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트로피컬 아일랜드 (45)화 (45/49)
  • 폐부에서 회오리치듯 돌고 돌던 날숨이 식도를 지나 불쑥 목구멍으로 치솟았다. 터질 듯 크게 부풀어 오른 호흡을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희미한 빛 한 줄기조차 들지 않는 어둠 속에 갇힌 그는 쇠사슬처럼 들러붙는 진흙 바닥에서 발버둥을 쳤다.

    “읍! 웁―!”

    입 안 가득 물고 있던 날숨이 파도 포말처럼 터져 나왔다. 푸르륵― 푸르릅― 별하는 진흙에 묻힌 다리를 내저으며 검보라색으로 물든 입술을 벙긋거렸다. 날숨이 빠져나간 자리로 진창이 빨려드는 순간, 별하의 몸이 별안간 강제로 부상했다.

    “푸으흡! 푸흡!”

    강한 힘에 수면 위로 끌려 올라간 별하는 기침을 토해 냈다. 쿨럭! 쿨럭! 쿨럭! 금세 혀 밑으로 파고든 진흙이 침과 함께 입술 밖으로 흘러내렸다.

    별하는 구물거리는 아나콘다 위에 엎어져 정신없이 기침을 내뱉다 말고 얼른 제 입을 틀어막았다. 날숨과 들숨이 어지럽게 뒤섞여 가슴께가 벅차게 오르내렸다.

    “하아― 하아― 하아―”

    별하는 가쁘게 헐떡이며 젖은 눈을 들어 올렸다. 진흙이 들어가 흐릿해진 시야 너머로 또 한 번 저를 구해준 인영을 확인했다.

    “하아― 하아― 파, 파비, 하아―”

    그는 별하 가까이에 몸을 낮춰 앉아 얼굴을 맞댔다. 무슨 말인가를 급히 건네며 별하의 얼굴에 묻은 진흙을 살살 문지르듯 닦아주었다. 진흙탕에 빠진 이를 구하려 꽤나 고군분투했는지 손끝이 차디찼다.

    쏴아아아― 거센 빗줄기에 진흙이 씻겨 내려가 금방 눈앞이 맑아졌다. 흐릿하던 윤곽이 또렷한 형태를 그린 찰나로 별하의 호흡이 뚝 멎었다.

    별하의 앞에서 얼굴을 맞댄 이는 제가 알던 인물이 아니었다.

    파비안이 아니었다. 모든 악몽의 근원, 족장이었다. 족장은 누런 이와 시커먼 잇몸을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벼, 라?”

    “―!”

    별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파비안을 찾기 위해 뿌연 장막 속을 다급하게 돌아보았다. 그러다 정반대 방향에서 남은 알파 원주민들과 대치 중인 이를 발견했다. 파비안 역시 별하의 위치를 뒤늦게 확인하고 부릅뜬 눈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하아…… 하아…….”

    언제 이곳까지 흘러온 건지 알 수 없었다. 정신없이 진흙 바닥을 헤집다가 떠밀려온 건지도 몰랐다. 별하는 산란하게 흩어지는 정신을 어서 다잡았다. 빗줄기를 사이에 두고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빤히 쳐다보는 족장의 눈길이 옆얼굴로 느껴졌다.

    “…….”

    별하는 턱을 지그시 물었다. 이번에야말로 확신했다. 자신이 본 게 정확했다. 족장은 역시나 알파가 아니었다. 이 강한 페로몬은 틀림없는 하이 알파였다. 족장이 어째서 하이 알파임을 숨겼는지, 어떻게 숨길 수 있었는지는 지금 중요하지 않았다. 이 끔찍한 괴인에게서 도망칠 수 있을 기회만이 간절했다.

    “하아아…….”

    별하는 천천히 숨을 불어내며 파비안에게로 향한 눈길을 내렸다.

    알파 원주민의 목덜미를 움켜잡아 사정없이 흔드는 파비안의 모습은 그야말로 인간계의 최상위 포식자였다. 그렇다고 해서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또 다른 상위 포식자들이 별하의 지근거리에서 그의 박동하는 심장을 노리고 있었다.

    언제 허기를 느끼고 눈뜰지 모르는 아나콘다 떼와 하이 알파인 족장. 알파들을 상대하는 파비안보다 별하를 상대하는 족장의 처지는 훨씬 태평했다. 얼핏 딴청을 부리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하이 알파에게 있어 오메가란 그런 존재였다.

