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트로피컬 아일랜드 (46)화 (46/49)
  • “아악! 허으윽―!”

    악운은 끝나지 않고 더 큰 악운을 불러왔다. 소란에 잠을 깬 주변의 아나콘다가 스르륵 대가리를 치켜들었다. 검은 혀를 날름거리는 파충류 옆으로 또 다른 배고픈 파충류들이 연이어 다가와 자그마한 먹이를 에워쌌다. 알파 원주민의 새된 비명은 순식간에 아나콘다의 목구멍으로 빨려 들어갔다.

    별하는 급히 손을 들어 빗물과 함께 빠른 속도로 흘러내리는 핏물을 막았다. 그러나 그의 손까지 시뻘겋게 물들어 갈 뿐 피는 멈추지 않았다.

    파비안은 제 어깨를 관통한 화살을 더듬었다. 촉이 구부러진 화살은 뽑을 수 없었다. 출혈을 생각해서라도 여기를 벗어날 때까지는 그대로 두는 편이 더 안전했다.

    그는 구부러진 촉을 앞으로 쭉 잡아당겼다. 길게 튀어나온 앞을 단번에 콰직 부러뜨렸다. 벌어진 상처로 핏줄기가 길게 이어졌다.

    파비안의 부상에 넋이 나간 별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두두의 팔이 잘려나갈 때만 해도 굉장히 고통스럽겠구나, 정도로만 생각했었다.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여유도 없었다.

    파비안의 상처를 마주하는 순간, 마치 제 어깨가 관통당한 듯 뼈까지 시렸다. 꾸물꾸물 새어 나오는 선혈이 이렇게나 애틋하고 안타깝고 아까울 수 없었다. 파비안은 턱 근육을 세우며 차분히 말했다.

    “괜찮아. 난 괜찮으니 어서, 위로 올라가.”

    표정이 좋지 않았지만 본인의 말대로 그 이상의 반응은 없었다.

    어깨를 관통당해 피를 흘리는 게 평범하고 쉬운 일일 수는 없었다. 심약한 오메가나 베타였다면 관통당한 즉시 쇼크로 졸도했을 수도 있었다.

    여러 후유증이 발생할 수 있는 위험한 부상이었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었다. 잠에서 깬 아나콘다들이 주린 배를 채우려 달려들기 직전이었다.

    벌써 뒤쪽의 흙탕물이 거칠게 들끓고 있었다. 다른 알파 원주민들의 시체까지 발견해 한입에 먹어치운 아나콘다들이 이쪽을 발견한 것이었다.

    “별하 어서―”

    여기서 더 꾸물거리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별하는 주먹을 움켜쥐고서 뒤돌아 절벽을 올랐다.

    수직 절벽은 빗물이 폭포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튀어 오르는 빗물에 눈을 똑바로 뜨기 힘들었다. 별하는 안벽 깊은 곳까지 뿌리를 내린 수풀과 튀어나온 바위를 번갈아 움켜잡아 빠르게 오르던 중 발밑을 힐긋 내려다보았다.

    아래쪽에는 흙탕물만 파도처럼 밀어닥칠 뿐 아무것도 없었다. 파비안을 닮은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었다. 물살을 타고 온 작은 아나콘다 한 마리가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작다고 해도 코브라의 몇 배였다.

    화들짝 놀란 별하는 다급히 그 주변을 살폈다. 혹여 저처럼 흙탕물에 떨어져 빠져나오지 못하는 상황에 처했다거나 별안간 튀어 오른 아나콘다에 꼼짝없이 먹혀버렸나, 끔찍한 상상밖에 하지 못했다.

    큰 부상을 당한 상태라 상상은 금방 극악으로 치달았다.

    “파……비안?”

    그 때 바로 옆에서 저음이 들려왔다.

    “잘하고 있어, 별하.”

    별하는 서둘러 뒤쪽을 돌아보았다. 언제인지, 제 옆까지 치고 올라온 파비안을 제 눈으로 확인하고서야 숨을 크게 내쉬었다.

    움직일 때마다 벌어지는 어깨의 상처에서 선혈이 끝없이 흘러나왔다. 파비안은 온전치 않은 상태로도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으로 절벽을 올랐다. 간혹 턱을 물고 통증을 참으면서도 작은 신음조차 입밖으로 내지 않았다.

