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트로피컬 아일랜드 (21)화 (21/49)
  • “너……. 으, 흐읏, 들었지……?”

    파비안은 여전한 위력으로 돌진해 들며 제 허리질에 맞춰 흔들리는 별하와 눈을 맞댔다. 무엇을? 별하는 제 안에서 불쑥 치솟는 위세에 허리를 접으며 신음을 억눌렀다. 목구멍을 할퀴듯 빠져나가는 날숨을 억지로 눌러 삼킨 후에 입술을 달싹였다.

    “진심이라고 했, 읏……. 으읏, 던 거…….”

    “……?”

    파비안은 예리하게 날이 선 오드아이를 빛내면서도 허리 짓을 멈추지 않았다. 별하는 그를 일절 거부하거나 물리치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대로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리하면서도 조금은 원망이 실린 목소리로 나직이 물었다.

    “내가 좋, 읏, 아한다고 말한 거 듣고, 흐읏……. 이렇게 막 하는 거지?”

    파비안이 허리 짓을 우뚝 멈췄다. 어떤 충격적인 소식을 들은 것처럼 눈길을 마주 댔지만 별하는 제게 꾹 틀어박혀 움직임이 전혀 없는 페니스를 어리둥절하게 내려다보았다.

    “……?”

    “…….”

    말을 잃은 눈길들이 교차했다. 별하는 엉덩이를 훤히 드러내고 허공에 뜬 채로 눈썹을 찌푸렸다.

    “……진심이라고는 했지만 멈추라고는 안 했는데.”

    파비안은 흐트러진 한숨을 길게 불어내며 겸연쩍은 듯 눈길을 내리깔았다. 그대로 상체를 숙여 저에게 힘겹게 매달린 별하를 부드러운 이끼 위에 눕혔다. 달려드는 위력을 버티느라 바들바들 떨리는 팔과 허벅지 안쪽이 발갛게 부어오른 다리를 살살 주무르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리 느꼈다면 미안하다. 내 잘못이야.”

    “…….”

    “최선을 다했을 뿐인데.”

    “……그보다.”

    “좀 더 분발하도록 하지. 막 하는 느낌이 없도록.”

    “아니, 지금 그보다.”

    “진심이라고 했던 네 말에 대해서는―”

    별하는 정색하며 파비안의 탄탄한 허리를 붙잡아 제게로 끌어당겼다. 접합된 곳이 깊숙하게 맞물려 목 안에서 달뜬 신음이 일었다. 그는 작게 혀를 차며 조금은 성마르게 말했다.

    “사과든 잡담이든 뭐든 나중에 얼마든지 해도 되니까, 일단 움직여. 바보 같은 파비안…….”

    파비안은 부드럽게 허리를 밀어 올려 제 페니스와 한 몸처럼 밀착한 내벽을 지긋이 열고 들어갔다. 벌린 다리를 더 넓게 벌리며 저를 자극하는 별하의 몸 위를 뒤덮어 잠깐 수그러들었던 허리 짓을 재개했다. 철퍽철퍽― 젖은 살들이 힘차게 맞부딪치는 소리가 수풀 주변을 맴돌았다.

    “흐읏, 읏! 앗, 으읏…….”

    “하아, 별하…….”

    퍽퍽퍽― 점점 거세지는 위력에 아래 깔린 엉덩이가 찌부러질 듯했다. 별하는 다급히 헐떡이며 그를 저지했다.

    “파, 파비안. 조금만, 너무 빨라…….”

    파비안은 하반신에 들어간 힘을 풀어내고 느릿하게 허리 짓을 했다. 제 그림자에 갇혀 달콤한 숨결을 흘리는 이를 내려다보며 그의 젖은 몸을 찬찬히 애무해 나갔다. 눅은 혀로 땀방울이 맺혀 번들거리는 피부 구석구석을 쓸다가 원하는 자리에 원하는 만큼의 불그스름한 흔적을 만들어나갔다.

    작게 튀어나온 목울대와 솜털이 하늘거리는 귀밑을 핥다가 예고 없이 허리를 강하게 쳐올리자 미끈하게 뻗은 쇄골 안쪽이 옴폭 파였다. 뼈가 도드라진 어깨와 체모가 거의 나지 않은 겨드랑이, 판판한 가슴 위에 꼿꼿하게 고개를 쳐든 젖꼭지를 정성스럽게 빨았다.

