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트로피컬 아일랜드 (40)화 (40/49)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난 족장 같은 거 하기 싫다고. 절대 싫어.”

곁으로 다가온 파비안이 별하의 등을 가만히 쓸었다. 진정시키려는 듯.

“이제 목숨을 위협할 것 같지는 않으니, 어떻게 하는지 좀 더 지켜보고 움직이도록 해.”

“도망치자는 거야?”

“배웅받으며 떠난다면 가장 좋겠지만.”

일방적으로 베타들에게 지껄이던 족장이 별하와 파비안을 돌아보았다. 베타들을 가리키며 무언가를 반복적으로 말했다. 별하는 금방 족장의 뜻을 이해했다. 그들을 따라가라는 뜻이었다.

지시를 받고 방을 나서는 베타들을 별하와 파비안은 지체없이 뒤따랐다. 먼저 문턱을 넘어서는 별하의 곁으로 족장이 급히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

별하는 반사적으로 물러나며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족장은 쉬이 포기하지 않고 손을 활짝 펼쳤다.

“이대이이랴리아러이디―”

“왜, 이러는 거야?”

“저한테 달라는 뜻이겠지.”

파비안은 더 시간을 끌 필요가 없다는 듯 별하의 어깨를 감싸 안고 밖으로 이끌었다. 족장은 강압으로 뺏지 않았다. 그럴 수 있을 만한 권력이 이제는 사라진 건지도 몰랐다.

별하는 파비안의 비호를 받아 음침한 방을 벗어났다. 어서 복도를 나서려는데 어둑한 왼쪽 복도에서 또 다른 인기척들이 들려왔다.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린 그곳에 알파 원주민 하나가 서 있었는데 좀 전까지 굳게 닫혀 있던 문이 미세하게 열려 있었다. 컴컴한 공간 안에 반짝이는 무엇인가가 있다고 깨닫는 그 때, 파비안이 조금 강한 악력으로 별하의 어깨를 안고서 그를 밖으로 이끌었다.

“…….”

서두르는 듯한 느낌이 영 부자연스러웠다. 별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앞만 내다보는 파비안의 무표정한 얼굴에서 어두컴컴한 공간에서 반짝이던 그것이 무언인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오메가였다. 마을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던 오메가들의 눈이었다.

“…….”

별하는 햇빛이 비쳐드는 문밖으로 나서며 문득 생각했다. 잠깐 족장이 되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하고.

갇혀 사는 오메가들을 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과 동시에 그들이 정녕 그것을 원할까 하는 의문을 느꼈다. 알파 원주민들이 저들의 이념에 빠져 사는 것처럼 오메가 원주민들이라고 얼마나 다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절대적으로 아니길 바라지만, 알파들에게 먹히는 행위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알파가 둘뿐인, 철창이 없는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할 리 없었다. 아무리 나약한 오메가라 할지라도.

별하는 복잡한 심경으로 베타들의 안내에 따라 족장의 거처를 등졌다. 파비안에게 늑대의 이빨을 건네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다가 힐긋 뒤를 돌아보았다.

움막의 문이 열려 있었다. 빛이 들지 않는 컴컴한 안쪽에 우두커니 서 있는 인영이 보였다. 족장은 혼탁한 눈을 부릅뜬 채로 멀어지는 별하를 응시하고 있었다.

별하가 걸음을 재촉해 시야에서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 족장은 단 한 번도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

베타들이 안내한 곳은 백색 강이었다. 이미 한 번 이곳에 와본 적이 있는 별하는 쉬이 그들의 뜻을 이해했다. 아직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주변을 살피는 파비안에게 말했다.

“씻으라는 거 같아.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파비안은 백색 강과 그를 두른 맹그로브 군락에서 눈을 들어 별하를 돌아보았다. 금방 상황을 인지한 듯 고개를 까딱였다.

“축제를 제대로 벌이겠다는 뜻이로군.”

별하는 생각도 하기 싫다는 듯 혀를 쯧, 찼다.

“정말 족장 자리 넘겨주려는 건 아니겠지? 망할, 빌어먹을. 이제 끝난 줄 알았더니 더 난관이잖아.”

