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트로피컬 아일랜드 (48)화 (48/49)
  • 서둘러 필요한 나뭇가지들을 주워 들고 파비안의 곁으로 돌아왔다. 굵은 나무조각의 외피를 긁듯이 뜯어내 뭉쳐놓은 후에 가늘고 단단한 나뭇가지들로 마찰을 일으켰다. 양손을 맞대어 열심히 비벼댔으나 젖은 손에서 떨어진 습기에 마찰력이 떨어졌다.

    “하아……. 하아…….”

    별하는 두 무릎을 꿇은 채로 다른 나뭇가지를 손에 넣고 비볐다. 숨을 돌릴 틈도 없이 작업에 열중하다가 파비안의 희미한 숨결이 잠시라도 귓가에 닿지 않으면 그에게로 허겁지겁 기어가 상태를 살폈다.

    어둑한 곳에서 나뭇가지를 만지다 피부 위로 붉은 실선들이 생겨나거나 손톱이 흔들려도 별하는 어떤 통증도 느끼지 못했다. 손바닥이 부어오를 정도로 나뭇가지들을 비비는데도 불씨는커녕, 연기조차 나지 않자 손에 든 것을 거칠게 집어 던졌다.

    “빌어먹을……!”

    그에 파비안의 내리깐 눈이 어두운 동굴을 떠다니는 별하의 그림자를 올려다보았다.

    “별하. 천천히 해. 서두르지 말고.”

    나직한 저음은 항상 그랬듯이 또렷하고도 차분했다. 언뜻 중상을 입은 사람의 목소리로는 느껴지지 않았다. 혼란의 늪에 빠진 별하를 진정시키려는 그의 배려인지도 몰랐다.

    “하아아…….”

    별하는 젖은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리며 다른 마른 나뭇가지를 손에 들었다. 바닥에 댄 나무토막을 뒤집어 다시 시도했다. 바짝 굳은 어깨에서 힘을 빼고 손바닥을 부드럽게 비비자 이내 연기가 꾸무럭꾸무럭 솟아올랐다.

    외피를 긁어 만든 뭉치를 그곳에 가져다 대고 입바람을 불자 불씨가 번득였다. 곧 자그마한 불티가 날리며 어둠이 멀찍하게 밀려났다. 별하는 불꽃에 먹혀드는 외피뭉치 위로 나뭇가지들을 세웠다. 불이 완전하게 옮겨붙은 것을 확인하고는 파비안에게로 다가갔다.

    “파비안, 불붙였으니까 이제 좀 따뜻해질 거야.”

    파비안은 제 목덜미에 손을 대고 체온을 재는 별하를 고요하게 올려다보았다. 표정은 없었지만 그를 격려하는 눈빛이었다. 별하는 새빨갛게 물든 그의 셔츠를 내려다보며 어금니를 물었다.

    일절 움직이지 않는데도 피가 멈추지 않았다. 이러다 정말 온몸의 혈액이 빠져나오는 게 아닐까 두려웠다. 불로 천공 주변부를 지져서 지혈하기는 전혀 불가능해 보였다. 환부의 크기도 크기였고 고통만 더할 뿐이었다. 바늘도 실도 없는 이곳에서는 기을 수 있을 만한 것이 없었다. 눌러 막아 멈추게 하는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별하는 파비안의 차가운 손을 꼭 잡고서 그의 이마에 달라붙은 금빛 머리칼을 조심조심 떼어내 주었다.

    “피가 멈추지 않아.”

    “…….”

    “압박할 수 있을 만한 걸 찾아올게. 나뭇잎이나 덩굴 같은 거. 금방 올 테니까 잠시만 기다려줘, 파비안.”

    파비안은 눈에 띄게 느려진 숨을 불어내며 희끄무레해진 입술을 열었다.

    “비가 그칠 때까지…….”

    별하는 입술을 깨물었다. 콧잔등이 뜨거워져 눈가까지 시큰거렸다.

    “그때까지 기다리면 넌? 네 피는? 계속 이렇게 흐르도록 놔둬야 하는 거야? 안 돼, 싫어. 그것만은 절대로 싫어. 금방 갔다 올게. 힘들겠지만 버텨줘, 파비안.”