    “으응…….”

    젖은 점막으로 곤두선 살덩이를 빨아들일 때마다 별하의 복부가 바들바들 떨렸다. 양쪽으로 번갈아가며 계속되는 자극을 견디다 못해 팔을 들어 거부했다.

    파비안은 별하의 양팔을 붙잡고 일부러 소리를 내 젖꼭지를 핥고 또 빨았다. 별하는 손끝에 닿는 풀을 움켜잡으며 육체의 안팎을 넘나드는 원색적인 쾌감에 신음했다.

    흥분할수록 열기둥를 감싼 내벽의 압박감도 강해졌다. 파비안은 허리에 힘을 실어 뜨겁게 죄어드는 안쪽을 찔러 올렸다.

    “흐읏……. 읏, 파비……안…….”

    사정감을 느낀 별하가 몸을 가만두지 못하고 긴박하게 비트는 찰나 파비안 역시 번득 덮쳐 든 사정감을 더 견디지 못하고 허리를 물려 페니스를 쑤욱 꺼냈다. 굵다랗게 부푼 귀두가 구멍을 헤집듯 열어젖혀 간신히 빠져나오자마자 간발의 차로 정액이 튀어 나갔다.

    “흐음.”

    “아으읏…….”

    별하도 곧바로 뒤를 우므러뜨리며 정액을 흘렸다.

    “하아, 으응……. 하아…….”

    “하아…….”

    큰 몸짓 없이 하느작거리며 늘어지는 별하를 내려다보던 파비안이 그의 말랑한 페니스를 입에 넣어 빨았다. 단맛밖에 느껴지지 않는 기둥을 한 입에 머금어 요도에 남은 정액까지 깨끗이 흡입해 목으로 넘겼다.

    “읏.”

    자극을 받은 페니스가 금방 빳빳해졌다. 파비안은 제 정액으로 뒤덮인 별하의 엉덩이 사이를 귀두로 문지르다 느직하게 안을 갈랐다. 그렇게 몸을 맞대고도 벌어지는 아픔을 느낀 별하는 이를 물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먼 나뭇가지 위에 앉아 이쪽을 응시하고 있는 생물체와 정통으로 눈이 마주쳤다.

    “자, 잠깐, 파비안. 잠시만 저기, 저곳―”

    파비안이 거칠게 들이닥치기 전에 어서 그를 저지했다. 흥분한 파비안은 별하의 눅진한 목덜미를 이로 잘근거리며 그대로 내벽을 찔러 들었다.

    “흐아읏……. 파……비안, 저기 새…….”

    “하아…….”

    파비안은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지금의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듯, 할딱거리는 별하의 목덜미만 빨았다.

    “쟤 저기서 보고 있다고, 파비안…….”

    “…….”

    “잠시만 멈춰. 잠시, 저 앵무새 이상한 말 따라, 읏, 흐읏, 따라 한단 말이야…….”

    별하가 전혀 집중하지 못하자 파비안은 주변의 파초와 푸새를 수북하게 한 움큼 움켜잡아 내려 위를 덮었다. 순식간에 밀폐되듯 좁혀진 공간에 진한 음영이 드리웠다.

    그는 당황한 별하를 제 아래에 단단히 묶어 가두고서 안쪽을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번득이는 통증에 신음하는 별하의 귓바퀴를 빨았다. 땀방울이 흐르는 귀 뒤에서부터 귀 아래, 귓구멍까지 질척하게 애무하며 더없이 달콤한 저음으로 속삭였다.

    “괜찮아, 별하. 금방 다시 기분 좋아질 거야.”

    그와 함께 미치도록 향긋하고 단 페로몬이 점막으로 녹아들어 강렬한 흥분감을 일으켰다. 별하는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쫓기듯 그의 어깨에 팔을 둘러 몸을 활짝 열었다. 새빨간 불덩이를 머금은 열기둥이 기꺼이 안을 꿰뚫었다.

    “―!!”

    별하는 손쓸 수 없이 강대한 열기에 휩쓸려 또 한 번의 환상 같은 절정을 맞이했다.

    04. Driven By

    석양의 거스름이 날아든 수풀 안은 거의 암흑이었다. 상대의 숨결과 체온으로 위치를 파악할 수 있을 뿐이었다.