    별하는 족장의 얼룩덜룩한 발밑을 조용히 내려다보다가 힘없이 고개를 푹 숙였다. 콜록콜록― 작게 기침을 뱉어냈다. 콜록콜록― 족장은 이윽고 관찰을 끝낸 듯 느지막이 몸을 일으켰다. 별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재빠르게 움직여 아나콘다를 딛고 선 족장의 발목을 힘껏 걷어찼다.

    107.

    “……?”

    족장은 미끄러운 곳을 디딘 채 약한 부위를 공격당하고도 꼼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 무엇을 하느냐는 듯 멀뚱히 별하를 내려다보았다.

    “윽.”

    별하는 얼른 몸을 일으켜 옆에 있는 아나콘다의 등으로 뛰어넘었다. 두 발이 채 닿기 전에 족장이 달려들어 그의 왼쪽 바짓자락을 움켜잡았다. 별하는 제 옷을 잡아당기며 눈을 희번덕이는 족장의 안면을 오른발로 걷어찼다.

    “크윽―”

    족장이 얼굴을 가리며 옷자락을 놓자마자 다시 한번 발길질을 했다. 젖은 쇳덩이를 차는 듯한 느낌에 발바닥에서부터 발등, 발목, 정강이까지 욱신거렸지만 별하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서둘러 일어나 파비안이 서 있는 곳으로 내달렸다.

    진흙탕에 잠긴 아나콘다의 몸체는 빙판길보다 훨씬 더 미끄러웠다. 맨발이 몇 번이나 쭉 밀려나가 별하는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주름진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리며 뒤를 쫓는 족장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성이 났는지 족장은 그르렁대며 네 발로 쫓아왔다. 늑대든, 뭐가 됐든지 간에 정말 네 발에 길이 든 금수처럼 뒤쫓아왔다.

    “하아― 하아―”

    길도 길이었지만 시야는 더 좋지 않았다. 동이 터 오며 점차 하늘이 불그스름하게 밝아 오기는 했으나 사위는 온통 안개에 휩싸여 있었다. 점점 더 짙게 내리는 빗줄기는 불투명한 장막이 수십 겹으로 쳐진 듯 시야를 가렸다.

    별하는 미지근한 빗물이 끊임없이 흘러드는 눈가를 훔치며 희뿌연 전방을 내다 보았다.

    “하아아― 하아아―”

    50미터 내에 파비안이 있었다. 장막에 가려 형체가 잘 보이지 않았지만 파비안이 확실했다. 그가 아니고서는 거대한 아나콘다를 짓밟으며 이쪽을 향해 올 리 없었다. 파비안은 알파 원주민들에게서 가져간 돌칼을 쥐고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별하는 저를 낚아채려 뻗어 오는 족장의 갈고리 같은 손을 간발의 차로 연달아 피했다. 물결치는 수면 위에서 비를 맞는 아나콘다의 몸체를 막 밟는 그 때, 몸이 불쑥 위로 솟구쳤다.

    “으, 읏!”

    2, 3미터까지 치솟았다가 미끄럼틀을 타듯 아래로 내려온 별하는 뒤를 돌아보았다. 금수처럼 달려들던 족장이 보이지 않았다. 아나콘다에 떠밀려 물에 빠지기라도 한 건지 그림자도 찾을 수 없었다. 쏴아아아― 꿈틀대는 웅덩이 위로 빗줄기만 하얗게 퍼붓고 있었다.

    “하아……. 빌, 빌어먹을…….”

    별하는 지체하지 않고 가던 길을 재촉했다. 이쪽을 향해 오는 파비안의 형체가 차츰 또렷해졌다. 익숙한 이목구비를 확인할 수 있을 거리까지 다다라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파비안의 안색은 희미한 핏기도 찾을 수 없이 창백했다. 좀 전까지 제 뒤에 있던 별하가 느닷없이 사라져 상당히 노심초사한 얼굴이었다. 희뿌연 장막 속에서 새파랗게 경직된 오드아이가 선명하게 내다보이는 거리에까지 가까워졌을 때, 그는 어서 제 손을 잡으라며 별하를 향해 길게 내밀었다.

    “하아…… 하아…….”

    별하는 비틀거리면서도 서둘러 파비안에게로 손을 내밀었다.