    울먹거리는 별하를 올려다보는 파비안의 목울대가 느릿하게 움직였다. 그러자 그의 입가로 선혈이 흘러내렸다. 별하는 얼른 그의 입술을 닦아주었다. 파초 이파리 안쪽으로 고여 드는 붉은 체액을 더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멀리 안 가. 근처에서 찾아올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최대한 편안하게 누워 있어. 알았지?”

    별하는 파비안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재빨리 동굴을 빠져나갔다. 다시 굵직하게 쏟아지는 장대비 속에서 필요한 것들을 찾았다. 환부를 넉넉하게 덮고 압박할 만한 게 필요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파초 군락에서 너르고 단단한 나뭇잎들을 쉬이 수확할 수 있었다.

    그것들을 정신 없이 뜯어내던 중에 바나나 나무도 발견했다. 아직 익지 않은 상태로 보였지만 별하는 마다하지 않고 얼른 송이째로 뜯었다. 자신에게 이런 힘이 숨겨져 있으리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바나나 송이를 번쩍 끌어안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하아……. 하아아…….”

    동굴 안의 모닥불은 어느덧 크게 자라나 있었다. 별하는 꼼짝하지 않고 누운 파비안부터 들여다보았다. 눈을 감은 채로 얕은 숨을 불어내는 것을 확인한 후에 가져온 것들을 그의 머리맡에 놓아두었다. 곧바로 밖으로 나갔다. 근처에서 뜯어낸 나뭇잎을 접어 빗물을 담은 후 안으로 들어가 파비안의 곁에 앉았다.

    “파비안. 물 좀 마셔.”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별하는 빗물을 제 입으로 가져갔다. 그대로 허리를 숙여 파비안의 입술을 눌렀다. 입 안 가득 들이켠 것을 건네주려는데 물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의 입 안에 고여 있던 핏물이 빗물을 밀어내며 울걱 밖으로 흘러내렸다. 별하의 얼굴은 온통 젖어 있었다. 어느새 길게 자라난 검은 머리칼도, 눈가도, 흰 뺨과 새빨간 입술도 흠뻑 젖어 투명한 물방울을 떨어뜨렸다.

    “파비, 안…….”

    별하는 파비안을 아연히 바라보다 얼른 손등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비감에 잠겨 있을 시간이 없었다. 피로 흠뻑 젖은 셔츠 위에 나뭇잎을 겹겹이 대어 둘렀다. 뒤쪽으로 체액 유실이 심해 억지로 파비안의 몸을 움직여 나뭇잎을 등 위아래로 넓게 감았다. 질긴 나뭇잎을 결 방향대로 갈라 단단히 매듭을 지은 후 그를 똑바로 눕혔다.

    그 와중에 눈을 뜬 파비안이 나직한 한숨을 불어냈다. 별하는 다시 뛰어나가 나뭇잎에 빗물을 받아 왔다.

    “파비안, 물. 물 마셔야 해.”

    “……미안해. 별하.”

    “내가 더, 내가 더 미안해. 그러니까 어서, 물. 물 마셔.”

    별하는 급히 물을 입 안에 머금어 곧장 파비안의 입술로 가져갔다. 살짝 벌어지는 입술 안쪽으로 물을 조금씩 흘려 넣었다. 밀려 나오던 좀 전과는 달리 조금씩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입 안의 물을 모두 건넨 별하는 다시 그것을 반복했다. 파비안은 목울대를 느리게 움직이며 물을 받아 마셨다.

    “잘했어, 파비안. 잘했어.”

    별하는 파비안의 뺨에 입술을 눌렀다. 그에 파비안 역시 고개를 살짝 틀어 별하의 뺨에 키스를 남겼다. 늘 느껴지던 따뜻한 열감 대신에 차가운 감촉이 스치자 기어코 별하의 눈가가 붉게 달아올랐다.

    “파비안…….”

    파비안은 가만히 손을 들어 별하의 눈가를 문질렀다.

    “미안해. 자꾸 늦어져서.”

    별하는 고개를 내저었다. 머리맡에 둔 바나나 하나를 따서 허겁지겁 껍질을 벗겨냈다.

    “뭐라도 먹어야 해. 그래야 피도 멎고 빨리 나아. 그래야, 그래야 뭐든 할 수 있어.”

