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트로피컬 아일랜드 (39)화 (39/49)
  • 처음 마주하는 파비안의 자신 없는 모습에 대답을 기다리는 별하의 얼굴에도 덩달아 그늘이 드리웠다. 혹 생각하기도 싫은 선언을 하는 게 아닐까, 돌연한 불안을 느꼈다. 예전 발정기를 따로 보내자고 못 박았던 아둔한 자신처럼.

    파비안은 새하얀 이마 위로 흘러내린 금발을 쓸어넘기며 잠잠히 물어왔다.

    “해변으로 돌아가면 허락해 주겠어?”

    별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엇을? 의아한 물음에 짧은 뒷말이 따라왔다.

    “너와의 각인을.”

    092.

    별하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그는 무척이나 익숙한 단어들을 귀로 듣고서도 그 의미가 금방 해석되지 않아 두 눈을 크게 끔뻑거렸다.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확신하는 얼굴이었다. 검은 눈동자를 숨김없이 드러내고서 빤히 쳐다보는 이에게 파비안은 분명한 음성으로 뜻을 전했다.

    “각인을 허락해 줄래?”

    “…….”

    별하는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이번에는 제대로 들은 것 같았다. 입을 꾹 다문 채로 파비안을 아연히 응시하다가 느릿하게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한 번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후로도 계속해서.

    경직돼 있던 파비안의 만면에 그제야 엷은 표정이 드리웠다. 미소였다.

    “고마워. 별하.”

    오후의 진한 햇살이 비쳐 몹시 반짝이는 눈동자들이 찰나로 깊게 맞물렸다.

    “…….”

    “…….”

    파비안은 가만히 손을 들어 별하의 머리칼에 붙은 나뭇잎을 떼어내 주었다. 그에 별하는 번뜩 현실로 돌아왔다. 파비안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올곧이 자각하는 순간,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잘 익은 과일을 연상케 할 만큼 새빨갰다. 뒤늦게 당황해서는 손등으로 뺨을 문지르며 눈길을 피했다.

    “두, 두두 녀석, 노, 놓치겠어…….”

    별하는 더듬거리는 제 목소리에 더 당황해 어금니를 꽉 다물었다. 파비안은 그런 별하를 다정한 눈으로 바라보다 고개를 들었다. 큰 보폭으로 앞서 걷던 두두는 이미 머리칼 한 가닥도 보이지 않았다. 별하와 파비안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검은 인영들의 기척만이 주변 어딘가에서 희미하게 느껴졌다.

    “그럼, 돌아가서 제대로.”

    말을 완전히 맺지 않는 파비안의 목소리도 살짝 떨리는 것 같았다. 별하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어떤 대답도 하지 못하고 애꿎은 입술만 씹었다. 파비안과 다시 눈이 마주치기 전에 먼저 황망히 돌아서서 걸음을 재촉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뒤쪽으로 말했다.

    “이거 말이야, 족장이 가지고 있던 것보다 크잖아? 혹시 이거 보고 겁먹어서 우리한테 자기 자리 내주는 거 아냐? 정확히는 너한테.”

    파비안은 엷게 웃으며 별하를 뒤따랐다.

    “그럴지도 모르지. 훔쳐가지만 않는다면.”

    “설마. 그렇게 자긍심 높은 알파들이 설마 소인배처럼 훔쳐가려고?”

    “이곳에는 없을까. 손에 잡히지 않는 자긍심보다 눈앞의 제 욕구가 우선인 녀석들이.”

    인간들이 모여 사는 곳이 신천지가 될 리 없었다. 미개한 식인종들도 일단은 사람이기에 비열한 부류 역시 존재할 터였다.

    “그건 그래.”

    별하는 입가를 끌어 올리며 짤막하게 웃음소리를 냈지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품에 안은 것을 훔쳐가고 안 훔쳐가고보다 당장 지금 이 상황이 더 그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걷는 별하는 공황상태와 엇비슷한 심적 동요를 겪고 있었다. 각, 인? 각인을 하자고? 생명의 불씨가 꺼질 때까지 상대의 페로몬만을 간절히 원하게 되는 그 각인―?

