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트로피컬 아일랜드 (22)화 (22/49)

양친을 표현하는 파비안의 어법은 칭찬인지, 비꼬는 것인지 선뜻 판단하기 어려울 만큼 묘하게 이중적이었다. 억양은 부드러웠지만 근접할 수 없는 거리감이 느껴졌다. 흡사 보이지 않는 장벽에 가로막힌 듯 딱딱했다.

대번 잠기가 달아난 별하의 눈동자에 힘이 실렸다. 파비안은 그가 제 말을 듣는지, 듣지 않는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저 마음이 맞는 친구와 시시한 잡담을 나누듯,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낸 적이 없는 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여느 하이 알파가 그렇듯 아버님은 세상의 빛을 보기도 전에 짝이 정해져 있었어. 내 어머님. 늠름하신 아버님과 왕족인 어머님은 세상 모두가 부러워하는 커플이었지. 가문의 숙원과 다름없는 각인 작업을 마치고 결혼을 한 뒤에는 곧바로 나를 낳으셨어.”

“…….”

별하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파비안의 목소리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먼 곳에서 야행성 조류의 울음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뒤편의 나무기둥에서 앵무새의 기척이 미세하게 들렸지만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강물이 흐르는 소리가 잠깐의 정적을 비집어 들었다.

“그리고 어머님은 사라지셨어.”

“사라지셨다고?”

별하는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파비안은 순순히 대답했다.

“그곳에 존재하기는 했었는지 더는 알 수 없는 연기처럼.”

“…….”

“아버님의 뜻에 따라 나는 벽지에서 자라났어. 물론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아. 내 인생의 가장 아름다웠던 시간이기도 하니까.”

파비안의 말에는 어떤 거짓도 실려 있지 않았다. 그는 별하의 목덜미에 느른한 숨결을 흘리며 독백 같은 사담을 이어갔다.

“어머님에게는 내연관계의 로우 알파가 있었어. 아버님보다 먼저 인연을 맺었지만 각인을 하지 않았으니 내연관계일 뿐이지. 아직 상용화되지 않은 고가의 억제제로 짝에 대한 욕망과 충동을 억제하면서 살고 계신다면, 별하 넌 믿을 수 있겠어? 내연관계의 알파와 함께 말이야.”

“…….”

“고매한 하이 오메가인 어머님은 가문의 계약에 따라 하이 알파와 결혼을 하고 나를 낳은 거였어. 마치 돼지 새끼를 낳듯이.”

별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창백한 얼굴로 제 어깨 너머를 돌아보았다. 파비안은 어떤 감응이나 동요도 없었다. 모닥불의 새빨간 불빛이 비쳐 반듯하게 깎아놓은 듯한 얼굴이 낮보다 더 날카로워 보였다. 그는 엷은 미소를 보이며 정정했다.

“돼지 새끼라는 표현은 노골적인 것 같으니 종마라고 하는 편이 이해가 쉽겠지.”

“……파비안 네 아버님은 그럼…… 역시 억제제에 의존하고 계신 거야?”

“글쎄. 그런 내색을 전혀 하시지 않는 분이라 짐작하는 정도지만 아마도.”

별하는 탄식했다. 아무리 좋은 억제제라고 해도 짝에 대한 열망을 완전히 잠재울 수는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감정을 완전히 말살시켜야 하는데, 아무리 의료 과학 기술이 발전해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열망은 알파와 오메가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기에, 세포들이 생명 유지를 멈추고 죽음을 맞이해야 완전히 잠재울 수 있었다. 그전까지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고통과도 같았다.

짝을 원하는 만큼 얼마든지 맺어질 수 있는 로우 알파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사안이었으나 일생 하나의 짝만 바라보는 하이 알파들에게는 더더욱 그랬다.

파비안은 이야기를 시작한 처음과 똑같은 저음으로 나지막이 읊조렸다.

“짐작했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특정 관계를 맺지 않은 이유이기도 해. 다른 뜻은 없어.”

“…….”

“그날에는 미처 하지 못한 내 대답이야.”

해변에서 서로의 호구조사를 했던 날을 말하고 있었다.

