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하는 더 버티다간 꼬리뼈가 부서지거나 허리가 빠질 듯해 하반신에 들어간 힘을 풀었다. 일순 빠듯하게 파고들던 열기둥이 내벽 깊숙이 미끄러져 틀어박혔다.
“흐, 으읏.”
별하는 뱃속이 벌어지는 선득한 감각에 헐떡였다. 파비안은 별하의 허리를 끌어안고서 그대로 내벽을 찔렀다. 발정기 때 별하를 수없이 절정으로 이끌었던 곳이었다. 뜨거운 정액으로 흠뻑 젖어 들었던 곳에서 다시 강한 쾌감이 번졌다.
“하, 아아…….”
별하의 깊은 곳을 익히 경험한 파비안은 유연하게 허리를 놀려 자극을 가했다. 별하는 파비안이 삽입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이내 절정에 다다랐다.
“파, 아으읏……!”
별하의 희뿌연 정액이 나무기둥에 튀어 흘러내렸다. 사정과 함께 내벽이 경련하듯 조여들자 파비안의 허릿짓이 더 빠른 리듬을 탔다. 정액이 다 빠지지 않은 페니스가 덜렁거릴 정도로 별하의 엉덩이를 퍽퍽 쳐올렸다.
“흣, 읏, 파, 파비안…….”
우악스러운 허릿짓을 버티다 못한 별하는 나무기둥에 얼굴을 처박기 직전이었다. 정신없이 허리를 놀리던 파비안이 별안간 손을 뻗어 별하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쌌다. 땀으로 눅진한 뺨 곳곳에 키스를 퍼부으며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작은 틈조차 없이 밀착해 끌어안자 맞물린 성기가 깊게 교접했다.
“으응…….”
맞물린 곳에서 강한 압박감을 느낀 파비안은 지체 없이 안을 파고들었다. 간신히 두 발로 지탱하고 선 별하를 단단히 끌어안아 몸을 부딪쳤다. 페니스로 뒤를 강하게 밀어 올릴 때마다 별하의 납작한 가슴이 흔들렸다. 파비안은 그를 한 손으로 움켜잡고서 격렬하게 밀고 들어왔다.
“아읏……! 읏, 앙, 앗!”
그는 별하의 뒷덜미에 얼굴을 묻고 흥분의 박차를 가했다. 강물 소리만이 흐르는 어둑한 수풀 속에 열띤 신음과 긴박한 숨결이 어지럽게 엉켜 들었다. 질퍽하게 젖은 하반신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끊임없이 쌓여갔다. 맞물린 곳에서 거품이 된 체액이 새어 나와 발갛게 달아오른 별하의 허벅지 안쪽으로 흘러내렸다.
파비안은 그의 목덜미에서 떠나지 않고 연신 잘근거렸다. 땀방울이 흐르는 뒷덜미를 아프지 않게 잘근잘근 깨물다가 목덜미를 길게 핥아 올렸다. 귓불과 그 언저리에 피가 고이도록 물고 빨았다. 귓바퀴를 혀로 쓸다가 안으로 파고들자 별하는 신음을 참지 못하고 쏟아냈다.
“흐, 으음, 읏…….”
누구의 것인지 모를 체액으로 뒤덮인 성기들이 매끄럽게 맞물렸다. 선명하게 각성한 성감대에 쾌감이 번득였다. 별하는 재차 오르가즘에 사로잡혔다. 끊어지는 신음을 삼키며 급히 사정할 때 파비안 역시 별하의 안에서 들끓던 열기를 터트렸다.
“아으읏……!”
“하아…….”
별하는 열기둥을 안에 들인 채로 묽은 정액을 뚝뚝 흘리며 신음했다. 파비안은 페니스가 빠지지 않는 자세로 자연스럽게 별하를 안았다. 땀이 밴 그의 뒷목에 입술을 누르며 다감하게 물었다.
“괜찮아?”
별하는 그에 대한 대답이 없었다. 지금은 그보다 훨씬 중요한 사안이 있는 것 같았다. 파비안이 제 안에서 빠져나가기 전에 고개를 돌려 입맞춤을 받으며 조금 성마르게 속삭였다.