    속살이 드러난 것을 파비안의 입가로 가져갔으나 그는 먹지 않았다. 그는 어떻게 해야 할 줄을 모르고 허둥거리는 별하를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

    “내 집에 가면 3층 서재에 금고가 있어.”

    “……?”

    “암호는 내가 어릴 적 머물던 저택의 스펠링을 거꾸로 이으면 돼.”

    “파, 파비안?”

    “그곳에 대한 건 아버, 님이 알려주실 거야. 스위스 은행 계좌……와 관련된 메모리칩도 있으니 잊어버리지 마.”

    별하는 사색이 된 얼굴을 험악하게 찡그렸다.

    “뭐, 뭐야? 그런 건 왜, 왜 가르쳐주는 거야?? 그러지 마, 싫어.”

    “별하라면 다른 암, 호들도 쉽게 찾아낼 수 있을 거야.”

    “그런 건 듣고 싶지 않아. 듣고 싶지 않아.”

    “들어야 해. 이제는 별하 거니까.”

    “싫어……. 싫어, 파비안…….”

    “반드시 챙겨.”

    파비안은 말을 마치자마자 쿨럭쿨럭― 기침을 쏟아냈다. 그러자 상처를 막아놓은 나뭇잎으로 사이로 핏물이 흥건하게 흘러내렸다. 별하는 얼른 파비안의 머리 뒤에 제 다리를 받쳤다.

    “아, 안 돼. 말하지 마, 파비안. 이제 말하지 마, 제발.”

    “…….”

    파비안은 눈을 감은 채로 제 입가를 닦아냈다. 탈색한 입술이 선혈로 새빨갛게 물들었다. 똑, 똑― 파비안의 창백한 뺨으로 따뜻한 물방울이 떨어졌다. 별하의 젖은 어깨가 잘게 흔들리고 있었다. 등을 웅크린 채 억지로 참고 참았지만 더는 견딜 수 없는 듯 입술을 깨물고 울었다.

    “흐윽……. 각인하기로 약속했잖아…….”

    그를 바라보는 파비안의 눈동자에 짙은 그늘이 드리웠다. 별하는 굵은 눈물이 뚝뚝 흐르는 눈가를 문질러 닦으며 터져 나올 듯한 흐느낌을 억눌렀다.

    “나랑 각인해야 해. 흑, 흐읍……. 내 짝은 너란 말이야. 파비안 네가 아니면 난…….”

    “…….”

    “계속, 흐윽……. 기다리고 있었단 말이야……. 그때부터 계속…….”

    파비안의 맑은 눈동자에도 물기가 어려 반짝거렸다. 그는 별하를 올려다보며 힘겹게 입술을 달싹였다.

    “……해.”

    “흐윽……. 약속했잖아…….”

    “미안해.”

    115.

    “미안해.”

    “흡, 흐읍…….”

    별하는 목구멍에서 뜨겁게 치미는 열기를 뱉어내며 눈가를 문질러 닦았다. 눈물을 닦아내면 금방 새로이 차올라 흘러내렸다. 파비안은 새하얀 석고조각 같은 손을 들어 별하의 뺨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예쁜 내 오메가…….”

    별하는 무겁게 젖은 눈을 들어 올렸다. 조심스럽게 제 뺨을 어루만지는 파비안의 손을 감싸듯 잡고 차가운 손가락에 깍지를 끼웠다. 힘을 실어 마주 잡는 그의 손등에 입술을 맞추며 말했다.

    “아직 늦지 않았어. 각인하자, 파비안. 지금이라도. 지금이라도 네 오메가가 되게 해줘.”

    “……별하는 이미 나의 오메가야.”

    별하는 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안 물었잖아.”

    “…….”

    “물어줘. 지금 바로, 파비안.”

    말없이 별하를 올려다보는 파비안의 얼굴에는 육체의 고통에 시달릴 때와는 또 다른 그늘이 깃들었다. 이전의 어떤 상처들보다도 그를 괴롭히는 듯했다. 파비안은 제 대답만을 기다리며 희미하게 몸을 떠는 별하를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내 아버지, 내 어머니를 보고 자라며 늘 생각했었어. 누구와도 각인을 맺지 않겠다고. 으음……. 피치 못할 사정으로 헤어지는 불상사가 생겼을 때, 그게 상대에게 얼마나 큰 죄를 짓는 일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

    파비안은 고통을 참는 듯 잠시 숨을 고른 후 가만히 말을 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평생을 독한 억제제에 의존하며 살아가게 하고 싶지 않아.”