    “…….”

    대게 발정이 찾아왔을 때 그에 대한 강렬한 충동을 느끼기는 하지만 더 높은 쾌감을 이끌어 내기 위한 본능과 마찬가지였다. 굳이 각인하지 않더라도 원하는 만큼 얼마든지 섹스할 수 있고, 임신해서 아이를 낳아 기를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인을 해야 하는 이유는 별하가 아는 한, 단 한 가지 경우밖에 없었다.

    갑자기 목 안이 따끔거렸다. 입 안이 바짝 말라 저절로 목울대가 크게 오르내렸다. 별하는 입술 안쪽의 연약한 점막을 곱씹으며 앞만 보고 걸었다. 팔다리를 차례로 교차해 가며 땅을 밟아가는데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제대로 걷고 있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꿈속을 걷는 것처럼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좀 전까지 세상 어느 누구보다 익숙하고 편안하고 안정감을 주던 남자가 갑자기 전혀 다른 존재처럼 느껴져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뒤에서 걷는 파비안이 지금 어디를 보고 걷는지, 그와 손발이 부딪치지는 않는지, 혹시 제 뒤통수만 보고 있는 건 아닌지 미치도록 신경이 쓰여 진땀까지 흘렸다.

    별하는 땀이 나는 손을 움켜쥐었다가 펼치기를 반복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엇박자로 뛰는 제 심장 소리에 주변의 기척이 잘 들리지 않아 뒷사람이 어디쯤에서 걷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별하는 호기심과 충동을 참지 못하고 제 어깨 너머를 힐긋 돌아보았다.

    “―!”

    고개를 돌리자마자 파비안과 눈길이 마주쳤다. 살며시 내리깐 오드아이에 햇살처럼 드리우는 미소를 마주하는 순간 그는 둔중한 무언가에 머리를 강타당한 듯 아뜩한 기분을 느꼈다. 철옹성의 절벽처럼 견고한 가슴 안쪽에 일평생 누군가를 들여본 적이 없었던 별하 스스로도 이 감정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별하는 돌연히 덮쳐든 감정의 파도에 휘말려 얼마 가지 못하고 다시 걸음을 멈췄다. 지금 당장 무슨 말이든 하고 싶었다.

    “으음. 그게…….”

    파비안은 한 걸음 뒤에서 천천히 멈춰 섰다. 선뜻 말을 잇지 못하는 이를 재촉하는 법 없이 차분히 기다려주었다.

    별하는 가던 방향을 돌아보았다. 높다란 파초 아래에 앞질러 나갔던 두두가 서 있었다. 어떤 신호도, 제스처도 보내지 않았으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음이 급해진 별하는 흥건히 젖은 손을 꼼지락거렸다.

    “파비, 안.”

    “별하.”

    “나, 난―”

    어렵사리 입술을 달싹이는 그 때, 온화한 기색이 감돌던 파비안의 안색이 단단하게 일변했다. 그의 눈은 별하의 뒤편으로 향해 있었다.

    “……?”

    좋지 못한 기류를 감지한 별하는 그의 눈길이 향한 곳을 돌아보았다. 두두의 곁에 다른 시커먼 인영들이 그림자처럼 서 있었다. 마중 나온 베타 원주민들이었다.

    창과 방패로 무장한 그들은 기력이 거의 다 쇠한 두두부터 부축해 살폈다. 앞에 선 베타 하나가 별하와 파비안을 향해 목소리를 높여 거칠게 외쳤다.

    “이르드나이럼야!”

    뒤쪽의 베타들이 반복해 외쳤다.

    “이르드나이럼야!”

    “이르드나! 이르드나이럼야!”

    꾸물거리지 말고 어서 서두르라는 뜻 같았다. 별하는 늑대 발톱을 품에 단단히 안고 옆 사람과 눈길을 주고받았다.

    “망할. 다시 여기라니.”

