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트로피컬 아일랜드 (44)화 (44/49)
  • “느, 늑대 발톱은? 그건 대체 뭐였던 건데? 결국 이럴 거면 그런 헛짓은 왜 시킨 거야? 아무리 미개하다고 해도 뇌는 있을 거 아냐? 생각도 할 수 있잖아?”

    “물론.”

    “그때 결판을 냈으면 자기 아들도 다치지 않고 하이 알파의 자긍심을 지킬 수 있었을 텐데, 대체 왜 번거롭게 그런 짓을 하는 거야? 대체 왜?”

    “처음에는 순수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을 거야.”

    “…….”

    “그랬으니 두두 녀석도 목숨을 걸고 최선을 다했겠지. 하지만 저들의 예상을 깨고 별하가 늑대 전리품을 가지고 나타났을 때부터, 그건 더 이상 의미를 가지지 못했을 거야.”

    “어째서?”

    파비안은 어두운 데다 안개까지 드리운 숲을 성큼성큼 헤쳐나가며 설명했다.

    “늑대의 전리품은 이 섬에서 가장 강한 개체가 되기를 갈망하는 원주민들의 염원에서 비롯된 토템이라고 할 수 있어. 별하가 그것을 가지고 나타났을 때 원주민들은, 족장은 생전 처음 느껴보는 탐욕에 눈을 떴을 테지. 늑대의 전리품보다 더 확실한 집약체가 제 눈앞에 서 있었으니까.”

    “…….”

    “오메가 늑대를 동경해 일족의 오메가를 잡아먹는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하이 알파를 이긴 오메가만큼 구미가 당기는 것도 없었을 거야. 전 재산을 바쳐 산해진미를 찾아 나서는 미식가들로 설명하면 이해하기 쉬우려나.”

    파비안이 말을 마쳤을 때 나뭇가지 사이로 빗줄기와 함께 내리는 흐린 달빛이 그를 비췄다. 핏물을 뒤집어쓴 듯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새빨갛게 물들어 있던 파비안은 위를 향해 살짝 턱을 들었다. 끈적하게 들러붙어 있던 핏물이 빗줄기에 차츰차츰 씻겨 내려갔다. 곧 깨끗한 금발과 새하얀 피부가 본래의 모습을 드러냈다.

    “…….”

    별하는 말을 잃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런 별하가 제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한 파비안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저 녀석들이 끔찍한 짓을 저지르기 전에, 이쪽에서도 제대로 상대해 줘야 해.”

    “……어떻게?”

    물음에 답은 없었지만 뜻은 명확하게 전해졌다. 이제 전력을 다해 죽이겠다는 뜻이었다. 뒤쫓는 녀석들만 죽이겠다는 건지, 이곳의 원주민을 전멸시키겠다는 건지 정확히 헤아리기 힘들었다. 다만 그 어느 때보다 흥분한 상태의 파비안은 시간을 들여서라도 반드시 자신의 의지를 관철할 게 틀림없었다.

    “별하를 안전한 곳으로 옮긴 후에.”

    별하는 담담히 대답하는 파비안에게로 손을 뻗었다. 눈가로 흘러내리는 핏물을 닦아주며 입술을 열었다. 쉬이 소리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목울대만 여러 번 움직였다. 창백하게 가라앉은 오드아이가 눈길을 맞대어 왔다.

    “미안해. 별하……. 계속 기다리게 해서.”

    별하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파비안이 미안해하거나 사과해야 하는 문제는 아무것도 없었다. 따지고 보면 오히려 제 쪽에서 더 미안해해야 했다. 이런 문제들은 전부 다 자신 때문이었으니까. 오메가만 아니었더라면, 그 흔하디흔한 베타였더라도 이런 사단은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까.

    그는 파비안에게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죄스러움을 느낄 정도였다. 파비안은 별하의 비감을 눈치챈 듯 그의 턱밑에 손을 댔다. 축 처진 턱을 살짝 들어 올려 다시 눈을 맞댔다. 젖은 머리칼에서 물방울이 끝없이 떨어졌다. 빗줄기 사이로 속눈썹까지 젖은 눈길이 틈 없이 밀착했다.

    “…….”

    “…….”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급하게 고개를 기울여 입술을 붙이려는 그 때, 잠시 사라졌던 기척들이 뒤쪽에서 들려왔다.