    별하 역시 사지에 힘을 실어 가파르고도 몹시 미끄러운 절벽을 올랐다. 나무뿌리를 잡고서 바위를 밟다가 젖은 이끼에 발이 쭉 밀려나갔다.

    “읏!”

    옆에서 강한 완력이 별하의 팔을 붙잡았다.

    “괜찮아?”

    “하아…… 하아…….”

    나무뿌리에 매달린 별하는 서둘러 파비안을 향해 괜찮다는 눈길을 보냈다. 곧바로 발밑을 내려다보며 디딜 곳을 찾았다. 옆쪽에 삐죽이 튀어나온 바위를 밟으며 한숨 돌린 별하는 그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절벽을 기어오르려는 작은 아나콘다 옆으로 큰 녀석들이 빠르게 모여들었다. 막 잠에서 깨어난 녀석들까지 각인한 것처럼 전부 이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조금만 머리를 굴려 몸체를 꼿꼿이 세우면 손쉽게 집어삼킬 수 있을 거리였다.

    별하는 마른침을 삼켰다. 다시 빠르게 오르려 고개를 드는 시야로 한 형상이 걸려들었다.

    멀찍한 구석으로 밀려난 아나콘다였는데 목 아래쪽이 커다랗게 부어올라 있었다. 컨디션이 영 좋지 않은 듯 주둥이를 계속해 크게 벌려가며 구역질을 해댔다. 구역질을 해대도 목에 걸린 먹이가 넘어가지 않는지 커다란 몸을 뒤틀었다.

    “……?”

    그 순간 꾸무럭거리던 아나콘다의 목 아래가 단숨에 쩍 갈라졌다.

    “―!!”

    별하는 보고도 믿지 못했다. 철갑 같은 아나콘다의 두꺼운 비늘 외피가 흡사 싸구려 모조가죽처럼 찢어진 것이었다. 그보다 더 별하를 경악하게 만드는 건 따로 있었다. 벌어진 안쪽에서 손이 튀어나왔다. 다섯 개의 손가락이 붙은 사람 손이었다.

    앙상한 나무뿌리 같은 손가락은 아나콘다의 갈라진 외피를 양쪽으로 움켜잡고는 그대로 찢어냈다. 봇물처럼 쏟아지는 내장, 체액과 함께 시커먼 인영이 동그란 머리통을 밖으로 끄집어냈다. 족장이었다.

    “뭐, 뭐…….”

    별하는 똑바로 말을 맺지 못했다. 죽지 않고 살아 돌아온 족장을 보며 전에 없던 오한을 느꼈다.

    눈앞에서 아나콘다에게 잡아먹히는 것을 목격했었다. 그런데 여태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게 인간으로서 가능한지 의문이었다.

    족장은 비릿하고 역하지만, 다른 사람과 똑같은 피를 흘렸었다. 그는 틀림없는 인간이었다. 그럼에도 설명할 수 없는 특이성을 자주 보이는 그가 이제는 두려울 정도였다.

    빗줄기에 아나콘다의 체액을 씻어낸 족장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이쪽을 발견하고 반색했다. 멀리서도 깊은 주름이 만들어내는 표정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별하는 족장의 심연을 꿰뚫고 있었다.

    “쯧.”

    그는 거칠게 혀를 찼다. 별하와 같은 곳을 보던 파비안은 굳은 목소리로 재촉했다.

    “저놈은 내버려 두고 어서 서둘러, 별하.”

    “죽지도 않아. 제기랄. 망할―”

    별하는 아나콘다들을 겁내지 않고 황급히 이쪽 절벽으로 달려오는 족장을 곁눈질하며 서둘러 위로 향했다.

    절벽 아래 아나콘다들은 해바라기처럼 위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마치 먹이와의 거리를 재듯이. 이내 거리 측정을 끝낸 녀석들은 절벽을 기어올랐다. 작은 아나콘다들은 가까이 닿지 않았으나 두 배 이상으로 큰 아나콘다들은 가뿐하게 별하의 등 뒤까지 솟아올랐다.