    발톱을 찾아 떠나 있을 때 좋았던 점은 파비안과 함께할 수 있다는 것과 오메가를 잡아먹는 식인종들에게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 단 두 가지였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지금보다 유리하고 안전한 상황처럼 느껴졌다.

    “…….”

    파비안은 더 말이 없었다. 이전까지의 상냥함은 흔적도 없이 지워내고 차가운 안광을 번득이며 그들에게로 향했다.

    베타들이 향한 곳은 광장이 아니었다. 광장을 우회해 파초 군락 반대편의 교목 사이로 들어갔다.

    별하는 내심 안도했다. 너른 광장에 우글우글 모여 앉아 이쪽을 동물원의 원숭이 또는 외계인처럼 쳐다보는 알파들과 마주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사라져 그나마 한시름 내려놓았다.

    혹시라도 일이 잘못되어 도망치거나 맞서 싸워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알파들이 모인 광장보다는 지금 가는 곳이 훨씬 나았다. 어디로 가는지 전혀 짐작할 수 없었지만.

    별하는 이제 제 앞에서 걷는 파비안을 힐금 곁눈으로 쳐다보았다. 주저하며 제게 고백하던 남자는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강인한 페로몬을 풍기고 있었다. 후각 능력이 저조한 베타들도 그를 의식하고 불편한 듯 연신 힐끔거렸다.

    좀 전에 미처 꺼내지 못한 말을 어서 들려주고 싶었다. 무슨 말을 하려 했었는지 확실하게 기억하지는 못했지만 그것이 아니더라도 하고 싶은 말들이 많았다. 그리고 어서 해변으로 돌아가 밤이 하얗게 샐 때까지 그와 체온을 나누고 싶었다.

    별하는 꾸물꾸물 밀려드는 불안감과 답답함에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파비안은 살짝 고개를 틀어 그를 돌아보았다.

    “괜찮아? 별하.”

    “……괜찮다고 말해 주고 싶은데, 힘드네. 솔직히 긴장돼.”

    “…….”

    “지금 어디로 가는 걸까? 처형대는 아니겠지?”

    별하의 물음에 파비안은 담담히 대답했다.

    “족장이 있는 곳일 테지. 트로피를 누가 가지고 있는지 확인해야 할 테니.”

    게임의 승패를 가리려면 확실히 그랬다. 트로피가 진실이었다.

    별하는 앞쪽에서 걷는 베타들을 내다보았다. 곧바로 제 뒤쪽과 주변의 가까운 나무 그늘을 돌아보았다. 줄곧 시야에 걸려 있던 두두 녀석이 언제부턴가 보이지 않고 있었다.

    상태가 위중해 급히 치료를 하러 간 것일지도 몰랐다. 부족 대표로 알파의 힘을 과시하는 임무에 실패해 어쩌면 명예살인을 당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평범한 알파도 아닌, 위대한 하이 알파기에 그 반대의 경우일 수도 있었다.

    별하는 불안과 긴장을 밀어내려 애써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렸다. 상념들에 빠져들기 직전 앞쪽의 베타들이 걸음을 멈췄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교목 사이의 공터였는데 그곳에 익숙한 외관의 움막이 서 있었다. 두두의 거처보다 좀 더 크고 높은 움막은 분명 원주민 우두머리, 족장의 거처였다.

    093.

    교목의 나뭇가지들이 뒤얽힌 움막 주변은 땀이 금방 식을 정도로 시원했다. 이곳 역시나 광장과 거리가 있어 조용하면서도 아늑한 분위기였다. 움막 뒤편은 굵직한 가지들로 막혀 있어 맹수들의 침입을 차단하기에도 용이해 보였다.

    백색 강과 조금 먼 점을 제외하면 최상의 입지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권력자가 머무르는 곳이 확실했다.

    베타들은 움막 앞에서 진입을 멈췄다. 밖의 기척을 들은 듯 안쪽에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창을 든 알파 원주민이었다.