    번뜩 고개를 든 파비안은 별하에게 눈짓했다. 별하는 낮게 혀를 찼다. 파비안의 말대로 원하는 바가 확실한 원주민들은 무엇에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집요했다. 그쪽이 죽든, 이쪽이 죽든, 둘 중 한쪽이 나가떨어질 때까지 결단코 포기하지 않을 태세였다.

    어떻게 해서든 외면하고 싶었던 시나리오는 바로 지금의 이 상황이었다. 죽을 때까지 쫓기게 되는 최악의 상황.

    잠시 숨을 돌린 별하와 파비안은 다시 숲을 달렸다. 원주민을 상대하는 것도 시야가 좋을 때를 노려야 했다. 돌칼이나 창보다도 화살이 어디에서 날아올지 예측할 수 없어 위험했다. 최악의 시나리오에 최악의 날씨까지 겹친 지금은 자리를 피하는 게 가장 급선무였다.

    빽빽한 밀림을 헤치다 수풀의 밀도가 조금 낮아지는 게 보였다. 지면이 고르지 않아 자주 발목이 꺾였지만 미미한 달빛이 비쳐드는 이 근방이 달리기에는 훨씬 좋았다.

    “하아…… 하아…….”

    별하는 파비안의 흔들림 없는 그림자만을 쫓으며 달렸다. 그리 멀지 않은 뒤편에서 간간이 부산한 기척이 들려왔다. 다리가 무거워 속도가 느려질 때마다 화살의 기척이 느껴졌다. 그것도 이내 끊어져 분노에 찬 탁한 괴성만이 캄캄한 숲을 쩌렁쩌렁 울렸다.

    대체 몇 시간째 달리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혼란한 기분으로는 야밤의 숲에 영원히 갇혀버린 듯한 착각마저 느꼈다.

    파비안의 손에 의지해 겨우 이동하는 중에 돌연 무성한 수풀이 뚝 끊겼다. 절벽이었다. 파비안은 건너편의 절벽을 내다보며 흠뻑 젖은 금발을 흔들어 털었다.

    “저곳으로 뛰어야 해, 별하.”

    건너 편 절벽은 거의 2미터 거리였다. 평소라면 발돋움을 해 손쉽게 뛰어넘을 수 있는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은 소나기인지, 태풍인지 알 수 없는 장대비가 몹시 거세게 쏟아지고 있었다. 상황이 여러모로 좋지 않았다.

    별하는 젖은 얼굴을 쓸어내리며 덜덜 떨리는 입술을 감추려 깨물었다.

    “응…….”

    별하가 대답하자마자 파비안은 곧바로 절벽을 뛰어넘었다. 누런 흙탕물이 흘러내리는 절벽에 착지하면서 발이 살짝 밀려 나가기는 했지만 이대로 사화산 정상까지 오를 수 있을 법한 거뜬한 몸놀림이었다. 그는 뒷사람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별하.”

    어서 뛰어넘어 오라는 뜻이었다.

    “하아…… 하아…….”

    별하는 주춤주춤 벼랑으로 다가갔다. 빗물이 강물처럼 흘러내리는 절벽 아래를 힐긋 내려다보았다. 달빛이 닿지 않는 아래쪽은 수풀이 무성했다. 이전의 절벽들만큼 까마득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빗물이 떨어지는 소리로 봐서는 제법 높이가 느껴졌다.

    “별하, 어서.”

    파비안이 재촉했다.

    “하아…… 하아…….”

    별하는 어서 여기를 건너가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발이 묶인 듯 움직이지 못했다. 절벽에서 굴러떨어져 죽을 뻔한 기억 때문인지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파비안은 더 재촉하지 않았다. 과거의 일로 트라우마가 생겨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이의 이름만 나직이 불렀다.

    “별하.”

    “…….”

    “별하…….”

    별하는 문득 귓가를 스치는 저음에 고개를 들어 건너편을 내다보았다. 파비안은 그 자리에 우뚝 서서 별하를 또렷이 응시하고 있었다. 빗물이 눈 안으로 흘러들어도 깜빡이지 않았다. 별하에게 붙박은 눈을 떼지 않고 가만히 입술을 달싹였다.