    별하는 파비안의 손을 두 손으로 끌어안으며 낮게 소리치듯 대답했다.

    “그럼 안 죽으면 되잖아. 나랑 살면 되잖아. 나랑 같이 살아가면 되는 거잖아. 그럼 그런 억제제 안 먹어도 살아갈 수 있잖아…….”

    젖은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턱끝으로 방울져 떨어졌다. 파비안은 대답이 없었다. 별하의 눈물방울이 제 얼굴에 톡, 톡 떨어질 때마다 어둡게 가라앉은 눈을 느지막이 감았다가 떴다.

    “그럼 잠시 생각할 시간, 을 주지 않겠어……?”

    별하는 눈물방울을 떨어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파비안은 어렴풋이 입꼬리를 당기며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크루즈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작은 남자와 이 순간까지 함께하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어.”

    “…….”

    “인생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 투성이군.”

    눈물을 가까스로 멈춘 별하는 잔 훌쩍임을 억누르며 말했다.

    “흐읍……. 나 그렇게 작지 않아. 파비안 네가 큰 거야.”

    “그런가……?”

    “응.”

    “그래. 그럴 수도 있겠구나.”

    “그때는 정말 미웠었는데. 주먹이 불끈 쥐어질 만큼.”

    파비안은 들리지 않는 한숨처럼 흐릿한 웃음을 지었다.

    “그럴 만도 했지. 제 세상에 갇혀 살던 오만한 녀석이었으니.”

    고요히 대답한 이는 모닥불 그림자에 어른거리는 동굴의 천장을 말없이 응시했다. 별하는 파비안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추고는 헝클어진 금발을 가지런히 쓸어넘겨 주었다.

    “지금은 가장 소중해.”

    “…….”

    “너와 함께하지 못하는 삶은 이제 상상하는 것도 힘들 정도로.”

    파비안은 말이 없었다. 별하는 그의 새하얀 뺨에 달라붙은 흙과 혈흔을 살살 닦아주었다. 제 말에 어떤 대답도 필요치 않다는 듯 현재의 시급한 사안에 집중했다.

    “혹시 허기가 지진 않아?”

    이색의 눈동자는 생기 없이 무겁게 가라앉은 채로 허공을 향해 있었다. 별하는 계속해 물었다.

    “물 말고, 다른 뭐라도 먹어야 빨리 낫지 않을까? 과일 같은 거 먹을 수 있겠어? 부드럽게 갈아서 죽처럼 만들면 되거든. 죽 알지? 포리지 비슷한 거.”

    파비안은 식욕을 전혀 느끼지 않았다. 식욕뿐만 아니라 어떤 욕구도 없었다. 어깨와 복부에서 들끓던 뜨거운 열감도 서서히 무뎌지고 있었다. 동시에 강한 졸음이 밀려들었다. 그는 무겁게 내리감기는 눈을 힘겹게 감았다가 떴다.

    “별하. 부탁, 이 있어…….”

    파비안의 얼굴을 쓰다듬던 별하는 어서 말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파비안은 금세 거칠게 메말라버린 입술을 간신히 달싹였다.

    “해변에서 구워 먹, 었던 조개.”

    “응, 조개. 그거 구워 먹었던 적이 있었지. 너무 맛있었어.”

    “맞아. 그랬어.”

    “그건 왜?”

    파비안은 미안한 듯 물어왔다.

    “구해줄 수 있을까……? 좋지 않은 날씨에 고생스럽겠지만, 바다에 들어가지 않, 아도 찾을 수 있어.”

    별하는 파비안의 입가로 배어 나오는 핏물을 아연히 내려다보며 되물었다.

    “조, 개 먹고 싶어?”

    “한 번쯤 다시 먹고 싶어.”

    “…….”

    “많이 필요하지 않아. 하나면 충분해.”

    “…….”

    “다녀오면, 그때 각인을…….”