별하는 그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기분이었다. 어떻게 보면 파비안의 태도만큼 큰일이 아닐 수 있었고, 유감이라는 말 한마디면 불편한 분위기가 끝날 수도 있었지만 세상에 널리고 널린 에피소드, 인륜사처럼 훌훌 넘겨버리기는 어려웠다.

오메가에 대한, 더 나아가 짝에 대한 관념과 감정의 근간을 이루는 사안이었다. 어쩌면 계속 이렇게 그를 쫓아다니며, 정말 사소한 일인 것처럼 그 누구와도 연을 맺지 못하게 깔짝깔짝 괴롭힐지도 몰랐다. 피부 안쪽에 새겨진 주홍글씨처럼.

별하는 모닥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느 순간부터 잊고 있던 낡은 기억들이 하나둘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 선명하지도, 분명하지도 않았지만 몸이 간직하고 있던 기억들이었다.

그는 어지러이 일렁이는 불 속에서 먼 과거의 편린을 들여다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난 평범하기 그지없는 알파와 오메가 사이에서 태어났어.”

053.

잠잠한 목소리는 달빛이 녹아든 강물을 따라 어둠 속으로 흘러들었다.

별하가 지금의 양부모에게 입양된 것은 오메가 연맹에 등록되기도 전의 일이었다.

만 3세 이상의 자녀를 둔 친권자들은 알파, 오메가, 베타 각각의 연맹에 등록해야 하는 법 조항이 있었다. 그를 어길 시에는 아동 학대치사로 보석금이 없는 형사 처분을 받을 수도 있었다. 성범죄의 중심에 있는 오메가의 인권과 그들에 대한 인식을 향상시키기 위해 정부는 강한 법적 구속력으로 약체 집단을 보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하의 친부모는 별하가 만 5세를 지날 때까지도 오메가 연맹에 등록하지 않았다.

그들은 알파와 오메가라는 평범한 관계로 짝을 맺어 별하를 낳아 길렀다. 여느 알파, 오메가 커플이 그렇듯 알파는 더 많은 짝과 이어지길 바랐고 실제로 다른 두어 명의 오메가와 이미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오메가 아내는 그런 알파에게 큰 상처를 입으면서도 곁에서 떠나지 못했다.

친부모에게 버림받을 당시에 희귀한 지병까지 얻어 의무 교육을 겨우 이수한 오메가는 변변찮은 아르바이트만을 전전해 오다 아이를 낳은 후로는 직업을 가지지도 못했다. 나라에서 주는 보조금만으로는 갓난아기를 키우며 특수한 억제제를 살 수 없어서 저주와도 같은 짝에게서 언제까지고 벗어나지 못했다.

별하는 친부모를 선명하게 기억하지 못했지만 그들의 관계에 대해서는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아직 젖냄새가 가시지 않은 어린아이의 눈에도 알파 아버지와 오메가 어머니는 의심할 것 없는 포식자와 피식자의 관계임을.

별하가 걸음마를 뗀 후에는 모친과 함께 곧잘 얻어맞았다. 배가 고파 칭얼대거나 기저귀에 똥오줌을 묻힐 때면 여지없이 손발이 날아왔다. 그를 막아주던 모친도 나중에는 무기력감에 빠져 멍하니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겨우 남은 시력까지 완전하게 사라진 맹인처럼.

알파 남편의 변심과 더불어 가정폭력을 더 견디다 못한 오메가 아내는 결국 스스로 그 구속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오랜 시간 저를 괴롭혀온 지병을 그대로 방치해 어린 아들이 보는 앞에서 생을 마감했다.

어린 별하는 제 어머니가 죽은 것을 알지 못했다. 입술이 새파랗게 변색된 어머니의 손발을 밤새도록 주물러주고 두꺼운 솜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주었다. 늦은 봄 날씨에 금방 부패한 시체는 이웃의 신고로 발견되었고 그때서야 별하는 극심한 영양실조 상태로 정부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지금의 양부모는 베타였고 여느 베타 부부들과 크게 다른 점이 없었다. 싸움과 화해를 반복했지만 평등한 사랑을 했고 그 사랑을 오메가 양아들에게도 아낌없이 나눠주었다.