뒤쪽에서 베타들이 이쪽을 향해 뭐라고 지껄여댔다. 잡담은 그만하고 어서 움직이라는 뜻 같았다. 별하는 트로피를 잘 보이는 곳에 두고 물속에 몸을 깊이 담갔다. 옆으로 다가온 파비안과 가까이에서 서로의 눈을 응시했다.

“지금 도망가면 잡으러 올까?”

별하의 물음에 파비안은 금방 대답하지 않았다.

원주민들에게 늑대의 발톱이 가진 의미가 대단하다는 것은 이제 익히 알지만 그게 이방인에게도, 이방인 오메가에게도 똑같이 통용될지 의문이었다. 마음에 걸리는 다른 사안들도 역시 그랬다.

계획 없이 도망을 가는 것보다는 좀 더 현실적인 방향으로 생각이 기울었다. 가령 별하보다 작은 발톱을 가진 전 권력자를 처단하고 확실하게 자리를 쟁취한다든가 하는.

별하는 안광을 번득이는 파비안의 생각을 읽어낸 듯 단칼에 잘라 거절했다.

“다 필요 없어. 엮이는 거 자체가 싫어. 그냥 원하는 거 주고 갈 길 가고 싶어. 한시라도 빨리.”

파비안은 그에 동의하지 않았다.

“신의를 가질 만한 대상이 아니야. 앞으로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 좀 더 지켜봐야 해. 트로피는 끝까지 넘기지 말고.”

“그렇게 해야겠지만…….”

“이제 끝이야. 거의 다 끝났으니까 조금만 더 참아줘, 별하.”

“…….”

별하는 싫은 내색을 감추지 못하고 눈을 내리깔았다. 그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파비안이 수면 위로 손을 꺼냈다. 흙이 묻은 별하의 뺨을 엄지로 쓸며 그의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칼을 살짝 넘겨주었다. 금세 눈길이 맞닿았다.

“…….”

“…….”

별하는 무의식적으로 팔을 뻗어 파비안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예쁜 유리구슬을 닮은 눈동자에 검은 눈동자를 붙박은 채로 고개를 기울였다.

숨결을 나누며 벌어진 입술을 맞대려던 찰나, 번득 무언가를 깨닫고 옆을 홱 돌아보았다. 강기슭에서 대기하고 있던 베타들이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미동도 하지 않고 빤히 쳐다보는 모양새가 하나같이 어리둥절해하는 얼굴이었다.

095.

별하는 미처 신경 쓰지 못한 상황에 당황해 얼른 뒤로 물러났다. 물러나는 만큼 파비안이 성큼 다가왔다. 그는 제게서 떨어진 별하의 허리를 감싸 끌어당기며 곧장 입술을 집어삼켰다.

“파, 으음.”

이쪽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이목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는 별하의 혀와 점막 구석구석을 파고들어 핥고 쓸었다. 녹녹한 안쪽을 실컷 맛본 후에야 짧은 입맞춤을 남기고 떨어져 나갔다.

별하는 금세 부어오른 제 입술을 손등으로 누르며 강기슭을 곁눈질했다. 베타 원주민들은 새로운 장르의 영화를 보는 듯 이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말은 통하지 않아도 순간적으로 그들과 생각이 통하는 기분을 느꼈다. 괜스레 민망하고 무안해진 별하는 태연한 척 등을 지고 돌아서서 몸을 씻어냈다.

“그나저나 두두 녀석은 어디로 간 걸까? 친구들한테 치료받고 있으려나?”

화두를 돌리려는 물음이었다. 파비안은 희뿌연 물로 제 목덜미를 적시며 억양 없이 말했다.

“그럴 테지. 패배감에 허우적대는 낯짝을 봐줘야 하는데.”

별하는 저에게 쓰는 어투와 전혀 다른 언어를 구사하는 파비안을 곁눈으로 돌아보았다. 그는 딱히 화가 났다거나 무언가에 몰두한 기색은 아니었다. 자신의 속내를 꾸밈없이 자연스럽게 드러낼 뿐이었다.