    “괜찮아, 별하. 내가 잡아줄 테니 뛰어도 돼.”

    “파비안…….”

    “반드시 잡아줄게.”

    “…….”

    “이제 놓치지 않아. 절대.”

    별하는 다시 절벽 밑을 내려다보았다. 흙탕물에 잠긴 제 두 발과 파비안이 서 있는 맞은편 절벽을 내다보며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도움닫기를 하려는 것이었다.

    적당한 거리에서 멈춰 서서 앞으로 내다보았다. 두근두근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달리려는 그 때, 뒤쪽에서 음산한 기척들이 어둠을 헤치며 이쪽으로 달려들었다. 검은 인영들과 알파였다.

    수풀 그늘에서 벗어나 보다 밝은 곳으로 뛰쳐나온 그들은 기친 기색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극한의 굶주림 속에서 먹이를 뒤쫓는 맹수처럼 광기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들 뒤로 기다란 인영이 걸어 나왔다. 족장이었다. 그의 일변한 외형을 마주한 별하는 제 눈을 의심했다. 지팡이에 의지하지 않고 허리를 곧추세운 족장은 제가 알던 알파가 아니었다. 상위 알파였다. 그도 하이 알파였다.

    “별하―!”

    저를 향해 누런 송곳니를 드러낸 짐승들과 맞닥뜨린 별하는 곧장 파비안이 손을 내미는 절벽으로 내달렸다. 벼랑에서 발끝에 힘을 실어 지면을 힘껏 박찼다. 짧게 몸이 뜨자마자 반대편으로 훌쩍 넘어갔다.

    길게 내민 파비안의 손을 맞잡으며 절벽에 무사히 안착하는 그 때, 옆으로 검은 인영들이 줄줄이 뛰어넘어 왔다.

    105.

    쿵― 쿵― 쿵― 연이은 착지에 절벽의 지면이 언뜻 흔들렸다.

    “―?”

    별하는 파비안의 손을 강하게 움켜잡은 채로 그를 쳐다보았다. 억수같이 내리는 빗물이 튀어 오른 건지, 정말 지진이 일어난 건지 그도 알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찰나로 검은 인영들의 새카만 눈동자들이 빠르게 오갔다. 눈치 없는 알파 하나가 전속력으로 뛰어넘어 와 절벽 끝자락에 발을 쿵― 디뎠다. 그 순간 다시 한번 발밑이 흔들렸다. 전보다 훨씬 강한 지진이었다.

    “뭐, 뭐야?”

    지진이 아니었다. 빗물에 약해진 절벽의 지반이 외력에 충격을 받아 무너지고 있었다. 상황을 깨달은 원주민들은 먹이를 낚아채는 임무보다, 살기 위해 서로 안쪽으로 올라가려 발버둥을 쳤다. 쿠궁―

    “카하악!”

    “크악!”

    “읏!”

    별하는 잡고 있던 파비안의 손을 밀치듯 서둘러 놓았다. 다급히 눈길이 교차했다. 파비안은 빗물에 흠뻑 젖은 얼굴을 험악하게 구기며 진흙처럼 흘러내리는 절벽 끝으로 달려들었다.

    새파랗게 질려 고개를 내젓는 별하를 향해 파비안은 재빨리 손을 뻗었다. 열기를 품은 손끝이 다시금 맞닿는 찰나, 별하와 검은 인영들이 디딘 절벽 끝자락부터 파비안이 서 있던 곳까지 순식간에 와르르 무너졌다. 쿠구궁―

    “으, 으…….”

    수풀에서 튕겨 나가듯 굴러떨어진 별하는 엎드린 상태로 쉬이 일어나지 못했다. 바닥에 부딪힌 뺨으로 차가운 물이 찰박찰박 와 닿았다. 뼈가 부러지거나 한 것 같진 않았지만 타박상은 피해갈 수 없었던 듯 몸 곳곳에서 욱신욱신한 통증이 번득였다.

    “하아…… 하아…….”

    떨어질 때의 충격에서 겨우 정신을 차린 그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쏴아아아― 잿빛 먹구름이 자욱하게 드리운 하늘에서는 장대비를 퍼부어대고 있었다. 이제야 여명이 밝아오는지 어스레한 기운이 느껴졌으나 겹겹이 쌓인 먹구름을 뚫지는 못했다.