별하는 아득한 꿈 같은 기억을 갖고 있었지만 자신에게 큰 문제가 있다거나 왜곡된 인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더 열심히 살아가려 노력했다. 그럼에도 피부 안쪽에 새겨진 주홍글씨 같은 기억에 어쩔 수 없이 영향을 받은 것도 사실이었다.

알파에 대한 적개심에 치를 떨며, 결코 닿지 않는 평행선처럼 그들의 가진 능력을 시기하고 부러워하며 평생을 살아갈 것이라 생각했다. 확신했다. 파비안,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별하는 가만히 모닥불을 응시했다. 흐릿하지만 어떻게 해도 지워지지 않는 기억을 모두 떠올려낸 건 처음이었다. 저를 위해서라면 어떤 고난도 기꺼이 받아들이실 게 분명한 부모님에게도 말하지 않은, 말하지 못한 저의 심연이었다.

“…….”

별하는 깊이 들이마신 숨을 나직이 불어냈다. 뭔가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다른 기분이 들었다. 처음 운을 뗄 때만 해도 또 한동안 우울해지지 않을까 하던 걱정이 무색하게 마음의 동요는 크지 않았다.

해피엔딩이 아닌 성인 동화책을 완독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안쓰럽고 애잔했지만 저와는 조금 다른 시선, 다른 행동, 다른 인생을 살아가는 주인공의 이야기로 느껴졌다.

“……상황이 상황이라 그런가.”

기분이 조금 이상하네, 독백하는 별하의 등에 온기가 스쳤다. 따뜻한 손길은 경직되어 있는 그의 등과 어깨, 팔을 보드랍게 쓸었다.

파비안은 제 품에 앉은 이가 오래된 과거사를 담담하게 끝마칠 때까지 고요히 듣고만 있었다. 무겁게 시작된 이야기는 조금씩 빨라지다 문득 두려움을 느낀 듯 다시 느려졌다가 이내 분노를 느낀 듯 미세하게 어깨를 세우기도 했다. 이야기가 끝나고 가라앉은 한숨이 입술 밖으로 나직이 흘러나올 때쯤 속삭이듯 말했다.

“별하, 네 잘못이 아니야.”

전과 다름없는 목소리에는 동정하는 기색이 전연 묻어 있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오메가의 숙명이라며 이해를 강요하지도 않았다. 그저 고생이 많았다는 듯 등을 쓸며 위로할 뿐이었다.

별하는 흐린 미소를 지었다. 모닥불에서 눈길을 떼고 안락한 의자가 되어주는 이를 돌아보았다. 불빛에 비친 오드아이를 똑바로 들여다보며 강한 악센트로 말했다.

“내가 해주고 싶은 말이었어. 넌 돼지 새끼가 아니야. 물론 종마도. 다만 파비안 블랙그레이일 뿐이야.”

“…….”

파비안은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어떤 감정도 깃들지 않는 얼굴로 별하를 직시했다. 별하는 자신이 뭔가 눈치 없는 말을 한 건가 싶어 얼른 덧붙였다.

“혹시 성까지 불리는 게 거북하다면 이름으로만 부를게. 파비안.”

파비안은 부드러운 숨을 불어내며 별하의 뺨을 쓸었다.

“싫어하지 않아.”

“그래……?”

“아버님은 아물지 않는 상처에 지금도 이따금씩 괴로워하시지만 결국 사랑을 베푸셨지. 지금의 별하, 네 부모님처럼.”

별하는 한국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을 이들을 떠올렸다. 배낭여행을 시작하고부터 지금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들까지 전해 듣는다면, 중동 국가든 식인종들의 섬이든 당장 폭파시키려 할지도 몰랐다. 저를 배웅하던 부모님의 모습을 떠올리자 머나먼 고향이 더욱더 그리워졌다.

이런 게 향수병인가 싶을 만큼 쓸쓸한 기분에 찬찬히 잠겨 드는데 불현듯 파비안과 눈길이 맞닿았다.

“…….”

“…….”