    독가시 같은 시커먼 혀를 날름거리며 집어삼키려는 녀석의 눈알에 일순 가느다란 나뭇가지가 휙 꽂혔다. 절벽을 타던 커다란 무척추 살덩이가 맥없이 아래로 추락했다. 첨버덩―!

    파비안은 일부러 목소리를 높여 크게 외쳤다.

    “별하, 어서!”

    아나콘다들이 저를 목표로 삼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별하는 이를 깨물고 절벽을 탔다. 파비안은 번갈아 덮쳐드는 아나콘다를 발로 짓밟으며 위협을 가했다. 어깨에서 굵은 핏줄기가 흘러내렸지만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

    같은 절벽을 오르는 족장은 거침이 없었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현지인답게 철봉을 타 넘듯 절벽을 성큼성큼 뛰어올랐다. 금세 별하를 따라잡아서는 갈고리 같은 손을 뻗어왔다.

    “으윽.”

    별하는 족장의 손끝이 발뒤꿈치를 재차 스치는 감각에 치를 떨었다. 차가운 전류가 통하는 듯 소름이 끼쳐 거칠게 발길질을 했다.

    족장은 발길질을 당하면서도 사냥을 그만두지 않았다. 파비안의 도움을 받아 빠르게 오르는 별하를 예의주시하다 별안간 재빠르게 뛰어오르며 손을 내뻗었다. 순간 올가미에 별하의 발이 낚아채였다.

    “미, 미친!”

    별하는 머리 위쪽의 바위를 움켜잡으며 미친 듯이 발을 내질렀다. 몸무게를 완전히 실어 매달린 족장은 족쇄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무게를 더 견디기가 힘들었다.

    “빌어, 윽, 먹을…….”

    별하는 얼마 남지 않은 벼랑과 파비안을 올려다보았다. 앞서 오르던 파비안이 흐트러진 숨을 몰아쉬며 곧장 별하의 발밑을 확인했다.

    파비안이 먹이를 낚아채고서 밝은 혈색을 띄운 족장을 떨어뜨리려 접근하는 그 때, 그들의 등 뒤로 집채만 한 진한 그늘이 드리웠다.

    “…….”

    “…….”

    별하와 파비안, 족장까지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

    폭우를 퍼붓는 하늘을 가로막으며 절벽 위까지 뛰어오른 물체는 아나콘다였다. 분명 아나콘다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지금까지와 전연 달랐다. 앞서 조우한 녀석들보다 족히 십수 배는 큰 거대 아나콘다였다.

    10. 【Diamond Heart】

    거대 아나콘다는 크기로만 봤을 때 사화산의 터주신인 새하얀 늑대를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검은 비늘 한 조각이 사람 얼굴만 했고 몸통은 지금까지 본 교목들을 몇 그루나 잇대어야 할 만큼 두꺼웠다. 무엇보다 거대한 몸뚱이가 물기둥처럼 꼿꼿하게 직립했다.

    동류의 떼죽음에 눈을 뜬 거대 아나콘다는 허락도 없이 제 구역에 침입한 불청객들을 응징하기 위해 솟구친 상태로 주둥이를 열었다. 성체 표범이든, 바다악어든 한입에 쉬이 집어삼킬 수 있을 엄청난 크기의 목구멍이 나타났다. 그야말로 암흑의 문이 그들을 향해 열렸다.

    하늘을 향해 내뻗은 두 개의 송곳니가 더할 나위 없이 위협적이었으나 거대 아나콘다의 최대 약점은 금방 드러났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큰 덩치만큼 움직임이 따라주지 못했다. 거대 아나콘다가 주둥이를 벌려 가장 상위에 위치한 파비안을 향해 덮쳐들었다.

    파비안은 기민하게 몸을 움직여 벼랑 끝으로 올라서서 시커먼 동굴을 피했다. 빗물이 쏟아지는 절벽에 부딪힌 거대 아나콘다는 중심을 가누지 못하고 미끄러졌다.

    “읏!”

    별하는 얼른 절벽에 몸을 붙여 충격 여파를 피했다. 그 와중에도 별하의 다리를 움켜잡고 올라서려던 족장의 하의가 미끄러지는 아나콘다의 거친 송곳니에 휙 걸려들었다. 별하의 상의 자락을 막 움켜잡은 족장은 그를 뒤늦게 발견하고 만면을 일그러뜨렸다. 거무튀튀한 얼굴이 일순 낭패감으로 뒤덮였다.

