬어야겠어. 아니면 지혈부터 한 뒤에―”

    눈썹을 찌푸리며 고개를 든 별하의 눈길이 곧장 파비안의 귓가로 날아갔다. 정확히는 젖은 금발에 덮인 귓전 그 너머였다. 파비안 뒤로 시커먼 그림자가 우뚝 서 있었다. 그만큼이나 커다란 인영이었다.

    “―!”

    그림자의 정체를 본능적으로 깨닫는 찰나, 별하의 동공이 최대치로 팽창했다. 돌연 낯빛이 새파랗게 일변한 별하의 눈길을 따라 파비안이 제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이었다. 새카맣고 날카로운 원추의 물체가 파비안의 복부 한가운데를 적확히 관통해 튀어나왔다.

    퍼억― 방패처럼 단단한 근육을 뚫고 나오는 소리가 폭음처럼 터졌다.

    “크윽―”

    파비안의 입가로 한 줄기의 새빨간 선혈이 흘러내렸다.

    112.

    별하는 눈을 부릅뜬 채로 파비안의 복부를 관통한 것을 쳐다보았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저를 선명하게 내려다보는 오드아이와 눈을 마주했다. 수 초쯤 되는 찰나의 시간이 영겁처럼 느껴졌다.

    “파, 파비…….”

    별하는 제 눈앞의 광경을 의심했다. 제 눈이 지금 현실을 보고 있는 게 맞는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차원으로 빨려들어 온 건 아닌지 똑바로 구분해 내지 못했다. 현실 세계에서는 결단코 이뤄질 수 없는 악몽을 보는 듯 탈색한 입술만 달싹거렸다.

    “파, 비안……?”

    파비안은 제 복부를 내려다보았다. 그 때 복부를 관통한 돌칼이 다시 한번 우악하게 살을 찢으며 튀어나왔다.

    “―!!”

    새빨갛고 따뜻한 선혈이 별하의 뺨과 목덜미로 후드득 튀었다. 별하는 충혈된 두 눈을 단 한 번도 깜빡이지 않고 파비안의 뒤쪽을 직시했다.

    파비안의 등 뒤에서 돌칼을 찔러넣은 인영은 자신만이 들을 수 있는 나직한 음성으로 음산하게 구시렁거리며 재차 압력을 행사했다. 핏물을 머금어 번들거리는 돌칼이 다시 살을 가르며 파고들 때에 파비안은 그것을 양손으로 움켜잡아 막았다. 그러자 뒤쪽에서 강한 위력이 해일처럼 부딪혀 왔다.

    암흑의 문으로 먹혀 들었다가 또다시 살아 돌아온 괴인은 거침이 없었다. 시커먼 발로 파비안의 허리를 난폭하게 떠밀어 돌칼을 단숨에 빼 들었다. 그에 관통당했던 복부에서 체액이 쏟아져 나왔다.

    “으윽―”

    파비안은 반격할 새도 없이 어지럽게 파문이 이는 빗물 웅덩이 위로 쓰러졌다. 투명한 물웅덩이는 금방 새빨간 물감을 풀어놓은 듯 혼탁하게 물들었다.

    “…….”

    별하는 눈을 끔뻑거렸다. 움직이지 못하는 파비안을 향해 찰박찰박 걸어가는 족장을 아연히 쳐다보았다. 족장은 지금까지 파비안을 목표로 노린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파비안은 범상한 알파도 아닌 하이 알파였고, 하이 알파 중에서도 강력한 페로몬을 지녔다. 알파 원주민들은 두두를 경외하듯 본능적으로 파비안을 두려워했다. 그것은 알파를 비롯해 하이 알파들끼리도 해당되는 것이었다. 둘 이상의 강한 개체들이 맞부딪친다면 어느 한쪽이 남을 확률보다 전멸할 확률이 아주 높다는 사실을 저들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대자연 속에서 살아온 알파 원주민들은 그것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했기에 별하와 파비안, 둘 다 이방인임에도 내내 오메가인 별하만 노려졌었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지만, 줄곧 파비안은 별하의 안위를 지키는 까다로운 불청객일 뿐이었다.

    이곳까지 집요하게 뒤쫓아 온 족장은 도무지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이제야 다른 시각으로 보기 시작한 듯했다. 이 돌고 도는 쳇바퀴 속 대장정을 속히 마무리 지으려면 단단한 울타리부터 무너뜨려야 한다는 것을.