“하아……. 파비안, 한 번만. 한 번만 더 해…….”
별하는 좀처럼 흥분이 가라앉지 않는지 파비안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별하에게 애정이 담긴 키스를 퍼붓는 파비안의 기둥 역시 여전히 우직하게 박혀 있었다.
“……괜찮겠어, 별하?”
별하는 채근하듯 뒤를 조이며 얕게 헐떡였다.
“어, 어서. 안쪽이 너무 뜨거워…….”
“하아…….”
파비안은 별하의 촉촉한 눈가에 입술을 눌렀다. 단내가 빠져나오는 그의 입술을 한입에 덮고서 내벽에 틀어박힌 페니스를 살짝 뒤로 물렸다. 잠깐 생겨난 틈으로 안쪽에 한가득 흩뿌린 정액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흐, 으응…….”
파비안은 별하를 살짝 돌려세워 한쪽 다리를 높게 치켜들고는 곧장 허리를 움직였다. 색에 물든 눈길이 맞닿는 순간 다시금 상기된 호흡이 깊게 얽혀들었다.
090.
불시의 섹스를 마친 그들은 강 상류에서 눅은 몸을 씻어냈다. 어느덧 해가 기울어 어렴풋하게 노을이 내리고 있었다.
수 시간 동안 몇 번이나 절정에 다다랐던 별하는 거의 녹초 상태였다. 손가락도 움직이지 못하고 파비안의 너른 가슴에 등을 붙인 채로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파비안은 젖은 손으로 별하의 어깨를 쓸어내렸다. 땀이 질척하게 흐르던 울긋불긋한 목덜미와 느른히 오르내리는 가슴, 명치, 복부를 가볍게 스치듯 문질렀다. 열기를 머금지 않은 손길은 아래로 내려가 바닥까지 훤히 들여다보이는 맑은 물속으로 잠겨 들었다.
서늘한 물속에서도 열기와 다정함을 잃지 않는 흰 손은 체모가 옅은 아랫배를 지나 더 아래로 향했다. 이제는 쉬이 발기하지 않는 페니스 주변을 간지럽히듯 맴돌다 그것을 커다란 손 안에 넣어 느릿하게 훑어 올렸다.
긴장감이 가신 말랑한 고환과 회음부 구석구석을 문지른 그는 별하의 쭉 뻗은 다리를 제 위로 올려 안쪽을 벌렸다. 회음부를 지나 벌어진 둔덕 사이의 움찔거리는 구멍에 손끝이 닿았다.
이전보다 더 부어오른 주름을 살며시 건드리자 별하는 불편감을 느낀 듯 몸을 뒤척였다. 입술 사이로 긴 한숨이 빠져나왔다.
“으응…….”
“…….”
파비안은 묵묵히 손을 움직였다. 자신이 정신없이 파고들었던 곳으로 천천히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느슨하게 풀어져 한참 열려 있었던 주름은 금방 어렵지 않게 안을 허락했다.
구멍이 열리자마자 내벽에 한가득 고여 있던 정액이 물길을 따라 꾸물꾸물 흘러나왔다. 뜨거운 정액과 차가운 물이 뒤섞여 몸 안에서 빠져나가는 감각이 선득해 별하는 허리를 움직거렸다.
“하아…….”
파비안은 혹 나중에라도 별하가 아프지 않도록 내벽에 들러붙은 제 정액을 꼼꼼히 소제했다. 뜨뜻하게 열이 올라 부어오른 점막을 문지르며 손가락을 좀 더 깊숙하게 밀어 넣자 별하는 기어이 신음을 흘렸다.
“흐으……. 파, 파비안 이제 그만…….”
파비안은 별하의 옆머리에 입술을 붙이며 상냥하게 속삭였다.
“안에 아직 남아 있어. 조금만 더 참아줘, 별하.”
투철한 의무감을 지닌 손가락은 마지막 정액 한 방울까지 없애려는 듯 내벽을 열고 들어갔다.
“읏.”
별하는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돌렸다. 손가락이 안을 휘젓는 감각을 이를 물고 참는데, 그의 페니스가 어느새 고개를 치켜들고 있었다. 파비안은 별하의 귓가에 입술을 붙인 채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금방 끝나.”