크루즈에서의 까칠했던 모습을 떠올린 별하는 새삼 절감했다. 파비안은 저에게 있어 더없이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남자이지만, 사실 그는 하이 알파라는 것이었다.

하이 알파는 특출난 신체 능력만큼이나 까다롭고 호전적인 성향으로도 유명했다. 그런 그가 용케 적의를 품었던 두두와 큰 다툼을 벌이지 않은 게 이제 와 신기하게 느껴졌다. 말은 저리하지만 자다가도 일어나 두두의 상태를 확인하고 자리를 살펴주기도 했었다.

물속에 잠수했다가 물 위로 올라온 이에게 별하는 장난처럼 말했다.

“친해질 줄 알았더니.”

파비안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대답했다.

“게임 룰만 정확히 알 수 있었다면 그런 일은 없었을 거야.”

“어?”

그는 선뜻 이해하지 못하는 별하를 위해 간단하고 쉽게 설명해 주었다.

“혹시라도 상대를 죽여서 무효 처리되면 이쪽이 곤란해지니까.”

“…….”

“자제했을 뿐이야.”

파비안의 말은 거짓 없는 진심이었다. 별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만 주억거렸다.

간간이 눈길을 주고받으며 마저 씻는 중에 베타들의 높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그만 돌아가야 한다는 뜻 같았다.

젖은 머리칼을 털어내며 물에서 나서는 중에 파비안이 근처 바위 뒤에서 뭔가를 발견했다. 물에 젖은 옷가지였다. 익숙한 패턴의 직물은 이곳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었다. 별하는 그것을 보자마자 낮게 외쳤다.

“어, 내 옷.”

별하의 남방과 파비안의 셔츠였다. 그것은 검붉은 피에 젖어 버려져 있었는데 두두가 먼저 이곳을 거쳐간 모양이었다.

파비안은 피에 젖은 별하의 옷가지를 물에 집어넣어 가볍게 흔들어 빨았다. 이미 깊게 배인 핏기는 잘 빠지지 않았다. 남방은 체크무늬 패턴과 뒤섞여 얼룩덜룩했다.

그에 반해 파비안의 셔츠는 물에 넣어 몇 번 흔들자마자 신기하게도 다시 멀끔한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언뜻 새 옷처럼 보였다.

파비안은 아무리 헹궈내도 회생되지 않는 남방을 안타까운 듯 내려다보며 주인에게로 건넸다.

“음. 별하, 남방이.”

별하는 노점상에서 산 만 원짜리 제 남방을 얼른 건네받았다. 괜히 무안해서 물기를 제거한 옷을 다시금 비틀어댔다.

“괜찮아. 아직 티셔츠가 남아 있잖아.”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지만 지금 입고 있는 티셔츠 상태도 영 말이 아니었다. 블루칩의 다리를 드레싱하느라 밑단은 헤져 있었고 복부와 등 쪽에는 군데군데 구멍도 나 있었다. 한 번 들러붙은 때는 아무리 문질러도 빠지지 않았다. 이곳에 머무른 만큼 더 머무르게 된다면 머지않아 걸레짝처럼 너덜너덜해질 게 분명했다.

그에 반해 파비안은 멀쩡했다. 셔츠는 소매의 커프스단추가 떨어진 것 말고는 어디 한 군데 낡은 데가 없었다. 옷깃이며 밑단이며 미세한 재봉선 하나 뜯기지 않았다. 바지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의 광택은 살짝 죽은 듯했으나 여전히 말끔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별하는 제 너덜너덜한 청바지를 힐긋 내려다보고는 쓴 입맛을 다셨다. 그러다 아무도 없는 이곳에서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어 금방 생각을 접었다. 청바지가 헤어져 없다면 이곳 원주민들처럼 생식기만 가리면 될 일이었다. 파비안이 준 팬티도 아직 건재했다.

그는 생명줄과도 같은 트로피들을 품에 안으며 옆 사람에게 눈길을 보냈다.

“가면 돼?”