    등을 짓누르며 세차게 뒤를 갈라 드는 흉기에 별하는 입술을 깨물고 식은땀만 흘렸다. 무릎을 굽히고 엎드린 채 짐승처럼 흥분한 파비안의 정욕이 어서 다하기만을 빌고 빌었다.

    시간이 갈수록 더 굳건해지는 페니스가 발갛게 부어오른 구멍을 쉴 새 없이 들락거렸다. 안쪽을 한가득 점령했다가 살짝 빠져나갈 때마다 희뿌옇게 뒤섞인 체액이 고환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파비안의 유연한 허리 짓에 배출하지도 않고 오르가즘을 느낀 별하는 온몸을 파들파들 떨었다.

    파비안이 별하를 제 가슴으로 누르며 막바지 삽입에 힘을 쏟았다. 내벽을 관통한 후 쑥 빠져나가자마자 정액을 쏟아냈다. 환한 대낮부터 내내 시달렸던 별하는 그대로 허물어졌다. 젖은 눈을 감은 채로 곧 죽을 듯이 숨만 할딱거렸다.

    파비안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별하의 상태부터 살폈다. 언뜻 걱정하는 듯 보였지만 별하는 이제 속지 않았다. 저러다 또 달려들 게 불 보듯 뻔했다.

    051.

    “벌써 밤이야. 하아…….”

    “…….”

    “아무것도 안 보여. 더 어두워지기 전에 잘 곳부터 찾아야 하는데…….”

    “아직 괜찮아.”

    챠르륵―

    그 때 지포라이터의 부싯돌 소리와 함께 자그만 불씨가 진한 그늘 속에서 반득 켜졌다. 음영이 선명하게 드리운 얼굴과 그 주변이 그늘 밖으로 어슴푸레하게 나타났다. 말이 없는 그의 페니스는 처음보다 더욱 강렬한 의지를 내보이고 있었지만 별하에게 이 이상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바닥에서 뒹구는 나뭇가지에 불씨를 옮겨붙인 파비안은 그것으로 밀려드는 어둠을 멀찌감치 물렸다. 그는 여전히 맥을 못 추고 웅크린 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별하가 눈길을 일절 맞추지 않자 그제야 이목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파비안은 주변에서 보드라운 나뭇잎들을 뜯어내 별하의 다리 사이를 닦았다. 제 정액으로 흥건한 회음부와 엉덩이 사이, 젖은 음모와 복부까지 최대한 말끔하게 닦아냈다. 별하는 그가 마음을 바꾸기 전에 억지로 일어나 수풀 위에 매달려 있는 팬티를 서둘러 꿰어 입었다. 청바지와 티셔츠, 남방을 서둘러 걸치며 아무렇지 않은 듯 옆쪽에 물었다.

    “그나저나 이틀 동안 어디서 잤어? 어제 비도 많이 왔었잖아.”

    그사이 금방 하의를 입은 파비안은 버클을 잠그지도 않고 별하의 착복을 도왔다. 안쪽으로 말려들어 간 체크무늬 남방의 깃을 밖으로 꺼내 반듯하게 접어주고 단추를 적당히 채워주었다.

    “화산과 근접한 장소라 굴이 제법 나 있더군. 넌 어디서 지낸 거지?”

    별하는 파비안의 불룩한 바지 앞을 애써 못 본 척하며 헝클어진 제 머리칼을 손으로 쓱쓱 빗었다. 고개를 들어 어둑한 주변을 살폈다.

    “해지기 전까지 저기 있었는데.”

    “음?”

    “관음증 앵무새.”

    파비안은 곧장 어딘가로 턱짓했다. 그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바로 머리맡 나뭇가지에 작은 생물체가 앉아 있었다. 언제부터 그 자리에 있었는지 앵무새는 제법 깨끗해진 날개를 뽐내며 단잠에 빠져 있었다. 별하는 작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어제 우연히 쟤랑 만났거든. 용케 나무 구덩이 같은 데를 찾아내더라고. 되게 넓고 깨끗해서 거기서 잤어. 운 좋게도 말이야.”

    파비안은 셔츠 단추를 대충 잠그고 불이 붙은 나뭇가지를 들었다. 횃불만큼 밝진 않았지만 암흑뿐인 밀림 속에서 이 정도의 밝기도 소중하고 귀했다. 그는 얕은 생각에 잠긴 듯하다가 되물어왔다.