    “다므라디라아―!”

    그는 어떻게 손을 써볼 틈도 없이 거대 아나콘다에게 끌려 내려갔다. 파비안은 급히 벼랑 끝에 가슴을 붙여 손을 길게 내밀었다.

    “별하……!”

    “아윽!”

    별하는 족장과 함께 끌려 내려가다가 파비안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필사적으로 뻗은 손끝은 간발의 차이로 닿지 못하고 오히려 점점 멀어져 갔다.

    “파, 파비안!”

    파비안은 벼랑 아래로 성큼 몸을 내려 멀어지는 별하의 손을 낚아채듯 움켜잡았다. 젖먹던 힘까지 쥐어짜 내 허공을 내젓던 손들이 맞닿는 순간, 일말의 흔들림조차 없는 강인한 위력이 별하를 번뜩 끌어올렸다.

    찌지직― 찌익― 족장이 죽을힘을 다해 움켜잡은 별하의 상의 자락이 찢겨나가며 엄청난 중력이 삽시에 증발했다.

    “으아아아악!”

    탁한 비명과 동시에 별하는 파비안의 손길에 이끌려 가볍게 벼랑 위로 올라섰다. 벼랑 끝에 두 무릎을 대자마자 뒤를 돌아보았다. 흥분한 아나콘다들이 우글거리는 진흙탕에 첨벙 떨어진 족장은 쉬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그의 주변으로 굶주린 파충류들이 속속들이 모여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자신이 처한 상황을 깨달은 족장은 급히 절벽을 기어올랐다. 하지만 1미터도 오르지 못하고 거대 아나콘다에게 붙잡혔다. 족장의 한쪽 팔을 입에 문 거대 아나콘다는 그를 위로 던져 올렸다. 절벽 위까지 던져서는 첨벙 뛰어올라 고꾸라지는 머리부터 한입에 집어삼켰다.

    “…….”

    별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절벽 위까지 솟아올랐던 인영과 찰나로 눈이 마주쳤던 그는 섬뜩한 기분을 한참 동안 떨쳐내지 못했다.

    파비안은 얕은 숨을 몰아쉬며 절벽 아래를 확인했다. 먹이를 목으로 넘긴 거대 아나콘다는 그대로 진흙탕을 파고들었다. 바다의 밑바닥에 서식하는 생물체처럼 거대한 몸뚱이가 서서히 흙탕물 속으로 묻혀드는 것을 확인한 파비안은 이내 돌아섰다.

    “끝났어.”

    큰 억양 없이 평온하기 그지없는 저음을 듣는 순간 별하는 참고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하아아…….”

    어느덧 자욱하게 흐르던 안개가 조금 옅어져 있었다. 별하는 푸르스름한 여명이 비쳐드는 절벽 밑을 곁눈질했다.

    진흙탕 위에 남은 아나콘다들은 여전히 절벽을 기어오르려 갖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수풀과 바위를 타기도 하고, 폭포 같은 빗물을 거슬러 오르다 미끄러질 때면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 전과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파비안이 숲으로 발길을 돌리며 말했다.

    “당분간은 쫓아오지 못하겠지만 또 어떤 녀석들이 출현할지 몰라. 우선 여길 벗어나도록 해.”

    “응…….”

    별하 역시 파비안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더 이상 질퍽한 이곳에 머무르고 싶지 않았다. 그는 우악한 파충류들에게서 얼른 등을 돌렸다. 곧장 숲으로 들어가려는 파비안에게 다가가 어깨의 상처를 들여다보았다.

    “파비안, 잠시만. 어깨에서 피, 가 많이 나…….”

    파비안은 별하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 아래로 내렸다.

    “괜찮아. 이곳에서 벗어난 후에 처치해도 돼.”

    “하지만…….”

    괜찮다고는 했지만 피를 많이 흘려 안색이 좋지 못했다. 출혈이 더해지기 전에 간단한 응급처치라도 하는 게 더 시급해 보였다. 아나콘다 서식지에 어느 간 큰 짐승이 나다니지는 않을 테지만 아래쪽에서 올라올 수 있었다. 지금도 계속해서 첨벙대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두두가 그랬던 것처럼 파비안이 갑자기 의식을 잃지 않을까 걱정스러웠으나 그의 말대로 자리를 옮긴 후에 상처를 돌보는 게 현재로서는 최선으로 보였다.