파비안은 물기를 털어낸 셔츠를 손에 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백색 강에서 벗어나 낯설지 않은 오솔길을 걷는 중에 어디에선가 번져 나오는 기척을 감지했다. 미미하게 땅을 울리는 기척은 광장 쪽에서부터 들려오고 있었다. 그곳과 가까워질수록 소음은 점점 더 커져갔다.

별하는 도저히 내키지 않는 듯한 얼굴로 파비안을 돌아보았다.

“정말 축제를 벌이는 거야?”

파비안은 귀를 기울여 광장의 동태를 살폈다.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가 느른하게 내쉬며 말했다.

“바글바글 모여 있군.”

“빌어먹을.”

별하가 마음을 다잡기도 전에 베타들은 광장으로 성큼성큼 들어섰다. 며칠 만에 다시 찾은 광장은 이전보다 훨씬 좁아진 느낌이었다. 온 섬을 누비고 다닌 덕분이었다.

베타들을 따라 별하와 파비안이 광장으로 들어서자 일시에 북소리가 뚝 멎어 들었다. 광장에 모여앉아 노래를 부르듯 이상한 소리를 내던 원주민들이 일제히 뒤를 돌아보았다. 익숙한 모양의 가면을 뒤집어쓴 그들은 늑대의 전리품을 들고 나타난 별하와 파비안에게서 슬그머니 물러났다. 홍해가 갈라지듯 길이 생겨났다.

“…….”

별하는 쏟아지는 눈길을 받으며 너른 길을 걸어 들어갔다. 옆에서 담담히 걷는 이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잡아먹는 건 아니겠지?”

“이제 와서 그럴 리가.”

“뭔가 모르게 느낌이 너무 안 좋아. 아니, 당연한 건가?”

“별하만은 먹지 못하게 할 테니 안심해.”

평온하게 흘러나오는 파비안의 저음에는 살기가 숨어 있었다. 만에 하나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결단코 목숨을 다해 원주민들을 말살할 듯한 눈빛이었다. 별하는 이를 악다물고 베타들을 따라 알파들 사이를 걸었다.

높다랗게 솟구치는 불 너머에는 이미 족장과 나이 든 원주민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전에 직면했었던 상황과 똑같은 광경에 별하는 강한 데자뷔를 느꼈다. 그때와 다른 점이라면 두두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과, 족장과 원로들 옆에 서 있는 작은 남녀 한 쌍이었다.

아직 어린 태가 가시지 않은 남녀는 광장을 채운 알파 원주민들과 조금 달랐다. 잡다한 시중을 드는 베타도 아니었다. 체격부터 분위기까지 오메가라는 것을 의심의 여지 없이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별하는 설명하기 힘든 기이한 불안감에 휩싸였다. 두 번째로 마주한 오메가의 등장이 반가워야 정상일 텐데 오히려 그 반대였다. 불안과 의심, 혐오감이 급속도로 가중되어 갔다.

지팡이를 든 족장은 느긋하게 불 옆을 지나 별하와 파비안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들 옆에 서서 무슨 말인가를 토해 내자 광장의 알파들이 누르스름한 눈알을 초롱초롱하게 빛냈다. 족장의 동물 울음 같은 말소리가 한참을 이어졌다.

별하는 살짝 고개를 틀어 불길 너머의 오메가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족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알파들처럼 눈을 빛내는 얼굴들에 어떤 두려움이나 걱정은 일절 찾아볼 수 없었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어 상기된 느낌이었다.

별하보다 조금 어려 보이는, 어쩌면 비슷한 또래일지도 모르는 남자 오메가는 저를 향한 시선을 느낀 듯 눈을 내려 이쪽을 쳐다보았다. 별하는 당황해 눈을 깜빡이면서도 마주친 눈을 돌리지 않았다.

단지 알고 싶었다. 세상과 고립된 이곳에서 오메가로 살아온 이가 지금 어떤 기분을 느끼고 있는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시선이 마주친 남자 오메가는 금방 눈을 돌려 이전처럼 족장의 뒤통수를 우러러보았다.

“…….”