의식하는 순간 몸이 긴장했다. 내벽이 움츠러들어 잘 열리지 않자 손가락 하나가 가세해 안을 열었다.
“으읏, 파비안.”
같은 곳을 계속해 눌러 드는 손길이 점점 묵직하게 뜨거워졌다. 그는 제게 기대어 꼼지락거리는 별하의 봉긋한 가슴을 느릿하게 쓸어내리며 이 이상 깨끗해질 수 없는 곳을 문지르고 또 문질렀다.
둔하게 가라앉았던 감각이 다시 예리하게 살아남을 느낀 별하는 뒤를 조이며 헐떡였다. 파비안의 우뚝한 열기둥이 별하의 등허리를 찔렀다.
“흐으.”
“…….”
“파비, 안…….”
파비안은 손에 힘을 실어 거침없이 내벽을 갈랐다. 점막을 강하게 눌러 벌리듯 파고드는 감각에 별하는 곧바로 허리를 들썩이며 사정했다. 고환이 바짝 오그라들었다.
“―!”
발기한 페니스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움찔거리며 발버둥 칠뿐이었다. 찰나의 쾌감에 전율한 별하는 이내 맥없이 쓰러졌다.
파비안은 깨끗해진 안쪽을 휘젓던 손을 천천히 밖으로 꺼냈다. 움찔거리며 곧바로 오므라드는 곳을 차분히 쓸었다. 그는 느른한 한숨을 흘리며 별하에게 남긴 자신의 흔적을 마저 지워나갔다.
오랜만에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묵은 때를 벗긴 그들은 모닥불 앞에서 느긋하게 배를 채웠다. 얼룩을 뺀 옷가지들은 가까운 나뭇가지에 줄지어 걸려 있었다.
해가 완전히 저물고 구수한 숯불고기 냄새가 번져도 두두는 일어나지 않았다.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간혹 들릴 듯 말 듯 희미한 신음만이 그가 아직 살아 있음을 알릴 뿐이었다.
내일 아침에 먹을 것과 환자 몫을 남겨놓고 식사를 끝낸 뒤에는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불안하고 불미스러운 생활이 이제 끝을 맺는 내일을 위해서였다.
금방 마른 팬티를 입은 별하는 은하수 밤하늘이 올려다보이는 나무 아래에 누워 그 풍경을 조용히 바라다보았다. 무거운 눈꺼풀을 찬찬히 감았다가 뜨며 작게 중얼거렸다.
“어서 다 끝내고 돌아가고 싶어.”
옆 사람에게 팔을 내어준 채 잠을 청하던 파비안이 눈을 떴다. 별하는 잠잠하게 중얼거림을 이었다.
“바다에서 느긋하게 수영하고 싶어. 이런 밤에도 물에 들어가기 참 좋은데. 낚시도 하고 싶고, 네가 잡아줬던 조개도 또 먹고 싶어. 푹신한 모래밭에서 낮잠도.”
파비안은 아직 촉촉한 기운이 가시지 않은 별하의 정수리에 코를 붙이며 답했다.
“일찍 잠들면 돼. 내일은 해변으로 돌아가는 날이니까.”
“응, 그렇지…….”
“안 졸려?”
별하는 느른한 한숨을 불어냈다.
“졸려. 엄청. 근데 눈이 잘 안 감기네.”
“어째서?”
“글쎄.”
그는 자신도 모르겠다는 듯 읊조렸다.
“뭔가, 이미 꿈꾸고 있는 것 같다고 할까.”
“음?”
파비안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별하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별하는 밤하늘로 향한 눈을 내려 파비안을 돌아보았다.
“너랑 이러고 있는 게 새삼 믿기지 않아서.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이렇게 될 거라곤 전혀 생각지 못했었는데 말이야. 알파 중의 알파라고 생각했어. 부정적인 의미로.”
파비안의 입매가 어렴풋한 곡선을 그렸다.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는 듯 먼 곳을 향한 눈가에도 미소가 깃들었다.
“그랬지. 그땐 별하가 엄마 손 놓친 아이인 줄로만 알았었어.”
별하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나도 너 아빠랑 싸워서 홧김에 가출한 줄 알았잖아.”