    2, 3미터도 되지 않는 거리였다. 내뻗은 손을 맞잡기 직전이었다. 미끄러지듯 아나콘다의 몸체를 밟으며 뛰어가던 별하는 단단한 무언가에 발이 홱 걸려 넘어졌다.

    “윽!”

    떠밀리듯 고꾸라진 몸이 중심을 잡을 새도 없이 진흙탕으로 처박혔다. 풍덩― 별하는 젖은 얼굴이 흙탕물에 처박히는 순간, 흐릿한 전방과 측면을 동시에 마주했다. 저를 향해 달려오는 파비안과 습지의 파충류처럼 물속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제 발을 건 족장을.

    족장은 올가미에 먹이가 걸려들자마자 물속으로 잡아끌었다. 별하의 정신을 잃게 만들어 파비안과 거리를 벌리려는 속셈 같았다.

    “푸흡―!”

    별하는 거칠게 몸부림쳤다. 양팔을 내저으며 제 다리와 목울대를 우악하게 압박하는 족장을 떨어뜨리려 안간힘을 썼다. 턱끝까지 닿는 흙탕물이 급물살을 일으키며 별하의 벌어진 입속으로 밀려들었다.

    “흐읍! 윽! 푸흡!”

    별하는 더 버티지 못하고 결국 물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물속에서 제게 들러붙은 족장의 사지를 풀어내려 온 힘으로 발버둥을 쳤다. 그럴수록 족장은 더 강하게 그를 옥죄었다. 심장만 뛴다면 다른 곳은 부러지든, 꺾이든, 찢기든 일절 상관없다는 듯.

    뿌르릅― 뿌르륵― 족장을 떼어내려 젖먹던 힘까지 끌어내 저항하던 별하는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흙탕물을 휘저었다. 손에 닿는 무엇이라도 좋았다. 필사적으로 내뻗는 손가락 사이로 걸쭉한 흙탕물만 빠져나가는 그 때, 무언가가 손끝에 툭 닿았다.

    “―!”

    별하는 그것이 물살에 밀려 나가기 전에 얼른 손에 움켜쥐었다. 물에 뜰 정도로 부력이 강한 물체는 돌멩이보다 가벼웠고 지푸라기보다는 단단했다. 손 안에 쏙 들어오는 그것은 부서진 나뭇가지였다.

    한두 뼘 크기의 짧은 나뭇가지를 꽉 움켜쥔 별하는 저를 끌어당기는 족장의 허벅지를 향해 단번에 내리찍었다. 딱딱한 피부를 뚫는 느낌이 손바닥을 통해 전해지는 순간, 몸을 옥죄던 위압이 일시에 떨어져 나갔다. 별하는 다급히 팔다리를 내저어 물 위로 올라갔다.

    “푸하읍―!”

    숨통이 제대로 트이기도 전에 새하얀 덩어리가 코앞으로 들이밀어졌다. 별하는 그것이 무엇인지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파비안의 손을 어서 움켜잡으려는 찰나, 불쑥 옆으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다름 아닌 족장이었다.

    물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족장은 무표정한 얼굴로 별하와 파비안을 스쳐 보았다. 그는 곧 손에 쥔 돌칼을 파비안이 딛고 선 아나콘다의 몸체에 쿠욱 찔러넣었다.

    “―!!”

    비늘 사이에 깊이 박힌 돌칼을 타고 새빨간 핏물이 배어나는 순간, 물이 끓듯 진흙탕이 출렁였다. 고이 잠들어 있던 근처의 아나콘다가 몸뚱이를 거칠게 뒤흔들며 물속에 처박은 대가리를 치켜들었다. 별하는 저도 모르게 외쳤다.

    “파, 파비안!”

    파비안은 아나콘다의 발작을 피해 기민하게 물속으로 뛰어내렸으나 그 바람에 별하와 거리가 떨어졌다. 별하는 무거운 진흙을 헤치며 파비안에게로 달려가다 돌칼에 찔려 잠에서 깬 아나콘다와 맞닥뜨렸다.

    “…….”

    아나콘다는 이전에 강에서 마주쳤던 아나콘다들과 비슷한 외형의 개체였다. 앞선 녀석 다음에 나타난 놈만큼 컸다. 자욱하게 내리는 비 때문인지 훨씬 더 커 보였다. 수 미터로, 사람 하나는 거뜬하게 삼키고도 남을 것 같았다. 엄청난 몸통 두께에 먹이를 질식시킬 필요도 없어 보였다.