    건장한 알파 원주민은 길잡이 베타들과 짧은 대화를 나눈 후 파비안과 별하를 돌아보았다. 누르스름한 눈동자로 이방인을 주시하는 알파에게는 경계심과 불신이 전적이었다. 그들의 차림을 머리 위에서부터 발끝까지 살피더니 손을 불쑥 내밀었다.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지시하듯 빠르게 지껄였다.

    원주민들의 시선을 받은 별하와 파비안은 의아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별하는 번뜩 무언가를 깨닫고 품에 안은 것을 더 꽉 쥐었다.

    “설마하니 발톱 내놓으라는 뜻은 아니겠지?”

    “…….”

    파비안은 제 턱밑에 겨우 닿는 원주민들을 내려다보았다. 원주민들의 누르스름한 눈동자들은 별하가 아닌 그에게로 향해 있었다. 두두와는 또 다른 하이 알파의 기백에 눌려 눈치를 보면서도 눈을 떼지 않았다. 파비안은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눈치챈 듯 손에 움켜쥔 것을 흙바닥에 툭 던졌다. 이빨이 듬성듬성 깨진 돌칼이었다.

    알파 원주민은 제가 바라던 것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것을 성큼 챙겨 들었다. 곧 몸을 틀어 움막의 문을 활짝 열었다.

    파비안은 별하를 잠깐 돌아본 후 선뜻 그곳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상체를 숙여 낮은 문턱을 넘는 그를 별하는 바로 뒤쫓았다. 문턱을 막 넘으려는데 긴 창이 대뜸 별하의 앞을 가로막았다.

    “―?”

    별하는 알파 원주민의 눈빛만으로도 그의 뜻을 단박에 알아챌 수 있었다. 열세한 소수 집단으로 지금까지 살아오며 자의로, 타의로 길러진 눈치가 이곳에서도 어김없이 발휘되고 있었던 것이다. 알파 원주민이 말하는 바는, 오메가인 자신은 이 움막에 들어갈 수 없다는 뜻이었다.

    “…….”

    별하는 제 앞을 가로막는 창칼과 매서운 얼굴을 한 알파 원주민을 물끄러미 직시했다. 이제는 손에 익숙해진 창을 빼앗아 알파 원주민의 목에 겨누면 과연 누가 이길지 궁금했다. 예전처럼 쉽게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받은 만큼 돌려줄 의향도, 의욕도 가득했다.

    왜 이런 마음이 드는지 자신도 알지 못했으나, 저를 막은 눈앞의 알파가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제아무리 강한 위력으로 억누른다 한들 새하얀 늑대만큼 압도적일까.

    그 때 안쪽에서 흰 손이 튀어나와 알파의 창을 우악하게 움켜잡았다. 서늘한 그늘을 뚫고 나타난 파비안은 알파를 향해 콧잔등을 일그러뜨렸다.

    움칫 물러나는 알파 원주민 곁으로 창칼을 세운 베타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겁을 내면서도 끝끝내 물고 늘어질 듯한 기세였다.

    별하는 이제 곧 끝나는 상황에 괜한 싸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원주민들을 향해 진정하라며 손바닥을 내보이고는 파비안에게 말했다.

    “난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이거.”

    줄곧 보듬어온 것을 그에게 건네려 어깨에서 풀어냈다. 고이 감겨 있던 이파리에 손가락이 걸려 뚝 뜯어졌다. 이파리들이 풀리자 안쪽에 숨겨져 있던 늑대의 발톱과 이빨이 밖으로 튀어나왔다.

    “읏.”

    발톱은 간신히 움켜잡았으나 이빨을 놓쳐 바닥에 떨어졌다. 묵직한 소리를 내며 지면에 박힌 그것으로 원주민들의 이목이 달라붙었다. 잠깐의 침묵 뒤로 그들은 동시에 일제히 물러났다.

    절대적인 무언가를 본 듯 파르르 떠는 녀석이 있는가 하면 낮게 신음하는 녀석도, 경외심에 찬 눈을 빛내는 녀석도 있었다. 저마다 이색적인 표정으로 쳐다보면서도 정작 다가오는 이는 없었다. 다가올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파비안이 그것을 주워 들어 별하에게 건넸다.