    파비안은 말끝을 흐렸다. 별하 역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각인은 지금 당장이라도 원하고 있었으나 이대로 파비안을 두고 갈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런 부탁을 한 적이 없었다. 이렇게 간절히 원하는 것을 먹이지 않으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여기서 해변과의 거리가 얼마나 될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별하는 눈이 멀어버린 듯 한 치 앞도 내다보지 않았다. 파비안은 별하의 마음을 꿰뚫어 본 듯 말했다.

    “해를 따라가면 돼. 머지않아 곧 먹구름이 걷힐 테니 쉽게 찾, 쿨럭쿨럭―!”

    그는 말을 다 맺지 못하고 기침을 거칠게 쏟아냈다. 간신히 삼키며 억누르던 핏물이 단숨에 역류해 밖으로 쏟아져나왔다. 쿨럭쿨럭―!

    “파비……!”

    별하는 그의 기도가 막히지 않도록 얼른 고개를 돌려주었다. 게워낸 핏물과 벌어진 상처에서 흘러내린 검붉은 체액이 낮은 지면으로 한가득 고여 들었다. 이대로라면 과다출혈로 곧 심정지가 일어날 수 있었다.

    부드러운 이끼 위에 파비안을 눕히고 급히 밖으로 달려나갔다. 되는대로 접어 만든 나뭇잎에 빗물을 가득 담아 돌아온 그는 서둘러 파비안의 입 안에 물을 흘려 넣었다. 전혀 들어가지 않아 제 입을 통해 밀어 넣어도 마찬가지였다.

    “파, 파비안. 안 돼, 파비안. 안 돼, 안 돼.”

    과다출혈로 인한 쇼크였다.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강제로 주입했다간 기도 폐쇄로 질식사할 수도 있었다. 별하는 손에 든 것을 집어 던졌다. 이성을 잃은 그는 황급히 모닥불 근처에서 나뭇가지를 주워 들었다. 그것을 양쪽으로 잡아 단박에 콰직 부러뜨렸다. 날카로운 단면이 생겨난 것을 제 아래팔에 가져다 댔다. 찰나의 망설임도, 의심도 없이 그대로 팔에 찔러넣어 그었다.

    “으윽…….”

    생살이 찢기는 아픔이 엄청났지만 가슴 안쪽이 문드러져 녹아내리는 듯한 통증에는 비할 바가 되지 못했다. 벌어진 살 틈으로 선혈이 흘러내렸다. 별하는 그것을 파비안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파비안, 파비안. 어서 마셔. 내 피라도 어서. 제발, 파비. 파비안…….”

    별하의 새빨간 선혈이 파비안의 입술 점막을 타고 안쪽으로 흘러들었으나 목은 움직이지 않았다. 별하는 제 팔에 입을 가져다 대고 힘껏 빨아들였다. 찢어진 틈을 통해 눅진하게 고여 드는 것을 곧바로 파비안의 입으로 옮겼다.

    “파비안, 마셔. 제발. 제발.”

    그가 마실 수 있도록 목 뒤를 살짝 눌러 자극하자 굳은 목울대가 느릿하게 상하로 움직였다. 별하는 그제야 깊은 한숨을 터트렸다. 재빨리 다시 한번 따뜻한 제 피를 파비안의 점막 안으로 밀어 넣었다. 잠시 의식을 잃었던 파비안은 깊게 감겼던 눈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피투성이가 된 그는 들릴 듯 말 듯 나직이 속삭였다.

    “어, 서. 별하…….”

    별하는 팔에서 배어나는 선혈을 막지도 못하고 그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파비안은 별하와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혀 밑에 고인 것을 목으로 넘기며 또렷한 목소리를 냈다.

    “부탁이야.”

    “…….”

    “별하.”

    이런 중에도 더할 수 없이 부드럽고 달콤한 저음이 그를 재촉했다. 별하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가 원하는 것이었으니까.

    “……금방 갔다 올게. 쉬지 않고 달려갔다 올 테니까, 그때까지, 움직이지 마. 되도록.”

    파비안은 입가를 끌어올리며 고개를 까딱였다.

    “고마워, 별하.”

    “금방 갔다 올 거야…….”

    “그래.”

    “…….”

    “…….”

    별하는 오드아이를 반짝이며 저를 보는 파비안에게서 주춤주춤 멀어졌다. 움직이고 싶지 않은 발과 본심이 천근만근이었다.