별하는 뭔가 알 수 없어진 기분이었다. 찜찜하고도 답답한 기분을 이해할 수 없어 건조하게 마른 눈만 끔뻑거렸다. 팔짱을 낀 채 상황을 관망하던 파비안이 가만히 말을 건네어 왔다.

“별하도 알고 있겠지만.”

“……?”

“우리가 참견할 일이 아니야.”

“……뭘, 알아?”

별하가 의아하게 되묻는 찰나 족장의 탁한 음성이 그쳤다. 잠시 사라졌던 북소리가 곧바로 둥― 둥― 둥― 둥― 광장을 울렸다.

족장은 이쪽을 지그시 응시했다. 별하가 안고 있는 늑대 발톱뿐만 아니라 파비안의 손에 들린 늑대 이빨까지 몹시 탐나는 듯 쳐다보면서도 이전처럼 막무가내로 손을 내밀지는 않았다.

그는 깊게 주름진 턱을 들어 돌화로 건너편을 돌아보았다. 오메가들이 서 있는 곳이었다. 족장이 지팡이로 바닥을 쿵 찧자 교목의 그늘 속에 숨어 있던 검은 인영이 기다란 팔을 휘적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인영은 뭉툭한 무언가를 손에 쥐고 있었는데 흡사 넓적한 중식도와 닮은 모양이었다. 두두의 날렵한 돌칼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돌칼을 보는 순간 별하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서, 설마.”

광장을 울리는 묵직한 북소리, 공기 중에 실린 긴장된 분위기, 지옥불처럼 솟구친 화염, 가면 너머로 숨을 죽인 알파들의 광기 어린 안광과 그들의 목울대가 가파르게 오르내릴 때 침이 꼴깍 넘어가는 소리는 뼈에 새겨진 것처럼 익히 알고 있던 것이었다. 그 후로 몇 번이나 꿈속에 찾아와 별하를 괴롭히던 기억이기도 했다.

배고픈 알파들이 나무에 매단 오메가가 익기만을 기다리던 그때와 똑같았다. 그들은 지금 눈앞의 해맑은 오메가 둘을 요리하려 하고 있었다.

096.

“하아…… 하아…….”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얕게 호흡하며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오메가들은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아는지, 모르는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그들 뒤편에 선 검은 인영의 밋밋한 얼굴에는 어떤 표정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이런 상황을 수없이 경험해 본 듯 덤덤했다. 덤덤함을 넘어서서 무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느껴지지 않았다.

별하는 목덜미에서 오싹한 한기를 느꼈다. 이곳에서 당장 도망치고 싶은데 땅바닥에 발이 눌어붙은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눈도 깜빡하지 못하고 눈앞의 광경을 직시했다. 바짝 메마른 입술을 달싹이며 스스로에게 세뇌를 하듯 중얼거렸다.

“아니야. 아닐 거야.”

너른 광장에는 분위기를 고취시키는 북소리 외에 어떤 소리도 없었다. 이곳의 모든 이목이 한곳을 향해 있었다. 저들의 허기진 배를 채워줄 어린 오메가들에게로.

북소리가 뚝 멈추자 검은 인영은 돌칼을 번쩍 들어 올렸다. 뭉툭한 날이 공기를 내리치기 직전, 별하는 남자 오메가와 또다시 눈길이 마주쳤다. 줄곧 기대에 찬 눈동자를 빛내며 족장을 우러러보던 오메가의 얼굴에 어느덧 화기가 증발해 있었다. 기쁨도, 슬픔도, 두려움도 없었다.

별하는 어떠한 표정도 떠오르지 않은 그 얼굴을 이전에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처음 이곳에 와 스치듯 마주쳤던 나이 든 여자 오메가의 얼굴과 똑같았다. 이 땅 위에 존재하는 모든 희망과 의지를 잃어버린 공허한 얼굴. 텅 빈 눈동자.

바람 소리를 내며 공기를 가른 돌칼이 가느다란 목덜미에 닿는 순간, 커다란 손이 별하의 두 눈을 덮었다.