    “파비안.”

    별하는 파비안에게 팔을 내밀었다. 어서 저를 잡으라는 뜻이었다. 어깨를 다쳐 걷는 데는 무리가 없어 보였지만 조금이라도 힘이 되고 싶었다.

    파비안은 제 한참 아래서 내민 팔을 묵묵히 내려다보았다. 이마와 눈가를 덮은 젖은 금발 사이로 잠잠히 가라앉은 오드아이가 느른하게 감겼다가 뜨였다. 그는 곧 희미하게 입가를 끌어 올리며 별하의 어깨에 팔을 둘러 끌어안았다.

    별하는 곧장 파비안의 허리에 팔을 감으며 그를 부축했다.

    “걸을 수 있겠어?”

    파비안은 고개를 까딱였다.

    “물론.”

    별하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파비안의 뜻대로 그들은 파충류의 왕이 몸을 숨긴 습지에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벗어났다. 서로를 의지한 채 비가 내리는 아침 숲을 가만히 걷던 그들은 문득 한숨을 뱉었다.

    별하가 피식, 한숨처럼 웃자 파비안 역시 희미하게 코웃음 소리를 냈다. 어디에도 우스운 일은 없었다. 악몽과도 같은 밤을 보내고 새로이 맞이한 아침에 허탈감과 함께 여러 가지 감정을 느낀 것이었다.

    별하는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서도 여전히 살아 있는 자신이 새롭게 느껴졌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줄곧 악몽이었다가 돌연 장면이 바뀌어 꿈에 그리던 소원이 이루어지기 전의 기분 좋은 꿈.

    “…….”

    “…….”

    별하는 다정하게 저를 보는 파비안과 잠시 눈길을 맞대었다. 굳이 말을 나누지 않아도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저 역시도 틀림없이 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이제 돌아갈 수 있었다. 새하얀 모래밭을 비추는 건조하고도 따뜻한 햇볕과 달콤한 코코넛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산뜻한 바람이 부는 해변으로.

    그보다 더 큰 목적이 존재하고 있었지만 지금 그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집요하게 저를 쫓던 그림자들이 말끔하게 사라진 것만으로도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별하는 눈길을 내려 전방의 녹음을 내다보았다. 아침이 밝아 오는 숲은 암흑으로 둘러싸인 밤 숲과는 전연 달랐다.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음에도 이보다 가시거리가 좋을 수 없었다. 바로 코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둡던 밤 숲을 어떻게 그리 내달릴 수 있었던 건지 별하는 새삼 신기할 지경이었다. 살고자 하는 강한 집념이 저에게도 숨겨져 있었다는 것 또한.

    어쩐지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당장 픽 쓰러져 잠들 것 같은 피로감에 시달리면서도 알 수 없는 상쾌함을 느꼈다. 어서 해변으로 돌아갈 생각에 무거운 발을 끌 듯이 걷다가 툭 튀어나온 나무뿌리에 걸려 휘청거렸다. 파비안이 재빨리 별하의 어깨를 붙잡았다.

    “괜찮아, 별하?”

    “아, 미안. 잠깐 딴생각하느라.”

    별하는 굽은 등을 억지로 곧게 세우고 파비안을 향해 저에게 기대라는 눈길을 보냈다. 하지만 그는 더 몸을 기대지 않았다. 주변을 빙 둘러보더니 커다란 파초와 뒤엉켜 비가 들지 않는 야자수 아래로 턱짓했다.

    “잠시 쉬었다 가야겠어.”

    별하는 내키지 않은 얼굴을 했다. 마음 같아서는 조금 힘들더라도 이대로 계속 가고 싶었다. 밀림에서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폭풍우가 와서 사흘 밤낮으로 모래밭을 쓸어가더라도 다시는 이곳으로는 들어오고 싶지 않을 정도로 간절했다.

    그런 마음이 굴뚝이었지만 파비안의 안색이 좋지 않아 강제할 수는 없었다. 별하는 야자수 아래로 파비안을 부축했다.