    별하는 대가리를 빳빳이 치켜들고서 저를 내려다보는 아나콘다를 망연히 올려다보았다. 느닷없이 공격당해 잠에서 깨버린 금수는 심기가 영 좋지 않았다. 깜빡이지 않는 눈과 벌어진 주둥이에서 분노에 찬 살기가 느껴졌다.

    무기도 뭣도 없는 지금, 성난 아나콘다에게 휘감기는 순간 끝이었다. 죽지 않더라도 반신불수가 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시간문제였다. 성한 몸으로도 목숨을 부지하기 힘든 이곳에서 반신불수라면, 사실상 죽은 것과 다름이 없었다. 어쩌면 죽음보다 더 지독한 고문일지도 몰랐다.

    파비안에게로 다가가지 못하고 주춤하는 사이, 족장이 별하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다.

    “으, 읏…….”

    별하는 휘청 중심을 잃고 물속으로 넘어졌다. 그에 파비안이 안광을 번득이며 출렁이는 물살을 빠르게 헤쳐왔다. 별하에게 꽂혀 있던 날카로운 사목이 돌연 파비안에게로 향했다.

    파비안을 먹이로 인식한 아나콘다는 순식간에 덮쳐들어 커다란 몸통을 휘감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파비안을 포획하고는 곧장 통나무 같은 몸통을 조였다. 먹이를 질식시키려 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목격한 별하는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족장에게 붙잡혔다. 족장은 파비안에게로 달려가려는 별하를 서둘러 절벽으로 질질 잡아끌었다.

    “그, 그만, 윽―!”

    거칠게 저항하는 그의 머리를 힘껏 가격했다. 기절시키려는 생각인 듯했지만 눈썹 위 이마가 살짝 찢어지면서 피만 비쳤다.

    별하는 족장의 강한 완력에 끌려가면서도 파비안을 휘감아 뒤덮은 아나콘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믿을 수 없게도 아나콘다의 똬리 안쪽에서 단단한 뭔가가 연쇄적으로 부러져나가는 듯한 소리가 일었다. 두둑두둑― 두둑두둑― 마치 굵은 뼈가 부서지는 듯한 소리였다.

    “파비, 파비안……?”

    믿을 수가 없었다. 별하는 제 두 눈으로 보고, 제 두 귀로 듣고도 지금의 상황을 믿지 못했다. 핏물이 흘러내려 새빨갛게 일변한 눈으로 아나콘다를 쳐다보았다.

    아나콘다는 알을 품는 듯 제 똬리 안을 내려다보았다. 불현듯 거친 움직임을 멈춘 아나콘다와 함께 별하 역시 알 수 없는 분위기를 눈치챘다. 그 순간, 똬리 안쪽에서 튀어나온 시커먼 돌칼이 아나콘다의 아래턱을 꿰뚫었다.

    돌칼을 움켜쥔 흰 손은 그대로 그것을 내리쳐 아나콘다의 커다란 몸통을 단박에 갈랐다. 돌돌 감겨 있던 똬리가 맥없이 스르르 풀리며 안쪽에 갇힌 이를 해방시켰다.

    별하는 빗물에 금세 깨끗해진 눈을 부릅떴다. 아나콘다의 피를 뒤덮어 쓴 이는 파비안이었다. 죽은 아나콘다의 몸통 위로 가뿐하게 뛰어오른 파비안은 그 어떤 부상도 입지 않은 모습이었다.

    빗줄기에 점차 핏물이 씻겨 내려가며 새하얀 얼굴이 드러났다. 뼈가 부러지던 소리는 그가 아닌 아나콘다에게서 난 소리였던 것 같았다.

    “하아……. 하아, 파비안…….”

    별하는 그제야 잠시 멎었던 숨을 터트렸다.

    108.

    먹구름 너머로 떠오른 어슴푸레한 빛무리를 사이에 두고 파비안과 눈이 맞닿았다. 어둠 속에서 유리구슬처럼 반짝반짝 빛나던 오드아이가 타오르는 용암을 머금은 듯 번뜩였다.

    빗물과 섞여 흘러내리는 아나콘다의 체액에 금발이 언뜻 검붉게 비쳤다. 서늘하게 가라앉은 얼굴에는 엷은 핏기도 돌지 않았다. 입술까지 색을 잃어 정말 차가운 대리석을 깎아 만든 조각상 같았다.