“…….”
“…….”
곧장 눈길이 스쳤다.
“장난감 군번줄은 아니지, 별하?”
“에이, 설마. 진짜야, 진짜. 아, 나도 궁금한 거 있는데 그때 너 뭐 때문에 그렇게 삐친 거였어? 코도 좀 빨갛지 않았나?”
“음.”
“사람들이 못생겼다고 해서 울었어?”
“…….”
“…….”
동시에 웃음을 터트린 그들은 서로를 꼭 끌어안았다. 매끈한 나신들이 마찰하며 감겨드는 감촉이 몹시도 부드러웠다. 파비안의 허리에 팔을 둘러 품으로 파고든 별하는 전혀 웃음기 없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옆에 있어줘서 고마워. 파비안, 넌 내 영웅이야. 지금도,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야.”
거짓 없는 진심이었다. 별하는 그 어느 때보다 확신했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 어떤 인생을 살아오고 또 계획해 왔든, 지금은 파비안 블랙그레이라는 남자만이 삶의 전부였다. 이대로 계속 그와 함께하고 싶었다. 무슨 일이든 그와 나누고 싶었다. 설령 이곳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한다고 해도.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가족들에게는 미안하고 죄스러웠지만 솔직한 심정이었다.
파비안은 제게 폭 안겨 가슴에 뺨을 비비는 별하의 등을 가만히 쓸었다.
“별하 역시 내게 소중한 사람이야.”
“응…….”
“……”
그는 무슨 말인가 덧붙이고 싶은 듯했지만 더 나오는 말은 없었다. 생각에 잠겨 별하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다 가만히 말했다.
“내일은 조개 많이 먹여줄게. 기대해.”
별하는 작게 웃었다. 고개를 들어 파비안에게 키스를 하려는 그 때, 숲 쪽에서 부스스 작은 기척이 일었다. 별하와 파비안은 동시에 어둑한 수풀을 돌아보았다.
“방금 무슨 소리 안 들렸어?”
“들렸어.”
다시 나뭇잎이 부산하게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 뭐야?”
파비안은 그 정체를 확인한 듯 덤덤하게 말했다.
“작은 녀석이군. 무시해도 돼.”
밤을 좋아하는 작은 동물의 기척인 듯했다. 일순 긴장했던 별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밝은 곳으로 눈길을 거둬들였다. 모닥불 너머에 누운 두두를 잠깐 확인하고 원래 자리를 찾아 들어갔다.
파비안의 팔을 베고 누워 슬슬 잠을 청하려는데 다시금 근처에서 낯선 기척이 일었다. 별하는 불안한 듯 쉬이 눈을 감지 못하고 몸을 뒤척였다. 다정한 저음이 그의 등을 토닥였다.
“괜찮아. 내가 지켜볼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알려줄 테니 별하는 편안히 잠들어.”
별하는 눈가를 문질렀다. 피곤하다는 말로도 부족할 만큼 피로했다. 파비안과 처음 섹스를 했을 때만큼 후유증이 남지는 않았으나 갈수록 횟수가 증식해 체력이 남아나질 않았다.
한두 번으로는 도무지 부족해서 고환이 아플 정도로 하고 또 해댔다. 파비안이 그만두려고 해도 이쪽이 더 참지 못하고 상대의 정욕을 부추겼다. 하면 할수록 민감해진 육체는 미약에 중독된 것처럼 파비안의 모든 것을 갈구했다.
뜨겁고 강한 위력과 달콤한 페로몬, 젖은 숨결, 질척한 땀, 또 다른 세계로 이끄는 온갖 날 선 감각들까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극렬했던 흥분감이 문득 떠오른 별하는 몸을 뒤적였다. 아직 열감이 느껴지는 뒤쪽과 텅 빈 내벽이 욱신거렸다.
파비안은 그의 목덜미에 입술을 누르며 안쪽에서 풍기는 체향을 가만히 흡입했다. 들숨을 몇 번이나 깊게 들이켜고는 자장가를 불러주듯 고요히 말했다.
“그거 알아, 별하? 맡고 싶지 않은 것들뿐이라 언제나 불만이었었어.”