    “조심해, 별하.”

    별하는 그를 힐긋 쳐다보았다. 낮은 문턱 때문에 고개를 기울인 채 내려다보는 파비안에게서 겸연쩍은 듯 눈길을 피하며 그것을 받아 들었다.

    “고마워.”

    발톱과 이빨을 품에 안은 별하는 멀찍이 물러난 원주민들을 돌아보았다. 어느새 창칼을 내려놓은 그들은 이전의 태도와 많이 달라져 있었다. 보이지 않는 벽은 여전했고 당혹감마저 느껴졌으나 수위 높은 경계심이 보이지 않았다.

    서로가 어리둥절하게 쳐다보는 사이, 파비안은 문 옆으로 비켜서며 지나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어서 이쪽으로.”

    “응…….”

    별하는 뒤쪽의 원주민들을 힐끔거리며 주춤주춤 안으로 들어섰다. 문턱을 넘어 어두컴컴한 그늘 속으로 완전히 몸을 묻어들 때도 별하를 저지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상한 냄새가 짙게 밴 움막의 내부는 생각보다 크고도 어두웠다. 햇빛이 비쳐들도록 높다란 외벽 상단에 긴 창들을 내놓기는 했으나 큰 효과는 없는 듯했다. 안벽에 자잘하게 내걸린 물체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고 겨우 걸음을 뗄 수 있을 정도였다.

    로비와 비슷한 형태의 짧은 복도를 따라 들어가자 단단한 원통의 나무기둥으로 가로막은 갈림길이 나왔다. 왼쪽 복도는 빛 한 줄기 들지 않는 어둠 속인 반면, 오른쪽 복도 안쪽에서는 불그스름한 불빛과 함께 희끄무레한 연기가 번져 나오고 있었다.

    그곳으로 발길을 돌리는데, 어두컴컴한 왼쪽 복도 안쪽에서 들릴 듯 말 듯 희미한 기척이 들려왔다. 눅눅한 바람 소리 같기도 하고 작은 가축들의 기척 같기도 했다. 상상하고 싶지 않았으나 아픈 사람의 신음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별하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

    빛이 비쳐들지 않은 곳은 고요했다.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착각할 만큼 어떤 소리도 없었다. 앞서 걷던 파비안은 뒷사람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아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멀찍이 선 별하에게로 의아한 눈길을 던졌다. 무슨 일이야? 별하는 고개를 저으며 작게 대답했다.

    “잘못 들었나 봐.”

    “괜찮아?”

    “응. 괜찮아.”

    괜찮지 않아도 괜찮은 척해야 하는 시간이었다. 의심과 불신을 버리고 진실을 마주해야 하는 시간.

    어둑한 복도를 지나 또 한 번의 문턱을 넘어서자 높은 천장의 널찍한 공간이 나타났다. 알 수 없는 조형물 같은 것들이 가득 매달린 공간 한가운데에 광장처럼 돌화로에 불이 피워져 있었는데, 구물구물 피어난 연기가 천장의 얼기설기 만들어진 구멍으로 자욱하게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 너머 기둥의 음영 속에 서 있던 인영이 천천히 불 가까이로 걸어 나왔다. 지팡이를 짚고 선 장신은 자주 악몽 속의 존재감 있는 주인공으로 나타났던 인물이었다. 족장이었다. 그는 여전히 기이한 눈길로 이쪽을 물끄러미 직시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파비안을 지그시 살펴보다가 그 뒤에 선 별하에게로 눈길을 던졌다. 오메가인 별하가 제 거처에 들어온 것이 무척 못마땅한 듯 주름진 얼굴을 잔뜩 찌푸리던 족장은 그가 품에 안은 것을 발견하자마자 순식간에 안색을 바꿨다.

    “움람댐리므라대르이댜―”

    빠르게 지껄이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이는 지금 이곳에 없었다.

    “…….”

    “…….”

    파비안과 스치듯 눈길을 나눈 별하는 족장이 언제나 데리고 다니던 검은 인영이 하나도 없는 것을 그제야 알아차렸다. 오직 족장밖에 없었다.