저를 담은 투명한 오드아이 속으로 곧장 빨려들어 가는 순간, 꼬리에 꼬리를 물던 비감들은 형체도 없이 증발했다. 별하는 생각도 전에 움직였다. 파비안의 너른 어깨와 등을 단단히 끌어안으며 말했다.

“이 세상에 그 사람 같은 알파만 존재하는 게 아닌 것처럼, 그런 오메가와는 전혀 다른 오메가도 이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어.”

“…….”

“……내가 그렇다는 뜻은 아니고.”

파비안은 나직한 코웃음 소리를 내며 미소 지었다. 힘을 싣지 않은 팔로 별하의 허리를 안으며 헝클어진 검은 머리칼을 정돈해 주었다.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귓가와 턱을 어루만지며 빤히 쳐다보자 별하는 괜히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괜찮아. 곧 잘 텐데.”

“…….”

“……많이 지저분한가?”

“…….”

파비안은 또렷한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서로의 온갖 사정을 속속들이 아는 중에도 쑥스러움을 느낀 별하는 파비안의 어깨에 이마를 붙였다.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려는 생각 같았지만 셔츠 너머로도 상대의 체온을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파비안은 아무 말이 없었다. 우뚝한 코끝을 별하의 옆머리에 붙이고서 그의 목덜미를 쓰다듬듯 만지작거렸다. 원래부터 마른 체형이었지만 이곳에 온 후에는 뼈가 더욱 도드라진 목덜미를 반복적으로 쓸어내렸다. 일렁이는 불빛 사이로 찾아든 정적은 평화롭고도 안락했다.

파비안은 이내 나긋한 저음으로 정적을 물렸다.

“이런 말을 하면, 별하 네게 상처가 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별하는 파비안의 등 뒤편에 눈을 둔 채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상대의 기분을 헤아려 잠시 멈췄던 속삭임이 나직하게 잇달았다.

“널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준 그들에게 감사함을 느껴.”

“…….”

“괴롭힌 것과는 별개로.”

“…….”

별하는 파비안의 목덜미에 뺨을 문질렀다. 얼룩진 시야를 숨기려는 듯 향긋한 체향과 따뜻한 열감을 전하는 목덜미에 가만히 코를 묻었다.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가 느릿하게 내쉬며 파비안의 것들을 가슴 안쪽이 가득 차도록 머금었다. 그러다 눈을 들어 그를 올려다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또 통했네.”

파비안이 별하를 내려다보았다. 검은 눈동자를 푹 적신 누기가 막 콧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별하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젖은 눈가와 입술을 휘며 저와 함께하는 이에게 무한한 애정을 전하고 있었다.

“나도 그 생각하고 있었거든.”

“……어떤.”

“너의 그분들에게 언젠가는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고.”

“…….”

“할 수 있을까? 여길 나가서……?”

파비안의 굳은 입가에도 어렴풋한 미소가 깃들었다. 별하의 눈가를 엄지로 닦아주며 확언했다.

“물론이지.”

“…….”

“별하, 네 꿈은 이루어질 거야.”

“부디 그랬으면 좋겠어…….”

“반드시.”

“…….”

별하는 불투명한 앞날에 불안을 느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이 순간만이라도 그와 온전히 함께하고 싶어 틈 없이 밀착했다. 파비안은 별하가 제게서 떨어지지 않도록 팔에 힘을 실었다.

그들은 온 힘으로 서로를 끌어안았다. 어둠을 밝히던 모닥불이 사그라지고 다시 태양이 떠오를 때까지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아안! ……조오―!

돌연한 소음에 잠에서 얼핏 깬 별하는 몸을 뒤척였다. 모닥불이 꺼져 강물 쪽에서 불어 드는 바람이 못내 서늘했다. 그는 저를 감싼 품속으로 더욱 파고들었다. 따뜻한 체온과 적당한 압박감이 딱 기분 좋았다. 이마에 닿는 옆 사람의 숨결을 느끼며 다시 깊은 잠속으로 빠져들려는 그 때였다.

빠! 비아안! 너어조오오―!