    달짝지근한 피냄새가 진동하는 동굴에서 벗어나자 곧 빗줄기가 덮쳐들었다. 쏴아아아― 별하는 모닥불 옆에 누운 인영을 희뿌연 장막 너머로 바라보았다.

    “…….”

    굳게 닫힌 파비안의 입술이 찰나로 열렸다. 빗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는 목소리의 의미를 알아차리자마자 별하는 뒤돌아 달렸다. 먹구름에 가려진 태양을 따라 누기로 뒤덮인 밀림을 재빠르게 헤쳐 나갔다. 어디가 어디인지 전혀 알지 못한 채로 오직 태양을 쫓아 달렸다.

    “하아…… 하아…….”

    빗물이 야트막하게 흐르는 경사면을 급하게 뛰어 내려가다 나무뿌리에 발이 걸려 휘청거렸다. 미끄러운 지면에 중심을 잡지 못해 그대로 수풀 위로 풀썩 엎어졌다.

    “으읏―”

    별하는 엎어진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빗물에 흠뻑 젖은 얼굴을 수풀에 묻고 이를 악물었다. 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으면서도 눈앞이 뿌옇게 흐려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다.

    별하 역시도 알고 있었다. 파비안이 저를 해변으로 보내는 이유를. 그가 어째서 이런 상황에 돌연 조개를 찾는지를. 그것을 알면서도 모든 것을 내려놓고 갈 수밖에 없는 자신이 원망스러웠고, 파비안이 미웠다.

    “흐윽…….”

    별하는 파비안에게서 멀어지고서야 별안간 깨달았다. 그에게 전하지 못한 말이 있었다. 둘 사이에 가장 중요한 말을 왜 이제야 생각해 낸 건지, 다시 돌아가 말해 주고 싶었다. 어쩌면 일평생 두 번 다시는 나오지 못할지도 모를 말, 그 한마디를 파비안에게 오롯이 전해주고 싶었다.

    ‘별하…….’

    동굴 밖에서 흐릿하게 귓가를 스친 파비안의 저음은 무척 상냥하고 따뜻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부디 무사히 돌아갈 수 있기를.’

    “흡, 흐윽…….”

    별하는 빗줄기가 쏟아붓는 젖은 수풀 위에 꼼짝하지 않고 누운 채로 소리 죽여 울었다. 그러다 이내 기절하듯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 * *

    사람의 머리칼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가늘고 풍성하며 부드러운 모질이었다. 어디선가 만져본 적이 있는 부드러운 감촉을 전신으로 느낀 순간 번뜩 눈이 뜨였다.

    뻑뻑한 시야로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새하얀 모래였다. 미지근한 실바람이 야자수가 뜨문뜨문 자라난 모래밭 안쪽으로 막 불어 들었다. 별하는 마른 머리칼 사이로 파고드는 바람을 맞으며 주위를 멍하니 돌아보았다.

    비는 내리지 않았고 젖은 수풀도 없었다. 무엇보다 밀림이 아니었다. 전혀 다른 장소에 와 있었다. 별하가 앉은 그늘 너머에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란 하늘과 파스텔톤 빛깔의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

    그는 어째서 자신이 이곳에 와 있는지 짐작도 하지 못했다. 무언가가 극심하게 흔들리는 물체에 올라탔던 것 같은 꿈을 꾸긴 했지만 그 이상의 것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머릿속에 하나의 얼굴이 번뜩 떠올랐다. 파비안―

    별하는 일순 새파래진 얼굴로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그 후로 얼마나 시간을 지체한 건지 알 수 없었다. 날씨가 화창하게 갠 것으로 봐서 적어도 반나절은 지난 것으로 보였다.

    모래를 한 움큼 집어삼킨 듯 따가운 목으로 마른 침을 삼키며 서둘러 해변으로 나갔다. 어서 조개를 주워 파비안에게로 돌아가야 했다. 흰 포말이 밀려드는 물가로 나가 젖은 모래를 돌아보았다.

    파비안이 원하는 것을 눈으로는 찾을 수 없어 물속으로 첨벙첨벙 들어갔다. 맑은 물속에 숨은 조개를 찾으려 발로 정신없이 모래를 휘젓는데, 문득 시야로 뭔가가 걸려들었다. 야자수 아래 걸린 형광 노란색의 천 조각이었다.