    스치는 눈길에서도 칼바람이 이는 파비안은 별하를 보고 있지 않았다. 도망치지 못하도록 팔로 별하의 목을 조르며 질질 잡아끄는 족장에게로 향해 있었다.

    그는 지금 극렬한 열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저를 쫓던 알파 원주민들에게 그랬듯이 족장의 목을 움켜잡아 단박에 부러뜨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있었다.

    별하는 거의 의식을 잃기 직전의 상태였다. 체력이 고갈되어 숨을 편히 내쉴 힘도 없었다. 진흙탕과 아나콘다 사이로 끌려가는 다리는 천근만근이었고, 전신으로 느껴지는 근육통은 쌓이고 쌓이다 결국 마비된 것처럼 감각이 느껴지질 않을 정도였다.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바로 옆에서 진동하는 하이 알파의 페로몬 냄새였다. 파비안과 같은 하이 알파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냄새가 역했다. 두두의 페로몬도 이 정도로 거부감이 들지는 않았었다. 어쩌면 감정이 세포 하나하나에 이입되어 생체적으로 극심한 혐오감을 느끼는 것인지도 몰랐다.

    거기다 아나콘다의 피비린내까지 뒤섞여 별하는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기가 힘들 만큼 강한 현기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물고 족장에게 저항했다.

    주먹으로 때리다 힘에 부쳐 손톱으로 긁어도 족장은 꿈적하지 않았다. 발이 진흙 속에 묻혀들도록 다리에 힘을 주고 버틸 때면 여지없이 별하를 난폭하게 잡아끌었다. 이곳의 오메가들과는 판이하게 저를 거역하는 그에게 열이 뻗친 듯 폭력을 가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족장은 또 다른 하이 알파인 파비안을 경계했다. 아나콘다 떼보다 그를 더 의식하고 있었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페로몬을 감지한 것 같았다.

    파비안이 이쪽을 향해 발을 떼는 그 때, 비틀거리던 별하가 손을 들어 허공을 가리키며 다급하게 외쳤다.

    “파, 파비안……! 뒤! 네 뒤에!”

    파비안은 우뚝 걸음을 멈추고 제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피냄새를 맡고 잠에서 깬 아나콘다 세 마리가 파비안의 등 뒤에서 시커먼 목구멍을 드러내고 있었다.

    세 마리의 아나콘다는 사화산의 알파 늑대들보다 컸다. 빗방울이 부서지듯 타고 흐르는 외피는 철갑을 두른 듯 번들거렸고 진흙탕에 묻힌 꼬리는 끝이 보이지도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간밤의 거친 짝짓기를 끝내고 허기를 느끼고 있던 아나콘다들은 눈앞의 먹이를 보며 걸쭉한 침까지 흘리고 있었다. 진흙탕을 점차 검붉게 물들이는 피냄새에 흥분한 건지도 몰랐다.

    파비안은 찰나로 고민했다. 별하를 먼저 구할지, 눈앞의 방해물을 먼저 해치울지. 고민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그는 바로 별하를 향해 달렸다.

    그 때 허기를 참지 못하고 가운데 아나콘다가 사납게 달려들었다. 파비안은 혀를 차며 재빠르게 돌아섰다. 머리부터 집어삼키려는 아나콘다를 향해 돌칼을 돌려 잡아 휘둘렀다. 거구의 아나콘다는 덩치가 믿기지 않을 만큼 민첩하게 파비안의 공격을 피했다.

    잠깐의 공간이 생겨난 틈에 양측의 아나콘다들이 먹이를 먼저 차지하기 위해 달려들었다. 세찬 빗줄기와 시커먼 형체들이 삽시에 뒤엉켰다.

    별하는 입술을 찢을 듯 짓이기며 커다란 아나콘다들에 둘러싸인 파비안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를 돕기 위해 족장의 억압에서 벗어나려 몸을 뒤틀었다. 그러자 돌망치 같은 주먹이 날아와 별하의 명치에 내려꽂혔다.

    “―!”

    별하는 신음도 내지 못하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순간적으로 구역질이 일었지만 게워 나오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숨도 똑바로 내쉬어지지 않아 어깨를 웅크리며 등을 말았다.

    “흐, 으…….”