    푹신하게 이끼가 낀 바위에 그를 앉히고 어깨부터 들여다보았다. 어깨에 꽂힌 화살은 꼬리만 남아 있었다. 과다출혈을 막기 위해 화살을 곧바로 빼내지 않은 이유도 있었으나 이미 그 의미는 퇴색된 지 한참 지난 듯한 모습이었다. 꿰뚫린 상태로 몸을 움직여 환부 주변의 살이 시퍼렇게 물든 데다 뭉그러질 대로 뭉그러져 있었다.

    과연 화살을 빼도 생명에 지장이 없을는지, 차라리 그대로 두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생각될 정도로 처참했다.

    “아, 파비안…….”

    파비안은 제 상처를 차마 건드리지 못하는 별하의 손을 살포시 감쌌다.

    “괜찮아. 해변에 도착해서, 그때 처치하면 돼. 흐음…….”

    그리 말하며 작게 한숨을 지었다. 역시나 통증이 상당한 듯했다.

    별하는 자신이 어떻게 마땅히 해줄 수 있는 게 떠오르지 않아 입술만 곱씹었다. 이곳에서 당장 음식을 먹기에는 상황이 여의치 않았고 잠을 자는 건 더욱 그랬다.

    일단 습지에서 몸싸움을 하며 빠진 수분을 보충하기 위해 옆쪽에 수북하게 자라난 파초로 향했다. 넓적한 파초의 중간 부분을 잘라내 옴폭한 모양을 만들어 접었다. 그리고 그것을 머리 위 커다란 파초 끝자락에 가져다 댔다. 이내 안쪽으로 빗물을 가득 고여 들었다.

    111.

    별하는 투명한 빗물이 찰랑찰랑 담긴 것을 어서 파비안에게로 가져가 내밀었다.

    “마셔, 파비안.”

    마시기 쉽도록 입가에 가까이 붙이자 파비안은 입술을 열어 빗물을 받아 마셨다. 내리 뜬 유리구슬 눈동자에 가지런히 드리운 속눈썹이 젖은 상태에서도 몹시 반짝거렸다.

    별하는 조용히 눈을 내려 그의 창백한 얼굴을 더듬었다. 빗방울이 미끄러지는 매끈한 뺨과 물을 넘길 때마다 느릿하게 오르내리는 목울대, 숨을 얕게 들이마셨다가 내쉴 때면 뒤따르는 작은 움직임들, 곧 저에게로 향하는 이색의 맑은 유리구슬 눈동자까지……. 인간을 초월해 흉포한 기세로 아나콘다들을 도륙 내던 남자가 이제는 순한 양이 되어 저를 바라보는 모습이 못내 애틋했다.

    “더 줄까?”

    파비안은 얼마 마시지 않고 금방 나뭇잎잔에서 입술을 뗐다.

    “별하도 목 좀 축여.”

    “더 마셔. 그걸로는 부족해.”

    “괜찮아, 지금은. 나중에 많이 마실게.”

    별하는 파비안이 남긴 것을 제 입으로 가져가 비워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해서 좀 더 받아 마셨다. 꿀꺽꿀꺽―

    “하아…….”

    빗물이 이렇게나 달 수가 없었다. 이 섬에 떠밀려와 처음 목으로 넘겼던 코코넛 단물만큼이나 다디단 느낌이었다. 별하는 손등으로 입술을 문질러 닦으며 파비안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눈을 가리는 금빛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떼어내 주며 물었다.

    “좀 어때?”

    파비안은 대수롭지 않은 듯 담담히 답했다.

    “욱신거려. 그래도 참을 만해.”

    “…….”

    “이 정도는 괜찮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별하.”

    어깨를 관통당했는데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처도 상처였지만 약이 없는 이곳에서 2차 증상이 나타난다면,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별하는 파비안의 이마와 뺨, 목덜미를 더듬으며 열을 쟀다.

    “다른 증상은? 어떤 거 같아? 살짝 열나는 것도 같은데, 괜찮겠어?”

    파비안의 눈가에 엷은 음영이 드리웠다. 그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별하의 손을 감싸듯 잡았다. 진흙이 들러붙어 얼룩덜룩한 손바닥에 입술을 짧게 붙였다.