눈앞이 캄캄해짐과 동시에 둔탁한 마찰음이 번득였다. 퍽―! 끊어질 듯한 신음 뒤로 섬뜩한 마찰음이 재차 반복했다. 퍽―! 퍽―! 도끼질과 다름없는 행위에는 거침이 없었다. 쿵! 바닥에 굴러떨어진 묵직한 무언가가 데굴데굴 구르는 듯한 기척이 들려왔다.

다시 퍽―! 퍽―! 퍽―! 쿵! 여섯 번의 힘찬 칼질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북소리가 되살아났다. 둥― 둥― 둥― 둥― 알파 원주민들의 들뜬 숨소리가 불길보다 뜨겁게 광장을 채웠다.

“하아…… 하아…….”

별하는 파비안의 손에 눈이 가려진 채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흐트러진 호흡을 다잡으려 움켜쥔 주먹이 새하얗게 탈색했다. 파비안이 그의 귓가에서 나직이 말했다.

“그대로 돌아서면 돼. 안 보일 거야.”

“…….”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었다. 실제로 앞은 보이지 않았지만 귀로 전해지는 소리는 눈으로 보는 것만큼 생생한 광경을 그렸다. 철퍼덕 쓰러진 물체를 가르고 두툼한 뼈를 우드득 우드득 부서뜨리는 소리가 북소리와 뒤섞여 귓전으로 선명하게 파고들었다. 검게 타들어 가는 장작냄새 너머로 비릿한 피냄새가 코를 찔렀다.

“으읍.”

별하는 이 끔찍한 참상을 더는 상상하고 싶지 않아 얼른 홱 돌아섰다. 저를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려다보는 파비안과 눈을 맞대며 어서 이 지옥에서 빠져나가기를 갈망했다. 그 때 옆에서 족장이 말을 걸어왔다.

“이니라야려디남리아니쟈이―”

알 수 없는 언어에 할 수 있는 대답은 없었다. 앙상한 손가락을 꿈지럭꿈지럭 움직여가며 무언가를 설명하던 족장은 곧 뒤로 다가온 베타에게서 무언가를 건네받았다. 그리고 얼른 그것을 별하를 향해 길게 내밀었다.

“……?!”

새빨갛게 물든 손바닥 위에 둥그스름한 무언가가 있었다. 낯설지 않은 형태의 그것은, 막 배를 가른 오메가에게서 뜯어낸 심장이었다.

아직 완전히 멎지 않은 심장이 족장의 손바닥 위에서 꿈틀 박동하는 순간 별하는 멀찍이 뒷걸음질 쳤다. 그러다 검은 인영들이 부지런하게 해체해 나가는 중인 오메가의 사체 조각을 시야로 발견하고는 손등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족장은 기다랗게 자라난 잿빛 눈썹을 치켜세우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니라야려디남리아니쟈이―!”

제 손에 든 것을 이번에는 파비안에게 건넸다. 파비안 역시도 그것을 받아 들지 않았다. 차가운 얼굴로 지긋이 내려다볼 뿐이었다.

별하도, 파비안도 오메가의 심장을 받아 들지 않자 족장의 만면에 묘한 기색이 감돌았다. 마치 왜 이 귀한 것을 가져가지 않느냐는 듯한 얼굴이었다. 성큼 다가온 알파 원주민들 역시 이해하지 못한 듯한 눈으로 그들을 빤히 쳐다보았다.

족장은 얼른 고개를 숙여 그것을 허겁지겁 물어뜯었다. 질긴 근육 덩어리를 부드러운 살코기처럼 베어 물어 질겅거렸다. 뜯어낸 작은 덩이를 어금니로 씹을 때마다 각진 턱이 도드라지며 목덜미의 핏대가 곤두섰다. 우적우적― 입가를 온통 시뻘겋게 물들인 모습이 흡사 영화에서나 보던 피에 굶주린 괴물 같았다. 분명 괴물이었다. 인간의 탈을 뒤집어쓴 악마와 다름이 없었다.

수십 조각으로 분리된 오메가들의 몸은 나뭇가지에 꿰어 차례차례 불 속으로 들어갔다. 북소리에 맞춰 알파 원주민들의 기이한 노랫소리가 이어졌다.