무겁게 내리감긴 눈꺼풀이 번쩍 떨어졌다.

“―?!”

별하는 황망히 소리가 난 곳을 쳐다보았다. 바로 머리 위 나뭇가지에 앉은 앵무새가 부리를 치켜세우고서 목청을 돋우고 있었다.

빠비안! 빠비아안! 너어조오―!

앵무새는 박자를 넣듯 새파란 날개까지 푸드덕거리며 요란을 떨어댔다.

“저 미친 앵무…….”

054.

아직 잠기가 덕지덕지 붙은 별하는 반쯤 감긴 눈으로 옆자리를 돌아보았다. 파비안도 막 소음을 듣고 잠에서 깬 듯 금빛 속눈썹을 들어 올렸다.

“으음.”

별하는 마른 눈가를 찡그리며 혀를 찼다.

“대체, 저 녀석 대체 왜 저러는 거야? 뭐가 문제야?”

자연에서 나고 자란 앵무새는 사료를 달라고 재촉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어디서 이상한 벌레들을 자꾸 물어와 별하에게 억지로 떠넘길 정도로 특출난 사냥꾼이었다. 그렇다고 심심해서 같이 놀자는 것도 아닐 텐데 왜 갑자기 울어대는지 알 수 없었다.

위화감과 함께 별안간 의심이 든 별하는 건조한 눈을 빠르게 끔뻑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

여명이 밝아 오는 숲은 아직 어스름하고도 한적했다. 음영이 진 수풀과 바위 아래, 물가, 나무 뒤를 빙 둘러 살폈다. 바람에 간혹 나뭇잎들이 흔들릴 뿐 별다른 낌새는 느껴지지 않았다.

빠비안! 빠비아안!

이유도 없이 삑삑거리는 생물체의 주둥이를 막으려 고개를 돌리는 찰나, 시야로 뭔가가 걸려들었다. 멀찍한 나무기둥 사이로 무언가가 휙 스쳐 지나갔다. 별하는 대번 바닥에 꽂힌 창을 뽑아 들었다.

“파비안……!”

나직이 외치자 그가 가볍게 몸을 일으켰다. 돌칼을 손에 쥐고 별하와 같은 방향을 응시했다.

“…….”

“…….”

다시금 나무기둥 뒤에서 시커먼 인영이 휙 지나가며 희미한 기척을 일으켰다. 파비안은 발소리를 죽인 채 조용히 그곳으로 다가갔다. 선제공격할 작정이었다. 말을 맞춘 듯 반대편으로 향하던 별하는 문득 걸음을 멈췄다. 엷게 음영이 내려앉은 나무 뒤를 직시하던 그의 눈에 한 형체가 들어왔다.

“잠시만, 파비안.”

“……?”

별하는 멀지 않은 곳을 향해 턱짓했다. 희끄무레한 빛이 비쳐드는 그곳에는 검은 인영이 서 있었다. 인위적으로 피부에 색을 칠한 형상이 아닌, 자연 그대로의 색을 지닌 생물체였다. 알파 중에서도 특출나게 큰 파비안과 비슷한 체격의 그것은 윤기가 느껴질 만큼 새카만 털로 뒤덮여 있었다. 언뜻 인간을 닮은 얼굴과 근육질의 형체가 무척 익숙했다. 고릴라였다.

고릴라 무리.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이른 시간에 나무 뒤를 지나던 고릴라 무리는 이쪽을 발견하고 힐끔거렸다. 처음 보는 종이 신기한 듯 저들끼리 눈길과 손길로 의사소통을 하며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지만 갈 길을 멈추지는 않았다.

별하는 파비안을 돌아보았다.

“난 또, 그 징그러운 놈들인 줄 알았어.”

파비안은 손잡이를 돌려 잡고 있던 돌칼을 내리며 저도 그리 생각했다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어느새 부리를 딱 다물고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나무 위에 얌전히 앉은 앵무새에게로 눈길을 던졌다.

“시끄럽긴 하지만 나쁘지 않아.”