    “으음…….”

    눈을 수차례 깜빡이며 눈가의 물기를 거둬냈다. 떨어진 절벽 위는 생각보다 그리 높지 않았다. 그렇다고 목숨을 걸고 뛰어내리기에는 말도 안 되는 높이였다. 절벽 주변을 가득 메운 수풀과 무른 진흙탕이 아니었더라면 심각한 골절상을 당했을지도 몰랐다. 운이 조금만 더 나빴더라면 썩은 나무 밑동에 몸뚱이가 꽂혀 즉사하거나 바닥에 머리를 처박혀 뇌진탕으로 비명횡사했을 수도 있었다.

    별하는 저를 구하려 달려들었던 파비안이 함께 떨어진 것을 깨닫고 급히 몸을 일으켰다. 빗물에 잠긴 무른 진흙 바닥을 짚고 일어나던 그는 문득 이상한 감각을 느끼고 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

    누런 진흙탕 속에 시커먼 뭔가가 있었다. 절벽 아래로 간신히 비쳐드는 빛무리에도 번들거리는 그것은 반듯한 오각형을 이루고 있었다. 그의 손바닥 반절만 한 오각형은 일정한 패턴으로 길게 이어져 있었다. 탁한 진흙탕에 묻혀 보이지 않는 곳까지.

    미끄덩하고도 서늘한 감촉을 자각한 순간 별하는 그 정체를 본능적으로 깨우쳤다. 이미 한 번 피부를 맞댄 적이 있는 그것은 바로 파충류의 비늘이었다.

    별하 아래의 진흙탕에 몸을 파묻은 물체는 다름 아닌 아나콘다였다. 그것도 한 마리가 아니었다. 폭포 아래 물웅덩이처럼, 널따란 습지를 가득 채울 만큼 많은 수의 아나콘다들이 우글우글 뒤섞인 채로 잠들어 있었다.

    “―!!”

    별하는 그대로 굳어 손끝도 움직이지 못했다. 어서 파비안을 찾아 도망가야 하는데 제 아래 미끄덩한 몸체를 짚은 채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혹 아나콘다가 잠에서 깨지 않을까 숨도 제대로 뱉지 못하는 그 때, 어깨 부근에서 선명한 열감이 스쳤다.

    흠칫한 별하는 어깨를 움츠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흠뻑 젖은 금발의 남자가 숨을 몰아쉬며 서 있었다.

    “하아……. 괜찮아, 별하? 하아…….”

    파비안의 안위를 확인한 별하는 억누르던 숨을 토해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 밑에 아, 나콘다…….”

    파비안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매섭게 뜬 눈으로 별하의 팔을 잡아 천천히 일으켰다.

    “깊이 잠들었어. 당분간은 정신을 못 차릴 거야.”

    그의 손길을 따라 느릿하게 몸을 일으키던 별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째서?”

    아나콘다들은 역삼각형의 대가리를 어디 쪽에 둔 것인지 찾을 수 없었다. 다만 진흙탕 속에 뒤얽힌 구불구불한 몸체를 간혹 뒤척이며 물살을 일으켰다.

    절벽 아래쪽과 진흙탕 주변으로 부러진 나무기둥들이 보였지만 딱히 싸움을 한 모양새는 아니었다. 곤히 잠든 거대 파충류들에게 상처 입은 흔적은 일절 찾을 수 없었다.

    파비안은 제 말을 믿지 못하는 별하의 물음에 담백하게 답했다.

    “밤새 짝짓기했을 테니.”

    “…….”

    “마침 비도 내리고.”

    별하는 다시 주변을 돌아보았다. 절벽이 무너지는 것도 개의치 않을 정도로 단잠에 빠진 아나콘다들은 확실히 방심한 모습이었다. 파충류의 왕을 잡아먹을 상위 포식자가 이곳에는 존재하지 않은 것 같긴 했지만 분명 과도하게 늘어져 있었다. 어떤 복잡하고 힘겨운 의식을 치른 뒤 기진맥진하게 쓰러진 것처럼.

    아마도 파비안의 말대로인 듯했다. 아나콘다들은 암수 상관없이 한데 뒤섞여 이곳 음지에서 밤새 광란의 짝짓기를 한 것 같았다. 두꺼운 나무기둥들이 부서져 나갈 정도로 격렬하고 사납게.