    족장은 아예 걷지 못하는 별하의 옷자락을 잡고 질질 끌었다. 파비안이 아나콘다들을 상대하는 사이, 떨어졌던 절벽을 다시 오르려는 생각 같았다.

    그러다 족장이 불현듯 멈춰 섰다. 어떤 마음의 변화가 생긴 것인지 끌고 가던 별하를 손에서 놓았다.

    별하는 위압에서 자유로워졌지만 도망은커녕 꼼짝도 하지 못했다. 둥글게 몸을 겹친 아나콘다 위에 무릎을 꿇고 엎어져 명치뼈가 부러진 듯한 고통에 신음했다.

    족장은 별하를 발로 밀어 똑바로 하늘을 보도록 눕혔다. 별하는 얼굴에 떨어지는 비를 맞으며 눈을 깜박였다. 그제야 겨우 숨이 트여 낮게 헐떡였다.

    “하아…… 하아…….”

    족장이 허리를 숙여 그를 내려다보았다. 의식을 완전히 차리지 못한 별하의 양쪽 눈을 잠시 번갈아 들여다보았다. 죽는 게 아닌가 확인하고 있었다.

    희미하지만 똑바로 숨을 내쉬는 것을 확인하고 곧 눈길을 아래로 내렸다. 맥박이 치는 목덜미를 지나 크게 오르내리는 가슴팍에서 눈길을 멈췄다.

    왼쪽 가슴을 향한 족장의 눈동자는 욕망을 숨기지 않았다. 당장 살과 뼈를 헤집어 그 안쪽에서 박동하는 것을 허겁지겁 물어뜯고 싶은 갈망에 휩싸여 있었다.

    애초에 족장이 원했던 그림은 원주민들의 찬양을 받으며 희대미문의 오메가로 만찬을 즐기려던 것이었다. 그랬으나 여러 방해 요소들로 실패로 그치고 말았었다.

    이제 더는 실패하고 싶지 않은 듯 족장은 끝을 내려 하고 있었다. 별하의 살을 찢고 뼈를 부러뜨려 심장을 뜯어낼 생각이었다. 바로 이 자리에서.

    “하아…… 하아…….”

    별하는 숨을 얕게 불어내며 희뿌연 세상을 아연히 올려다보았다. 비스듬히 고개를 돌려 젖은 머리칼 사이로 비의 장막을 내다보았다. 빗줄기 속에 커다란 그림자들이 어지럽게 뒤엉켜 있었다.

    옆의 아나콘다를 밟고 뛰어올라 다른 아나콘다의 머리통에 돌칼을 내려찍는 이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어서 아나콘다들을 해치우고 이쪽으로 오려 했으나 주변의 녀석들이 하나둘 잠에서 깨어나 난투에 끼어들었다.

    별하는 핏물이 살짝 맺힌 입술을 달싹였다.

    “파비안…….”

    그는 제 위에서 아른거리는 그림자를 올려다보았다. 족장은 별하를 내려다보며 아나콘다들처럼 침을 흘리고 있었다. 백탁이 낀 눈동자는 초점이 없었고 목울대는 계속해 침을 삼키느라 바쁘게 오르내렸다. 돌칼을 앞의 아나콘다에게 찔러넣으며 놓쳐버린 그는 어떻게 명치뼈를 부서뜨릴지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족장은 주위를 둘러보다 마음이 급해진 듯 곧 주먹을 움켜쥐었다. 굵은 뼈가 도드라진 주먹을 치켜들어 별하의 명치를 내리치려는 찰나였다. 힘없이 감겼다가 뜨이기를 반복하던 별하의 눈동자가 언뜻 위로 향했다. 일순 족장의 뒤통수로 시커먼 그림자가 드리웠다.

    “……?”

    주먹을 내지르려던 족장이 움직임을 멈추고 제 뒤를 돌아보았다. 새카만 거대 파충류가 두 갈래의 혀를 날름거리며 족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족장이 흠칫 몸을 움직이는 순간 아나콘다는 주둥이를 찢어 벌려 눈앞의 먹이를 낚아챘다.

    족장은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거꾸로 처박히듯 명치까지 집어 삼켜졌다.

    “으…….”

    별하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을 일으켜 세우려 애를 썼다. 족장 다음은 자신이었다. 아나콘다에게 먹힐 때 먹히더라도 같은 뱃속으로 들어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빌어먹, 을…….”