    “그곳에서는 언제 탈출한 거야?”

    별하는 빈 주먹을 그러쥐었다. 어제 아침 저에게 기습을 당해 기절한 베타 원주민의 목 두께가 문득 손 안에서 느껴졌다. 죽지는 않았을 테지만 사람에게 살의가 깃든 위해를 가했다는 사실에 새삼 두려움을 느꼈다. 그 대상이 말 안 통하는 식인종이라 할지라도 도덕심이 가벼워진다거나 그러진 않았다.

    별하는 짧다면 짧은 인생에서 누군가를 해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어렸을 적 불우한 가정환경 때문에 같은 오메가들에게 따돌림을 당했을 때도, 인간관계보다도 오직 공부나 제 할 일에만 몰두하는 그를 시기하며 괴롭히던 몇몇의 동급생에게도, 오메가라면 누구나 흔히 경험이 있는 추행을 당했을 때도 위력을 행사하지 않았었다.

    모든 사건의 시작이 되는 배낭여행의 궁극적인 목적 또한 그런 성격을 타파해 사람들과 원만하게 교류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목숨을 방어하고 살아남기 위한 행동이었지만 별하는 여러모로 씁쓸한 기분을 느꼈다. 그는 수풀 구석에서 찾아낸 창을 슬쩍 내보이며 말했다.

    “어제 오전에. 보초 서는 녀석이 하나만 남아 있을 때.”

    “음.”

    “죽이진 않았어.”

    파비안은 당시의 상황이 눈에 훤히 그려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현명한 선택이었어. 별하. 마땅히 할 일이었으니 자책하지 마.”

    별하는 어렴풋이 입매를 끌어올렸다. 그 때 인기척을 듣고 잠에서 깬 앵무새가 푸드덕푸드덕 날개짓을 했다. 기다렸다는 듯 날아와서는 별하의 어깨에 걸터앉았다. 작은데도 묵직한 무게감이 어깨에서 느껴졌다. 신기한 듯 쳐다보는 파비안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얘 짝이 뱀한테 죽었어. 남 일 같지가 않아서 다친 거 도와줬더니 집에도 안 가고 계속 이러네.”

    “…….”

    “언제 만났었던 거야?”

    별하의 티셔츠 밑단에서 눈을 뗀 파비안이 칠흑같이 캄캄하고도 고요한 밀림을 빙 둘러보았다. 그가 앞장서서 먼저 길을 헤쳐나가며 답했다.

    “나무에 앉아서 깃털 정리를 하고 있더군. 익숙한 체취가 느껴져서 잡아먹으려다 말았어.”

    별하의 어깨에 얌전히 앉아 있던 앵무새가 대뜸 목소리를 높였다. 빠비! 안―! 빠비―안―! 별하는 한쪽 귀를 막으며 조용히 하라는 눈치를 보냈다. 그를 알아먹을 리 없는 생물체는 돌연 어깨에서 떨어져 어둠 속으로 날아갔다.

    “어디 가는 거지?”

    파비안은 약간의 심려가 깃든 기색으로 서둘러 이동했다.

    “뭔가와 마주친 적은 없지만, 이곳에 어떤 개체들이 서식하고 있는지 아직 아무것도 몰라. 특히 야간에는 조심히 움직여야 해. 좋지 않은 무언가의 눈에 띄지 않도록.”

    별하는 앵무새가 사라진 어둠을 돌아보며 걱정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다시 오면 혼내야겠네.”

    제 어깨 너머를 돌아보는 파비안과 눈길이 마주친 그 때였다. 삐삐삑― 삐삐이삑― 어둠 속에서 새 울음소리가 울렸다.

    “―?!”

    “……?”

    그리 크지 않은 소리가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왔다.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익숙한 높낮이의 새소리였다. 난데없이 사라진 앵무새임을 눈치챈 별하는 곧장 스치는 생각에 파비안을 붙잡았다.

    “쟤 왜 저러는지 알아.”

    파비안은 더없이 의심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사이 새소리는 금방 끊어졌다. 앵무새도 제 스스로 생각하기에 어둠이 내려앉은 밤중에 소리를 내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깨달은 듯 더 신호를 보내오지 않았다. 별하는 소리가 난 곳으로 발길을 돌리며 파비안에게 눈짓했다.