확실히 지금 바로 뭐가 튀어나온들 이상하지 않은 깊은 밀림이었다. 간밤에는 불을 피워 맹수나 그런 좋지 않은 생물체의 접근을 막았지만, 그러지 못할 때나 그것이 통하지 않을 때는 밤새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했다. 그럼에도 시야각의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 나무 위에 앉은 앵무새는 지면에서 내다볼 때보다 훨씬 넓은 시야를 갖고 있었다. 알람 또한 정확했다.

별하는 그를 따라 앵무새를 돌아보았다.

“……나쁘진 않아. 이상한 말만 지껄이지 않는다면.”

앵무새는 별하와 눈을 마주치자 날개를 활짝 펼쳐 날아왔다. 당연하다는 듯 그의 어깨에 자리를 잡고는 부리를 치켜세웠다.

빠비이안!

파비안은 작은 한숨을 뱉으며 불씨가 사그라진 모닥불로 향했다.

“교육하는 수밖에 없어.”

별하는 제 어깨에 걸터앉아 바로 귓가에서 삑삑거려 대는 앵무새를 돌아보았다. 얼마 전 짝을 잃고 죽어가던 녀석이 정말 맞는지 기운이 넘쳤다.

“교육? 그런 거 한 번도 안 해봤는데, 어떻게 하는 거야……?”

미미하게 남아 있는 모닥불 불씨에 마른 나무껍질을 가져다 대고 바람을 넣자 흰 연기를 일으키며 금세 불이 붙었다. 파비안은 주변에 널브러진 나뭇가지들을 모닥불 안에 집어넣으며 이쪽을 쳐다보았다.

“당근과 채찍으로.”

“…….”

“원한다면 만들어주지. 채찍은.”

“……채찍?”

입 밖으로 말을 꺼내는 순간 앵무새와 눈이 딱 마주쳤다. 앵무새는 별하의 심중을 읽은 듯 급히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올랐다. 삐삐이삑― 빠비이안! 털끝도 건드리지 않았는데 죽는 소리를 내며 숲으로 들어가 버렸다.

“하아…….”

별하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불길이 살아난 모닥불과 그 옆에 몸을 낮춰 앉아 뭔가를 들여다보고 있는 파비안을 흘깃 돌아보고 강으로 향했다. 어저께 정사의 흔적이 남은 몸을 좀 씻어낼 생각이었다.

부드러운 모래 속에 창을 꽂아놓고 남방을 벗어 걸어두었다. 청바지를 무릎 위까지 걷어 올려 알록달록한 자갈 바닥이 고스란히 들여다보이는 물속을 응시했다.

어두운 밤에 봤을 때보다 훨씬 협소한 물줄기는 강이라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무릎을 지나 허벅지 반쯤 오는 수심의 개천이었다. 맑은 물속에는 자잘한 생물들이 평화롭게 기어 다니고 있었다.

별하는 두 손을 모아 물을 담았다. 손 안에 가득 담은 물을 몇 번이나 반복해 비워낸 후에야 갈증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곧장 세수를 했다. 목덜미를 문질러 씻고 옷깃 안쪽과 겨드랑이에 손을 밀어 넣어 제 땀으로 끈적끈적한 피부를 쓸었다. 옷이 축축하게 젖어 들자 더 찝찝해진 그는 이대로 목욕을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 젖은 옷을 훌훌 벗어 던졌다. 수심이 낮았지만 몸을 담그기에는 나쁘지 않았다.

무릎을 꿇어앉은 별하는 수면 위로 드리운 나뭇가지에서 잎이 넓적한 나뭇잎을 몇 장 떼어내 때타월 대용으로 몸을 문질렀다. 목덜미와 어깨, 팔을 지나 상체와 다리, 다리 사이를 꼼꼼히 씻어냈다. 팔을 등 뒤로 세워 힘겹게 닦아내려는데 불쑥 옆으로 긴 그림자가 드리웠다.

“별하, 도와줄게.”

파비안이었다. 그는 자유로운 차림으로 다가와 별하의 등을 문질렀다.

“…….”