    별하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펴지 못해 전전긍긍했다. 눈앞에서 아나콘다가 족장을 집어삼키는 상황에도 몹시 지친 몸은 마음을 따라가지 못했다.

    허벅지를 때리며 어서 일어나려는데 문득 등 뒤에서 수면이 거칠게 마찰하는 소리가 일었다. 곧장 얼음처럼 차디찬 감촉이 어깨에 와 닿았다.

    “―!!”

    별하는 엎어지듯 어깨를 움츠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저를 낚아채려는 아나콘다가 아니었다. 파비안이었다.

    아나콘다의 체액을 온통 뒤집어쓴 파비안은 강한 힘으로 별하를 일으켜 세우며 다급하게 이끌었다.

    “어서 이쪽으로―”

    “파비, 파비안…….”

    별하는 차갑게 식은 파비안의 손을 서둘러 끌어안듯 맞잡고 그를 뒤따랐다. 금세 따뜻해지는 피부와 밀착하자 곧이라도 죽을 것 같던 육신에 활력이 깃들었다.

    진흙탕을 달리며 파비안과 눈길이 맞닿았다. 별하는 제 안위를 살피는 오드아이를 마주하는 순간 자신도 믿을 수 없을 만큼 강렬한 생기를 느꼈다. 마치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 느낌이었다.

    “파비안…….”

    그 이름만으로도 영원히 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당장 언제 죽을지, 얼마나 고통스럽게 죽을지, 알 수 없는 곳인데도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그와 함께라면 어떤 것도, 어디라도 좋았다. 이런 지옥조차도 지옥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방금까지 파비안이 서 있던 곳에 아나콘다의 사체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녀석들의 체액으로 누런 흙탕물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별하는 파비안이 다치지 않았는지 급히 눈으로 살폈다. 시뻘건 핏물이 씻겨 내려간 그는 점차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얼룩덜룩하게 풀어 헤쳐진 셔츠는 상반신을 훤히 드러내고 있었는데 자잘한 상처 외에는 보이지 않았다.

    별하가 강한 힘으로 파비안의 손을 움켜쥐자 그는 그보다 좀 더 강한 힘으로 별하의 손을 감쌌다.

    파비안이 이끈 곳은 수풀로 우거진 절벽 끝이었다. 그는 올라가기 수월한 곳을 가리키며 별하부터 밀어 올렸다.

    “별하, 어서 올라가―”

    별하는 급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흙탕물 속에 잠겨 있던 수십 갈래의 몸체들이 눈에 띄게 구무럭거리고 있었다. 상황이 더 심각해지기 전에 이곳을 떠나야 했다. 족장이 집어 삼켜진 곳으로 잠에서 깬 아나콘다들이 속속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별하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그 때였다. 저를 위쪽으로 안아 올리려는 파비안의 뒤쪽에서 작은 무언가가 반짝거렸다.

    “―?”

    물체의 정체를 인지하기도 전에 그것은 파열음을 내며 곧장 이쪽으로 날아왔다. 슈우욱―

    109.

    눈을 크게 뜬 별하의 얼굴에 돌연 진한 음영이 드리워졌다. 앞을 막아선 파비안의 그림자였다.

    그가 무엇을 하려는 건지 깨달을 새도 없이, 파비안의 앞쪽 어깨로 날카롭고 좁다란 촉이 퍽 튀어나왔다. 새빨간 핏방울을 흩뿌리며. 뒤쪽에서 날아온 화살에 어깨를 관통당한 것이었다.

    별하는 부릅뜬 눈을 끔뻑이며 파비안을 올려다보았다.

    “윽.”

    금빛 눈썹을 선명하게 일그러뜨린 파비안은 곧바로 뒤쪽을 향해 돌칼을 날렸다. 휘이익― 돌칼이 날아가는 방향에는 간신히 살아남은 알파 원주민이 죽은 아나콘다 뒤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화살대와 화살을 주운 것까지는 분명 운이 좋았으나, 그것을 사용하여 아나콘다 서식지에서 도망쳤어야 했다. 제 목숨보다도 족장의 명령이 우선인 알파 원주민은 천운과 함께 날아온 악운에 부딪혔다. 파비안이 날린 돌칼에 정확히 어깨를 맞았다. 알파 원주민의 어깨는 종잇장처럼 찢겨나가 덜렁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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