    끈질긴 추격 끝에 기회를 움켜잡은 족장은 바로 파비안을 없애버릴 생각이었다. 움켜쥔 돌칼에서 빗물에 희석된 핏방울이 방울져 떨어졌다.

    “…….”

    별하는 저를 쳐다보지도 않고 지나쳐가는 족장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날카로운 돌칼이 파비안의 복부를 꿰뚫고 튀어나온 순간부터 사고는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본능에 따라 산소를 흡입했다가 이산화탄소를 내뱉을 뿐이었다. 간혹 빗물에 흠뻑 젖은 눈을 기계적으로 끔뻑거렸다.

    족장은 여유롭게 돌칼을 돌려 잡았다. 어디서 곁눈으로 본 것을 흉내 내듯 돌칼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피 웅덩이 속에 쓰러진 파비안의 옆에 우뚝 섰다. 새빨갛게 뒤덮인 손으로 제 복부를 움켜쥔 파비안은 턱을 물고서 족장을 올려다보았다.

    “어째서 네, 놈이 하, 이 알파…….”

    그의 말을 알아들을 리 없는 족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주름 지고 검버섯이 드리운 안면이 빗물 아래서 설핏 일그러졌다.

    파비안은 이를 으드득 갈았다. 어떻게 해서든 몸을 똑바로 일으키려 했으나 힘을 실어 시도할 때마다 검붉은 선혈이 손등을 뒤덮었다.

    족장은 파비안의 숨이 끊어질 때까지 기다릴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지금 당장 끝을 내고 싶다는 듯 돌칼을 움켜쥐고서 번쩍 뛰어올라 그에게로 덮쳐들었다.

    그 때였다. 별하는 두 손으로 움켜잡은 것을 전력을 다해 족장에게로 휘둘렀다. 뻐억―

    “―?!”

    생각지 못한 공격을 받은 족장이 비틀거리며 멀찍이 밀려 나갔다. 그의 손에 쥔 돌칼이 파초 뒤편으로 튕겨 날아가는 동시에 팔이 덜렁거렸다. 별하의 풀스윙을 정통으로 맞아 어깨가 탈골된 것이었다. 덜렁거리는 제 팔을 어리둥절하게 내려다본 족장의 만면이 짙게 일그러졌다.

    별하는 멈추지 않았다. 곧장 반대편으로 굵은 나무막대를 휘둘렀다. 뻐억― 처음 한 번은 족장의 이목이 파비안에게로 오롯이 집중되어 나무막대를 휘두를 틈이 있었지만, 두 번째부터는 어림없었다. 족장은 별하가 온 힘을 다해 휘두르는 족족 전부 다 막아냈다.

    아나콘다의 철갑을 찢어낼 정도로 엄청난 악력을 지닌 손아귀에 나무막대가 움켜잡히자마자 별하는 손을 놓고 뒤돌아 달렸다. 파초 뒤편으로 튕겨 날아간 돌칼을 먼저 손에 쥐기 위해서였다.

    “하아…… 하아…….”

    별하는 파초 군락을 다급히 헤집으며 파비안의 피가 묻은 돌칼을 찾았다. 썩은 코코넛 열매가 널브러진 이끼바닥과 높다란 풀숲을 헤집는 중 뒤쪽으로 긴 그림자가 드리웠다.

    어깨가 탈골될 것 같은 강한 악력이 별하의 어깨를 움켜쥐어서는 그대로 뒤돌아 세웠다.

    “으읏―”

    족장은 탈골되어 덜렁거리는 팔을 끼울 여유도 없이 별하에게로 달려들었다. 주먹을 내지르며 저항하는 별하의 발을 가볍게 걸어 넘어뜨렸다. 미끄러운 이끼에 더해 엉덩이를 찧으며 넘어진 그의 위로 족장이 서둘러 올라탔다.

    “벼, 라! 벼, 라!”

    “미, 으윽, 미친 새……!”

    “벼, 라!”

    족장은 어디서 배운 건지 모를 별하의 이름을 신이 나 외쳐 불렀다. 체중으로 꼼짝하지 못하게 짓누르고는 별하의 티셔츠를 찢을 듯 밀어 올렸다. 가슴팍이 급격하게 오르내리며 선명히 우므러드는 명치를 한 손으로 잡아 벌렸다.