    괜찮으니까 이쪽으로.

    별하와 파비안이 소리가 난 곳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기다리다 못한 앵무새가 어둠 속에서 날아오다 별하를 발견하고는 다시 제가 날아온 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삐익― 앵무새의 짧은 외침이 들려오는 곳에는 작은 강이 흐르고 있었다.

    “아…….”

    백색 강의 상류인 듯했다.

    어제 그렇게 비바람이 몰아쳤는데도 좁다란 강물은 바닷물처럼 투명했다. 언뜻 수심이 깊어 보이진 않았지만 인근의 풀숲이 몹시 시커멨다. 강물을 따라 밤하늘이 뜨문뜨문 내다보였는데 먹구름이 지나간 후라 아득한 별들까지 또렷했다. 밤하늘이 한낮의 모래알처럼 몹시 반짝거렸다. 별들이 자리한 어디를 봐도 온통 별천지였다.

    제 취향인 듯, 엄청난 두께의 나무 위에 앉은 앵무새가 날개를 푸닥거리며 별하를 재촉했다.

    “알았어. 소리만 내지 마.”

    파비안이 별하의 앞을 막아서며 물었다.

    “저 녀석 뭔 짓을 하려는 거지?”

    “아, 쉴 곳.”

    “쉴 곳?”

    “어제 나무 구덩이 찾아냈다고 했잖아. 또 찾았나 봐. 안전하게 쉴 수 있을 만한 곳.”

    파비안은 그게 가능한가, 하는 얼굴로 나무 위의 앵무새에게 눈길을 던졌다. 위기에서 저를 구해준 은인의 존재를 제대로 인식하고 있고, 미묘하게 소통이 가능하며, 타의든 자의든 저에게 별하의 위치를 안내한 전력까지 미루어봤을 때, 앵무새는 확실히 영물이었다.

    머리가 비상한 작은 새에게 그제야 경계심을 누그러뜨린 파비안은 옆으로 비켜섰다. 별하는 앵무새에게로 향하며 걱정하지 말라는 눈길을 보냈다.

    “감이 꽤 좋은 녀석이야. 너 찾아낸 걸 보면.”

    “…….”

    파비안은 제 손에 든 것을 건넸다. 괜찮다는 이에게 억지로 쥐여주고는 이내 근방을 살폈다. 위험한 흔적이나 신호는 없는지 자리를 잡기 전에 확인하려는 것 같았다. 별하는 불붙은 나뭇가지를 들고 앵무새에게로 다가갔다. 새파란 꽁지깃을 흔들며 뒤편의 나무기둥으로 사라지는 녀석을 보며 확신했다. 나무 구덩이다.

    별하는 나뭇가지와 창을 근처 흙바닥에 박아 넣고 강가와 수풀 여기저기로 뻗은 나무줄기를 탔다. 다른 사람의 몸을 잠시 빌려서 쓰는 것처럼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이를 물고 움직였다. 두들겨 맞은 듯 뻐근한 허리를 곧추세워 두어 번 번뜩 뛰어오르자 앵무새의 꽁지깃이 보였다.

    그가 다가온 것을 확인한 앵무새는 푸드드 날갯짓을 하며 나무 구덩이의 그늘 속으로 쏙 들어갔다. 별하 역시 전날 머물렀던 그곳과 비슷하게 생긴 그곳으로 들어가려 머리부터 들이밀었다. 그 순간 쿵! 코끝이 채 들어가기도 전에 정수리가 단단한 뭔가에 부딪혔다.

    “윽.”

    깜짝 놀라 옆으로 비켜난 앵무새가 삐삐거렸다. 별하는 생각지도 못한 충격이 이는 정수리를 문지르며 깜깜한 앞을 내다보았다.

    “뭐, 뭐야?”

    손을 뻗어 보이지 않는 앞을 더듬었다. 전과 같은 깊이의 구덩이인 줄로만 알았으나 훨씬 얕은 구덩이였다. 구덩이라고 하기도 뭐한, 정말 새 한두 마리나 겨우 비를 피할 수 있을 만한 깊이였다.

    “…….”