“…….”
“이제는 점점 더 좋아질 것 같아. 별하의 기분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는 페로몬 냄새.”
파비안의 속삭임에 별하는 작은 한숨을 쉬었다. 역시나 제 기분을 들킨 것이었다.
“뭔가 억울하달까, 아쉽달까. 나도 그런 능력이 있었으면 좋겠어. 네 미묘한 기분까지 알 수 있게.”
파비안은 바로 대답했다.
“숨 쉬고 눈 감는 것보다 쉬워. 이런 능력 따위 없어도.”
“어떻게?”
“나는 늘 별하를 생각하고 있으니까.”
091.
“…….”
“상상하는 그 이상으로 단조롭고 단순해. 너와 관계된 일에서만큼은 세상 누구보다.”
평범한 한국 남자들이라면 잘 알려주지 않을 속내를 파비안은 꾸미지 않고 솔직담백하게 표현했다. 이런 장소, 이런 시간이기에 들을 수 있는 말인지도 몰랐다.
별하 역시도 그랬다. 식인종들과 엮이기 전에, 이 신비의 섬에 발을 디디기 전에 이러한 단어의 조합을 알파에게서 들었다면 조금도 믿지 않았을 것이 틀림없었다. 단지 섹스를 하기 위한 진부하고 일차원적인 작업 멘트로 치부했으리라.
그러나 모든 난관을 함께 헤쳐온 지금은 그 의미가 전혀 달랐다. 본능에 집착하지 않는 알파의 진심을 오롯이 느끼고 있었다. 별하는 어쩐지 뺨이 간지러웠다. 겸연쩍은 기분이 들어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역시 탐나. 너의 그런 점도.”
“…….”
“아니. 탐난다기보다는 사랑스럽다고 해야겠지.”
파비안은 턱밑의 동그란 이마에 입술을 누르며 보송보송하게 마른 별하의 등허리를 쓸었다. 별하는 독백하듯 작게 읊조렸다.
“사랑스러워.”
파비안은 고개를 들어 나뭇가지 너머를 올려다보았다. 높다란 밤하늘을 수많은 별들이 밝히고 있었다. 어둑한 밀림을 밝히는 모닥불은 낮보다 더 강건하게 타올랐다. 제 운명을 거스르거나 포기하지 않고 온 힘을 다해 부딪히고 또 휩쓸렸다. 그것마저도 사랑스럽다는 듯이. 느릿하게 감겼다가 뜨이는 이색의 눈동자가 어느 때보다 반짝거렸다.
그는 제 품에 안긴 이의 어깨를 꽉 끌어안았다. 처음부터 한 몸이었던 것처럼 보드랍게 얽혀드는 피부 감촉이 못내 감미로웠다. 굳게 닫힌 그의 입술 사이로 나직한 저음이 흘러나왔다.
“영광이군. 별하에게 사랑받을 수 있다니.”
별하는 말이 없었다. 대신 느른한 숨소리가 그의 목덜미를 스쳤다. 맞닿은 가슴이 규칙적으로 오르내렸다. 파비안은 금방 잠이 든 별하의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한숨처럼 짧게 웃었다.
“어서 날이 밝아오기를.”
아직 다 못한 말을 네게 전할 수 있도록.
팔이 떨어진 다음 날 바로 생고기를 씹을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오늘은 훨씬 더 예후가 좋았다. 두두의 퀭하던 두 눈에는 총기가 깃들었고 사색이던 얼굴에는 불그스름하게 혈색이 돌아와 있었다. 취향을 생각해 생고기를 건네주자 직접 불에 구워 먹기까지 했다.
별하는 두두와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 앉아 엊저녁 남겨놓은 음식을 먹었다. 어떤 대화나 눈길도 나누지는 않았지만 절로 그의 눈치를 살피게 되는 지금의 상황에 적잖이 불편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두두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파비안과 알몸으로 포옹한 채 긴 밤을 보내고 막 진한 아침 키스를 나눌 때였다.