    “윽……!”

    별하가 빗장뼈가 벌어지는 고통에 몸을 들썩이며 팔다리를 거칠게 휘둘러 저항했다. 그에 족장은 한 손으로는 불편하다고 생각했던지 제 탈골된 어깨를 급히 매만졌다. 빗물에 몇 번이나 손이 미끄러져 혀를 끌끌 차댔다.

    별하는 제 허리를 누르는 족장의 사지를 주먹으로 힘껏 퍽퍽퍽 두들겼다. 살면서 이렇게나 주먹질을 해본 적이 있을까 싶을 만큼 잠시도 쉬지 않고 내질렀다. 별하의 주먹이 족장의 옆구리 어딘가쯤에 가닿을 때 일순 눈앞이 번쩍거렸다. 어깨를 맞추던 족장이 별하에게 위력을 가한 것이었다.

    “하아― 으윽, 하아―”

    별하는 굴하지 않았다. 먹혀 들지 않는 주먹질만으로는 지금의 상황이 조금도 좋아지지 않을 걸 깨닫고 다급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작은 돌멩이라도 좋으니 무엇이라도 손에 잡히길 간절히 바랐다.

    물웅덩이가 고인 풀숲으로 손을 내뻗어 바닥을 더듬는데, 족장의 어깨에서 두둑― 두두둑― 소리가 들려왔다. 자리를 벗어났던 뼈가 이내 제자리를 찾아가는 소리였다.

    일순 별하와 족장의 눈길이 한 지점에서 맞닿았다. 족장은 원상태로 돌아온 어깨를 이리저리 돌려보다가 별하를 향해 씨익 웃어 보였다.

    “벼, 라.”

    누런 이빨 사이사이에 거무죽죽한 무언가가 가득 끼어 있었다.

    “윽, 하아― 하아―”

    족장은 빗물이 흘러들어도 깜빡이지 않는 눈으로 저를 직시하는 별하의 가슴팍에 와락 달려들었다. 곧장 빗장뼈를 양손으로 벌려 잡았다. 손끝에 힘을 실어 오므라진 뼈대를 열어젖히려는 순간, 번들거리는 첨예한 날이 족장의 옆구리에 깊숙이 찔러 들었다.

    “……?!”

    별하는 움켜쥔 돌칼을 다시 한번 족장의 옆구리에 힘껏 박아넣었다.

    “죽, 어.”

    족장이 손을 우뚝 멈추고 제 옆구리를 내려다보았다. 한 차례 피 맛을 본 돌칼은 자비 없이 사선으로 깊이 박혀 있었다. 돌칼의 손잡이 끝으로 검붉은 핏방울이 빠르게 흘러내렸다.

    별하는 별안간 전투 의지를 잃고서 저에게로 눈알을 굴리는 족장의 복부를 가격해 단숨에 자세를 전복시켰다.

    “흐어억…….”

    옆구리에 박힌 돌칼을 곧바로 길게 끄집어내자마자 검붉은 체액이 쏟아져나왔다. 별하는 그것을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죽어.”

    명치를 향해 사정없이 내찌르는데 족장이 서둘러 붙잡아 저지했다. 몸에 힘을 싣자 꿰뚫렸던 옆구리에서 핏덩이 같은 핏물이 울걱울걱 쏟아져나왔다. 주변 수풀이 금세 피웅덩이로 가득 찼다.

    “허으윽…….”

    “하아― 죽어. 죽어. 하아―”

    별하는 돌칼을 사이에 두고 족장과 힘겨루기를 하면서도 이전의 위협적인 완력도, 악력도 느끼지 못했다. 의미 없는 손가락질에도 생명의 위협이 느껴지던 위압감을 이제는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상위를 점령한 별하는 턱을 치켜들고서 족장을 내려다보았다.

    “죽어. 죽어.”

    “이리바아야, 야리너파리이―! 이러, 이호나아아라이이―!”

    칼날을 움켜쥐고서 다급하게 외치는 족장의 목소리에 전에 없던 절실함이 깃들어 있었다. 별하는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온 체중을 실어 돌칼을 내리꽂았다.

    “이제 그만 죽으라고, 미친 새끼야―!”

    날카로운 칼날이 질긴 살을 가르며 뼈에 박혀 들었다. 별하는 멈추지 않았다. 돌칼을 한 손에 움켜쥐고서 족장에게 내질렀다.