    족장은 희뿌연 눈동자를 번득이며 빠르게 이쪽으로 다가왔다. 옷자락이 불에 닿아 타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파비안의 옆을 스쳐지나 별하의 앞에 우뚝 선 족장은 손에 쥔 지팡이를 내버리고 손을 내밀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서서히 썩어 들어가는 나무뿌리처럼 메마른 손가락들이 별하를 향해 활짝 벌어졌다.

    별하는 그를 내려다보며 영 의심스러운 듯 물었다.

    “……이거 줘도 되는 거 맞아?”

    파비안은 제 앞에 선 늙은 족장에게서 잠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늘어진 옷자락까지 눈으로 매섭게 훑으며 대답했다.

    “건네주진 마.”

    별하는 족장의 손을 피해 뒤로 슬며시 물러났다. 그러자 족장이 별하의 앞에 두 무릎을 꿇었다.

    “움람댐리므라대르이댜― 움람댐리므라대르이댜―”

    주문을 외듯, 애걸을 하듯 같은 말을 반복하며 손을 내젓는 족장은 몹시 필사적이었다. 당황한 별하는 그를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몰라 파비안을 돌아보았다.

    “뭐, 뭘 어쩌라는 거야?”

    무릎을 꿇고서 별하에게 간청하던 족장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곳은 좀 전 족장이 서 있던 곳이었다. 천장에 달린 이상한 장식물들과 기둥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는데 침상 같은 게 놓여 있었다. 양측에 팔걸이가 달린 것으로 봐서는 커다란 의자 같기도 했다. 족장은 그곳을 계속해 가리키며 같은 말을 반복했다.

    “움람댐리므라대르이댜―”

    백태 낀 눈동자에서 광적인 기운이 느껴졌다. 그의 뜻을 점점 더 헤아릴 수 없어진 별하는 고개를 내저었다.

    “몰라요. 당신이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이대이이랴리아러이디―”

    “하아……. 젠장.”

    파비안은 도무지 대화가 통하지 않는 이들을 지나쳐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예상보다 견고하고 세밀한 내부 구조와 방 안의 장식물들을 찬찬히 돌아보았다. 기둥 너머 어스름한 음영 속에 놓인 의자에 곧 눈길이 닿았다. 그는 그것을 물끄러미 응시하다 굳게 닫힌 입을 열었다.

    “앉으라는 뜻이군. 저 의자에.”

    족장은 파비안의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꿇은 무릎을 세워 옆으로 비켜섰다. 기꺼이 안을 허락하는 제스처였다. 그런 족장의 환영에도 별하는 이 이상은 안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단 셋뿐이었고, 파비안도 곁에 있었지만 그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어서 게임에서의 우승을 확실히 하고 이곳에서 떠나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다.

    우승을 확실히 못 박으려면 관객이든, 증인이든, 사람들을 불러서 어떤 얘기라도 나누어야 하는데 그런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아 의아함만 커져갔다. 파비안은 독백하듯 읊조렸다.

    “왕좌를 넘기겠다는 뜻인지도 모르겠군.”

    별하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왕좌를 넘겨? 누구한테?”

    파비안의 눈길이 그에게로 향했다.

    “지금 트로피를 든 사람일 테지.”

    094.

    “……?”

    별하를 향한 족장의 단단한 눈길이 마치 파비안의 말을 뒷받침하는 듯했다. 별하는 질색한 얼굴로 자신이 안은 것을 내려다보았다.

    말 그대로 우승 트로피인 줄 알았는데, 족장의 자리를 좌지우지할 정도일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었다. 대체 이게 뭐라고……? 별하는 원주민들에게 있어 어떤 가치를 지닌 물건인지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하는 중이었다.

    별하는 제게로 쏟아지는 눈길을 느끼고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파비안과 족장이 그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그들의 뜻은 분명했다.

    “……그러고 싶지 않아.”