두두는 그 행위의 의미에 대해 알지 못하는 듯했으나 애정표현의 일환인 것만은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다. 후로 이쪽으로는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근처의 새들만이 떠드는 아침 식사는 길지 않았다. 승패가 나뉜 게임을 완전히 끝내려면 어서 움직여야 했다. 두두 역시 그리 생각하는 건지 식사를 끝내자마자 지체하지 않고 앞장서 길을 나섰다. 별하는 그가 어제처럼 무리해 정신을 잃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말릴 처지가 아니었다. 말린다고 포기할 녀석도 아니었다.
파비안은 날이 무뎌진 돌칼을 허리에 차며 눈길을 보내 왔다. 걸을 수 있겠냐는 뜻이었다. 별하는 늑대 발톱과 이빨을 어깨에 두르며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이게 거의 다 왔잖아.”
어제의 섹스로 뒤와 허리가 약간 당기긴 했으나 밤새 숙면을 취해서인지 컨디션이 나쁘지 않았다.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허기와 갈증도 전혀 없었고 날씨 역시 쾌청해 몸이 가벼웠다. 무엇보다 고지가 눈앞에 보여 피로감을 느낄 새가 없었다.
“꾸물거리다 두두 녀석 놓치겠다. 이만 가자.”
하룻밤 묵었던 자리를 정리하고 파비안을 뒤따르는데, 문득 근처 수풀이 들썩거리는 듯한 소리가 별하의 귓전에 닿았다. 그는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꺼진 모닥불에서 잿빛 실타래가 피어오를 뿐 동쪽 해가 비치는 강가는 고요했다. 아나콘다나 검은 식인종들, 알파 늑대 같은 건 전혀 보이지 않았다.
“…….”
그럼에도 왠지 모르게 불안한 기운을 느낀 별하는 그곳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앞서 걷던 파비안이 따라오지 않는 이를 돌아보았다.
“왜 그래?”
별하는 그제야 뒤로 향해 있던 시선을 거둬들였다.
“무슨 소리가 났던 거 같은데, 잘못 들었나 봐.”
파비안은 별말 없이 이만 움직이자는 눈길을 건네어 왔다. 그가 위험을 감지하지 못했다면 실제로 위협이 될 만한 건 없다고 생각한 별하는 쓸데없는 걱정들은 뒤로하고 다시 길을 재촉했다.
이끼에 덮인 평평한 지면은 위에서보다 걷기가 수월했다. 밀림의 밀도가 강력해질수록 높은 습도와 자잘한 벌레들, 억센 덩굴이 피부를 괴롭히는 것을 제외하고는.
높은 고도에서와는 다르게 자잘한 맹수들의 습격을 조심해야 했지만 거대한 존재를 경험한 후로는 크게 위협을 느끼지는 못했다. 토끼나 두더지 같은, 작은 동물들과 다름없는 미물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별하뿐만 아니라 파비안이나 이곳 원주민인 두두에게도 똑같이 적용되고 있었다.
별하는 사위의 밀림을 빙 돌아보았다. 살육의 현장, 그 자체이던 곳이 이제는 어린 시절의 놀이터처럼 익숙하게 느껴졌다. 목숨을 걸었던 서바이벌이 끝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곳이기도 했다. 한시라도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전적인데 이상하게 아쉬운 기분도 들었다.
그는 묘한 감상에 젖어 옆에서 걷는 이를 돌아보았다. 생각에 잠겨 있던 파비안이 저를 향한 시선을 깨닫고 눈길을 맞댔다.
“왜 그러지, 별하?”
반듯한 얼굴에 금방 엷은 미소가 깃들었다. 불쑥 어젯밤이 떠오른 별하는 괜스레 겸연쩍은 기분이 들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싱그러운 녹음의 풍경은 똑같은 장면처럼 계속해 이어졌다. 간혹 눈에 띄는 과일나무의 열매로 갈증을 해결하기도 하고, 초식동물 무리와 맞닥뜨려 눈싸움을 하기도 했다. 멀리 앞장서 걷던 두두가 후미로 뒤처질 때는 나무 그늘에서 잠시 쉬어가기도 했다.
장대한 교목들이 하늘을 뒤덮은 지대에 다다랐을 때쯤, 나뭇잎들이 일시에 흩날릴 만큼 강한 바람이 불어 들었다. 대양을 가로지르는 해풍 같았다. 별하는 시원한 바람에 눅은 땀을 훔쳤다.