    “죽어―!!”

    113.

    돌칼을 막으려 필사적으로 손을 휘젓던 족장은 머지않아 축 늘어졌다. 경련하듯이 몸을 뒤틀다가 그 후로 더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별하는 과격한 손길을 멈추지 않았다. 돌칼을 내리찍는 손과 얼굴이 온통 새빨간 피로 물들어 있었다. 단단한 살을 어렵게 파고들던 칼날이 불현듯 쉬이 미끄러져 들어갈 때서야 차츰 손이 멎어 들었다.

    “하아― 하아― 하아―”

    곤죽이 된 형체를 내려다보며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제 아래 누운 물체가 사람이 아니라 흡사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괴생물체처럼 보였다. 일말의 인류애도, 동정심도 없었다. 어떻게 두 번씩이나 아나콘다 배 속에서 살아 돌아온 것인지는 몰라도, 이제 더는 그 기묘한 천운을 받아들일 껍데기가 남아 있지 않은 모습이었다.

    별하는 이성이 돌아오자마자 손에 움켜쥐고 있던 것을 내던지고 서둘러 몸을 세워 일어났다. 정신없이 수풀을 헤집고 나가는데, 막 파초를 돌아오는 인영과 마주쳤다.

    “파…….”

    파비안이었다. 그는 이쪽을 향해 비틀비틀 걸어오다가 별하를 발견하고 멈춰 섰다.

    “별하……. 괜, 찮아……?”

    무척 걱정스러운 듯 물어 오는 파비안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새하�R다. 원래의 흰 얼굴에서 생기만 오롯이 빠져나가 영원히 깨지 않는 잠에 빠져들 것처럼 보였다. 그가 가쁘게 호흡을 할 때마다 복부를 움켜쥔 손가락 사이로 핏물이 흘러내렸다. 별하는 황급히 달려가 파비안을 부축했다. 말을 하고 있을 새가 없었다. 어서 출혈부터 막아야 했다.

    “조, 조금만. 파비안, 조금만 참아줘. 추, 출혈부터 멈춘 후에…….”

    파비안은 별하에게 몸을 완전히 기댔다. 워낙 체격 차이가 컸던 터라 별하는 비틀거리면서도 파비안을 놓치지 않았다. 그의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고 비를 피할 곳을 찾았다. 파비안은 핏물과 빗물에 흠뻑 젖은 별하를 내려다보며 나직이 한숨을 지었다.

    “하아……. 다행, 이야…….”

    “말하지 마, 파비안. 말하, 안 돼. 안 돼. 말하면 안 돼.”

    “으음―”

    별하는 급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희뿌연 장막 너머를 내다보며 큰 나무를 찾았다. 비를 피할 수만 있다면 당장 어디라도 좋았다. 끊이지 않고 내리는 빗물을 따라 발이 닿는 물웅덩이마다 불그스름하게 물들었다. 별하는 차갑게 몸이 식은 파비안을 부여잡고 무성한 관목 군락 뒤편의 고목으로 향했다.

    이곳이 어디쯤인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눈과 귀가 깜깜하게 닫힌 채로 오로지 파비안을 살려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꾸역꾸역 움직였다.

    발목까지 닿는 물웅덩이를 지나다 돌 이끼를 잘못 밟은 별하가 비틀거렸다. 파비안의 무게에 한순간 중심을 놓쳐 엉덩이를 찧으며 넘어졌다. 그에게 온전히 의지하고 있던 파비안 역시 넘어졌다. 별하는 엉덩이뼈에서부터 뒤통수까지 욱신거리는 통증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옆에 누운 파비안에게로 빠르게 기어갔다.

    “파비안―! 파, 파비안―!”

    파비안은 얼굴에 떨어지는 비를 맞으며 희미한 숨만 내뱉었다. 피가 멈추지 않는 그의 복부를 확인한 별하는 울먹이며 몸을 일으켰다. 일어나면서도 지면이 미끄러워 몇 번이나 비틀거렸다.

    “조, 금만 참아, 파비안. 읏, 다 왔어. 이제 금방이야.”

    바로 파비안을 일으키려 했으나 그는 일어나지 못했다. 눈을 뜨고 호흡을 하는 것도 버거워 보였다. 별하는 파비안의 상반신을 일으켜 세웠다. 등 쪽으로 손을 넣어 양쪽 겨드랑이를 잡고 끌었다.