목숨이 아깝지 않을 만큼 경외하는 늑대의 가면을 뒤집어쓴 그들은 별하와 파비안의 주위를 계속해 빙글빙글 돌았다. 아마도 이방인의 승리를 축하하는 행위처럼 보였다. 저들이 우상시하는 늑대의 전리품을 환영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별하와 파비안은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 못한 채 끝없이 이어지는 원주민들의 축제를 창백한 얼굴로 주시하고 또 경계했다.

금세 어둑해진 광장에 숯불고기 냄새가 진동하자 별하와 파비안은 더 이상 원주민들의 이목을 끌지 못했다. 승리자들이 오메가의 살을 취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지한 그들은 서로 먹기 위해 달려들었다. 별하는 식은땀을 흘리며 파비안을 돌아보았다.

“그냥 이거 던져주고 가버릴까? 잠시도 있고 싶지 않아. 끔찍해.”

파비안은 별하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닦아주었다. 노을이 질 새도 없이 금방 어두워진 사위의 숲을 돌아보며 말했다.

“해가 졌어. 전처럼 막무가내로 움직이기에는 너무 위험해.”

별하는 돌화로 주변으로 모여들어 게걸스럽게 저녁을 먹는 소리를 애써 외면하며 입술을 잘근거렸다.

“여기서 밤을 보내야 하는 건 아니겠지?”

“아마도 높은 확률로.”

그래야겠지. 파비안의 담담한 저음이 이처럼 섬뜩할 수가 없었다. 파비안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는 별하를 등을 쓸며 잠잠히 위로했다.

“확실한 답을 받을 때까지, 조금만 더 견뎌줘.”

“그게 가능해? 확실한 답이란 걸 어떻게…….”

별하는 말을 맺지 못했다. 근육 덩어리를 급하게 먹어치운 족장이 알파들을 헤치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입가를 시뻘겋게 물들인 채로 조잡한 동물 소리를 내며 지껄여댔다. 별하의 품속 발톱을 가리키기도 하고, 거대한 교목의 뒤편을 손짓하거나 제 한쪽 어깨를 툭툭 치며 누런 공막을 크게 드러내기도 했다. 아마도 두두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족장의 뜻이 어떠하든 간에 별하는 고개만 내저었다. 족장은 대화가 전연 통하지 않는 이들에게 제 할 말을 실컷 늘어놓은 후 이내 어딘가로 발길을 틀었다. 미동 없이 우두커니 선 별하와 파비안에게로 손짓했다. 저를 따라오라는 뜻이었다.

“……무슨 수작이지?”

별하의 물음에 파비안은 말이 없었다. 한창 저들만의 축제를 즐기는 알파들을 빙 돌아보았다. 푸짐한 인육으로 배를 채운 그들은 기괴한 노래와 격한 춤으로 만족감을 표현했다. 북소리도, 노랫소리도 어느 때보다 흥에 겨웠다.

“음식이 더 부족해 보이진 않는군.”

가벼운 농담에도 별하는 웃지 못했다. 족장이 목청을 높여 재차 그들을 불렀다. 파비안은 팔짱을 풀어내며 말했다.

“일단 확인해 봐야겠지.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건지.”

“또 이거 달라고 할 거 같은데, 따라가야 해? 시커먼 놈들이 숨어 있다가 덮치기라도 하면?”

“그럴 생각이었다면 이런 파티 따위 열지 않았겠지.”

“그럼? 왜 저러는 거야? 뭘 어쩌자는 거야?”

“글쎄.”

“하아……. 빌어먹을.”

파비안은 먼저 걸음을 떼고 느릿하게 족장이 기다리는 곳으로 향했다.

“일단 여기보단 낫겠지.”

별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마지못해 그를 뒤따르며 독백하듯 중얼거렸다.

“우리나라에 이런 말이 있어, 파비안.”

파비안이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어떤?”

별하는 알파들의 고성으로 시끄러운 광장을 돌아보며 나직이 읊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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