    “하아아…….”

    별하는 숨을 길게 내쉬며 파비안과 눈을 맞췄다. 불행 중 다행으로 아나콘다는 잠들어 있었지만 상황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절벽 아래에 갇혀 나갈 길이 보이지 않았다. 거기다 같이 떨어졌던 원주민 녀석들은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 없었다.

    파비안은 숨을 가쁘게 내뱉는 별하에게 침착하라는 눈길을 보내며 제게로 이끌었다.

    “별하.”

    “하아……. 응.”

    “저기 수풀 보이지? 저곳을 통해서 위로 올라갈 거야.”

    그가 턱짓한 곳은 흙탕물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는 절벽이었다. 정확히 절벽의 단면에 길게 늘어진 두툼한 나무뿌리와 주변을 뒤덮은 수풀이었다. 생각만큼 쉽지는 않을 테지만 밟고 올라가기에 나쁘지 않은 모양새였다.

    별하는 반색하며 눈을 빛냈다. 맨손으로 클라이밍을 한 적도 있는데 저 정도는 거뜬했다. 손에 움켜쥘 것이 있고 밟을 곳이 있다면 그보다 쉬울 수 없었다.

    파비안에게 서둘러 움직이자는 눈길을 보내며 별하는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 아나콘다들이 장악한 습지의 한복판에서 벗어나기 위해 조심스럽게 걸음을 떼는데, 황톳빛으로 물든 별하의 티셔츠 아래쪽이 축 늘어졌다.

    “……?”

    빗물에 흐린 눈가를 닦으며 무의식적으로 턱밑을 내려다본 별하는 움찔했다. 티셔츠의 헐렁한 복부 부근에 화살이 걸려 있었다. 측면에서 날아온 화살이 꼬리 때문에 미처 옷을 관통하지 못한 것이었다. 얼른 몸을 낮춰 앉은 그는 앞사람을 낮게 불렀다.

    “파비안……!”

    앞서 아나콘다의 몸체를 밟아나가던 파비안은 별하의 목소리만으로 상황을 파악한 듯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돌아보았다.

    부옇게 내리는 빗줄기 너머로 검은 형체들이 서 있었다. 절벽에서 같이 떨어졌던 알파 원주민들이었다. 그들은 이쪽을 발견하고 급히 거리를 좁혀 왔다. 슈우욱― 화살이 재차 날아와 별하의 머리 위를 스쳤다.

    원주민들은 잠든 아나콘다를 자극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계속해 이쪽을 위협해 왔다. 별하와 파비안은 어디로도 도망가지 못하는 상태로,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인영들과 대치했다. 화살대를 들고 있던 검은 인영 하나는 남은 화살까지 전부 다 날렸는지 그것을 내던지고 허리에 차고 있던 돌칼을 뽑아 들었다.

    “빌어먹을…….”

    별하는 목숨을 걸고 저를 집요하게 쫓는 원주민들을 하나하나 쳐다보았다. 밤새 뒤집어쓰고 있던 알파의 늑대 가면은 거의 다 부서지거나 아예 박살 난 듯 쓰고 있지 않았다. 빗물과 흙탕물에 검은 인영의 몸을 뒤덮은 먹물이 군데군데 얼룩덜룩하게 지워져 누른 피부를 드러내고 있었다.

    빗줄기를 거칠게 쏟아붓는 먹구름 사이로 서서히 동이 터오고 있었다. 푸르스름하게 번지는 새벽빛 아래서 얼굴을 마주한 그들은 깜깜한 숲에서 마주쳤을 때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오메가의 살을 게걸스럽게 탐하고 광기에 사로잡혀 폭력을 휘두르던 악마들이 지금은 그와 반대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얼핏 잡히지 않는 먹잇감에 피로감을 느끼는 것 같기도 했고, 어서 편안한 집으로 돌아가 쉬고 싶은 열망을 느끼는 것 같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겁을 집어먹은 것도 같았다.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겉으로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분명 그들은 이 상황에 겁을 내고 있었다. 아나콘다 떼가 언제 눈을 뜨고 대가리를 치켜세울지 모르는 이 상황을. 그러면서 충혈된 검은 눈동자들은 잠시도 별하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하아…… 하아…….”