    “으읏.”

    파비안은 생각보다 훨씬 더 무거웠다. 마치 쇳덩이를 끄는 듯 안간힘을 써서야 겨우 움직였다. 끌었다가 쉬기를 반복하며 수차례 만에 고목 밑으로 들어온 별하는 빗물이 뚝뚝 흐르는 채로 서둘러 파비안의 복부를 들여다보았다.

    날카로운 돌칼에 꿰뚫린 복부는 처참했다. 강철방패 같던 피부와 근육이 헝겊조각처럼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너덜너덜하다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을 만큼 헤져 있었다. 안쪽 장기에 얼마나 어느 정도의 손상이 입었는지 겉으로 봐서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주변의 피부 조직은 시퍼렇게 죽어 있었고 얕은 숨을 쉴 때도 핏물이 새어 나왔다. 어깨의 상처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아…… 하아…….”

    별하는 완전한 패닉 상태였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자신이 해야 하는 게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숨만 가쁘게 몰아쉬며 파비안의 차가운 몸을 더듬었다.

    “파비…….”

    나뭇가지 사이로 비집어 든 작은 빗방울이 파비안의 얼굴 위로 톡 떨어졌다. 파비안은 눈을 감았다가 뜨며 길게 한숨을 불어냈다. 복부를 누르던 손을 떼고 별하를 올려다보았다.

    “별, 하. 여기.”

    별하는 파비안의 손길을 따라 눈을 움직였다. 파비안은 너덜너덜하게 찢어진 환부를 정확히 가리키고 있었다.

    “이곳을.”

    “……?”

    처음에는 그의 뜻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새하얀 손끝만 쳐다보다가 이윽고 깨달았다. 그곳에 손을 넣으라는 뜻이었다. 장기가 무사한지 상태를 확인해 달라고 말하고 있었다. 별하는 그렁그렁한 눈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막아도 한참 모자를 판국에 그에게 고통만을 안겨주는 상처를 헤집을 용기도, 이성도 없었다. 파비안은 그런 별하를 잠잠히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감각이 없어. 아프지 않, 으니까 잠시만 확인하면 돼…….”

    “하아……. 하아…….”

    그는 혼란한 상태의 별하를 위로하듯 나직이 속삭였다.

    “괜찮아, 별하. 할 수 있어.”

    “하아…….”

    “별하만이 할 수 있어.”

    별하는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상처를 후벼야 하는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 순간이 꿈이기를 바랄 만큼, 차라리 원주민들의 감시를 받으며 움막 속 침대 위에서 아침을 맞이하기를 간절히 바랄 만큼 끔찍했지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기에 큰 상처를 입었다면 파비안의 생명은 머지않아 곧 거꾸러지리라. 애써 외면하고 모른 체하고 있던 최악의 상상과 마주한 별하는 더는 머뭇거리지 않았다. 깨끗한 빗물에 손을 씻어내고 파비안의 복부를 눌렀다. 파비안은 미동 없이 누워 빗방울이 떨어지는 나무 위를 바라다보았다.

    “조금만 참아.”

    별하는 숨을 훅 들이켠 후 곧장 너덜너덜하게 엉겨 붙은 살점 속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차갑게 식어가는 바깥과 달리 안쪽은 따뜻했다. 부드럽게 감기는 체액을 뒤적이며 손가락을 좀 더 안으로 밀어 넣었다.

    “…….”

    파비안의 눈썹이 어렴풋이 일그러졌지만 그 이상의 변화는 없었다.

    별하는 미끄덩하게 와 닿는 장기를 조심스럽게 더듬었다. 따뜻하고도 보드라운 그것들을 더듬어 확인했지만 상태가 어떤지 단정할 길이 없었다. 어디가 어디인지도 알지 못했다. 다만 바깥처럼 헤집어진 부분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별하는 새파랗게 질색한 얼굴로 말했다.

    “자, 잘 모르겠어. 근데 찢긴 곳은 없는 거 같아.”

    파비안의 턱 근육이 도드라졌다.

    “그나마 다, 행인가…….”

    별하는 더 견디지 못하고 급히 안쪽에서 손가락을 꺼냈다. 시뻘겋게 물든 제 손과 엉망진창이 된 파비안의 복부를 아연히 내려다보다가 서둘러 그의 셔츠를 벗겼다. 어깨의 상처도 심했지만 장기가 있는 복부만큼은 아니었다.