    폭풍우에 용케 날아가지 않고 해변을 맴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것이 미끄러지듯 휙 움직였다.

    “……?”

    별하는 제 눈을 비볐다. 부은 눈두덩을 문지르며 왼쪽과 오른쪽을 오가는 천조각을 아연히 바라보았다. 드디어 미쳐버린 건가? 생각하며 이쪽을 향해 똑바로 날아오는 천조각을 마주하는데, 돌연 낯선 이목구비와 마주했다.

    “…….”

    별하는 제 눈앞에 서 있는 사람과 한참 얼굴을 마주 보았다. 새파란 눈동자와 두툼한 코, 입술, 흰 피부, 갈색 머리를 한 사람은 분명히 사람이었다. 그것도 원주민이 아닌 전형적인 서양인이었다. 별하는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형광 노란색의 조끼를 입은 사람을 쳐다보았다. 상대가 먼저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괜찮, 으세요?”

    영어였다. 별하는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믿기지 않는 현실에 두 눈을 끔뻑거리다 돌연 울컥 눈물을 쏟았다. 바짝 마른 입술을 억지로 열어 작게 달싹였다.

    “도, 도와주세요. 제발…….”

    새하얀 해변에는 헬리콥터 세 대와 중형 선박이 대기해 있었다. 구조대는 수십 명이었다. 용병 군인들과 의료진, 관련인들이 해변에 임시 거처를 만들어 북적거렸다.

    별하는 저를 임시 거처로 안내하는 것을 완강히 거부했다. 태평하게 수다를 떨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파비안은 한시가 촉박한 상태였다. 반나절, 어쩌면 한나절 동안에 좋지 않은 상태를 맞이했을지도 몰랐다. 쇼크 상태가 길어지면 결과는 단 하나였다.

    최악의 상황을 떠올린 별하는 발악하듯 어서 움직이기를 간청했다. 그런 별하 앞에 금발의 노신사가 다가왔다.

    “저는 조슈아 블랙그레이라고 합니다.”

    별하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뚜렷한 이목구비의 금발 노신사는 파비안의 부친이었다. 그는 다른 말 대신 진회색의 슈트 안쪽에서 작은 사진 한 장을 꺼내 별하에게로 내밀며 정중하게 물었다.

    “아는 얼굴입니까?”

    작은 사진 안에 찍힌 인물을 확인한 별하의 눈가로 금세 눈물이 흘러내렸다. 별하는 근심과 상념이 짙게 드리운 노신사를 올려다보며 울먹였다.

    “살려주세요. 이 사람을.”

    조슈아의 지휘 아래, 알파 용병들로 구성된 밀림 탐색 몇 팀이 일사천리로 꾸려졌다. 별하는 임시방편의 응급처지만 받은 후 그들과 함께 밀림으로 들어섰다.

    밀림에서 길을 찾기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소비되었다. 애초에 길이 없어서 동물들이 지나다니는 길을 중심으로 안쪽을 더듬었다. 깊은 숲에서 전자기기는 수시로 오작동을 일으켰다.

    별하의 흐릿한 기억과 높은 지능의 훈련견들의 도움으로 이틀 만에 가까스로 파초 군락의 동굴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들이 찾는 이는 그곳에 없었다. 다량으로 피를 흘린 흔적과 모닥불이 꺼지고 남은 숯만이 어둠 속에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추가로 투입된 알파 용병들과 며칠에 걸쳐 주변을 수색했지만 파비안은 찾지 못했다. 빗물과 함께 증발해 버린 듯 페로몬도 찾을 수 없었다.

    별하는 구조된 날부터 한시도 잠들지 못했다. 안정제를 맞고 여러 도움을 받아도 그때뿐 날이 갈수록 피폐해져 갔다. 밥은커녕, 물도 제대로 넘기지 못해 밀림에서 지낼 때보다 더 피골이 상접해 있었다.

    갖은 노력에도 파비안을 찾지 못한 그들은 색다른 방안을 모색했다. 바로 현지인들의 도움을 받는 것이었다. 그러나 별하가 탐색팀들과 식인종 원주민들의 거처에 들이닥쳤을 때는 텅 빈 움막들만이 남아 있었다. 알파, 오메가, 베타, 그들이 기르던 가축들까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마치 들이닥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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