    별하는 고개를 저었다. 저 의자에 앉고 싶지 않았고 식인종들의 족장 따위는 더더욱 되고 싶지 않았다. 파비안은 제 어깨에 툭 닿은 천장 장식물을 손에 쥐고 내려다보며 말했다.

    “차라리 보스가 된다면 더 안전해질 수도 있어. 여기 녀석들에게 족장은 남다른 의미니.”

    “말도 안 통하는데 족장이라니. 싫어. 족장이든, 보스든 이젠 한시도 여기 있고 싶지 않아.”

    “앉기만 해. 그리고 떠나자.”

    “…….”

    파비안은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했다.

    “난 별하의 안전만을 원해.”

    별하는 뜻이 확고한 파비안과 한참 동안 눈길을 맞댔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대로 느껴져 더 거부할 말을 생각해 내지 못했다. 족장은 그들의 침묵으로 대화가 끝이 났다고 생각한 듯 완강하게 손짓했다.

    “…….”

    별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파비안에게서 눈길을 내렸다.

    곧 걸음을 떼어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은 환기가 되고 있음에도 공기가 썩 좋지 않았다. 길게 늘어진 장식물들에 닿지 않으려 피해 걷다가 하나가 귓가를 스쳐 힐긋 내려다보았다.

    손바닥 크기의 울퉁불퉁한 형태의 장식물은 누랬다. 가까이에 매달린 것 중에는 검게 썩은 것도 있었는데 거의 비슷했다. 뾰족하거나 뭉툭한 것들의 형태와 질감으로 봐서는 짐승의 이빨, 발톱, 또 다른 상징적인 부위 같았다.

    별하가 가진 것에는 비교도 되지 않는 것들이었으나 나름의 의미를 지닌 건 분명해 보였다. 원주민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맹수의 전리품과 같은. 그렇지 않고서야 이리 강박적으로 매달아 놓았을 리 없었다.

    별하는 가급적이면 그것에 닿지 않도록 어깨를 틀어 움직이며 기둥으로 다가갔다. 불길이 치솟는 돌화로에는 무엇을 태웠는지 검은 물질로 지저분하게 뒤덮여 있었다. 그는 불길을 지나 더 안으로 들어섰다. 이쪽을 말없이 응시하는 파비안을 힐긋 돌아본 후에 의자 앞에 섰다.

    “…….”

    이내 별하는 또 다른 시련에 맞닥뜨렸다. 거리를 두고 봤을 때는 의자, 혹은 침상이라고 생각했었다. 가까이서 본 그것은 의자가 맞았다. 그러나 일반적인 의자는 아니었다. 거무스름하고도 누런 재질의 단단한 무언가를 통으로 잇대어 만든 의자는 상식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의자의 자재는 무척이나 익숙한 외형이었는데, 바로 인간의 뼈였다. 그것도 일정한 크기의 정강이뼈만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이 또한 오메가의 것이리라. 별하는 정강이뼈들에 감긴 검은 머리카락을 멀거니 내려다보며 물었다.

    “……너 이거 봤어?”

    파비안은 고개를 까딱였다. 그는 별하를 걱정하듯 한시도 눈을 떼지 않으면서도 저지하지는 않았다. 지금은 혐오스러운 감정이나 다른 무엇보다도 이 일을 확실히 끝맺고 싶어 했다.

    별하 역시 그에 뒤지지 않는 마음이었기에 어금니를 악다물고 의자 앞에서 몸을 돌렸다. 묵묵히 저를 지켜보는 파비안과 제 품에 안긴 것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족장을 원망스러운 듯 번갈아 쳐다보고는 뒤를 내려 의자에 앉았다.

    삐그극― 머리카락에 감긴 뼈들이 서로 마찰하며 음산한 소음을 일으켰다.

    “으윽.”

    엉덩이에 닿는 딱딱한 질감이 소름 끼쳐 별하는 더 앉아 있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그에 족장이 바깥을 향해 우악하게 소리쳤다. 곧 밖에서 여러 인기척이 들려왔다. 베타들이었다. 족장은 그들에게 무엇인가 지시했다. 별하는 얼른 파비안과 눈을 맞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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