    셔츠로 파비안의 복부를 감싸는데 문득 한 가지를 깨달았다. 혈색이 빠진 파비안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과다출혈로 인해 오한을 느끼는 것이었다.

    “아, 안 돼.”

    별하는 벌떡 일어나 주변을 살폈다. 마른 장작을 찾으려는 생각이었지만 간밤부터 내린 장대비에 그런 게 있을 턱이 없었다. 온 세상이 젖어 있었다. 장작을 구할 수 없다면 하다못해 그를 덮을 만한 것이라도 필요했다.

    “하아…… 하아…….”

    별하는 머뭇거림 없이 빗속으로 들어갔다. 가까운 파초 군락으로 달려가 그곳을 돌아보았다. 수미터 높이의 커다란 파초들을 올려다보던 그는 그중에서 가장 단단한 것을 찾아내 양손으로 뜯어내기 시작했다.

    질긴 이파리는 손톱과 악력만으로는 수시간이 걸릴 듯했다. 바닥에서 돌멩이를 집어 들어 파초 이파리의 하단을 퍽퍽 내리쳤다. 잘못 내리쳐 손가락을 찧었지만 신음이 나오지 않았다.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려 더 빠르게 돌멩이질을 했다.

    너덜해진 이파리를 양손으로 단박에 뜯어내자 카누 배 크기만 한 커다란 지붕이 생겨났다. 별하는 지체하지 않고 그것을 어깨에 번뜩 짊어졌다. 돌아서 가는 그의 시야로 뭔가가 걸려들었다. 울창하게 우거진 녹음 뒤로 새카만 무언가가 있었다. 숲의 퇴적물이 높이 쌓여 만들어진 작은 동굴이었다.

    “하아…… 하아…….”

    그것을 확인한 별하는 서둘러 파비안에게로 돌아갔다. 움직이지 못하고 눈만 겨우 뜬 그를 커다란 이파리 위로 이끌었다. 감당하기 버거운 무게에도 어금니를 물고 파비안을 옮겼다.

    “별, 하…….”

    별하는 파비안의 눈가에 고인 빗물을 닦아주었다. 재차 고여 드는 빗물을 계속해 살살 닦아주며 가쁜 숨을 불어냈다.

    “방금 동굴을 발견했어. 하아……. 그곳에서 불 피워줄 테니까 조금만 더 견뎌줘. 얼른 갈 테니까. 하아…….”

    “…….”

    별하는 파비안의 상태를 살핀 뒤 곧바로 파초 이파리를 끌었다. 두꺼운 파초 이파리는 빗물에 젖은 지면 위에서 부드럽게 끌려갔다.

    어지럽게 뒤얽힌 수풀과 물웅덩이를 헤쳐 가까스로 파초 군락에 도착한 별하는 동굴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그리 크지 않은 곰들이 겨울잠을 자기 위해 머무르는 동굴처럼 보였다.

    젖은 풀냄새, 흙냄새 사이로 마른 나무냄새가 미세하게 느껴졌다. 안쪽에서는 별다른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포악한 맹수가 숨어 있다거나 굶주린 식인 원주민들이 튀어나올 낌새는 전혀 없어 보였다. 별하는 속히 파비안을 동굴 안쪽으로 이끌었다.

    114.

    동굴 안쪽은 바깥에서 들여다볼 때보다 널찍했다. 똑바로 서기에는 약간 부족했지만 일단 빗물이 새는 곳이 없었고 아늑했다.

    별하는 미동 없이 누운 파비안을 안쪽까지 힘겹게 끌어와 상태를 살폈다. 늘 따뜻한 체열을 나눠주던 파비안의 피부는 빗물에 젖어 차디찼다.

    “하아……. 많이 춥지? 빨리 불 피워줄게.”

    파비안은 대답 없이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가 떴다. 별하는 서둘러 동굴 안쪽을 더듬었다. 울퉁불퉁한 안벽은 큰 바위들과 썩어 들어가는 통나무들, 낙엽과 이끼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부스러기가 떨어지는 통나무의 외피를 더듬다 그 아래 쌓인 것들을 발견했다. 마른 나뭇가지들이었다. 그것을 주워 드는 순간 안쪽에 숨어 있던 쥐들이 후다닥 밖으로 도망쳤다. 별하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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