    뒤로 물러난 별하는 제 정수리를 가만히 눌렀다. 안쪽에서 앵무새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왜 들어오지 않느냐는 듯 쳐다보는 생물에게 말했다.

    “내 덩치를 봐. 못 들어가.”

    앵무새는 고개를 좌우로 갸웃거리다, 곧 네 마음대로 하라는 듯 저 혼자 다시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별하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나무에서 내려왔다. 지면에 발을 딛는 순간 뒤꿈치에서부터 엉덩이와 등허리, 뒷목까지 통증이 일었다. 마치 고압 전류가 관통하는 느낌이었다.

    육체의 통증도 통증이었지만 그의 관심을 단번에 잡아끈 것은 모닥불이었다. 작은 불씨가 어느새 자라나 나무 아래에서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언제 피운 거야? 미리 말해 줬으면 같이 주웠을 텐데.”

    마른 나무토막들이 푸르스름한 불길에 야금야금 먹혀 들고 있었다. 커다란 나무를 등 뒤에 두고 모닥불 앞에 앉은 파비안은 원주민들의 창을 들여다보다, 근처에 앉는 별하를 돌아보며 덤덤히 물었다.

    “그 녀석이 원하는 건? 찾았나?”

    별하는 멀쩡한 척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지만 저절로 일그러지는 눈썹까지 가리지는 못했다. 때마침 파비안과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게 자기 집 자랑이더라고.”

    “집 자랑?”

    “응. 난 머리도 안 들어가. 저보다 몇 배로 큰데 가능할 거라 생각했나 봐.”

    파비안은 무슨 상황이었는지 금방 이해한 듯 다시 창을 내려다보았다

    052.

    “공간 지각은 조금 부족할지 몰라도, 별하 너를 둥지로 데려간다는 게 놀라워.”

    “그건 그래. 앵무새가 까치랑 비슷하게 지능이 높다던데 사실이었어.”

    “어쩌면 신뢰감이 한몫했을 가능성도 있어.”

    별하는 뒤가 불편해 몸을 뒤척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그럴 가능성은 있었다. 짝을 잃어버리고 다리를 다친 데에는 애도하는 바였지만 그로 인해 저에게 맹목적인 신뢰감과 동시에 묘한 애착을 느끼는 것을 진즉부터 느끼고 있었다. 반가워하며 이대로 함께해야 하는 건지, 인간의 손에 길들여지지 않도록 밀림으로 돌려보내야 하는 건지 문득 고민스러웠다.

    타닥타닥― 고요히 흐르는 강물소리 사이로 모닥불이 힘차게 타오르는 소리가 끼어들었다. 수풀 안쪽에서 들려오는 귀뚜라미 소리를 들으며 생각에 잠겨 있던 별하는 문득 하품을 했다. 조용한 옆자리를 돌아보자 파비안은 창과 돌칼을 번갈아 들여다보며 예리한 날을 손보고 있었다.

    “그거 알아?”

    별하의 담담한 물음에 파비안이 고개를 들었다.

    “무엇을?”

    “지금 거기 축제 벌이고 있어. 네가 출발한 후부터.”

    파비안은 놀랍지도 않다는 듯 답했다.

    “그럴 테지. 아마 승리의 토템을 가지고 돌아갈 때까지 계속될지도.”

    별하는 한쪽 무릎을 세워 앉으며 전적으로 수긍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러고도 불편한지 반대편으로 몸을 기울이며 나직이 덧붙였다.

    “만약에 두두 새끼, 그 하이 알파가 말이야.”

    “두두……?”

    “하이 알파가 본인 이름이 두두라고 하더라. 두두.”

    파비안은 전혀 관심이 없는 듯 무심하게 답했다.

    “멋지군. 두두.”

    별하는 흐릿하게 웃었다가 금방 걱정과 두려움에 물든 낯으로 물었다.

    “만약에 그 두두 놈이 발톱인지 뭔지를 가지고 먼저 돌아가게 되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걸까?”

    “…….”

    파비안은 잠시 말이 없었다. 바로 떠오른 장면은 있었지만 옆 사람의 기분을 생각해서 최대한 순화해 말했다.

    “글쎄. 어느 정도 각오해야 하지 않을까.”

    별하는 긴 한숨을 내쉬며 허리를 곧게 세웠다.

    “어느 정도란 건 목숨인 건가……?”