    별하는 눈을 굴려 그들 너머를 내다보았다. 절벽을 뛰어넘기 전 마주쳤던 족장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흐린 눈을 찡그려 절벽 위를 올려다봤지만 어떤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제 착각이 아니었을까, 하고 별하는 다시금 지난 기억을 되짚었다.

    이리 생각하고 저리 생각해 봐도 족장은 확실하게 하이 알파였다. 범상한 알파가 그런 강한 페로몬을 풍기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하이 알파 특유의 위압감은 흉내를 낸다고 해서 발현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별하는 천천히 제게로 다가와 앞을 가로막는 파비안에게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파비안, 너 알고 있었어?”

    파비안은 선뜻 달려들지 않는 원주민들을 빤히 주시하며 나직이 되물었다.

    “무엇을?”

    “족장 말이야.”

    선뜻 나오는 대답이 없어, 그는 별하의 물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눈치였다. 별하 역시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몰랐어?”

    “……?”

    “족장도 하이 알파인 거.”

    106.

    파비안의 금빛 눈썹이 일그러졌다. 그는 여전히 별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동의를 구하는 듯 쳐다보는 별하를 곁눈으로 스쳐보며 말했다.

    “무슨 소리 하는 거지, 별하? 그 녀석은 알파다.”

    일말의 의심도 없이 단언하고 있었다. 별하는 어리둥절하게 원주민들을 돌아보았다. 알파라고 하면 지금 무기를 치켜들고 이쪽을 향해 느릿느릿 다가오는 원주민들이었다. 거슬리긴 하지만 심리적인 압박감은 크지 않은 저들이야말로 알파였다.

    “……알파라고?”

    파비안은 오히려 별하를 걱정스럽게 쳐다보았다. 정말 괜찮은 게 맞느냐는 듯.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힘들 만큼 별하의 상태가 좋지 않다고 여긴 건지 가던 방향으로 슬쩍 눈짓했다.

    “여긴 내가 정리할게. 별하, 먼저 올라가.”

    “파, 비안, 그게…….”

    “어서. 빗물 때문에 많이 미끄러울 수 있으니 무리하게 밟지 말고.”

    “…….”

    별하는 극심한 체력 고갈로 자신이 잘못 본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무일푼 거지가 일확천금에 당첨되어 하룻밤 사이 벼락부자가 된다거나, 큰소리를 떵떵 치던 유지가 패가망신하는 모습은 종종 보았지만, 오메가에서 알파로 체질이 변한다거나 알파에서 오메가로 변했다는 소리는 도시 괴담으로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정체성을 애초부터 속이고 있었다면 모르겠지만 억제제가 없는 이곳에서 과연 그게 가능한 일일까, 하고 의심에 의심만 키워 나왔다.

    족장이 알파임을 단언하는 파비안의 의견에 별하도 충분히 동의했다. 그럼에도 찜찜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심신이 극한으로 몰려 정말 헛것을 본 건가 싶었다. 절벽 위에서 당장 흉곽을 부서뜨려 심장을 뜯어낼 듯하던 족장이 이제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아 불안했다. 어딘가 안전한 곳에 숨어 자신들이 무릎을 꿇기만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족장도 족장이었지만 당장 발밑에서 꿈틀대는 아나콘다 무리에서 벗어나는 일이 시급했다. 그전에, 집요하게 뒤쫓는 알파 원주민들을 이제는 멀리 떨어뜨려야 했다. 두 번 다시 쫓아오지 못하도록.

    별하는 젖은 눈을 깜빡이며 흐린 시야를 걷어냈다.

    “여기서 이러다가 다 죽을지도 몰라…….”

    그 작은 중얼거림을 용케 들은 듯 옆 사람의 저음이 뒤따랐다.

    “어쩌면 그럴지도.”

    “일단 이곳에서 벗어난 뒤에 때리든, 맞든 해도 되잖아? 전부 다 죽을지도 모르는 여기서 꼭 이래야 하는 걸까……?”

    파비안은 다가오는 알파 원주민들을 주변 시야로 경계하며 별하가 절벽으로 갈 수 있게 길을 터주었다.

    “그런 생각을 할 줄 아는 머리가 있었다면 일을 이리 어렵게 만들지도 않았겠지.”