“얼마나 더 가야 하는 거지?”
꽤나 걸은 것 같은데도 끝이 보이지가 않았다. 파비안은 대답이 없었다. 그는 걸음을 우뚝 멈추고 전방의 녹음을 지긋이 응시하고 있었다. 안광이 빛나는 얼굴에는 희미한 표정도 비치지 않았다.
“……?”
별하가 파비안을 따라 한 지점을 돌아보는 순간 숨을 훅 들이켰다. 녹음의 진한 그늘 속에 뭔가가 서 있었다. 새카만 머리통과 길쭉한 팔다리, 오직 새카만 전신의 정체는 그것이었다. 검은 인영.
검은 인영은 하나가 아니었다. 근처의 새카만 그늘 속에 검은 인영들이 십수 명이나 숨어 있었다. 결승점이 바로 코앞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나뭇가지처럼 미동 없이 서 있던 검은 인영들은 이쪽을 발견하자마자 재빠르게 움직여 주변을 에워쌌다. 흡사 거대한 바퀴벌레 떼를 보는 것 같았다.
파비안은 느직이 돌칼을 꺼내 들었다. 검은 인영들을 당장이라도 찢어발길 의지가 한가득이었다. 별하 역시 발밑에서 기다란 나무막대기를 주워 손에 들었다.
이전에는 검은 인영들의 그림자만으로도 움츠러들었지만 지금은 그날들과 달랐다.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이들에게 맞아 죽거나, 맛있는 저녁거리가 되거나, 그보다 더한 고초를 겪는다고 해도 마음의 변화가 없었다. 끝까지 맞서 싸워야 한다는 일념이 전부였다.
검은 인영들은 난폭한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며 날을 세우고 있었다. 별하가 숲으로 들어가기 전보다 상당히 예민해진 모습이었다. 별하를 놓친 것에 대해 질타를 받은 건지도 몰랐다.
그들은 눈앞의 이들을 산채로 뜯어먹으려는 듯 어슬렁어슬렁거리를 좁혀 왔다. 팔을 뻗으면 닿을 거리까지 가까워진 그 때, 앞쪽에서 거친 육성이 울렸다.
“두! 두!”
두두가 위협적으로 목청을 돋웠다. 그러자 검은 인영들의 이목이 단번에 그곳으로 향했다. 아연한 얼굴을 한 이들에게 다시 한번 지시가 내려왔다.
“두! 두! 두!”
검은 인영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이내 멀찍이 물러났다. 두두는 별하와 파비안에게 묵묵한 눈길을 힐긋 보내고는 뒤돌아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늘로 숨어든 이들은 모습을 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만 않을 뿐 주변을 떠나지도 않았다. 그들의 비릿한 체취가 온 사방에서 풍겨왔다. 별하는 굳게 움켜쥔 것을 천천히 다리 옆으로 내려놓았다.
“이제 거의 다 왔어.”
파비안은 고개를 까딱이며 말했다.
“발톱 잘 챙겨, 별하.”
“응.”
별하는 어깨에 멘 것을 재차 확인했다. 해변으로 돌아갈 수 있는 열쇠는 무사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검은 인영들의 귀환 인사를 받으며 목적지로 향해 가는 길은 짧은 듯 길었다. 좋은 점이라면 원주민들이 오랜 시간 차곡차곡 밟아놓은 길이 무척 편하다는 것이었다.
맹그로브가 번성한 백색의 강을 따라 걷는 중이었다. 반걸음 뒤에서 걷던 파비안이 불현듯 앞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별하.”
별하는 늑대 발톱과 이빨을 품에 꼭 안은 채로 대답했다.
“응?”
“……락해 주겠어……?”
커다란 바위를 비켜 흐르는 물소리에 질문을 똑바로 듣지 못한 별하는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미안, 물소리 때문에 못 들었어. 방금 뭐라고 했어?”
곧장 대답하지 않는 파비안의 아름다운 얼굴에 언뜻 불안한 기색이 엿보였다. 그는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눈을 내리깔았다.
“해변으로 돌아가면.”
“응.”
“…….”
“해변으로 돌아가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