    “별하 손이 찬 거야. 어깨 상처는 해변에 가서 해결하면 돼.”

    별하는 지금 당장 파비안의 어깨에 꽂힌 것을 꺼내 그 주인에게로 되돌려주고 싶었다. 화살의 주인은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되었지만 그것으로도 분은 풀리지 않았다. 자연에게서 탐욕의 벌을 받은 것과는 별개로, 자신이 직접 파비안을 대신해 응징하고 싶었다.

    동시에 수많은 생명의 불씨를 앗아간 이 상황이 몹시도 안타까웠다. 애초에 탐욕을 부리지 않았다면 누구도 다치지 않았을 것을. 원주민들을 이끄는 우두머리가 알파의, 하이 알파의 명예를 걸고 그 약속을 지켰더라면 이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을.

    그 때 파비안이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그에 혈액이 응고되기 시작한 어깨에서 다시 핏빛이 비쳤다. 지나간 기억에 잠시 묻혀 들었던 별하는 번득 그를 올려다보았다.

    “파비안, 좀 더 쉬어야 해. 피 나잖아.”

    파비안은 젖은 셔츠가 거추장스러운지 벗으려다가 마음대로 벗지 못하는 상황에 작은 한숨을 흘렸다.

    “해변이 여기서 그리 멀지 않아. 아직 체력이 남아 있을 때 움직였으면 해. 별하가 아직 걸을 수 있다면.”

    “난 괜찮지만…….”

    별하는 그리 말했지만 당장 머리를 어디에든 가져다 대기만 해도 잘 수 있을 만큼 피로가 중첩된 상태였다. 잠시라도 눈을 감으면 곧바로 기절할 정도였다. 사고는 최소한으로 이뤄지고 있었고, 극한까지 다다른 육체는 정신력으로 겨우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자신이 아니었다.

    “파비안, 네가 위험해. 움직일 때마다 상처가 벌어져서 계속 피난다고. 두두 못 봤어? 갑자기 기절하는 거? 쇼크라도 오면 어떡할 거야?”

    저를 지키기 위해 최전방에서 섰던 파비안은 깊은 부상까지 입은 상태였다. 아나콘다 습지에서는 꽤나 멀어졌고, 병적으로 뒤를 쫓던 식인 원주민들은 이제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데 굳이 무리해서 움직여야 할 필요성을 가지지 못했다.

    물론 별하 역시도 파비안만큼이나 밀림을 벗어나 해변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가 이리되지만 않았더라면 진즉에 두 손을 꼭 잡고 달려갔을지도 몰랐다. 파비안은 고민에 빠진 별하를 잠잠히 내려다보며 말했다.

    “해야 할 게 많잖아.”

    별하는 한숨을 쉬었다.

    “물고기든, 과일이든, 고기든 내가 다 잡아 올 테니까 아무 걱정하지 마.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원하는 거 다 해줄게. 넌 어서 상처 낫는 데만, 빨리 나을 수 있도록 그것만 신경 써줘.”

    “그것 말고, 별하.”

    “……?”

    “계속 미뤄졌던 약속.”

    “……미뤄졌, 던 약속? 그게 뭔…….”

    별하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불현듯 기억의 파편 조각을 발견했다.

    ‘해변으로 돌아가면, 허락해 줄래?’

    ‘너와의 각인을.’

    그의 고백이었다.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곤 꿈에서도 생각하지 못했었던 그날이 문득 몇 시간 전의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방금 파비안에게 고백을 받은 것처럼 그 달콤한 목소리가 귓가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

    별하는 저를 빤히 응시하는 파비안과 한참 얼굴을 마주하다 슬쩍 눈길을 내렸다. 죽음의 문턱에서 빠져나온 지 채 몇 시간도 지나지도 않았는데 저 말 한마디에 새삼 어색한 기분을 느꼈다.

    사느냐, 죽느냐 하던 중대 사안보다도 지금 이 순간의 낯선 분위기가 더 불편하게 느껴졌다. 불편하다기보다는 멋쩍고 부끄럽다는 표현이 더 옳았다. 별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적당한 답을 찾지 못했다.

    “그건 나, 중에 해도 되지 않아……? 지금은 파비안 네 상처가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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