    파비안이 그를 돌아보았다. 편히 세운 무릎을 내려 양반다리로 바꾸고는 불쑥 손을 내밀었다.

    “……?”

    어리둥절하게 쳐다보는 별하에게 상냥한 저음을 건넸다.

    “자리가 불편하면 여기에라도.”

    제 양반다리 위에 앉으라는 뜻이었다. 순간 별하는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고심했다.

    흙바닥은 엉덩이가 배겨 불편했다. 무성한 풀숲은 독충과 독사의 위험으로 근처에도 얼씬할 수 없었다. 크고 작은 나무줄기는 완벽한 원형이라 발을 딛는 정도밖에 되지 못했고, 앵무새가 찾아낸 나무 구덩이는 거짓을 조금 보태 옹이 수준이었다.

    파비안의 체형은 완전한 근육질이라 생각만큼 그리 편하지만은 않았지만 따뜻한 체온과 감미로운 체향 때문에 다른 선택지에는 눈길도 가지 않을 정도로 더없이 유혹적이었다.

    “…….”

    별하는 멀거니 눈을 끔뻑이며 새빨갛게 타오르는 모닥불을 응시했다. 그런 마음을 숨기느라 괜히 어두컴컴한 주변 숲을 두리번거리거나 발에 묻은 흙을 툭툭 털어냈다. 파비안은 고민하는 마음을 일절 드러내지 않으려는 별하의 시야에 잡히도록 손을 길게 뻗었다.

    “여기로, 별하.”

    “…….”

    별하는 입술 안쪽을 잘근잘근 곱씹었다. 물론 돌발적인 발정기를 함께하고 수없이 살을 나누며 진한 관계를 맺었지만 멀쩡한 정신으로 갑자기 밀착하기도 어쩐지 겸연쩍었다. 제 마음을 이제 알 만큼 알고 있을지라도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파비안은 어르듯이 그의 이름을 혀 위에서 부드럽게 굴렸다.

    “별하.”

    “읏.”

    별하는 더 참기 힘든 듯 파비안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상대가 당기는 대로 끌려가 단단한 양반다리 위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파비안이 만들어준 의자는 상상한 것보다 훨씬 더 안락하고 따뜻했다. 방금 전까지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지 더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지금 당장은 이 안락감만 즐기고 싶을 정도로 편안했다.

    별하는 뻐근한 등을 파비안의 가슴팍에 기대며 느른한 한숨을 불어냈다. 파비안이 고개를 기울여 별하의 뺨에 가벼운 입맞춤을 전했다.

    “편하게 기대. 얼마든지 있어도 되니까.”

    상냥한 속삭임이 앞사람의 보송보송한 귀밑 솜털을 스쳤다.

    “…….”

    별하는 몸에 바짝 들어간 힘을 천천히 풀어내며 파비안에게 완전히 의지했다. 근처 수풀에서 나는 벌레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일렁이는 모닥불을 가만히 응시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심신의 안정이 찾아들자 곧 졸음이 쏟아졌다. 머리가 무거워지고 눈꺼풀이 저절로 내려갈 만큼 피로했지만 어쩐지 이대로 잠들기가 아쉬웠다. 이런 평온한 시간이 또 언제 올는지, 내일은 또 어떤 하루가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을는지……. 이 시간을 좀 더 누리고 싶었다.

    그럼에도 별하는 이미 한밤중인 앵무새처럼 무거운 고개를 똑바로 가누지 못하고 파비안의 어깨에 기댔다. 서서히 눈을 내리감는 그의 귓가에 자장가처럼 나른한 저음이 흘러들었다.

    “나의 양친은, 나와 같은 하이 알파인 아버님과 하이 오메가인 어머님이시지.”

    “…….”

    별하는 감은 눈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의 목소리에 집중하려 했지만 몹시 노곤해 몸이 마음대로 따라주질 않았다. 파비안은 모닥불을 응시하며 잠잠히 말을 이었다.

    “자랑스러운 아버님은 당신의 반려자나 시간이 지나면 결국 바스러지는 한낱 감정들보다도 하이 알파의 명예와 권력이 우선인 분이야. 한낱 감정이 인생의 최우선이었던 어머님은 그녀를 마주한 모든 이들이 사랑에 빠질 정도로 아름다우신 분이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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