얼떨결에 나뭇잎 타월을 건넨 별하는 물속에 잠긴 제 다리만 내려다보았다. 아침 햇살이 비쳐들어 몹시 반짝이는 금빛 체모와 더불어, 커다랗게 덜렁거리는 물건이 자꾸 옆에서 눈길을 잡아끌었다. 애써 못 본 척하며 슬그머니 등을 돌리자 파비안은 자연스럽게 뒤편에 섰다.

조금 까끌까끌한 나뭇잎으로 등줄기를 따라 훑어 내렸다. 날개뼈와 그 아래쪽, 옆구리를 미끄러졌다가 다시 등허리를 타고 올라갔다. 어깨를 쓸던 손길이 예고 없이 겨드랑이를 파고드는 바람에 별하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며 신음했다.

“읏. 파비안.”

파비안은 자신이 건드려놓고 무슨 일이냐는 듯 다정하게 속삭였다.

“아프면 말해.”

“응…….”

피부를 찬찬히 쓸던 나뭇잎이 등허리를 지나 엉덩이로 내려가자 별하는 얼른 그의 손을 붙들었다.

“손 닿는 데는 내가 할게.”

“시원하지 않았어?”

“시원하더라. 근데 내가 해도 시원해. 아, 이참에 너도 등 밀어줄 테니까 돌아서 봐.”

“…….”

“파비안?”

파비안은 돌아서지 않았다. 등 뒤에서 떨어지지 않고 별하를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별하 역시 움직이지 않았다. 초조해하면서도 물속에 몸을 담그고만 있었다. 다정한 저음이 그의 젖은 목덜미를 스쳤다.

“부끄러워하지 마, 별하. 자연스러운 반응이니까.”

“읏…….”

별하는 입술을 씹었다. 손이 닿지 않은 곳을 씻겨주려 그가 등을 문질렀을 뿐인데도 페니스가 발기한 것이었다.

어제 그렇게 정액이 더는 나오지 않을 정도로 섹스를 하고도 발기하는 페니스가 새삼 정말 놀라웠다. 자신에게 이런 정력이 숨겨져 있었다는 사실을 반가워해야 할지 안타까워해야 할지 스스로도 의문이었다.

별하가 얕은 생각에 빠진 동안 파비안의 그의 동그란 정수리와 옆머리, 뺨에 키스를 퍼부어댔다. 저와는 체형이 조금 다른 별하의 마른 어깨와 팔을 쓸어내리며 발갛게 달아오른 귓불을 핥았다.

“밤엔 잘 잤어?”

“흐으…….”

별하는 귓가에서 울리는 젖은 살덩이 소리에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복부를 지나 젖꼭지를 스친 손길에 어깨를 움츠렸다. 미미한 자극에도 적갈색 살덩이가 단단하게 일어났다.

“파, 파비안…….”

파비안은 제 손길에 봉긋 솟아오른 별하의 가슴을 내려다보며 나직한 한숨을 흘렸다.

“괜찮아. 겁먹지 마.”

그는 곤두선 젖꼭지를 엄지와 검지로 잡아당겼다. 아프지 않을 정도로 살살 당기는데도 별하가 아파하자 손끝으로 부드럽게 굴렸다. 굴리다가 지긋이 밀어 올리자 별하는 고개를 돌렸다.

“으, 으…….”

처음 만졌던 날보다 눈에 띄게 도드라진 살덩이는 상당히 예민해져 있었다. 조금 만질 뿐인데도 물속에 잠긴 페니스에서 체액이 흘러나왔다.

파비안은 커다란 손으로 양쪽 젖꼭지를 문질렀다. 다른 손으로는 아랫배를 쓰다듬으며 곧장 페니스를 감싸 쥐었다. 신음하며 허리를 비트는 별하의 뒤에 가슴을 붙이고 치솟은 페니스를 훑어 올렸다. 서늘한 물속에서 밀착한 피부가 뜨거운 열기를 전하며 급속도로 달아올랐다.

“으읏, 흐…….”

파비안은 손아귀에 힘을 실어 빠르게 페니스를 자극했다. 쾌감으로 허리가 움찔거릴 때마다 젖꼭지를 누르듯 문지르자 별하의 목 안에서 참지 못한 신음이 뚝뚝 끊겨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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