    그는 으르렁거리듯 서늘하게 뇌까렸다.

    “미개한 종자들.”

    “…….”

    별하는 원주민들이 머리가 나쁘다고는 확신하지 못했다. 자신이 느끼기에 그들은 원하는 목적을 위해 악착스럽게 물고 늘어질 만큼 간사하고 영특했다. 생각하는 머리가 정말 없었다면 가치를 상정하지도 못할뿐더러, 가까운 먹잇감에 홀려 금방 포기했으리라.

    그들은 절대 머리가 나쁜 게 아니었다. 과도하게 탐욕스러울 뿐이었다. 목숨이 걸린 상황에서도 먹잇감을 낚아챌 기회를 놓치지 않을 정도로.

    파비안은 길을 터놓은 방향으로 별하에게 눈짓을 보냈다. 수심이 제법 깊은 진흙탕에 푹 잠긴 무척추 몸체를 밟고 어서 지나가라는 뜻이었다. 별하는 그가 시키는 대로 먼저 움직였다.

    그 때, 익숙한 외형의 물체가 폭우를 뚫고 날아왔다. 날카로운 창날은 정확히 별하의 옆구리를 향하고 있었다. 슈우욱― 파비안은 안광을 번득였다. 손을 내뻗어 찰나로 제 옆을 비껴가는 것을 단박에 움켜잡았다. 창날에 스치듯 팔을 찔린 별하는 발을 헛디디며 기우뚱했다.

    “윽…….”

    진흙탕에 잠긴 아나콘다의 비늘이 몹시 미끄러워 중심을 잡기가 어려웠다. 간신히 지르밟고 있던 아나콘다의 몸체가 구무럭거리는 순간 완전히 중심을 잃고 쭈욱 미끄러졌다.

    “파아, 읍―”

    풍덩―

    “별하?!”

    파비안은 손에 움켜쥔 것을 곧장 날아온 방면으로 되돌려주었다. 강한 외력을 받은 창은 흡사 천둥 같은 소리를 내며 희뿌연 장막을 단숨에 갈랐다.

    검은 칠이 거의 다 벗겨진 원주민은 파비안의 행동을 예측해 몸을 피했다. 기민하게 옆으로 굴렀으나 수면 위로 올라온 아나콘다의 꼬리에 통로를 가로막혔다. 창은 여지없이 원주민의 가슴팍을 꿰뚫었다.

    “흐어억!”

    어느새 주위를 에워싼 원주민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동시에 달려들었다. 뒤통수부터 물속에 빠진 별하는 입을 틀어막았다.

    진흙탕은 생각보다 훨씬 더 수심이 깊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혼탁한 물속에서는 도저히 눈을 뜰 수 없어 다급히 팔을 내저었다. 분명 바로 앞이 물결치던 수면이었는데 어쩐 일인지 진흙탕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손을 더듬어 수면을 찾는 별하의 위로 아나콘다의 육중한 몸뚱이가 내려왔다.

    “우웁―”

    서늘하고도 미끄덩한 사이를 황급히 빠져나가는 그의 위로 또 다른 몸체가 연이어 덮쳐들었다. 더는 빠져나갈 틈이 없었다. 수면에 내리꽂히며 파열하는 거친 빗소리와 잠든 아나콘다들의 느직한 기척, 어딘가로 끝없이 흘러가는 물소리가 귓가에서 아득히 들려왔다.

    좀 전까지 곁에 있던 파비안의 페로몬도, 목소리도, 기척도 일절 찾을 수 없었다. 뽀로록― 꽉 닫힌 입술 사이로 공기 방울이 빠져나왔다. 당황한 별하의 빗장뼈가 크게 도드라졌다.

    제 몸 둘레의 몇 배나 되는 아나콘다의 탄탄한 몸뚱이를 치받고 떠밀고 주먹으로 두들겨대도 틈은커녕,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에 점점 더 가슴팍이 가쁘게 오르내렸다.

    “웁― 우웁―”

    위에서 내리누르는 아나콘다와 지면의 사이는 불과 50센티도 되지 않았다. 그 사이는 빗물과 뒤섞인 질흙으로 틈 없이 메워져 있었다. 가로막힌 사위를 더듬는 손끝이 차갑게 얼어붙어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을 때 별하는 이곳에 완전히 갇혔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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